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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VIII. 시時-공간空間 지평융합 속에서 성경을 읽어라

수호천사1 2014. 3. 19. 23:05

VIII. 시-공간空間 지평융합 속에서 성경을 읽어라

 -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

 

1. 과거, 현재, 미래의 지평융합으로서의 ‘오늘’

 

기독교 복음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 때문에 ‘기독교는 배타적인 종교’라는 비난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복음이 선포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성경이 증언하는 시간 개념을 정확이 이해하면 곧바로 철회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6-58)고 답변하셨기 때문입니다.1)

그렇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시간이해’는 어떠한 것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b)고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히브리인의 시간’ 개념보다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것으로 답변이 대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히브리인들 - 더 자세히 말하면 유대인들은 -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하였기 때문입니다.(참조 요 8:59) 그렇다면 예수님이 활동하신 시간, 그 시간은 어떠한 시간인가?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계 1:4-5a)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 1장 17절 이하에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라고 증언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또한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에 대하여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5장 5절에서는 하나님을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시간을 언급할 때, ‘내일’이나 ‘지난 날’이라는 시간을 뜻하는 부사를 구분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여 ‘오늘’이라는 시간개념으로 언급합니다. 예컨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 ”(마 6:30a); “가버나움아 …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비교 마 27:19b) 특별히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역이 모두 ‘오늘’ 일어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7절은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고 증언하고 있으며,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히 5:5)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시간대時間帶와 하나님의 활동시간대가 동일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태초에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살아계신 것처럼,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지나간 ‘과거’나 앞으로 도래할 ‘미래’는 ‘오늘’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시간 속으로 융합 됩니다. 즉 지나간 과거는 현재로 수렴하고, 미래는 ‘오늘’이라는 현재 속에 잠재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없으면, ‘미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지만, 물리적이고 실질적으로는 ‘오늘’이라는 ‘현재’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상응하게 어거스틴Augustinus도 자신의 『고백록』에서 ‘오늘’, 곧 ‘현재’를 성경이 증언하는 시간 단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당신의 세월은 단 하루(벧후 3:8) 님의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겨지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는 날이니이다.”2) 그래서 어거스틴은 “과거는 이미 아니 있는 것, 미래는 아직 있지 않은 것이고 보면, 과거에 대하여 ‘길다’ 해서 아니 되는 것 대신 ‘길었다’ 해야 옳고, 미래에 대해선 ‘길으리라’가 옳을 것입니다.”3)라고 말합니다. 즉 그는 ‘과거’는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것이고, 미래는 무한히 열려 있지만, 불확실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일 년의 첫 달이라 친다면, 나머지는 모두 미래이요, 둘째 달이라도 첫 달은 이미 갔고, 멀어지지만 아직 없다. 이렇다면 지금 말한 이 일 년조차 그 전부가 현재가 아니요, 전부가 현재일 수 없다면, 일 년도 현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4) 한 마디로 말해서, 어거스틴은 시간이란 결국 현재 뿐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 현재일 수 없고, 과거란 미래에게서 밀려나는 것, 미래란 과거에 뒤따르는 것이며, 모든 과거와 미래란 항상 현재인 그 분한테서 만들어져 흐르는 것이 아니겠나이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5) 그렇다면 여기서 또 질문이 생깁니다. 왜 히브리인들은 ‘오늘’이라는 ‘현재’ 시간대만을 생각하였는가? 

 

 

2.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게“의 지평융합으로서의 ‘하늘’

 

