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1장) 공부
제1과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베드로전서 1:1-2)
성경은 66권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쳐준다.(물론 성령님의 인도 속에) 이 말씀은 66권 중 일부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도 없고, 알아도 편중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안에도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씀(은혜)과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율법)이 다 들어있지만 우리가 성경 중에서 갈라디아서만 읽는다면 아무래도 은혜를 깊이 깨닫는 반면 바른 삶의 내용과 중요성을 충분히 알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골고루 알고 묵상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 중에도 은혜와 율법이 특별히 잘 조화된 책이 있다. 베드로전서이다. 물론 베드로전서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적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유익하다. 주요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식품과 같다.(바나나? 쌀이나 시금치와 비교) 베드로전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소망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전서가 새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돕기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소망이 우리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베드로전서를 통해 균형 잡힌 신앙과 신앙생활의 힘을 얻기 바란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소개를 하는가? 베드로전서의 말씀으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권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베드로를 소개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은 없을까? 베드로는 당시에 교회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경력이나 지위를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도라고만 소개한다. 요즈음으로 하면 총회장, 노회장, 박사 등의 호칭을 쓰지 않고 목사라는 칭호만 쓴 것과 비슷하다.(박사표시 가운 때문에 논란이 생긴 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위는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는 직분에 있다. 필요한 훈련을 받고 박사 가운을 입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말씀에 권위를 더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사람만 진정한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도올과 아동부교사?) 하나님이 말씀을 성경으로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맞는 말씀만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운 삶의 모습이 말씀전파의 권위를 준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16)
사도의 권위는 심부름 받은 일에만 있다. 심부름 받지 않은 일에는 아무런 권위도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베드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말을 할 때는 아무런 특별한 권위가 없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모습만으로는 아무 권위도 없다.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다른 성도를 존중하고 높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신 일은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한다. 다른 성도들도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런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입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전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은 다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이다.(아시아는 대륙이 아니라 로마의 주) 그러나 본문의 나그네라는 말은 지상의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뜻이 아니라 천국 본향을 떠나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고 있다.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다. 영원히 살 곳도 아니다.
나그네는 어떻게 사는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 고향에 갈 준비를 하며 산다.(팔레스틴 회복 전 유대인들이 현금화가 용이한 생업) 그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 고향에 갈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에서는 지금 죽 한 그릇을 위해 남은 인생의 장자권을 버렸다. 하물며 이생에서 몇 십 년 좋은 것을 누리겠다고 내세의 천국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생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사람은 인생이 나그네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그네는 괴롭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관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생각해보라. 둘째, 시민권이 없어서 충분히 보호되거나 권리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주민은 주의 시설 사용에 큰 혜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나라 국민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관습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보호되는 것은 자기 본국의 힘에 따라 달라진다.(강대국 시민들의 거만한 모습?)
천국의 시민이라면 이 세상에서 관습이 달라 괴롭기는 해도 보호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 나라의 세력은 온 세상에 충만히 뻗어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빈국에 가면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이런 자부심과 천국의 소망을 되새기면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나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만으로 사역에 자신이 있습니까, 세상적인 다른 모습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다른 사역자를 볼 때는 어떻습니까?
3. 내가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천국 소망이 부러움을 없애줍니까?
4. 교회의 직분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명 받지 못한 사역, 믿음의 상실, 등)
5.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천국 소망 속에 힘찬 신앙생활을 하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과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2 )
베드로전서는 소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우리를 나그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천국이 본국이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천국시민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려면 관습이 다르고 세상권세의 보호를 받지 못해 힘든 점도 있다. 하지만 천국권세의 보호를 받고 내세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더욱이 베드로는 신자들의 위치를 나그네라는 표현만이 아니라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알려주며 격려해준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이다.
