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베드로전서(4,5장) 공부

수호천사1 2016. 10. 13. 07:36

베드로전서(4,5장) 공부

 

 

제19과 죄의 천적은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4:1-6)

뱀이나 거미는 해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로운 동물이다. 해로운 동물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뱀이나 거미가 기분 나쁘다고 몰살시키면 큰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삶에 가장 해로운 게 무엇일까? 죄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을 그치게 만든다. 죄는 죄책감과 죄과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의 평안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의 삶에도 징계가 임하여 큰 해를 당하게 만든다. 더욱이 영원한 파멸에 빠지게 만든다. 죄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죄를 제거할 수 있는가?

죄를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1) 지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므로 죄를 해결하려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법을 어기고 도망 다니던 사람도 벌을 받고 나면 떳떳한 시민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벌을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벌을 받으면 완전히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벌을 죄 없는 다른 분이 대신 받아줘야 한다. 이것을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이 내 죄를 용서받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용서받으면 우리는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앞으로 죄를 멀리하면 된다.
   2) 앞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죄의 세력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후에 죄에 젖어버려서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 이것도 예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도록 고쳐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고쳐주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의 죄에 젖은 모습이 치유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제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연약하여 자꾸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돕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 본문 1절이 이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고난을 받으면 죄를 그치게 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을 받는 것이 죄를 그친 증거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도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해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고난을 통해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되며 죄에서 멀어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고난이 있다. 1) 징계의 고난이다. 징계는 잘못을 제거하는 데 크게 유익하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우리의 영적 성장도 비슷하다. 우리는 징계의 고난을 통해 죄에서 멀어지고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2) 훈련의 고난이다. 잘못이 없지만 고난을 통해 믿음을 굳세게 만들어 죄를 이겨내게 해주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시나?” 이 집사님은 고난 후에 축복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믿음이 자라 큰 고난도 이겨내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 받는다는 사실이 죄를 멀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포로들을 고문하면서 한 사람만 고문하지 않으면 그는 반역자로 지목된다. 고난 받는 것이 죄를 멀리한 증거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성도들이 악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들의 악행을 살펴보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여기서 ‘방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마을’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마을 잔치가 그렇게 방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마을 잔치에는 네 가지가 모습이 있었다. 1) 우상에게 제사했다. 2) 술에 취하여 방탕한 잔치를 벌였다. 3) 잔치 뒤에 음행이 따랐다. 4) 로마를 대적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본문이 피하라고 하는 악행은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행, 폭동인 것이다.

우리사회의 우상숭배는 어떤가? 돼지머리 고사, 사주팔자, 관상, 손금, 등은 민족의 전통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우상숭배이다.(하나님 외의 영적 존재 섭리 인정) 종교다원주의도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폭동으로 몰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폭동을 거부한다. 우리사회의 음란도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음란문제는 해외성매매나 이혼율이 세계 최고수준에 이른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술은 일인당 술 소비량이 세계 2위 수준이다. 폭동의 문제는 어떤가? 지금은 우리나라에 폭동이 많다고 볼 수 없지만 우리가 단체행동이 강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해방 후 좌우대립, 매년의 노동투쟁, 월드컵 응원, 등) 이것은 선동의 위험이 크다는 위험을 알려준다. 성도들은 폭력적 선동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시험을 극복해야 한다.(산상설교)

6절의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말씀은 3:19와 연결된 내용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이것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단순히 죽기 전에 믿은 사람들이 지금 몸은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살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본문이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선을 행하라는 것을 가르치므로 본문의 문맥에는 후자가 더 잘 맞는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우리 죄를 제거하고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천적이다. 고난은 해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유익한 것이다.(하나님의 자녀에게)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리교회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혹시 십자가를 보며 용서의 기쁨이 아니라 죄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3.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징계의 고난) 죄를 멀리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4.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란, 폭동 중에 우리사회에서 걱정되는 모습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성도들과 교회가 어떻게 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5.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죄를 제거해주는 축복임을 알고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유익을 얻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0과 한 주일 후에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7-11)

성도들에게 한 주일 후에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답이 나왔다. ‘죄를 회개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전도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마지막 시간은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다가 종말을 맞이하겠다.’ 불신자들에게 물으니까 못해본 것들을 하겠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여행, 식사, 등) 신자들에게서는 이런 것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다를까? 소망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신자는 내세에 소망을 두고 있으나 불신자는 현세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것이다.

이 질문을 한 후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왜 지금은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살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하며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종말을 생각하며 회개, 화해, 전도, 등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예수님도 종말에 대한 긴박감을 주신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긴박감을 알려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종말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7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것은 딴 데 정신을 잃지 말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신인가? 신앙의 정신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앞 문단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란, 폭동을 들었다. 이런 것들은 자기가 하나님 대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은 예배, 말씀, 찬양, 기도, 등이 있는데 본문은 이 중에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는 우선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가까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 기도도 중요하다. 바른 기도는 자기의 욕심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참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에 따라 살게 된다.

