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하나님, 자연, 인간의 삼분법적 관계규정
-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인지구조 -
1. 히브리인의 인지구조로서의 ‘십계명’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는 말씀으로 맺는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주衣食住의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즉각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과 ‘이 세상의 의식주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삶을 종교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연관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을 여호와 종교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과 회의는 히브리인의 인지구조認知構造, 곧 구약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면, 그 이유가 즉시 이해될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인지구조를 가장 간략하게 축약 요약한 것은 바로 ‘십계명’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토라Torah’, 곧 ‘모세 오경五經’(창세기-신명기)이다. 그런데 ‘오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확대한 ‘계약법전’(출 20:22-23:33)과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법전’(출 25 - 민 10)과 세속적인 삶의 문제를 다룬 ‘신명기 법전’(신 12-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성결법전’(레 17-26)이 ‘제사법전’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십계명’은 - 마치 세상의 ‘憲法’처럼 - ‘모세오경’의 근본적인 법이다. ‘십계명’은 출 20:1-17과 신 5:5-16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부서지고, 새로 받은 십계명은 공개되지 않다가, 모세와 백성이 모압 평지에 도달해서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승된다.1)
‘십계명’이라는 말은 ‘10개의 말씀Ten Words’(신 4:13)2)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십계명’이라고 부른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며 살아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규범이자 동시에 생활규범이다. 왜냐하면 이 규범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에는 무려 613개의 율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내용으로 구분하면,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규정이다. 즉 “너는 …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7절)까지의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규정이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12절)부터 “간음하지 말라”(14절)까지의 계명이다. 그리고 셋째는 인간과 사물(물건)의 관계규정이다. 즉 “도적질하지 말지니라”(15절)부터 “이웃의 아내를 … 탐내지 말지니라”(17절 후반부)는 말씀까지의 계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상의 3가지 관계규정을 통합하는 ‘안식일 계명’, 곧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8-11절)는 계명이다. 이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물건) 사이의 관계 규정을 통합하는 계명이다.3)
그런데 동시에 ‘십계명’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상응하는 규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자연, 곧 사물(물건)과 그것을 다스릴 사람을 만드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4계명은 ‘창조의 안식’에 근거하여 ‘안식일 계명’을 규정하고 있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따라서 ‘하나님’, ‘사람(인간)’ 그리고 ‘자연(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존재들이다. 즉 이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자연’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4)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자연(물질)’은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 ‘자연(이 세상 물질을 포함하여)’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제4계명이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창조의 섭리에 따라서, ‘안식일’에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 곧 ‘인간’과 ‘자연’과 함께 ‘안식’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곧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물질)의 관계’도 하나님의 보편적인 창조질서에 따라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가르쳐 주는 히브리인 인지구조의 아주 독특한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면, 인간도 함께 멸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계명에는 단순히 인간의 삶을 위한 규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보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각 교파 따라서 ‘십계명’의 구분이 약간씩 다르다. 우선 개혁교회(장로교회)와 동방정교회 그리고 유대교 전통은 ‘안식일 계명’을 네 번째 계명으로 보고,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안식일 계명을 ‘세 번째 계명’으로 본다. 즉 장로교회와 동방정교회 그리고 유대교는, “나는 … 의 하나님 여호와라”(출 20:2)를 서언으로 보고, “너는 …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3절)를 제1계명으로,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4-6절)를 제2계명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7절)를 제3계명으로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8-11절)를 제4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너는 …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3절)와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4-6절)를 제1계명으로 보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7절)를 제2계명으로,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8-11절)를 3계명으로 본다. 대신 개혁교회(장로교회)와 동방정교회 그리고 유대교 전통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 탐내지 말라”(17절 후반)는 계명을 10계명으로 보는 반면에,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17절 전반부)을 제9계명으로 그리고 “이웃의 아내를 … 탐내지 말라”(17절 후반부)를 제10계명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구분은 단지 서열 식으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므로 ‘히브리인의 인지구조’에 변화를 주는 해석은 아니다.
II. 주기도문의 인지구조.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물질)’의 삼분법적 인지구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마 6:9-13; 눅 11:2-4)5)는 사도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주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였다.6) 그래서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한다는 것은, 마치 기독교 신자임을 증빙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따라서 ‘주의 기도’는 교회에서 일반 회의나 집회의 마침을 의미하는 ‘의식적 상징기도’가 아니다. ‘주의 기도’는 성도들의 공동 기도이다. 즉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7) 따라서 ‘주의 기도’ 속에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인지구조’가 담겨져 있다. 바꾸어 말하면 ‘주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이 아주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선포와 구원사역의 ‘알갱이’, 곧 ‘복음의 요약’8)이라고 할 수 있다.
