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言約史로 천국비유를 읽어라
-언약사 3시기 Drei Phasen der Bundesgeschichte -
1.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
신약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 혹은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최초로 선포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2)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산상수훈에서 비롯하여 당신의 공생애 내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수 없이 선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많은 비유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컨대 ‘천국에서 가장 큰 자’에 대한 비유(마 18:1-9; 병행 막 9:33-37; 42-48; 눅 9:46-48; 15:3-7; 17:1-2),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1-14, 병행 눅 15:24),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 병행 눅 19:11-27),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설교를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비유의 주제’,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로서의 “자기를 낮추는 자”(마 18:4), 혹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리라”(마 22:14), 그리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등에 초점을 맞추어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해석해 왔습니다. 이와 상응하게 『예수의 비유』란 책을 쓴 예레미야J. Jeremia도 ‘예수의 비유에 담긴 소식’을 ‘구원의 현재’, ‘빚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큰 확신’, ‘大破局에 직면하여’, ‘늦지 말라!’, ‘시간의 요구’, ‘살아 온 제자의 신분’, ‘人子의 수난의 길과 영광의 啓示’, 그리고 ‘완성’이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1) 따라서 ‘비유’에 대한 해석은 율리허A. Jülicher의 ‘직유와 은유적 해석’, 휘비그P. Fiebig의 ‘랍비적 메샬림meshalim적 해석’ 양식비평가The Form-Critics, 카둑스A.T. Cadoux와 다드C.H. Dodd와 예레미야의 ‘사회학적 해석’ 그리고 편집비평Redaction-Crititcsm에 이르기 까기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2)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구약성경, 특히 히브리인들의 구원역사에 대한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들입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기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시고, 그들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으로 기업으로 주시기 위하여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사’, 혹은 ‘구원역사’가 과연 ‘천국’에 대한 비유해석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인가? 성부 하나님은 이 지상나라의 주인이고, 아들 하나님은 천상의 나라의 주인이신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인들의 인지구조’, 더 자세히 말하면, 적어도 ‘구약성경의 전승’, 특히 ‘구원역사’ 내지는 ‘언약사’의 전승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6-5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비유’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역사’, 내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역사’의 전망에서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2. 언약사 전개의 3 단계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음과 같이 ‘구원역사Heilsgeschichte’에 대한 증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구원역사 속에는 3 시기(단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기Phase는, 애굽에서 중노동으로 고난 받고 있을 시기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역사’의 세 단계의 시기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Covenant’에 기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날 이스라엘 조상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에 이르렀고, 그리고 다시 “아브람이 …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창 12: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 가나안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a)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상 살펴본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3 시기(단계)를 분석하면, 첫 번째 시기는 ‘고난의 시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동행의 시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약속한 땅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께 함께 거하는 ‘동거의 시기’,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안식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상 3 시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시기’로 종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역사’의 3 시기(단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시기였는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보다 명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역사 가운데 첫 번째 ‘고난의 시기’에는 우선 육신의 고통을 당합니다. “자, 우리(= 애굽 사람)가 그들(=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 1:10-11);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 1:14) 뿐만 아니라, ‘고난의 시기’에는 ‘자손의 번성’을 억제당합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출 1: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출 12:1a)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17)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날(유월절) 결정적으로 계시됩니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 12:22-23); 반면에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피부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동행의 시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과 어떻게 동행하셨는지는 다음과 같은 상황 묘사가 아주 적절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0-22)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과 동행하는 모습을 이렇게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는 참 ‘동행’을 충분히 증언하였다고 할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동행하고 계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언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인식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시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청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출애굽의 공로를 ‘금송아지’에게 돌립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그 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 33:1-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중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그 순간 그 곳, 곧 시내 산까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임마누엘’의 역사는, 모세의 청을 듣고 다시금 ‘동행’할 것을 약속해 주신 데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의 주체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거居하시는 ‘동거同居의 시기’,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안식의 시기’입니다. 