2. 사랑해야 한다.(8절)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은 9-11절에서 사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그런데 왜 사랑해야 하는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이다. 종말을 맞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죄를 용서받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주기도에도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용서를 지키는 길이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것이다.(10,000달란트 탕감 받은 종)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씀은 세 가지 뜻이 있다. 1)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내 죄를 용서받는다. 2)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을 용서해준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아들이 며느리에게 잘해주면 경우, 사위가 딸에게 잘해주는 경우?) 3) 공동체의 죄가 적어진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죄 적은 교회가 된다.

3. 서로 대접해야 한다.(9절) 이것은 나그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것 같은 실제적인 대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정신적인 대접이 물질적인 대접 못지않게 중요하므로 여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원망 없이 대접하는 것이다. 즉, 사랑으로 대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도움이 된다. 1) 내가 대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라.(양과 염소 비유) 2)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라.(10-11절) 3) 특정인이 과중하게 일하지 않도록 일을 나눠서 하라.(일이 과중하면 원망) 그러려면 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의례히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능력도 필요하다. 무능한데 일을 맡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훈련도 받고, 성령님의 은사도 받아야 한다.

4.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10-11절)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을 예비하는 세 가지 자세를 가르쳐준다. 1) 믿음의 자리를 지키라.(열 처녀 비유) 2)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라.(달란트 비유) 3) 이웃을 사랑하라.(양과 염소 비유) 오늘 본문도 이것을 가르쳐주는데 믿음, 사랑, 사명의 순서로 가르쳐준다. 본문은 사명 감당을 위해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1) 은사를 받으면 봉사하라. 은사를 받고도 봉사하지 않으면 악한 종이다. 은사는 그 자체가 사명이다. 은사가 있는데 봉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권하는 것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구원과 축복의 길을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은사에 따라 섬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이것은 다른 사명을 맡겨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사명에 충성해야 하듯이 자기 은사에 따라 섬겨야 한다. 남과 경쟁하지 말고 자기 은사에 자존감을 가지고 남과 협력해야 한다.(다른 과의 전문의와 잘 협력하는 의사를 찾은 환자) 3)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거나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더욱 잘 섬길 수 있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한 주일 후에 타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비춰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를 생각해보십시오.(이민 준비의 여러 모습들)
3. 나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줄 정도로 교우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4. 나는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사에 따라 사명을 잘 감당하는 편입니까?(성실히, 겸손히, 자존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5.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기도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종말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1과 부끄러운 일과 자랑스러운 일 (베드로전서 4:12-19)

오래 전에 영국에서 큰 돈을 습득하여 주인에게 전해준 사람이 많은 전화와 편지를 받았는데 그 중 90%가 “너는 바보다.”라는 내용이었다. 불의한 이득을 포기했는데 욕을 먹은 것이다. 반면에 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이득 얻은 것을 자랑한다.(학생은 부정행위, 운전자는 과속, 등) 세상의 윤리를 지켜도 욕을 먹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고난을 받는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 5:30)는 말씀도 악을 버리면 얼마나 큰 고통이 오는지를 암시한다.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가지 고통이 따른다. 1) 손을 찍을 때의 고통이다. 담배를 끊는 것 자체가 힘들다.(아버지의 흡연으로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도 담배 끊기가 어렵다) 과속이나 부정행위를 중지하는 것도 힘들다. 이런 것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지 염려가 되어 결단을 망설이게 된다. 2) 손 없이 사는 게 불편하다. 과속에 익숙한 사람이 규정 속도를 지키려면 답답하다. 뇌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그것 없이 살려면 불편하다. 3) 조롱과 비방을 받게 된다. 비정상이거나 무능하다고 낙인찍힌다. 그래서 소외당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성도들이 당한 대표적인 고난이 사회의 조롱과 비방이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조롱과 비방이 얼마나 무서운지 본문은 불시험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불시험은 무서운 시험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불로 연단하는 것 같이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는 축복의 훈련이라는 뜻도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그래서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4:13a)

운동경기에서 상대팀 응원단이 가장 많이 야유하는 사람은 상대팀에서 잘하는 선수인가, 못하는 선수인가? 잘하는 선수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조롱과 비방을 많이 받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비방과 조롱 속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행으로 비방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우리가 받는 비난은 믿음 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벧전 4:16)

한국교회는 어떤가? 진리의 교리 때문에 비난받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당당하게 진리를 지켜야 한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인기투표도 아니고 여론조사도 아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거부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진리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비방하는 말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a)

