설교. 신약

[스크랩] 베드로전서(2,3장) 공부

수호천사1 2016. 10. 13. 07:35

베드로전서(2,3장) 공부

 

 

제9과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3)

본문의 구조는 이렇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라. 그것은 이렇게 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앞의 내용 때문에 이렇게 하라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뜻이다. 앞의 어떤 내용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가? 성도들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1:23) 결과는 무엇인가? 구원에 이른다.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 그러니까 우리도 거듭났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이다. 악한 삶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악한 삶을 버릴 때 중요한 것은 악한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신령한 젖은 영적인 양식도 되고 말씀의 양식도 된다. 우리는 말씀으로 영적 은혜 입는 것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동시에 하는 게 좋지만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악한 습관을 버리는 게 먼저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악을 버리지 않고 말씀과 은혜만 사모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악을 버리지 않으면 은혜 받기 어렵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악한 생각이 가득하면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 없다. 악을 생각하는 사람은 악한 것을 구할 수밖에 없다. 신령한 젖을 구하는 것 같아도 진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악한 삶을 충족시켜주는 방법으로 그것을 사모할 뿐이다.
   2) 속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 신령한 젖을 받아들일 수 없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 있어도 말씀에서 은혜 받기 어려운데 악한 마음이 가득하면 어떻게 은혜를 받겠는가? 교회에 대해 불만, 교인에 대한 증오심, 등이 있으면 신령한 젖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악한 습관과 생각을 버리지 않고 신령한 젖만 구하면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해도 영적인 은혜를 입지 못하고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은혜를 사모한다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 교회에서 중직을 맡기도 한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런 사람은 자신만 망하는 게 아니라 남들도 망하게 한다. 남들이 이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이들을 보고 잘못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한다. 악독은 악의 총칭이다. 악은 모두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 네 가지 행동이 나온다.
   1) 기만: 기만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입에는 거짓이 없다.(벧전 2:22) 사탄에게 거짓이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종이다. 사람이 왜 거짓말을 하는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는데 하나님께 잘못 보이면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외식: 외식은 위선이다.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일종의 거짓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외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외식은 거짓이므로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예수님도 얼마나 외식을 싫어하셨는가. 단, 마음에 없어도 이웃을 위해 절제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사랑이다.(미숙한 사랑) 우리는 위선과 절제를 구별해야 한다. 악한 마음을 솔직하게 다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을 절제해서 선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단, 자기가 진짜 그렇게 선한 척해서는 안 된다. 겸손히 자기는 악하지만 노력할 뿐이고 주님의 은혜로 이런 절제라도 한다고 해야 한다.
   3) 시기: 시기는 남에게 이기려는 경쟁심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경쟁심이 생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남을 경계하지 않아 경쟁심이 생기지 않는다. 교회에서 시기심을 버리려면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하면 된다. 바울은 자기를 괴롭히려고 열심히 전도하는 대적자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4) 비방하는 말: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다. 말은 행동이 될 때도 있고(위험을 알려주는 말) 행동이 안 될 때도 있다(헛맹세). 비방하는 말은 강력한 행동이다. 말은 생각만큼 쉽고 행동만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죽이거나(마타도어: 소를 죽이는 마지막 투우사, 흑색선전의 뜻이 됨) 중상을 입힐 수 있다.(30초 비방이 30년 마음의 상처) 비방의 말이 무서운 것은 몹시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쟁심 때문에 남이 비방당하는 말을 즐겨 듣는다. 비방은 거짓, 시기, 위선(앞에서는 칭찬, 뒤에서는 비방)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비방 대신 해야 할 말은 칭찬과 격려이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 경쟁(경쟁 유발 칭찬?), 위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갓난아기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기는 오직 젖만 사모한다. 어른처럼 쾌락적인 음식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사정없이 사모한다. 젖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의 은혜, 영적인 은혜를 이렇게 몰입해서 사정없이 사모하면 신앙이 성장할 것이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이미 은혜로 거듭난 사람은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전에 악한 습관 버리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3. 내가 우리교회와 교우들을 비방하거나 칭찬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4. 내가 말씀의 은혜와 영적인 은혜를 갓난아기처럼 사모했던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질적인 축복을 그렇게 사모했던 경험도 말씀해주십시오.
5. 우리가 모든 악독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신앙이 더욱 성장하도록, 교회의 영적 성장과 양적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0과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4-10)

