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X. 시형제媤兄弟 결혼제도에서 예수의 대속代贖의 죽음까지
1. ‘보아스’의 아들이 왜 ‘나오미’의 아들인가?
유대인의 대 제사장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ἕνα ἄνθρωπον ἀποθανεῖν ὑπὲρ τοῦυ λαοῦ)’ 유익하다”(요 18:14)고 권고하였다. 왜 그랬을까? ‘가야바’는 어떠한 이유로, 혹은 어떠한 근거에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말하였을까?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 사죄赦罪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로마 군대에게 내어 주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마 27:24a) 뿐만 아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하여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히브리의 사상적 전통이 있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으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렇다면 ‘대속代贖 사상’은 히브리인의 어떠한 사유체계에 근거한 것인가? 이점을 우리는 우선 히브리인의 ‘시-형제媤-兄弟 결혼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1)
구약의 신명기 25장 5-10절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의 ‘시-형제 결혼 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 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신 25:5-10) 바로 이러한 ‘시-형제 결혼제도’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어느 날 예수님께 ‘부활 때의 결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4-28, 병행 막 12:18-27; 눅 20:27-40)
이상의 ‘시-형제 결혼 제도’에 따라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자기 남편, ‘엘’의 시-형제媤-兄弟, ‘오난과 셀라’가 ‘시-형제 역할’ - 곧, 자기 형 ‘엘’을 대신하여 ‘형수(兄嫂: jabam)’, ‘다말’과 결혼하여 ‘형의 역할을 대행代行하는 일’을 - 거부하자 시(媤)-아버지 유다의 씨를 받다 죽음 남편 ‘엘’(유다의(창 38:2-3) 아들,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자기 남편 ‘엘’의 가계家系를 계승한다.(창 38:8-30)2) 이렇듯 ‘시-형제 결혼 제도’에 따르면,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려움 당한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형제의 어려움을 대신 감당해야 하는 ‘대행, 혹은 대리사상’이 히브리인들의 ‘시-형제 결혼제도’의 의미이다.
그런데 ‘대행’ 혹은 ‘대리사상’은 보다 확장되어, 단지 가계家系 계승을 위하여 ‘씨’를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의 경제적 고난을 대신 감당해 두는 ‘대리속량’ 사상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시-형제 결혼제도’가 ‘고엘(대신속량 = 대신 사드림)’ 제도로 확장되는 것은 ‘룻’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3) 비록 신명기 25장의 율법은 ‘고엘(대신속량) 제도’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한 가지 근본사상, 곧 형제의 고난을 대신 감당한다는 ‘대행’ 혹은 ‘대리사상’은 ‘고엘 제도’에서도 동일하게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룻’의 이야기에서 ‘보아스’는 ‘시-형제 제도’와 ‘고엘 제도’에 따른 의무 두 가지 모두 감당하기 때문이다.
우선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하여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룻 2:20; 3:9b)라고 말한다.4)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 ‘룻’에게 지시하여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다하도록 촉구하라고 말한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그러자 ‘보아스’가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룻 3:12-13)고 권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보아스’는 성읍 장로 10명과 자기 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를 불러 모아 놓고, ‘거업 무를 자’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룻 4:5)고 말한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룻 4:8, 참조 4:7)5) ‘보아스’가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룻 4:10)고 선포한다. 그 후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서 ‘나오미’ 품에 안겨 준다.6) 그러자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7)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형제 결혼 제도’ 혹은 ‘고엘 제도’에 의해서 예수님의 조상 ‘다윗’, 왕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시-형제 결혼 제도’에 의해서 ‘유다’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서 난 ‘베레스’의 계보가 ‘다윗’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18b-22)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보아스’는 ‘시-형제 결혼 제도’와 ‘고엘(대신속량) 제도’의 의무 2 가지를 모두 실행한다. 즉 ‘보아스’는 ‘시-형제 결혼제도’에 따라서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아 ‘나오미’의 대(代)를 이어주고, 동시에 나오미의 ‘토지’가 다른 씨족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대신 속량’해 줌으로써, ‘나오미’ 가계의 재산을 보존해 주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인들의 ‘시-형제 결혼 제도’에 ‘고엘 제도’가 더 추가됨으로써, ‘대행 사상’ 혹은 ‘대리사상’이 ‘대속(속량)사상’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업을 물다’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가알לאג’은 ‘되사다’, ‘속량하다redeem’, ‘구속하다’, ‘근친(近親)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인 ‘파다עדפ가 있는데, 이 ‘파다’ 역시 ‘구속하다redeem’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알’이 주로 근친의 특권이나 속량(대속)을 표현할 때 쓰인 반면에, ‘파다’는 일반적인 종교적 의미의 ‘대속’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구속’이란 단어의 배후에는 히브리인들의 ‘시-형제 결혼 제도’와 ‘고엘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근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 되는가?
