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 강좌2부 성도여러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제가 질문하기를, ‘그럼 보지도 못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십니까?’ 라고 질문하면,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곧 바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도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답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답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도마에 대하여 ‘부활의 소식’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받아드리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보지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무조건 믿으라!’는 ‘맹신’을 강요하기 위한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2. 오히려 알지도 보지고 못하고 믿는 ‘아덴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고 믿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명백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믿으라!’는 ‘맹신’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 없이 많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첫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창 12:1) 그 후, 천사의 모양으로 하갈에게와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모세에게 ‘호렙 산’에 나타나셨습니다.
3. 이렇게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분이, 이제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점을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여기서 3절의 ‘이는’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곧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후도 후서 4장 6절에 의하면 -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 참고 고후 4:4)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사탄’이 제일먼저 알아보았습니다.(참조. 고전 2:14)1) 마치 귀신들린 무당이 참 그리스도인을 먼저 알아보듯이(참조. 행 19:13-15)2) 악한 영인 귀신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봅니다. (212쪽 중간)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마침 그 곳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릴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은)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 9:25)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막 9:33) 그때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무리들이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마 9:33)고 증언합니다.
5. 그러나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냐 하는 것은, ‘귀신’이 증언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는, 예수님이 친히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212쪽 아래)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시고, 귀신마저도 굴복시키는 분이 과연 누구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아주 잔잔하게 만드시는’(마 8:26) 분이 과연 누구인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실 수 있는 분이 과연 누구인가?(마 14:13-21, 병행 막 6:30-44; 눅 9:10-17)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요 11:39)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는 말씀 한 마디로 다시 살리신 분이 과연 누구인가? 이러한 예수님의 일하심을 단지 ‘기적을 행함’으로 일축해 버릴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 분이 과연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6. 신앙 강좌 2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일을 행하신 분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가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세례 요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엘리야’, 아니면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주는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막 8:29)이라고, 성경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의 고백으로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오한 내용입니다. 그 증거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214쪽 “2.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모세”라는 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7. 구약의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청원하였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출 33: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2-23)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하나님 몸의 ‘등背’은 보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어 ‘י (아호르: achor)’: 곧 ’나의 등’은 ‘뒤에 남겨두다. 늦어지게 하다’는 동사 ‘achar’에서 유래한 말로서, 전치사, 부사, 혹은 접속사로 쓰일 때는, ‘후에’(창 9:28; 10:1) 혹은 ‘그 뒤’(창 18:10), ‘뒤’(창 19:6,26; 22;13) ‘다음에’ 혹은 ‘다음은’(삼하 23:9; 느 3:20)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나를 뒤(다음)에는 볼 것이요’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세는 ‘변화 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참조 골 1:15; 고후 4:4)를 봅니다.’
8. 어느 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마 17:2-3) 호렙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곧 얼굴을 보고자 하였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고 말씀하신 것, 바꾸어 말하면, ‘네가 후(다음)에는 나를 볼 것이요, 앞(서)는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순간에 성취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상응하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義人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6-17, 병행 눅 10:23-24)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곧 ‘네가 후(다음)에는 나를 볼 것이요, 앞(서)는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시간적時間的 그리고 시각적視覺的으로 변화 산에서 성취된 것이다. 또한 호렙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 했던 모세는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후(다음)에는 볼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9.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주 결정적으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단호하게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이러한 증언의 진신성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그리고는 계속해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 17:21)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라고 요청하였을 때, “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고 답변하셨던 것이다.
10. 그러므로 신앙강좌 2부 성도 여러분! 모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달라도 기도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참고 고후 4:4)이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고 예수님께서 증언하셨듯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2) (행 19:13-15)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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