예수님께서 이 지상의 시-공간 안에서 일하셨지만, 예수님은 혼자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 지상 사역은 예수님 자신의 독자적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는 ‘공동사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서 함께 일하고 계심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0-11)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동시에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항상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속에서 보다 명백히 드러납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 곧 ‘일하시는 장場’은 3차원적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분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밖에 마 5:45,45; 6:1,9; 7:11,21; 10:32,33; 12:50; 16:17; 18:10,14,19; 23:9; 막 11:5)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은 - 비록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 ‘하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이 지상’을 시-공간적으로 융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따라서 예수님이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을 우리는 ‘하늘’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하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지평이 융합된 곳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늘’ 개념을 분석해 봄으로써 더욱 명백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의 '하늘'은 땅과 바다와 비교하여 구름과 날 짐승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을 위한 ‘대기권’을 비롯한 ‘별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피조 세계의 하늘’을 의미합니다.6)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의 '하늘'은 땅과 ‘별들의 하늘(우주)’ 그 위에 있는 영역으로서, ‘천사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을 의미합니다.7) 즉 상징적인 의미의 '하늘'은, 대기권을 비롯한 별들의 하늘, 곧 우주(宇宙)를 ‘보이는 하늘’이라고 부르고, ‘천사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역을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징적인 의미의 '하늘'을 성경은 “하늘들의 하늘(βασιλεία τών οὐρανών)”(마 3:2)로, 때로는 “하늘나라 (βασιλεία ἐπουράνιον)”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에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 10:12; 왕상 8:27; 느 9:6 등). 이러한 하늘은 창조된 천사들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골 1:16)8)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영역은 특별히 규정된 일정한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히 어느 곳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Unbestimmbarkeit)”의 영역이라고 벨커(M. Welker)는 말한다.9) 그래서 몰트만은 “성서의 전통에 있어서 하늘은, 하나님이 ‘어디에(wo)’ 계시는지, 하나님이 ‘어디로부터(woher)’ 행동하시는지,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어디로(wohin)’ 향해야 하는지, 그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언제든지 사용되어져 왔다”고 말합니다.10) 바꾸어 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활동영역’ 혹은 ‘거주지(Wohnort)’을 가리킵니다.(대하 30:27; 마 5:16,45; 6:1,9; 7:1,21 이밖에 많은 곳) 칼 바르트K. Barth도 ‘하늘’을 ‘하나님의 창조적 가능성 혹은 잠재력의 영역’으로 이해했습니다.11) 그래서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늘’은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한 곳’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시-공간적 인식과 감각을 초월하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곳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이 ‘하늘’을 “하나님의 에너지와 가능성과 능력의 나라(das Reich der Energien, der Möglichkeit<possibilitas> und der Mächtigkeit<potentia> Gottes)”로 특징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2) 따라서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 하늘에서 하나님은 세계와 (별들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13) 그래서 이 하늘은 주기도문 속에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라는 기도문의 그 ‘하늘’을 의미한다고 그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상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하늘'의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현존現存해 계시는 하늘이나, 예수가 승천하신 '하늘'은 전통적인 우주론적 혹은 공간적 차원에서 보면, 삼층 세계의 '하늘'을 의미 합니다. 그 '하늘'은 하나님의 창조적 가능성과 잠재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는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가능성과 잠재성의 영역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는 장(場, Kraftfeld)을 의미합니다. 에벨링G. Ebeling의 말을 빌어 말하면, “하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늘이 있습니다.”14) 다시 말하면 이 말은, 하늘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이 있는 곳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으로서의 ‘하늘’ 개념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이러한 하늘 개념에 의하면, 전통적인 의미의 3층 세계적 우주관에 의한 하늘 개념이 극복됩니다. 즉 전통적인 3층 세계적 하늘 개념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통일되고, 그 제한된 한계성이 극복되어집니다. 이런 '하늘' 개념에 근거해 볼 때, “내(예수 필자 주)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는 예수의 말씀은 ‘하늘나라’의 현재적 실재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도 '하늘'을 ‘하나님의 현존’과 동일시하였고, 땅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15)

따라서 이제 여기서 계발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융합은 ‘보이는 이 지상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가 융합 속에 기초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융합된 ‘하나의 하늘’이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사건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오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간 차원에서는 ‘하나의 시간 차원’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최근 우주과학에서 주장하는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곧 ‘1초 동안에 빛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의 공간 안에서는 시간의 차가 생기지 않는다’는 원리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3.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은 예수의 선재先在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16) 이렇게 성경은 예수의 선재뿐만 아니라, 그가 역사적인 인간, 나사렛 예수로 화육됨에 대하여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예수 필자 주)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눅 24:51) 이렇듯 마가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에 대한 보고로 복음서를 끝맺습니다. 특별히 누가 전승의 사도행전은 “주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행 1:9-10)라고 예수님의 승천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습니다.17)

그래서 초대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렇게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怒)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4:16; 살후 1:10; 비교. 행 1:11). 이러한 사실은, 초대교회는 예수의 승천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하늘로부터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살전 4:16)18)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예수님의 화육과 승천을 동일한 차원으로 묶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9-10) 즉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승천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19)