비스마르크가 공을 세운 병사에게 훈장을 주려고 하다가 장난 끼가 발동하여 훈장 대신 100마르크를 받는 게 어떤지 물었다. 병사는 훈장이 돈으로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물었고 비스마르크는 3마르크 정도라고 했다. 병사는 훈장과 97마르크를 받고 싶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병사의 기지에 감탄하며 그렇게 주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장난을 해서 생긴 일이지 실제로 병사가 100마르크를 받고 3마르크로 훈장을 사려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의 부귀와 천국의 영생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병사처럼 대답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영생은 믿음으로 간다. 믿음은 돈이나 시간을 조금 하나님께 바치는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생명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렇게 살면 불행해지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속에 살며 필요한 축복은 누린다. 더욱이 하나님 뜻에 따라 이웃에게 덕을 끼치며 보람된 삶을 살고, 천국의 소망 속에 기쁨이 넘치며, 나중에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내 욕심을 채우지는 못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버림 받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산돌이 되는 참 복을 누리셨다.(4-5절) 우리도 예수님처럼 산돌이 되어야 한다. 또 이것을 알아야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다.

당시 성도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러면 이런 염려를 할 위험이 있다. “혹시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선교 방해?)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단, 거룩한 삶으로 고난을 받아야지 악한 행동으로 고난을 받으면 안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19-20)

우리는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1. 다른 성도들과 함께 세워져야 한다. 집은 재료도 좋고 재료들의 결합도 좋아야 튼튼하다. 벽돌 하나는 쉽게 굴러다니지만 튼튼한 집에 결합된 벽돌은 그렇지 않다. 우리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오래 전에 성도들 중에 이상한 모습이 많아 내가 잘못된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존경하던 목사를 찾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신앙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물처럼 만드셨다. 다른 성도들과 협력하여 우리 자신을 세워가야 한다. 그리고 결속된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의 양이 많아야 불을 끄지 않는가?

2. 산돌은 자기도 살아있고 남도 살리는 돌이다. 이것은 거룩한 제사장의 모습이다. 거룩한 삶으로 자기도 살고, 제사장의 역할로 남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한다. 제사장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섬길지 생각한다.(목사도? C목사의 경험) 그런데 사실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6:33과 같다. 제사장은 거룩하게 살 뿐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에도 헌신해야 한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렇게 제사장적인 삶을 사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이들은 믿음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승리하셨는가?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중에 심판자가 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성도들을 비난하고 박해하는 자들은 다 파멸되고 성도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 유명한 말씀을 해준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성도들만 이런 지위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과 달리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진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가? 염려하지 말라.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는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는가? 시험에 들지 말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다. 나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며 세상과 다르게 살라.

본문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원어에 더 가까운 뜻은 왕의 제사장이다. 온 세상 왕이신 하나님이 쓰시는 제사장이다. 이것은 우리의 권세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두려울 게 없다. 제사장답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도 비슷한 뜻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한다. 우리는 이제 지위가 완전히 바뀌고(하나님 백성) 받는 사랑(하나님 긍휼)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 하겠는가?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덕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나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3. 벽돌은 혼자 있을 때보다 건물에 포함되어 있어야 튼튼합니다. 건물의 힘에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와 교우들에게서 신앙의 도움을 얼마나 받습니까?
4. 내가 온 세상 왕이신 하나님이 쓰시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5.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며 이웃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1과 비난을 이기는 비결 (베드로전서 2:11-12)