그러나 한국교회가 악행 때문에 비난받는 경우도 많다. 사회의 악행에 성도들이 연루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성도들의 일반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으므로 오늘은 악행 중에 ‘남의 일을 간섭하는’ 모습을 좀더 살펴본다. 전도를 해보면 교회 다니다가 상처를 받아서 안 다니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히 강하게 전도를 거부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았을까? 기존교인들이 쓸데없는 말 때문이다.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것은 자격도 없으면서 감독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한 성도가 실수를 하면 그것을 감독하고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여전히 그를 내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면서 잘못을 고치도록 권해야 한다. 이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반면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성도를 비방하는 것이다. 비방이 아니라도 덮어줘야 할 것을 드러내어 말하면 쓸데없는 간섭이 된다.(걱정해주는 척하며, 기도해주자고 하며 남의 치부를 말하는 모습) 교회에 이런 모습이 특히 많다고 한다.(다른 성도가 나의 은밀한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긴 사람)

교회적으로 사회의 구체적인 정책에 간섭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교회는 사회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모습에 대해서는 경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성도들 사이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마치 어떤 것이 신앙의 절대가치를 지닌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인의 의견으로 말하는 것은 좋으나 교회의 이름으로 말할 때는 신앙의 확고한 가치만 주장하는 게 바람직하다.(환경, 생태계, 교육방법, 등)

끝으로 베드로는 격려와 경고의 말씀을 준다.(17-18절)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이런 고난을 통해 구원이 온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멸망당할 때는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우리를 격려한다. 1) 믿는 자들이 결코 쉽게 구원을 성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고난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난을 극복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 불신자는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지금 불신자의 길이 편해 보여도 절대 그들을 따르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구원의 성취를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세상에서 악행을 통해 이익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교회 안에서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3. 나는 교회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4. 현재 우리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교회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어떤 내용의 말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쇠고기파동, 촛불집회, 정치권 인사문제, 등)
5. 우리가 악행으로 비난받지는 말고 참된 믿음으로 비난받을 때는 담대히 이겨내며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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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과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오 (베드로전서 5:1-6)

우리의 신앙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다(가정 포함). 이 둘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할까?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교회생활을 잘해야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이 두 가지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시간적인 순서로는 교회생활이 더 먼저이지만 중요성으로는 사회생활이 더 중요하다.(“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래서 항상 둘 다 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베드로전서는 두 가지에 대한 교훈을 다 주지만 당시에 성도들이 세상에서 비방 받는 경우가 많아 바른 삶으로 그것을 극복하라는 사회생활의 교훈을 많이 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이다. 교회생활이 바로 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랑과 사명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물론 이 두 가지도 분리될 수 없으나 외형적인 모습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구별해서 살펴본다. 오늘 본문은 이 둘 중에 무엇을 가르치는가? 외형적으로는 장로들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사랑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교훈인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본문은 베드로가 자기와 같은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인데 베드로의 위상을 볼 때 이 말씀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자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 교훈의 내용은 모든 직분자에게 해당된다. 이 교훈에서 베드로는 먼저 겸손한 모습을 두 가지 보여준다.
   1) “나는 (너희와) 함께 장로된 자요” 베드로의 외적 위상은 지교회의 장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지방의 작은 교회 목사를 대하는 서울 큰 교회의 제직) 그러나 베드로는 우월한 자로 훈계하는 게 아니라 동역자로 권고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장로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며 결단하도록 돕고 있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 성도들을 존중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내 것을 남의 것보다 더 아낀다. 그러나 남의 것이라도 왕의 것이라면 특별히 존중하며 아낄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높이는 모습도 베드로의 겸손이며 장로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이렇게 교훈 받을 준비를 시킨 후에 본격적인 교훈을 준다.

1. 성도들을 섬기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이 잘 되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적 육적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남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억지로 하고 내 양이라고 생각하면 자원해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원해서 하면서도 하나님 뜻대로 한다. 소유의식은 없으나 주인의식은 있는 것이다. 그 양의 주인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체면 때문이다. “항존직이 안 할 수도 없고....” 자원해서 한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지로 한 사람은 자랑한다. 그러면 교만해지고 남을 정죄한다. 이것은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2.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해야 한다. 돈을 위해 교회를 섬기지 말라. 사례비를 받는 것은 괜찮다. 그만큼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사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돈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섬기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욕심과 염려 때문이다. 내세의 소망과 현세의 소망(하나님의 도우신다는 믿음)으로 욕심과 염려를 이겨야 한다. 돈을 추구하면 성도들을 차별한다.(부자에게만 관심, 인정을 쓰는 성도에게만 친절) 심지어 교회사업을 통해 개인적인 이권을 추구한다.(교회 일에서 리베이트가 생기면 교회재정으로 환입하라.) 명예를 추구해도 성도들을 차별한다.(교회권력자에게만 관심) 선거운동을 한다.(이것만 없어져도 교회가 상당히 교회다워질 것이다.)