우선 「여호수아」서 11장 23절은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지난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땅으로부터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긴 역사를 선포한 후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고 촉구합니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 ‘여호수아’는 ‘임마누엘, 곧 구원자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즉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상 살펴본 ‘언약의 역사적 전개의 3단계’, 곧 ‘고난의 시기’, ‘동행의 시기’, 그리고 ‘동거의 시기’에 상응하게, 라이트Wright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역사’에서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의 주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라이트는 ‘언약의 형식’으로 주어진 이스라엘 구원에 관한 ‘예언적 요약’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3)
3. 구원의 3 단계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 말씀으로 천국을 다음과 선포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2-14, 병행 눅 14:15-24) 우선 이 비유 말씀에 의하면, 우선 혼인잔치 자리에 참석하게 된 사람들은 ‘청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청함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든지’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혼인잔치에 불려온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구원의 역사 3단계’에 비유하면, 첫 번째 단계, 곧 ‘고난의 시기’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었던 것처럼 - ‘가난’, ‘병’, 그리고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혼인잔치에 불려온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초청해 주지 않는 비천한 사람들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는 누구도 초청해 주지 않는 비천한 인간들’, 즉 ‘가난’, ‘병’, 그리고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혼인잔치의 주인, 곧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인들을 통하여 ‘혼인잔치’, 곧 ‘천국’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인잔치’에서 ‘주인’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따라서 이 시기, 곧 ‘혼인잔치에 악인들이 참여해 있는 시기(단계)’는 -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과정’에 따라면 - 둘째 단계, 곧 ‘동행의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가난’, ‘병’, 그리고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혼인잔치’의 주인, 곧 ‘천국의 주인’ 하나님께서 함께 ‘잔치에 참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던짐을 받습니다. 즉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1-13)고 마태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는 ‘구원역사의 3단계’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할 자와 그렇지 못할 자’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란, -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의 3 시기에 비유하여 해석하면 - 똑 같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민수기」는 “여호와께서 그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민 26:65)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 본문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십자가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 받은 강도처럼 -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혼인잔치에 대한 비유 말씀에서 ‘예복’이란,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 나아갈 때 갖추는 ‘예의禮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주인을 만홀히 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노라.”(사 1:4) 그리고 은유적으로 ‘예복’이란, ‘화려함’ 보다는, 오히려 ‘단정함’, ‘깨끗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회개의 기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준비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동거同居’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회개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였을 때, 그에게 ‘낙원의 동거’가 약속으로 주어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 강도)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출애굽’하였지만(장정만 60만명), 소수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예수님의 말씀은 - ‘구원역사의 3단계’를 고려해 볼 때 - 서로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아무런 예고도 없이 ‘혼인 잔치’에 불러놓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다시 ‘성 밖으로’ 내어 쫓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에 의하면, 천국은 언제든지 ‘도둑 같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강조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35-40) 이와 상응하게 사도 바울도,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고 없이 ‘혼인 잔치’에 불려갔다는 것은 핑계거리가 못됩니다.
4. 구원을 위한 복음의 뿌리내림의 3 단계
예수님께서 어느 날,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1-8, 병행 막 4:1-9; 눅 8:19-2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18-23)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천국에 관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우선 ‘고난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기는 ‘말씀을 듣고 잠시 기뻐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성령님이 동행 혹은 함께하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f)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잠시 기뻐하는 시기’는 성령이 ‘동행’ 혹은 ‘함께’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말씀을 통하여 얻은 기쁨도 살아지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내려서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시기’입니다. 그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삶에 있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1) Joachim Jeremias, Die Gleichnisse Jesu, 『예수의 比喩』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11-218.
2) 이점에 관하여: J.D. 킹스베리, 김근수 역,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서울: 도서출판 나단, 1992), 9-26.
3) 참조. John P. Milton, Our Hebrew-Christian Heritage, 신성종 역, 『히브리식 사고와 기독교』, (서울: 컨콜디아사, 1980,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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