선교사들이 광주에 들어와 양림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활동을 하자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한센병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니까 반대가 더 심해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반대가 수그러들었다. 지금도 양림동에 기독교인이 많다. 이것은 교회가 박해를 이겨내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선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해를 이겨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이겨내는 것이다.
2.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1) 말로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오해를 풀어주고,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해주고, 우리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2) 행동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1)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준다.
       (2) 선을 행하여 좋은 인상을 받는다. 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어나기도 한다. 기적으로 선행을 할 수도 있고 말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위로와 격려의 말) 기도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기적과 선행을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본문은 이 중에 선을 행하여 박해를 이겨내라는 가르침이다. 선을 행하는 삶은 사랑의 삶인데 베드로전서에서는 거룩한 삶으로 많이 표현한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앞에서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은 거류민과 나그네 같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 시민이 아니라면 이 세상 시민과 다른 삶(거룩한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 타국에서 지낼 때 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는다.(총리지명자: “총리 될 줄 알았으면 아들 국적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국적은 더 그렇다.)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1절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다. 여기서 제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정당한 욕구가 아니라 영혼을 거스르는 정욕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몸에 해로운 음식을 먹고 싶은 욕심은 절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해로운 욕심은 절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이 몸에 해로울 때가 많은 것처럼(과자의 유혹, BR 창시자 단명)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중에도 영혼에 해로운 것이 많다. 그래서 이런 정욕에 대한 제어가 필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정욕을 제어할 수 있는가? 자기의 형편을 알고 정욕이 자기에게 가져다줄 결과를 알면 제어할 수 있다. 동료들과 술 먹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도 술 때문에 간이 나빠졌다는 판정을 받으면 술을 멀리하게 된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선수는 음식도 절제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정욕을 제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정욕을 제어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교회를 비난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교회를 오해했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네 가지 비난을 했다. 1) 간음한다는 것이다. 카타콤에서 남녀회중이 모였기 때문이다. 2) 살인의식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3) 로마의 반역자라는 것이다.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4) 자기들을(세상 사람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싫어했다. 베드로전서 당시 교회가 받은 박해는 폭력에 의해 해를 당한 것이라기보다 말로 비난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회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이 기록된 목적 중에 하나도 교회가 사회에 해를 끼치는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글로 설명)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한 변호를 많이 하였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더 강력한 방법은 성도들이 선하게 삶으로써 그 비난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행은 논쟁이나 법적투쟁보다 더 유용한 방법이다. 심지어 이단들마저도 위기를 맞이하면 선행을 많이 해서 자기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모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세상에서 비난받을 때가 있는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우리는 교리 때문에 비난받을 수도 있고 악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서 비난받을 수도 있다. 이때 비난을 피하려면 그들을 따르지 말고 선행에서 그들보다 우월해지며 선행으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쳐야 한다. 믿음을 버리면 오히려 더 큰 조롱거리가 된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렘 1:17) 소신을 버리면 칭찬이 아니라 조롱이 온다.(H 목사) 반면에 믿음을 지키고 선하게 살면 우리를 악하다고 비난하던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한다.

언제 이렇게 되는가? 하나님이 오시는 날. 이날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실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시면(우리 선행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 최후 심판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도 최후 심판 때에는 우리 선행을 비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행실을 선하게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13부터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면 비난을 받지만 더욱 그리고 끝까지 거룩하게 살면 그 비난을 이겨낼 수 있다.(신앙생활의 역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교회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3. 교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오해로 인한 것입니까, 우리의 부족함 때문입니까?
4. 한국교회가 세상의 존경을 받기 위해 시급히 해야 할 선행을 몇 가지 찾아보십시오. (성도 개인이 해야 할 선행, 교회가 해야 할 선행)
5.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막고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우리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2과 준법이 신앙의 척도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7)

한 장로님 아들이 안수집사로 임직을 하게 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할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항존직분자가 되었으니 정말 안수집사답게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한다.” 아들도 안수집사답게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안수집사답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부분에서는 잘 하겠지만 모르는 부분에서는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술을 끊는 게 안수집사답다고 생각하면 술을 끊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은 안수집사다운 것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교통법규는 지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해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면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성도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신자다운 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에 잘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신앙생활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말씀만 들어서는 안 된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에 잘 나올 뿐 아니라 사회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바른 삶에 대해 많은 성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두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악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교회에 나가야 한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 나가 죄를 용서받는 게 중요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지만 바르게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2)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자가 된다. 그러니까 부자가 된 것은 신앙생활을 잘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이다.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악한 방법으로라도 돈만 벌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죄 용서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믿는 자는 순종하며 바르게 산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부자가 되는 게 아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보라. 신앙생활에 대한 축복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본문 앞에서는 비난을 막기 위해 선을 행하라고 했는데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선한 삶인지 가르쳐준다. 특히 본문은 사회제도를 잘 따르고 정치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단, 정치지도자들은 선을 이루는 자들이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13-14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면 안 된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세상제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제도를 잘 따라야 한다. 준법이 바른 신앙생활의 원리인 것이다.(언더우드 선교사의 국경을 넘은 세례)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웃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려면 이웃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신자는 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본문이 쓰일 당시에 교회가 받은 중요한 비방 중에 하나가 국가의 반역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방을 막으려면 더욱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도로교통법을 어기는 것은 생명과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쉽게 어길 수 있는가? 한 TV 프로에서 장애인 부부가 한 밤중에 교통신호를 지켜 온 국민이 감동한 적이 있다.(교회 차량의 새벽 난폭운전?) 다른 법도 마찬가지이다. 반독재 운동을 하며 대통령을 많이 비판해서 반국가적이라고 지목받았던 목사님이 미국에 집회를 다녀오며 달러를 많이 남겨왔다. 그때는 달러를 몰래 가지고 나가던 시절이라 감시하던 기관원들이 이것을 보고 반국가적이라는 말을 삼가게 되었다.