1. 성부하나님은 신자들을 미리 아시고 선택해주셨다. 이것은 예지예정이 아니다. 예지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선하게 살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시고 선택해주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모습에 구원이 달린 것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무시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민대생이 한명회를 사위로 선택한 것과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남편으로 선택한 것을 비교해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안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존귀하게 세워주셨다는 뜻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하나님의 선택은 철저히 은혜의 선택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2.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성부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본문은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라고 가르쳐준다. 이 두 가지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순종하는 것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피 뿌림을 얻는 것도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것이다.
1)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목적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 바로 죄 용서와 구원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 이 모습은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시는 정말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변치 않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예수님의 모습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내주겠다. 내 모든 것을 내놓고라도 너를 구원하고야 말겠다.”
2)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서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받지만 받은 구원을 지키려면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사실 믿는 상태라면 순종한다. 그래서 산 믿음은 행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순종은 못해도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고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다. 구원의 삶은 지난 죄를 용서받고(치료약) 앞으로 죄에서 멀어지며(예방약) 사는 것이다. 죄 용서를 받았으니 죄 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다.(방탕주의의 유혹) 우리는 순종을 위해서도 선택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순종하게 하시는가? 성령님의 역사로 하신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피 뿌림의 은혜를 입을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만들려면 세상과 다르게 변화시키셔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세상과 다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세상과 다르게 만들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세상의 과학적인 생각, 합리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세상과 달라져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예측과 전혀 다르다.(성품, 환경, 등) 여기서도 성령님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등학교 동창들의 변화)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드신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려면 세상 사람들과 달라져야 한다. 세상에서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 하면 예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려면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 찬양과 말씀과 기도가 특히 중요다. 예수님 승천 후 성도들은 기도와 찬양 중에 성령님을 받고(눅 24:53; 행 1:14), 고넬료 가족은 말씀을 듣다가 성령님을 받는다.(행 10:44)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 성부하나님은 우리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사랑하고 계셨고 예수님을 보내 우리를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받게 하신다. 이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항상 믿음을 지키기 바란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전도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했거나 전도할 엄두도 못낸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과 관계없이 선택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3. 나는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삶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내가 순종하기 어려운 것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교회의 직분과 사역, 가난한 이웃 섬김, 등)
4. 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십시오.(신앙적인 생각, 교회생활, 사회생활, 등)
5.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3과 살아 있는 소망이 우리를 살려줍니다 (베드로전서 1:3-5)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단순히 사도로 설명한 모습, 성도들을 나그네로 표현한 모습,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설명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격려한다. 당시에 가장 흔한 인사는 건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을 구한다. 왜 그럴까? 은혜가 더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축복으로 만들지만 건강이나 세상적인 축복은 그것만 주고 그 밖의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한다.(건강으로 행복?)
은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냥 주시는 유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 속에 살고 있는데도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은혜 베풀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도 은혜를 깨닫게 된다. 은혜를 받는 것과 은혜를 깨닫는 것 중에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그것을 깨달으면 주님을 사랑하며 더 큰 은혜를 받고 깨닫지 못하면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줄어들고 원망이 많아지며 은혜도 멈추게 된다.
평강은 온전한 것이다. 개인의 몸과 마음과 영이 상처 없이 온전한 것이다. 공동체에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 평강도 은혜에서 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걱정이 없어지고 마음에 평강이 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이웃을 사랑하여 인간관계에 평강이 온다. 은혜로 축복을 받으면 삶에 평강이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온갖 축복으로 나타났는데 그 핵심이 영생을 주신 것이다. 영생은 그냥 끝없이 사는 게 아니라 지극한 행복 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왜 주셨는가? 많은 긍휼 때문에 주셨다. 죄 속에서 파멸의 길을 가는 우리를 사랑하여 불쌍히 여기고 주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주셨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셨다.