2. 대속자Redeemer,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심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병행 막 10:45)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갈 1:4)고 증언한다. 즉 예수님께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우리를 건지시려고’, 바꾸어 말하면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상응하게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 인용한 성경증언에 있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란 헬라어는 ‘λύτρον ἀντὶ πολλῶν’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λύτρον’이란 말은, 죄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 있거나, 남에게 빚을 지어서 채무자(債務者)가 되었을 때, 그러한 사람을 ‘죄로 인한 징벌’이나, ‘부채(負債)’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돈, 곧 ‘속전(贖錢: Lösegeld)’을 의미한다.7)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속전’으로 표현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죄의 노예’가 되어 있거나,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죄 값’을 지불해야 할 ‘정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대속물’, 곧 ‘속전’으로 지불하여 인간을 해방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이러한 ‘인간 해방’을 위해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모든 부채와 죄로 인한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속전’을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대속주’, 곧 ‘구세주’ 혹은 ‘속량주’라고 불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어로 ‘Redeemer’라고 표현하는 것도, 예수님을 타인을 위해서 ‘저당물을 찾아주는 사람’; ‘다시 사주는, 곧 환매還買해 주는 사람’; ‘속신贖身하는 사람’, ‘구조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할 만한 구체적인 성경적 전거典據가 있는가? 물론 있다.
우선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에 관한 노래는 “그(= 고난의 종)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라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등의 표현은 ‘고난의 종’이 감당할 ‘대속의 행위’, 곧 ‘속량 행위’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행 3:18; 눅 24:25-27, 44-47)8)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예지’(참조 행 2:23)9)에 일치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한 것’(갈 4:5)10)이며, ‘육신의 죄를 정(淨)하게 하시기 위한 것’(롬 8:3)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대속’의 개념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희생을 위해서 수풀에 걸린 예비한 ‘숫양’으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3-14) 이 기사에 의하면, ‘숫양’은 ‘이삭의 희생’을 대신하여 ‘속량제물’이 된다. 여기서 ‘숫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예비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된 아들’, 즉 ‘이삭’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모친 사래에게 ‘언약한 아들’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또한 14절) 동시에 ‘이삭’은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창 26:24, 비교 창 17:2; 15:5)11) 이와 상응하게 예수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계약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선언하신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병행 막 14:23-24; 눅 22:19-20)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 곧 ‘계약 백성’인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이 ‘속량’, 곧 ‘대속의 죽음’을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제자들과 ‘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을 것을 선언하신 것이 바로 성만찬 제정이다. 성만찬 제정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계약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속량(대속)하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다.
이상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볼 때, 구약성경의 ‘이삭’을 대신(代身)하여 희생의 제물로 죽은 ‘숫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시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 혹은 ‘계약 백성’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 ‘숫양처럼’ - 그와 ‘새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은 ‘대속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속죄’ 혹은 ‘대속’의 개념에는 죄인을 위해서 대신 당하는 ‘대속적 혹은 대리적 고통’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또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언급할 때, 종종 구약의 ‘고엘 제도’에 상응하는 ‘매입(買入)’ 개념을 사용한다.12)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이밖에 고전 7:23)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의 피 값으로 산 사람들’로 규정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b)13)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라고 말할 때, ‘성경대로’란, 다름 아닌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에 대한 노래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서신 속에는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의 노래’가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밖에 갈 1:4; 2:20; 롬 4:25) 즉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은 다름 아닌 이사야 53장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b)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사다’ 혹은 ‘핏 값’ 혹은 ‘우리를 위하여’ 혹은 ‘우리를 대신하여’ 라는 표현들은, 구약의 ‘시-형제 결혼 제도’나 ‘고엘 제도’의 용어와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피’로 ‘속전(贖錢:λύτρον)’을 지불함으로써 -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피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다시 사들임으로써 - 인간을 죄로 인한 고통으로 해방시키는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몸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참조 고전 6:19-20; 7:23)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새 언약’의 백성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삭’의 기사에서 읽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언약의 아들’(참조 창 18:10)이었고, ‘계약 백성’(참조 창 17:13-14)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즉 ‘우리 모든 사람(= 그리스도인)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남아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희생제물’로 오해되고 있는 것과 같은 성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신(人身)제의적 희생제물’이 아니다.