우리는 준법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베드로전서만 이렇게 가르치는 게 아니다. 로마서도 12장부터 바른 삶에 대해 가르치는데 먼저 12:1-2에서 바르게 살라고 포괄적으로 가르친 후 12:3부터는 바른 교회생활에 대해 가르치고 13:1-7에서는 사회제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신자들과의 약속은 잘 지켜야 하고 불신자들과의 약속은 어겨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사회법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법을 잘 지켜야 하지만 교회적으로는 더욱 잘 지켜야 한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법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회는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기 권리도 희생해야 할 텐데 법을 어기며 특혜를 누려서야 되겠는가? 혹시 특정국의 선교를 위해서는 부득이 법을 어겨야 할 경우가 있겠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우리는 준법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본문이 가르쳐주는 대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세상의 방종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이다. 남들이 욕심과 염려로 악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때 그런 악을 거부하고 바르게 살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세상의 법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법을 어길 수 있는가?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이웃을 사랑하면 법을 지키게 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3. 예수님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남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세금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마 17:24-27)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4. 성도들이 사회에서 악을 행하는 중요한 이유는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삶의 분야에 이런 모습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5.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회제도와 법을 잘 지키도록,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3과 직장생활도 신앙의 척도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5)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음식을 먹어야 몸에 유익한 것과 같다. 2) 성경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오해하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이단을 보라. 불신자보다 복음을 더 강하게 거부하지 않는가? 3) 성경의 의미를 바로 적용해야 한다.(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성경을 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1) 그 말씀을 누가 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셨다. 이 말씀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처럼 제삼자이면서 가르치는 입장의 사람이 해야 한다. 2) 그 말씀을 누구에게 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피해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가해자가 자기보호의 구실로 삼으려고 이용해서는 안 된다.(교회에 오는 도둑들의 생각?)

오늘 본문도 이것을 잘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 본문은 근로자와 사용자 중에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 근로자이다.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이 말씀대로 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 사실 오늘 본문은 사환에게 주신 말씀인데 사환은 당시에 집안일을 보던 노예를 의미한다.

당시의 노예들 중에 주인보다 학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학식과 상업능력이 뛰어났는데 이들이 로마에 패해 노예가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노예들 중에는 능력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수당을 받아 자기 재산을 불리고 그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이들이 사보타주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사보타주: 맡은 일을 하는 척하면서 제대로 하지 않아 능률을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기구들을 망가뜨리는 행위) 그러나 여전히 노예이기 때문에 주인의 모멸이나 박해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본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내용은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다. 선한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악한 주인에게도 잘하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까지도 화내거나 저주하거나 사보타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일을 잘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제도를 지키라는 지난 주의 교훈과도 잘 통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난해한 모습이 있다. 1) 노예제도를 인정하라는 것인가? 실제로 미국의 노예시대에 다음 말씀이 노예주를 위해 오용되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하지만 이 말씀은 노예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주인에게는 어떤 말씀을 주시는가?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성도들은 노예로 취급하지 말고 형제로 취급하라고 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6)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딤전 6:2)

그런데 노예제도는 왜 파괴하지 않았는가? 당시 상황에 적합한 선교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 이것은 예수님이 일시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금하고 여인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지 않으신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이것이 성경적인 개혁의 중요한 원리이다. 우리는 잘못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사랑과 희생이 투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누룩이 반죽을 부풀리는 것 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악한 사회에 들어가 속에서부터 조용히 변화시키는 것이지 외적인 폭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요시야의 종교개혁은 내적 변화 없는 제도적 변화여서 실패/ 전도와 헌금은 어떻게 하는가?)

2) 악한 주인에게 순종하면 정의는 어떻게 되는가? 악한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악한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사랑과 온유로 대하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외편도 돌려대라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며 하나님의 정의에 맡기라는 뜻이다.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문자적으로 ‘은혜’) 일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를 받는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의인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 아울러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바르게 살게 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의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의롭게 살아야 하고, 아울러 우리가 이렇게 살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의롭게 살아 사회에 정의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지금 우리나라의 노사문제에 대한 나의 평가와 바람직한 모습을 말씀해주십시오.
3. 지금 우리사회에서 꼭 고치고 싶은 모습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4. 내가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겠습니까?
5. 우리가 직장과 사회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4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 (베드로전서 3:1-7)