‘주기도문’은 우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이러한 주기도문은 1) 기도 대상에 대한 부름; 2) ‘당신’이라는 동형이 두 번(혹은 세 번) 나타나는 간청; 3) ‘우리’라는 동형이 세 번 나타나는 간청; 4) 그리고 마지막 간청(마태복음에 부가된 간청으로 엮여 있다).9) 이러한 청원을 기도의 주체와 대상에 따라서 구분하면, 주기도문의 각 청원은 크게 ‘하나님을 향한 청원’과 ‘우리(인간) 자신을 위한 청원’과 ‘물질과 관련된 청원’으로 크게 삼분(三分)된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세 가지 청원을 하나로 묶는 종합적인 간청: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구성되어 있다.10)
그런데 이러한 ‘주기도문’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면 히브리인의 신앙적 인지구조인 십계명의 ‘삼분법적trichonomisch’ 인지구조에 상응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첫 번째 청원인 하나님을 향한 청원은 -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는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청원이다. 두 번째 청원인 생명유지를 위한 식물(食物)에 대한 청원은 - 곧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 인간과 자연(물질)의 관계 회복을 위한 청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청원인 인간을 위한 청원은 -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청원이다.11) 그리고 끝으로 마지막 세 번째 청원인 종합적인 간청은 - 곧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 ‘안식일 계명’처럼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식물; 물질)’의 관계가 모두 회복되기를 청원하는 기도이다. 그 다음은 첨부는 - 곧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송이다. 그러나 이 영광송은 ‘청원의 내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더욱 특이한 것은, 주기도문의 청원중 인간과 물질에 관한 간청의 순서는 최초 아담의 타락과정과 역순逆順으로 되어 있다. 즉 아담이 사탄(악)의 시험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범죄를 행한 후, ‘땀을 흘려야 먹고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에덴Eden 동산에서 추방되었던 것의 역순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부름을 제외하고, “(하나님) 나라이(가)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리고 이러한 간청을 모두 종합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청이 있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 인간, 자연’의 삼분법적 인지구조가 어떻게 성경에 각인되어 나타나는가?
II.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단절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식물’의 관계단절 을 낳는다.
‘십계명’과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식물(자연, 물질)’의 삼분법三分法적 ‘관계규정’은 하나의 규정이 깨지면 다른 관계규정도 동시에 깨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단절은 다른 두 관계가 단절되는 단초가 된다. 이를 우리는 창세기의 타락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최초 인간 아담Adam의 아내가 뱀의 유혹을 받는다. 이때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창 2:16-17)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은 후, 첫째는 아담Adam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다음 ‘그의 여자’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리고 그 다음 ‘자연’과의 관계까지 단절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자신의 죄악을 그의 아내(여자)에게 전가시킨다. 아담이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는 그 다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단절로 이어진다. 그래서 “땅은 네(=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창 3:18) 왜냐하면 “땅은 너(= 아담, 인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창 3:18) 결국 최초 인간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단절되자, 그로 인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이어서 ‘인간과 사물(자연),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과 식물食物’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렇듯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단절로 말미암아,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과 의식주(자연)’의 관계가 단절되는 현상은 ‘가인Cain’의 범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최초의 인간 아담Adam과 그의 아내 하와는 첫 아들 가인을 낳는다. 죄의 징벌로 주어진 아들인 가인(참조 창 3:16a), 그래서 그런지 가인은 ‘형제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 즉 죄악의 씨앗으로 태어난 아들이기에 죄악의 열매를 맺게 된다.12) 그 후 가인과 그의 동생 ‘아벨Abel’은 각각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아벨의 제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창 4:5b)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가인의 제물이 무엇이며,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간단히 드러난다. 우선 가인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은 ‘땅의 소산’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읽으면, ‘흙의 소산: yriP hm;d;a}’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hm;d;a아다마’가 ‘땅’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땅’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흙’이라는 뜻도 있고, 은유적으로는 ‘더러운 것’, ‘티끌 같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뜻한다.13) 그리고 ‘소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yriP페리’는 농사를 지어서 얻은 열매가 아니라, 땅에서 자연히 생긴 야생 열매를 의미한다.14) 따라서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 곧 ‘땅에서 난 자생적 열매’이다. 즉 가인은 자신이 땀 흘려 농사지어 얻은 소출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땅에서 자생적으로 맺은 열매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범죄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악으로 인하여 가인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즉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 그도 최초 인간 아담처럼 -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창 4:11b)라는 징벌을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과 자연(의식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면, 인간의 경제적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계시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지면에서 내어 쫓겨남을 받은 것’(창 4:14)은 마치 최초 인간 아담이 범죄 한 후 ‘에덴Eden 동산에서 내어 쫓겨남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창 3:24) 그런데 히브리 유목민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의하면, 형제나 족속들의 지경에서 ‘내어쫓김’을 당하는 것은 거의 ‘죽음의 경지’로 내몰림, 곧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인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라고 애통하였던 것이다. 결국 가인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충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자기 동생을 살해함으로써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는 관계가 되고, 이어서 ‘자연’, 곧 ‘의식주’와 관계도 궁핍해진 것이다.