우선 히브리인의 인지구조나 구약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인신제의人身祭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는 종교행위이다. 그래서 선지자, 에스겔은 ‘인신제의’를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네(= 이스라엘 백성)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겔 16:20-21, 이 밖에 여러 곳: 겔 20:31; 왕하 17:17; 21:6; 대하 33:6 등) 인신제의는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종교행위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9-11)고 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 그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건 이방 신이건 - 신의 분노를 달래는 ‘희생제물’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히브리-구약성경적 인지구조가 아니다.14) 마르틴 헹엘에 의하면, 오히려 “악과 재산에서 ‘국토를 깨끗이 정화’하든지, 또는 신들의 진노를 ‘진정시킨다’는 의미로 이해된 ‘속죄expiation’란 주제는 고대 후기 종교들의 통속어lingua franca의 하나였다”15)
따라서 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 아들, 이삭)를 번제로 드리라”(창 22:b)고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희생제물’의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 곧 경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로우M. Burrows는 “바울의 속죄 개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희생을 위하여 숲 속에 수양을 준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자신이 희생제물을 준비하셨다는 생각으로써만 희생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16) 그래서 바로우는 “바울의 속죄 개념은 희생의 범주 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확언한다.17)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신人身제의적 희생제물’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시-형제 결혼제도’와 ‘고엘 제도’에 상응하는 것으로써, 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인간을 위한 ‘대리속량’ 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 ‘시형제媤兄弟’란 라틴어 ‘levirat’를 번역한 것으로서, ‘levirat’는 히브리어 ‘야밤מביjabam’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야밤’은 ‘결혼한 사람의 형제나 자매’(verschwägerte Personen, Schwager 혹은 Schwagerin)을 뜻한다.(Kutsch, Art. ‘מבי’, ThWAT Bd. III, 393-400, 특히 396.) 신명기는 ‘jabam’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행할 것이요’라고 풀어서 쓰고 있다.
2) 유다와 다말의 사건은 ‘시형제 결혼 제도’에 따라서, 모든 형제들이 서열에 따라서 과부된 형수, ‘다말’고 결혼하여 가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시동생들이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서 형에서 아우로 대해의 책임이 이어진다. 유다의 경우는 그의 둘째 아들 ‘오난’과 셋째 아들 ‘셀라’가 모두 그들의 형수 ‘다말’과 결혼하기를 거부하자, 그 다음 서열에 속한 시-아버지 ‘유다’를 ‘다말’이 선택한 것이다.
3) 고엘제도에 관하여: A. R. Johnson, The Primary Meaning of לאג, VTS 1(1953), 67-77; H. J. Kraus, Erlösung, RGG. 2. 3.Aufl., 586-588; O. Procksch, λύω, ThWNT IV, 331-337.; Ringgren, לאג, ThWAT I,884-890.
4) ‘나오미’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이며.(룻 1:1), 모압 여인, ‘룻’의 시어머니‘이다.
5) 룻 4: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참조 신 25:9)
6) 룻의 결혼에 관하여: H. H. Rowley, The Marriage of Ruth (The Servant of the Lord, Oxford, 1965, 169ff)
7) Büchsel, λύτρον, ThWNT IV, 341-351
8) 행 3:18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9) 행 2:23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 ”
10)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1)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12) ‘구원’의 개념은 주로 ‘구속redemption’의 의미를 갖는데, ‘구속’이란 문자적인 뜻은 ‘되사들이는 것, buy back’, 한자어로 표현하면 ‘환매(還買)’를 의미한다. 그런데 ‘구속’이란 개념은 신약에서 ‘구원salvation’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에서 ‘redeem’과 ‘redemption’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어원을 갖는다. 히브리어에서 ‘עדפ’ 는 ‘장자(처음 난 자)를 구원하는 데’ 사용되고(출 13:13; 34:20; 민 18:15이하), ‘לאג’은 ‘재산이 가족의 소유에서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재산을 대신 매입(買入)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민 35:12; 신 19:6,12; 수 20:3,5,9) ‘구속’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구약 성경적 의미가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 있어서는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표현할 많이 사용된다.
13) 여기서 ‘자기들을 사신’이란, 헬라어 ‘ἀγοράσαντα’는 ‘ἀγοράζω’의 aor.(단순과거) 형으로서, 소유주로부터 돈을 주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적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속박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참조 계 5:9; 14:4)
14) 안셀름Anselm은 『Cur Deus Homo?: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었는가?』에서 “저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은 자신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인간성은 그의 신성에게 드린 제물이다”(Cur Deus Home? II, 18)라고 말하였다.
15) M. Hengel, The Atonement - The Origins of the Doctrine in the New Testament, 전경연 역, 『신약성서의 속죄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53.
16) Millar Burrows, An Outline of Biblical Theology, 유동식 역,『聖書神學叢論』(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7), 318.
1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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