결혼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축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그러나 결혼은 고통도 준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 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신자와 신자의 결혼(신앙관 차이, 교회 선택),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 불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성격, 가치관의 차이), 모두 쉽지 않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현대 사이에는 문화나 관습의 차이가 있어 현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에는 일시적인 교훈도 있다. 이런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우상파괴: 그대로 따르기보다 정신을 알고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성경의 교훈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성경의 교훈을 너무 쉽게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며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결혼에도 나타나는데 두 가지 모습이 중요하다.
   1) 불신자와의 결혼에 관대하다. 한 목사님 딸이 불신자와 선을 봤다. 목사님이 성품을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결혼은 피하는 게 좋다.(특별한 소명은 제외: 삼손[삿 14:1-4], 호세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a) 이 말씀은 불신자로 인해 삶에 큰 영향을 받을 만큼 가까운 결합은 피하라는 뜻이다.(결혼, 동업) 결혼한 후에 전도하려고 하지 말고 전도한 후에 결혼하라.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전 7:13)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 7:15a) 이런 말씀은 결혼 후에 믿게 된 경우에 대한 교훈이다.
   2) 부부의 역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이런 교훈을 옛날의 남존여비 사상에서 나온 교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절a) 물론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당시 상황과 문맥을 알고 본래의 메시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함부로 옛날 교훈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본문을 보고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내에게 주는 말씀을 남편이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근로자에게 주신 말씀을 사용자가 오용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은 노예도 성실히 일하라고 하지만 주인도 노예를 형제처럼 대하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부부에 대한 교훈도 이와 비슷하다.(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후?) 그래서 본문만 보고 거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교회가 비방 받지 않고(비방을 막기 위해 선행하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라) 선교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선 아내가 이렇게 해야 남편이 감동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이웃들까지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아내가 비천해지면 선교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면 남편과 많은 이웃의 선교에 큰 유익이 되는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집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밤을 사다주며 이것을 매일 저녁 10개씩 삶아서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머니가 비대해져 빨리 돌아가신다고 했다. 며느리는 기뻐하며 매일 저녁 정성껏 삶아드렸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점점 며느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몇 달 후 며느리가 남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밤을 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내에게 외모로 치장하지 말고 마음을 온유하고 안정하게 하라고 한다. 온유는 부드럽게 양보하는 모습이다.(쿠션, 전기담요) 안정한 것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것은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비방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이게 남존여비 사회에서만 그런가? 그러니 아내가 바가지를 긁거나 이 사람 저 사람 비방하면 어떻게 선교가 되겠는가?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이고 남편이 원하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예쁜 여인 이상으로 존경해주는 여인에게 유혹받기 쉽다고 한다. 이것은 신문에 난 것이지만 사실이다. 성경도 이렇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너(하와)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개역)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할 때 가정에 화평과 선교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남편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비방하는 것은 대부분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이다. 재물, 자녀, 건강, 등에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온유와 안정으로 남편을 존중하며 함께 기도로 이겨나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여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본문을 오용하여 여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본문은 아내의 권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내는 본문이 여인의 권리를 해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딸답게 이런 미덕을 갖춰야 한다. 그러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가족은 평등하지만 서로 투쟁하며 하향평준화가 되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상향평준화가 되어야 한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신앙의 문제로 가족들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믿는 가족과? 불신 가족과?)
3. “남편을 왕으로 섬기면 나는 왕비가 되고, 남편을 종처럼 부리면 나는 (   )이 된다.”에서 (  )를 채워보십시오. 이 말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4.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을 각각 다섯 가지씩 조원들이 함께 찾아보십시오.(출석부에 끼워 제출해주십시오.)
5. 우리가 진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미덕을 갖춰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5과 가정생활을 잘못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베드로전서 3:1-7)

세상에는 부당한 차별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가난해서 받는 차별, 피부색 때문에 받는 차별, 여성이기에 받는 차별일 것이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이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인 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이다.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물론 이런 신학운동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교리와 실천의 혼동: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실천이고 예수님을 구속자가 아니라 계급투쟁가로 보는 것은 교리이다.)

여성차별을 생각해보자. 서양에서는 여성이 대접을 잘 받는가?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서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 인형을 아끼는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서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것 같아도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게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이다.(기사도의 여성존중?)(여권운동도 서구에서 발생했다.)