3.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이 되라. 지도자는 성경과 교회의 사정을 많이 안다. 많은 업적이 있기 때문에 발언권도 존중받는다. 그러나 그래도 주장하는 자세를 하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역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벧전 4:11) 그러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따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주장하는 자세는 사라지고 본이 되는 모습만 보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문은 장로의 상대가 되는 평신도들에게도 겸손을 권한다. 평신도는 지도자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그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함부로 거부해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젊은 성도들이 당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사람의 판단력은 지극히 부족하다. 지금은 내가 확실히 맞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평신도는 우선 지도자의 견해를 더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나님이 직분을 그렇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도 항상 겸손해야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도자나 평신도나 교회 전체나 오직 겸손할 때 높여주신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하는 교회사역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축복입니까, 부담입니까? 나는 사역을 하면 생색을 냅니까(다른 사람 정죄), 감사하며 만족합니까?
3. 내가 교회를 섬기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더러운 이득을 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4. 내가 겸손해지기 어려운 분야는 어떤 곳입니까?(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어려운 곳)
5. 우리가 억지로나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나 주장하는 자세로 섬기지 않고 겸손히 서로 섬기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3과 잠시 고난 후에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14)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에 성도들에게 뭐라고 축복했는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은혜와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b) 교만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 겸손해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 사실 하나님과의 평강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데 겸손히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만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니까 겸손한 자만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이다. 또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 사람은 겸손해야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은혜를 입을 수 있다. 또 교만하면 다툼이 일어나지만 겸손하면 평화로워진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a) 목사들 모임에서 한 목사가 중직자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어렵다고 하자 경험 많은 목사가 말했다. “목사가 안 죽어서 그래.” 목사와 중직자들이 겸손하면 교회는 평강을 얻는다. 사람은 겸손한 자와 싸우지 않는다.(겸손무적? 인자무적?)

이렇게 겸손히 주님을 믿으면 나타나는 모습 중에 하나가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살림걱정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께 다 맡겼기 때문이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절)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던 당시 성도들에게 특별히 적합한 말씀이다. 겸손한 자는 박해 속에서도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하나님과의 평강, 마음의 평강)

염려가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박해, 염려, 유혹이 대표적인 시험거리이다. 염려는 문자적으로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마음이 나뉘는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스를 잠그고 나왔는지 염려하기 시작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사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염려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가? 병이 났을 때 의사에게 맡기면 염려를 덜지만 의사가 믿음직하지 않으면 다시 염려가 생긴다.(맹장수술대에서 뛰어내려온 맹구) 그러나 하나님께는 염려를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 후에 8-9절의 말씀을 주는 것이다. 근신하라는 것은 다른 것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제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이 염려나 쾌락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이 염려하게 하는 것밖에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탄은 직접 우리를 해칠 수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일시적인 고난만 줄 뿐이다. 사탄이 주는 것은 해가 아니라 염려이다. 그런데 염려에 빠지면 믿음을 지키지 못해 진짜 해를 입는 것이다.(천로역정의 두 사자/ TV의 구미호: 해를 끼치지 못하나 두려워하면 활동이 위축된다) 우리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근신하며 위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정직, 헌신, 희생, 등)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가르쳐준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9a절) 사탄은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기만 하면 물리칠 수 있다. 야고보서 4:7b는 이것을 이렇게 가르쳐준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자꾸 약해지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굳건하게 할 수 있을까?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면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할까? 두 가지 말씀이 중요하다. 1) 다른 성도들도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이다.(9b절) 엘리야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엘리야처럼 믿음을 지킨 사람이 7,000명 있다는 것이었다.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면 염려를 이길 수 있다. 2)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다.(10절) 소망이 염려를 이기고 믿음을 지키게 해주기 때문에 산 소망인 것이다. 이 소망의 내용은 우리의 고난은 잠깐이요 받을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과 하나님이 반드시 이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하는데 여기에도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1) 베드로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문안한다고 한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한다. 이 말은 당시 지도적인 교회인 로마교회와 오지의 교회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규모나 장소나 구성원에 따라 우열이 생기는 게 아니다. 2) 내 아들 마가라고 한다. 이것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친밀한 모습이다.(교회 세습 논쟁 때 세습 지지자가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친 아들이 아니라 동역자나 후배가 아들처럼 사랑을 받으며 후임자가 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고 한 적이 있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이나 베드로전서 성경공부 전체에서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쓸데없는 염려로 시간과 힘을 낭비한 경험이 있습니까?(랭크의 수요일 염려상자)
3.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에서 올바른 염려를 찾아보십시오.
4. “세상의 염려는 인간의 교만과 욕심에서 온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염려를 이겨내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해주십시오.
5.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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