베드로는 앞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피 뿌림(십자가 은혜)으로 알려줬는데 여기서는 부활로 알려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포함해서 나타난 것이다. 부활하지 않는 분의 죽음은 대속과 구원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예수님이 부활로 죽음을 이기셔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단,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영생을 얻는데 이것이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한다. 산 소망이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으며 하늘에 예비 된 영생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죽은 소망은 무엇인가? 영생이 없는 단순히 세상에서만 좋은 것을 누리는 소망이다. 출세? 건강? 소아마비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아이가 건강 때문에 더 불행해진다면? 영생의 소망이기에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다.
2) 살려주는 소망이라는 뜻이다.(예: exciting game) 헬라어 동사는 행동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본문은 계속적인 동작을 보여준다.(예: 두드리라) 산 소망은 한 번만 살려주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살려주는 소망이다. 영생의 소망은 우리를 계속해서 소생시킨다. 사람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은 소망이 있을 때까지이다. 소망이 없어지면 포기한다. 칭찬이 좋은 것도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초행길을 갈 때 목적지에 도달할 소망이 있으면 계속 가고, 없으면 그 길을 버린다. 길이 애매해서 계속 갈지 말지 고민할 때 계속 가게 해주는 게 있다.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보고 소망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서 나그네로 지내며 본향인 천국으로 간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데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 길로 가면 최고의 축복인 영생을 얻는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소망이 신앙생활에 힘을 줌으로써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다.(주를 앙모하는 자....) 베드로는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해 격려한 후 여기서는 소망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격려하는 것이다.
소망은 분명히 얻을 수 있어야 강력한 소망이 된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얻기 어려우면 소망이 약해진다.(반드시 10배를 받는 복권과 로또복권 중에서?)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강력한 산 소망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 왜 분명한가?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거듭나게 해주셔서 얻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우리 거듭남의 근거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우리는 자꾸 변하므로 우리 모습을 근거로 거듭난다면 우리 소망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나게 해주시므로 우리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2)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목적지에 갈 수 있다. 우리가 이정표를 봐도 자신 있게 길을 갈 수 있지만 길과 차를 잘 아는 사람이 동승하고 있으면 더욱 자신 있게 길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길을 인도하고 보호해주신다면 우리의 소망이 얼마나 확실하겠는가? 그래서 오늘 본문 첫 부분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하는 것이다. 산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헌신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며 구원의 길인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하는 인사말은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가 한 인사말을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인사말을 찾아보십시오.
3. 성경 말씀 중에 나에게 가장 큰 평강을 주는 말씀을 소개해주십시오. 찬송가나 복음송가 중에서도 찾아보십시오.
4. 오늘 배운 ‘살려주는 소망’을 나의 말로 정리해보십시오.
5. 우리가 산 소망으로 항상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속한 자치기관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4과 근심은 잠깐입니다 (베드로전서 1:6-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디서 힘을 얻고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소망에서 얻는다. 물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은 소망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얻는다. 사랑은 소망이 없어도 믿음을 지키게 해준다.(죽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면 동행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사랑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보다 소망 때문에 지키는 경우가 더 많다. 예수님도 믿음을 지키라고 하실 때 소망으로 격려하신 것을 보라. 소망이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산 소망(살려주는 소망)인 것이다. 그러면 소망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 힘을 얻을까? 우리는 지난 주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배웠다.
1) 소망의 내용이 클수록 큰 힘을 얻는다. 고난 후에 받을 돈이 많을수록 더 잘 견디지 않는가?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소망이니 가장 큰 힘을 얻는다.
2)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클수록 큰 힘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있어 소망의 성취가 확실하다. 그래서 큰 힘을 얻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소망으로 힘을 얻게 되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번호는 계속해서 매김)
3) 고난이 속히 끝난다고 믿을수록 잘 견딘다. 길이 막혔다고 돌아가는 사람은 길이 곧 뚫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난이 빨리 끝난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6절은 우리의 고난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이 말씀은 시험이 잠깐만 근심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 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시험이 너무 힘들지 않게 만들어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은 고난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적절한 시기에 멈추게 해주시거나 극복하게 해주신다. 이 소망이 고난을 이길 힘을 주는 것이다.