베드로전서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철저히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두 가지를 가르친다. 강한 사람들은 사회관습을 넘어서 약한 사람들을 철저히 존중해주라고 한다. 반면에 약한 사람들은 사회관습 이상으로 강한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한다. 그래서 세상을 감동시키라는 것이다. 본문 앞의 두 문단에서는 노예가 주인을, 아내가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오늘 본문 7절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당시에는 남편이 권력층이었다. 그래서 이 교훈은 모든 권력층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생활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권력층은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의 약한 형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잘 대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어렵다. 사람은 남을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고난이 주는 유익한 점 중에 하나가 약한 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징기스칸: 장군은 너무 강하면 안 된다. 병사를 이해하지 못해 리더십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남을 이해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쳐준다. 그것은 지식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지식인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알던 당대의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성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주는가?

1)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하나님의 이미지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치려고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하면 안 된다.(이미지 왜곡, 하나님 오해) 하나님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백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잘못이다.(예수님을 흑인이라고 해도 곤란)

2) 부부는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한 몸의 지체 중에 더 잘난 게 있는가?(사슴의 뿔과 다리?) 한 몸 안에서는 다 평등하다. 서로 자기 역할을 하며 협력할 때 모두가 행복해진다.

3) 결혼은 일부일처제이다.(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사람씩 만드셨다) 그래서 간음은 무서운 죄이다. 십계명에서도 살인 다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간음죄는 남녀에게 동등하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우리나라 간통죄 논란)

4) 아내는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다.(벧전 3:7) 이것은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b) 이것은 선입관, 관습, 체질적으로 장벽이 있다는 뜻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어떤 분야에서 열등하다는 선입관이 있다.(하버드대학 총장이 여성은 수학, 과학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했다가 사임) 가사 돌보는 일을 많이 하는 문제, 임신의 문제(교육전도사의 경험), 등이 여성의 활동에 장벽이 된다. 이런 모습 때문에 여성이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다. 남편은 이런 형편을 알고 더욱 존중하고 보살펴야 한다.

5)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사람이다. 영생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만큼 평등한 것은 없다. 평소에 아무리 잘 대해줘도 유산을 다르게 주면 불공평하다. 여성은 남성과 똑 같은 유업을 받는다. 남녀가 완전히 평등하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남편은 이렇게 아내가 자기와 동등하면서도 사역의 모습, 체질, 관습, 등의 여건에 의해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잘 대해줘야 한다. 공평하려면 약한 사람을 잘 대해줘야 한다. 추위를 타는 사람에게 옷을 더 주는 게 공평하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4b-25) 우리는 사랑으로 이렇게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경고의 말씀을 준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3:7b) 기도가 막히면 죽는다. 산소공급선이 막힌 것과 같다.(머구리, 잠수부) 아내를 박대할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잘 이해하고 귀하게 대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인종차별, 빈부차별이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남녀의 성차별도 나쁘지 않습니까? 우리사회에 흔한 성차별의 예를 들어보십시오.
3.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편이 가정에서 바꿔야 할 태도나 행동을 구체적으로 찾아보십시오.
4. 요즈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 우리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도와서 화목하고 영적으로 건강한 가정이 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6과 이런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3:8-12)

지금까지 살펴본 베드로전서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본다. 1) 산 소망을 강조한다. 2) 거룩한 삶을 강조한다. 3)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우리도 구원받고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막아 선교에도 유익하다.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교회생활보다 더 중요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b) 그러나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교회생활부터 먼저 해야 한다.(악한 습관을 버리고 교회에 나오는가, 교회부터 나오고 악한 습관을 버리는가?) 왜냐하면 교회생활을 통해 악한 습관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버릴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위급한 사람 돕기 위해 교회 결석)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처음에는 포괄적으로 준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14-15)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2:1) 그러다가 2:13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주는데 이것이 사회생활에 대한 교훈이다. 1) 사회의 규범을 지키라.(2:13-17. 일반적인 사회생활) 2) 사환들은 성실히 일하라.(2:18-25, 직장생활) 3) 남편과 아내의 바른 자세.(3:1-7, 가정생활)

그리고 3:8부터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을 준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3:8) 이것은 생활 전반에 대한 교훈이지만 교회생활이 특별히 강조된 것이다.(밑줄 참조) 이 교훈이 사회생활에 대한 교훈보다 나중에 나온 것도 사회생활이 교회생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당시처럼 교회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때는 더욱 그렇다. 오늘의 교회는 어떤 형편인가?