III.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회복되는 ‘인간관계’와 ‘물질관계’
초두初頭에도 언급하였듯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면, ‘인간과 식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고 선포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증언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으면, ‘인간과 인간관계’와 인간의 ‘물질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관계’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 이점을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마 25:31-45)에서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을 양 무리들에게 “내(= 인자 = 예수님)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임금(= 예수님)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답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에 의하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회복’이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준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 말씀은 ‘인간관계’의 회복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물질’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고 설교하라고 권면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히브리인의 인지구조에 의하면, 인간 및 물질관계가 엉망이면서, 하나님에게만 충성하고 신앙심 깊은 척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바로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자식인 ‘바리새인’과 같은 놈들이다.
1)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이 증언하고 있는 십계명은 두 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하다. 단지 4계명과 10계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4계명에 있어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서로 다르고, 10계명의 탐내지 말라는 대상이 조금 다르게 배열되어 있을 뿐이다.
2) “십계명”이란 히브리어로 “아세레트 하드바림(ʿaseret, ‘10’; ha devarim ‘말씀’)”(출 34:28; 신 4:13; 10:4)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열 개의 말씀이냐? 이점에 대하여 카수토(Umberto Cassuto)는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이기 때문에, 열 개의 말씀을 손으로 꼽아가면서 기억하고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 박준서, 『십계명 다시보기』(서울: 한들출판사 2001), 21.(이하 본문의 괄호 속 쪽수는 본 책의 쪽수를 의미함)
3) 십계명의 삼분법적 인지구조에 관하여: 한태동, 『성서로 본 신학』(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1-29.
4) 이를 우리 조상들은 ‘天地人’으로 이해하였다.
5) 일반적으로 누가복음에 있는 것이 보다 원문에 가깝다고 본다. 이점에 대하여: J. Jeremias, The Prayers of Jesus, 89.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볼 때, 누가복음의 표현이 마태복음에서 확대된 것으로 본다.
6) Didache 8:3: "너희는 하루에 3번씩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7)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쁘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 210-258)는 자신의 주기도문 해설에서 주기도문을 주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가 공동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점에 관하여: 치쁘리아누스, 이형우 옮김, 『도나뚜스에게 가톨릭 교회 일치, 주의 기도문』(왜관: 분도출판사 1987)〔교부문헌 총서 1〕, 특히, 109이하.
8) 주기도문에 관한 첫 번째 주석을 쓴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AD 155-220)이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a breviarium totius evangelii)이라고 하였다. 이점에 대하여: H. Zahrnt, Jesus aus Nazareth, 146.
9) 주기도문은 하나님에 대한 청원이 셋, 우리를 위한 청원이 셋,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영광 기원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모두 여섯 청원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혹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독립된 청원으로 간주하여 모두 일곱 청원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을 여섯 청원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람은 Origen, Gregory of Nyssa, J. Calvin, Jeremias 이고, 주기도문을 일곱 청원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람은 M. Luther, E. F. Scott, E. Lohmeyen 등 이다.
10) 그러나 보프(L. Boff)는 주기도문을 크게 2개로 대별하여 보려고 한다. “신앙의 눈은 둘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우러르고, 그의 빛을 응시하며, 다른 하나는 땅을 향하면서 어둠의 비극을 분별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위로 치닫는 내적 인간(영혼)의 충동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땅을 향해) 밑으로 치닫는 외적 인간(육신)의 무게를 경험한다.”(L. Boff, 이정희 역, 「주기도문」, 1986, 39).
11)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악’에 의해서 깨어졌기 때문에, 반복해서 바꾸어 청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이러한 예를 우리는 다윗의 범죄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음욕으로 인하여 빚어진 죄악, 곧 ‘밧세바’를 아내를 맞아드림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서 간접적으로 살인하는 죄를 낳고, 그 죄악의 씨앗으로 잉태된 아들은 끝내 죽는 것과 같다.
13) J. G. Plöger, Art. ‘המדא’, ThWAT Bd. I., 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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