4) 고난이 큰 유익을 줄수록 큰 힘을 얻는다. 앞의 세 가지는 고난을 이겨낸 후에 소망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는 게 이런 경우이다. 그러나 4)번은 고난 자체가 소망을 이루는 데 유익을 주는 경우이다. 운동선수가 힘든 훈련을 받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더 힘든 훈련을 받을수록 더 실력 있는 선수가 된다는 소망이 있으면 훈련의 고난을 기쁘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7절을 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믿음의 확실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6절의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믿음이 확실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6절의 시험을 통해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순수하고 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6-7절이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도 그것은 곧 끝날 것이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며 아울러 그 어려움을 이겨냄으로써 믿음이 증명되어 우리가 큰 상급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고난은 믿음을 연단시키는 도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조절해주신다. 헬스클럽에서는 전문 트레이너가 회원의 형편에 맞게 운동기구의 무게와 운동시간을 정해준다. 운동으로 몸을 해치지 않고 더욱 건강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도 이렇게 조절해주셔서 고난을 유익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믿음이 연단되는 것을 금보다 더 귀하다고 가르쳐준다. 믿음이 금보다 귀하기 때문에 믿음을 연단하는 고난도 금보다 귀한 것이다. 금메달이 1년의 쾌락보다 귀하다면 1년의 훈련도 1년의 쾌락보다 귀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시련을 이겨내고 신앙생활을 잘 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8절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사랑한다. 그래서 더 큰 칭찬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본문에는 두 가지 구원의 모습이 나타난다. 첫째, 재림 때 얻을 완성된 영생의 구원이다.(7절) 둘째,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미 얻은 구원이다.(9절) 후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 세상의 악과 해를 이기며 사는 축복이다. 우리는 이런 내세의 소망으로 믿음을 지키고 또한 현세에서 누리는 구원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을 지켜서 결국 완성된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중에 한 가지를 말씀해주십시오. 내 생각에 이것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오늘 말씀에 비춰 희망적인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3. 내가 겪은 고난이 나의 신앙과 인격에 유익이 된 경험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4. 우리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헌신적으로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쓸 것 같은 사람을 몇 분 말씀해주십시오. 이분들이 왜 이렇게 할까요?
5. 우리의 어려움이 속히 극복되고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는 소망 속에 시련을 잘 이겨내도록, 교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5과 얼마나 귀한 구원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베드로전서 1:10-12)
어떤 글을 보니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버리느냐도 중요하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버릴 것을 잘 버리면 해야 할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나무는 가지를 치고, 조난당한 배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바다에 버리지 않는가? 그러면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가? 귀하지 않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귀한 것은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어떤 것인가? 큰 유익을 주면서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은 금보다 더 유익하지만 금이 더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하다. 그리고 사랑이 들어 있으면 귀하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주면 지극히 귀한 물건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영생과 이생의 축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축복이 구하기 어렵고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이라면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된다. 이게 쉬운 일인가? 언뜻 보면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사실은 몹시 어렵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고 또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게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인가? 본문은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라고 가르쳐준다.
1) 이 구원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선택해주셨다.(2절: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도 계획하셨다.(11절: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을 미리 지시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하게 하여 구원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공들인 것이므로 쉬운 게 아니다.
2) 선지자들이 자기 힘으로 살펴보고 예언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가르쳐주셔서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예언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3) 그런데 이 구원은 선지자들도 맛보지 못했고 심지어 아브라함도 맛보지 못했다. 물론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구원을 얻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 그러나 우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누리거나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 속에 살지는 못했다.
4) 이 구원은 사도들이 성령님의 감동 속에 자기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기의 안락을 포기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이게 돌처럼 세상에 널려진 일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5) 우리의 구원은 천사들까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천사들이 무엇이 아쉽겠는가? 그런데도 이 구원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천사가 왜 보고 싶어 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하나님이 간절히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2)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가 되는 놀라운 구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
2. 이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잘 믿어지지 않는다.