그러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목표가 같아야 한다. 목표가 다르면 절대 같은 마음이 안 된다. 이때 큰 목표와 작은 목표가 다 같아야 한다. 큰 목표는 다 같이 교회발전이어도, 작은 목표가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으로 나뉜다면 충돌이 생긴다. 그리고 방법도 같아야 한다. 질적 성숙을 목표로 세워도 방법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나뉘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 단, 사명이 서로 다른 것과 마음이 나뉜 것은 구별해야 한다. 성경공부를 하기로 해도 장소 준비, 조원 연락, 간식 준비, 등으로 사명은 나뉜다. 사탄과의 전투에서 공격지점과 작전은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대와 병과별로 전투의 사명은 다른 것이다.    2) 체휼해야 한다. 문자적으로는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체휼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치인이 함께하는 것은 마음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정치이념이 달라지면 헤어진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하는 것은 체휼하기 때문이다. 정치이념이 달라도 헤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이 둘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3) 형제사랑이 필요하다. 형제사랑은 공평한 사랑이다. 세상에서는 능력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된 사랑을 한다. 그러나 형제간에는 이런 차별이 없다. 성도들은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업적이나 직분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 차별당하는 자는 교회를 떠날 위험이 있고, 차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떠날 위험이 있다.(업적과 직분의 독) 교회의 직분은 효율적 사역을 위한 사명 분담일 뿐이다.
   4)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 단어는 민망히 여긴다는 단어에 좋은 마음이라는 뜻이 덧붙은 단어이다. 민망히 여긴다는 단어는 내장에서 나온 말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의미한다.(원숭이의 단장과 유사) 애간장이 녹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5)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자주 생각해본 것이라 오늘은 특별한 모습 한 가지만 생각해본다. 교회에서 겸손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눌리던 사람이 교회의 평등을 빌미로 교회에서 권세를 잡으려고 할 때 겸손해지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이것은 이민교회에 흔한 모습인데 어느 교회에나 나타날 수 있다)
   6)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라고 한다. 앞의 5가지는 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모습인데 6번째 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모습이다. 이것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1) 강한 자와 약한 자의 화목이 중요하다. (2) 특히 교회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게 더 중요하다. 앞에서 약자(사환과 아내)가 강자를 섬기는 모습을 더 많이 말한 것은 세상의 관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세상의 비방을 막고 선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모습을 더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성도들은 공평한데 공평하려면 강자가 더 많이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약자가 섬기는 모습이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7)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악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11절) 악한 말은 진실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함을 보라) 둘째,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을 말하지 말고”(11절) 거짓말은 유익할 것 같아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은 결국 해가 된다. 교회는 정말 말이 많은 곳이다. 중직자일수록 말을 조심하라. 특히 화평을 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거나 ‘체휼하지’ 못하는 말을 피해야 한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출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리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는 목표와 같이 하지 못하는 목표를 찾아보십시오.
3.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과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족이나 세상 친구들과 비교할 때 어떤지 말씀해주십시오.
4. 교회에서 들은 말 중에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말을 몇 가지 소개해주십시오. 나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말도 몇 가지 소개해주십시오.
5. 우리가 이성과 감성에서 하나가 되고 겸손히 서로 섬겨 귀하고 복된 교회를 이루도록, 나라와 세계의 평강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7과 고난을 이기는 믿음 (베드로전서 3:13-16)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어려움을 겪어보면 알 수 있다. 어려울 때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이다. 믿음도 이와 비슷하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어려움에서 믿음을 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1) 이 세상 어려움을 극복하고 축복을 누린다. 2) 이 세상 어려움은 그대로 당하나 믿음을 잃지 않고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35b)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3-38)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다. 단, 어려움을 이기고 축복을 받는 경우도 있고 어려움 속에서 인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둘 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고난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가? 본문이 이것을 가르쳐준다.

본문 13절은 먼저 선을 행하면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우리가 꾸준히 선을 행하면 악한 사람도 감동을 받아 우리를 덜 해치게 된다. 2)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해치려고 하는 존재는 사탄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그래서 궁극적인 해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당할 수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나 선을 행하여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해와 고난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본문 14a) 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복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도 고난을 겪어야 진급이 빠르다.(군인, 교사)

우리가 이것을 알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14b) 여기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1)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보다 강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2)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의 박해(권력)나 비방(이목)을 두려워한다. 그러면 시험에 빠진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박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비방은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귀하게 여기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사람 앞에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된다. 교인들 앞에서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라. 외식, 경쟁, 과장, 거짓, 사람의 명예 도둑질, 하나님의 영광 도둑질, 등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15a)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모시고 거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주님을 거룩한 분으로 모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거룩한(구별된) 분, 다른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주시는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며 세상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은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과 다른 거룩한 예수님은 부인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성경을 재구성하며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유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예수님만 구원자라는 것을 부인하므로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을 수 없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 인간의 칭찬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과 현대 신학자들이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보는 상황에서 인간의 칭찬을 추구하면 예수님을 거룩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뒤쳐진 신앙으로 치부된다) 2) 예수님의 거룩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 위인의 가르침이나 행동만 보고 감동을 받으면 예수님을 위인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죄 용서와 기적의 능력을 체험하면 거룩한 분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전에 살펴본 대로 우선 선한 삶으로 그들의 비난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교리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그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살지 않는 것을 비방한다. 이에 대해 중요한 답변은 우리의 소망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의 믿음과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소망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문학가가 되려는 사람과 운동선수가 되려는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소망의 답변을 할 때도 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에 대한 겸손과 경외심이며 동시에 묻는 사람을 존중하는 존경심이다. 우리는 불신자와 싸우기 위해 답변하는 게 아니다. 불신자에게 은혜를 나눠주려는 것이다.(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잘난 체한다.”는 비난을 받은 경험)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믿음을 지켜서 세상의 고난을 극복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과 믿음을 지켰으나 고난을 그대로 당한 사람의 예를 찾아보십시오.(성경이나 주위 인물 중에서)
3. 예수님이 세상의 위인들과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몇 가지씩 찾아보십시오.
4.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이 나에게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세상 쾌락을 멀리 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5.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모시고 산 소망 속에 모든 고난을 이기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8과 신자는 선한 양심으로 삽니다 (베드로선서 3:17-22)

먼저 앞 문단의 내용을 되새겨본다. 1) 선을 행하면 해를 당하지 않는다. 2) 선행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해가 되지 않고 복이 된다. 3)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산 소망을 말해주라. 4) 선한 양심을 가져서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16절) 이중에 4)는 지난 주에 살펴보지 못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다.

오늘 본문은 우선 앞 문단의 주제 중 2)를 다시 말해준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절)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살도록 격려해준다. 예수님이 고난의 삶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고난의 삶을 사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고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고난을 말한다. 2)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난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고난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십자가는 사형도구이며 고문도구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의 욕심, 자아, 편안함, 고집, 등을 다 포기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도 이 두 가지 고난을 가르쳐준다. 1) 우리에게 선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서(17절) 그 다음에 예수님도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18절) 예수님이 선을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2) 예수님이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속죄의 고난이다.(18절) 이 중에 본문은 본받아야 할 고난이 강조되어 있다.(문맥이 보여주는 선행의 주제, 22절에서 예수님이 고난 후에 영광 받으신 것을 강조하는 모습, 20-21절에서 바른 삶을 강조하는 모습, 등)

예수님이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후 어떻게 되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도 천국의 영광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우리 자신이 천국의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우리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믿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여 신앙이 성장하게 해준다. 그래서 더욱 믿음을 잘 지키게 되는 것이다.(‘훈련 때의 땀 한 방울은 전투 때의 피 한 방울과 같다’)

그리고 우리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이웃을 구원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남의 죄를 대속해주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며 의를 행하면(양보, 원수사랑, 등)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부흥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모습이 두 가지 있다. 1) 축복을 약속해준 것이다. 60-70년대에 나라가 산업화되면서 많은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와서 어렵게 살았다. 이 때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여 교회가 부흥하였다.(S교회) 2) 고난을 받은 것이다. 70-80년대에 군사독재로 백성이 고통을 당할 때 사회정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 교회가 부흥하였다.(C교회)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1) 예수님은 죽으신 3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 2)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본문 19-20절이 이에 대한 답을 주는가?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말씀은 심히 어려운 구절이다.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이 죽으신 동안 영으로 지옥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자들에게도 어떻게든지 은혜 받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단,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부자가 지상에서 성경을 알고 구원받을 기회를 가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기회가 있다고 해도 지상에서 복음을 몰랐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판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혹시 이 해석이 맞아도 지옥에서 회개할 영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선교를 강조하신 것 아니겠는가?

이 본문은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적다는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의 삶을 살려면 얼마나 남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끝으로 본문은 노아가 물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것을 세례와 연결시킨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는 죄 씻음이 아니라 선한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세례가 죄 씻음이라면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세례가 계속해서 죄를 씻어주기 때문이다.(세탁이 보장되면 마음 놓고 옷을 더럽힌다?) 그러나 세례가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죄를 멀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세례가 용서의 은혜만 입는 게 아니라 선한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라는 말씀은 예배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내 신앙생활에서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3.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이 극소수였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4. 내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선을 위해 당해야 할 고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5.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의를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해내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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