2)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3) 불리할 때 믿음을 버렸다가 다시 믿으면 될 것 같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정말 믿고 있으면 믿음을 버리기가 쉽지 않고(수많은 순교자들) 믿음을 버린 사람이 다시 믿음을 가지는 게 쉽지 않다. 더욱이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버린 동안 죽으면 다시 믿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지극히 귀한 것이다.
더욱이 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것이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고, 선지자들이 많은 수고를 했지만 자기들은 맛보지 못하고 우리를 위해 수고한 것이고, 사도들도 목숨을 걸고 우리를 위해 전해준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주신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귀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 구원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목숨보다 더 귀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손해를 무릅쓰고 주일을 지키며(주일을 지키는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한 집사),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수고한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3. 오늘 한국사회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 어려운 점과 쉬운 점을 각각 몇 가지씩 찾아보십시오.
4. 내가 아주 귀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을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5.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믿음을 잘 지키도록, 우리교회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6과 마음의 허리를 동이십시오 (베드로전서 1:13-22)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종살이가 너무 괴로워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육적인 구원보다 영적인 구원에 초점을 두신다. 왜냐하면 영적인 구원은 영과 육을 구원으로 인도하지만 육적인 구원은 영의 구원을 주지 못하고 결국 영과 육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도 영적인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신다.(육적 고통)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죄를 짓고 징계를 받고 하면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이던 사람들은 워낙 악에 젖어 있어 있어서 그 훈련으로도 고쳐지지 않아 결국 두 사람 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파멸 당한다. 그러면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은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우상숭배. 2.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
1. 우상숭배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제1계명 어김) 둘째,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제2계명 어김) 그런데 광야에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긴 것이다.(말년에는 다른 신 문제도 커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없을 때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도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1) 영광의 하나님을 비천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모독이 된다.(졸업앨범에 내 사진 대신 개 사진?) 2) 우상만 섬기고 영이신 진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우상을 잘 관리하면 축복?) 3) 우상을 지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지배하려고 하게 된다.(우상을 소지하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
2.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고 반역이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성인을 다 멸하기로 결정하신 것도 가나안 정탐 후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이다. 이것만 봐도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바로 출애굽의 모습에 비춰 우리의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 13절에서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12:11의 모습과 같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허리를 동이는 것은 단단히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허리를 동이고 준비해야 하는가?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전에 천로역정을 보고 구원받는 게 너무 어렵게 그려졌다고 비판했으나 나중에는 공감하게 됨)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지나가는 모습이 본향인 천국을 향해 나그네 길을 가는 인생과 비슷하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 그래서 교회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천국을 향해 가는 인생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러면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어떤 모습과 같은가? 이전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가나안땅의 소망을 바로 보고 또한 꼭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도 이전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천국의 소망을 바로 보고 또한 꼭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절) 이것을 본문은 근신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근신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것들 때문에 정신을 잃지 않고 바른 정신으로 소망을 바라보며 성취를 믿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게 무엇인가? 욕심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14절)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사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1) 저질스러운 방탕의 쾌락 2) 약간 고급스러운 쾌락: 고상한 취미생활도 거기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방탕과 마찬가지이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운동을 즐기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중직자) 3)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여기에 빠지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버렸는데 교회에 와서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교회의 이권과 직분의 명예) 허리를 동이고 나그네 길을 잘 가라는 것은 이런 세상적인 욕심을 그리워하며 그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과거 세상의 쾌락이 그리울 때가 있는가?)
본문은 이를 위해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거룩에는 존재적 거룩과 윤리적 거룩이 있다. 1) 존재적 거룩은 세상과 존재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상 사람들과 존재적으로 다르다. 2) 윤리적 거룩은 삶의 모습이 세상과 다른 것이다. 세상 삶의 모습은 어떤가? 이기적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선악과를 먹었고, 먹은 후에 더욱 이기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은 무시하고 내 이익만 챙긴다. 이와 다르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하나님 사랑)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이웃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이웃 사랑). 거룩하게 사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근신해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상숭배는 미신적인 신앙형태를 가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숭배나 미신적으로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까?(어떤 물건이나 행위를 의지?)
3. 내가 교회에 나가거나 개인적인 경건시간을 가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거에 하던 것 중 끊은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을 다시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왜 그런 것 같습니까?
5. 우리가 참 신자로서 거룩하게 살며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7과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13-22)
사람은 여러 가지 정체를 가지고 산다. 그 중에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같은 사람도 아들 앞에서는 점잖게 행동하고 예비군복을 입으면 함부로 행동한다. 왜 그런가? 아들 앞에서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예비군복을 입으면 자기가 예비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수많은 정체 중에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을까? 사장, 아버지, 어머니, 광주시민, 집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면 행동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야 할까?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하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전서는 하나님 자녀의 특징으로 거룩을 강조한다. 그러면 거룩과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거룩은 세상과 다르다는 뜻이고 거룩에는 존재적 거룩과 윤리적 거룩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존재적으로 세상과 달리 거룩하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예배)한다. 윤리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과 달리 거룩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삶으로 거룩해야 한다. 거룩한 삶은 사랑의 삶이다.(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오늘 본문도 거룩하라고 한 후에 거룩해졌으면(영혼이 세상과 달리 깨끗해졌으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르쳐준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절) 그리고 본문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돕기 위해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적 거룩(전능, 선하심, 등)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그리고 윤리적 거룩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최선을 다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중에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17절에서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하는 것이 이런 뜻이다.
사람이 행동하도록 힘을 주는 중요한 요소는 감정이다. 좋아하면 힘차게 일하고 싫어하면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싫어할까? 일 시킨 사람을 사랑하거나, 일이 좋거나, 일에 대한 상급이 있으면 좋아한다. 반대로 일 시킨 사람을 싫어하거나, 일이 싫거나, 일에 대한 벌이 있으면 싫어한다.(당근과 채찍)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좋거나(기쁨, 보람), 하나님 뜻대로 살 때 상급을 받으면 힘차게 하나님 뜻대로 산다. 반대로 하나님 뜻을 어길 때 벌을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산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다.(병사는 자기 장군을 적장보다 더 두려워해야 적과 싸운다: 손자가 궁녀를 강병으로 만듬)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거룩한 사랑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도우신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정의롭다. 억울한 사람을 사랑하여 억압하는 자를 물리치신다. 억압하는 자를 사랑하여 바른 사람이 되도록 고통으로 고쳐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2.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우리 속을 아는 분, 절대 속일 수 없는 분을 두려워한다.(운동선수는 약물검사를 두려워한다: 벤 존슨은 한국의 검사력을 무시하여 약물 사용?) 그래서 이런 분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다.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밖에 없다. 마음과 은밀한 언행까지 거룩해져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외모와 행위가 다른가? 본문에서 행위는 단수이다. 그래서 행위를 본다는 말씀은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하나로 보며 기본적인 자세를 본다는 뜻이다. 중심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열매가 각각의 행동이 아니라 기본자세인 것과도 비슷하다. 이에 반해 외모는 기본적인 자세나 중심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모습이다. 거룩하라고 하니까 거룩한 마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거룩하게 보이는 행동만 하거나(기도, 예배참여, 봉사, 섬김, 등) 거룩한 사람들이 가진 모습과 칭호만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교회직분, 업적자랑, 등)
3.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나그네이기 때문에 세상과 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도 있다. 다 된 것처럼 방심하는 사람은 무엇을 보고 그럴까? 외모(행동, 업적, 직분)를 보고 그런다. 중심과 기본자세를 보는 사람은 끝까지 조심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천국 환상: 천국문 바로 앞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함정)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사회생활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체성이나 직분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을 생각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됩니까?
3. 하나님이 나에게 철저히 바른 삶을 바라신다는 말씀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4. 내가 신앙생활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외모(경건생활, 봉사업적, 교회직분, 등)를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말씀을 나눈 후 이런 외모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5.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마음과 은밀한 언행까지 거룩해지도록, 한국교회가 거룩해지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8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25)
바리새인은 원래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한 사람들이지만 율법주의적인 사고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사람들을 정죄했다. 그리고 외형적인 업적을 중시하다 보니까 위선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탈무드에는 바리새인을 7 종류로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1) 조금 있다가 형: 선행을 미뤄두는 사람 2) 멍든 형: 악을 안 보려고 눈을 감고 가다가 다친 사람 3) 어깨 형: 선행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는 사람 4) 곱사등이 형: 겸손한 체하는 사람 5) 계산 형: 자기의 선행과 악행을 계산하며 행동하는 사람 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형: 하나님이 두려워서 바르게 사는 사람 7)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 하나님을 사랑하여 바르게 사는 사람. 백성들은 이 중에 진짜 바리새인은 7)이라고 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만 사랑만으로는 바로 살기 어려워서 두려움도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17절에서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가르친 후 18절부터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와주고, 더욱 구원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 이 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받는다. 이보다 귀한 것이 있을까? 이렇게 값진 것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알려준다. 1) 이 구원은 진짜 구원이고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좋은 것이 비싸다. 가짜와 진짜 중에 진짜가 비싸다. 그래서 가짜를 진짜로 속이려면 가격을 올리지 않는가? 2) 이 구원을 유의해서 관리해야 한다. 귀한 것을 어떻게 함부로 굴릴 수 있는가? 그러면 자연히 구원받은 자답게 살려고 노력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천하게 다루는가? 전도를 마치 구걸이나 시시한 물건을 강매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신자도 그렇다. 예배나 봉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나 봉사를 인심 쓰는 것처럼 참여한다면 구원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구원의 가치를 백만분의 일만 알아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감추인 보화 비유)
본문은 구원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우선 구원은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시간적인 준비를 보여준다. 구원은 창세 이전부터 예비되었다가 말세를 맞아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참고로 말세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가리키거나(하나님 나라의 완성)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를 가리킨다.(구원사역의 완성) 여기서는 초림 때를 의미한다. 어쨌든 이것은 구원이 얼마나 오랫동안 예비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와 부활과 영광을 보여주며 믿음과 소망을 말해준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절)
그리고 다시 우리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사랑의 삶이다. 특히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21절에서 믿음과 소망을 말한 후 22절에서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용이다.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도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본문은 믿음과 소망에서 나온 사랑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거짓 없는 사랑이다. 거짓된 사랑은 어떤 것인가? 본심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사랑하는 체하는 것이다. 왜 사랑하는 체할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이다.(체면, 보상, 관계, 등) 거짓 사랑은 자기 이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 사랑의 마음이 없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행동하는 것은 부족한 사랑이기는 해도 거짓 사랑은 아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피차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서 차별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성도들도 교회지도자에게 특별대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은 내 몸처럼, 혹은 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거짓 사랑은 이기적이고 자기 목숨을 이웃보다 아끼기 때문에 절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수 없다.
베드로전서 1장은 지금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보여줬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바른 신앙의 모습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준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한 사랑과 나아가서는 뜨거운 사랑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준다. 앞으로 베드로전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거룩한 삶의 길을 가르쳐줄 것이다. 우리는 1장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2장부터 나오는 구체적인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구원이 말할 수 없이 비싼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3. 거짓이 없는 사랑을 보신 적이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4. 우리교회 성도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교회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 것 같습니까? 구체적으로 몇 가지 찾아보십시오.
5. 우리가 구원의 가치를 더 많이 깨닫고 구원을 지키기 위해 애쓰도록, 우리교회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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