이렇듯 예수님의 선재와 그의 지상적-역사적 사역 그리고 그의 승천이 예수님의 전-생애에 속하는 것이라면, 예수님 생애의 시간은 결코 이 지상적-역사적 시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상사역 시간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사역은 ‘영원’ 속에서 - 더 자세히 말하면 ‘역사적 시간 이전에 그리고 역사적 시간 이후에’ - 일어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의 근원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재, 곧 하나님과 동등한 위(位, status dei)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낮아짐(Kenosis)의 목적은 단지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빌 2:9-11). 그래서 반 오이엔(van Oyen)은 예수의 선재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과 승천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통전적으로 연관시켜 생각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인격과 운명은 그의 세계 내에 있는 사건과 관련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시는 행위가,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로 나타난 것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20)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고 이 지상과 하늘 그리고 지금과 종말을 융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도 ‘오늘’로 표현하시고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미래에 일어날 사건도 ‘오늘’이라는 시간 차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왜냐하면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그 때를 의미하고, ‘낙원’이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질문이 제기됩니다. 어떻게 이러한 ‘시간과 영원’ 그리고 ‘이 지상地上와 하늘나라’의 융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 여러 번 스스로 증언하셨듯이 -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에 대하여 요한전승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예수 그리스도)시니라.”(요일 1:1-2)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함께 계심’은 곧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 곧 ‘존재와 시간의 융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더라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에 그는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계신 시간은 -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이 - ‘역사적 시간’이며 동시에 ‘영원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항상 오늘’이라는 ‘영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간은 ‘역사적 지상적 시간’처럼 ‘사멸될 과거와, 막연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동시사역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참조 눅 22:29; 요 15:9; 17:18; 18:9; 20:21)

한 마디로 말해서, ‘임마누엘’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속에서 일어난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그 사역 속에서 ‘시간과 영원’, ‘이곳과 저곳의 융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성경을 읽으면, 시-공간의 난해한 구절이 명백히 이해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에 대하여: O. Cullmann, ‘Der johanneische Gebrauch doppeldeutiger Ausdrücke als Schlüssel zum Verständnis des 4. Evg’. (1948) wieder abgedr. in: ders., Vorträge und Aufsätze(1925-1962), 1966, 176ff. - H. Leroy, ‘Das johanneische Mißverständnis als literarische Form’, in: BiLe 9, 1968, 196ff.

2)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S. Aurelii Augustini, Confessionum, 최민순 역, 『고백록』(서울: 성 바오르 서원, 1977), XI권 13장.

3) Aurelii Augustini/최민순 역, 『고백록』, XI장 15절.

4) Ibid.

5) Aurelii Augustini/최민순 역, 『고백록』, XI장 11절.

6) 시편 104편과 창세기 1장을 참조하라. 이것에 관하여: J. Neils, Gott und Himmel im Alten Testament, CONC(D) 15(1979), 150-156. 그리고 땅위에 있는 ‘궁창’으로 표현된 ‘자연의 하늘(coelum naturae)’이란 ‘공기의 하늘’과 ‘에델의 하늘’을 가리키는 데, 이것은 성경의 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기독교적으로 혼합된 것이다.

7) ‘하늘’을 삼분(三分)하여 보는 것에 관하여: Fr. Diekamp, Katholische Dogmatik nach den Grundsätzden des Hl. Thomas III, Münster 1922, 406ff. - D. Tilenus, Syntagmatripertitum Disputationem theologicarum in academia Sedanensi habitarum, Genevae 1618, 455에서 “coelum trifariam in scriptura sumitur”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 그리고 이에 덧붙여 자세한 참고자료는 Heppe/Bizer,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 a.a.O., 390ff.(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München 1985, 167, Anm 4.에서 재인용)

8) 과거 기독교 신앙 고백과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는 골로새서 1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창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의 창조”로 확장시켰다: “‘천지’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창조물을 말합니다”(지원용, 『말틴 루터 소교리문답서와 해설』, 컨콜디아사 1981, 90)  

9) M. Welker, Universalität Gottes und Relativität der Welt, Neukirchen 1981, 203ff.

10) 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München 1985, 170.

11)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II/3, 491: “Dialektik des Gegensatzes von Himmel und Erde”.

12) 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174.

13) Ibid.

14) G. Ebeling, Vom Gebot. Predigten über das Unser-Vater, Tübingen 1963, 24(J. Moltmann, Ibid., 181에서 재인용)

15) M. Luther, Vom Abendmahl Christi. Bekenntnis. WA 26; BoA 3, 408.(J. Moltmann, ibid., 182 재인용) 몰트만에 의하면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을 하늘과 동일시하였고, 요한 게르하르트는 하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고 한다. 이점에 대하여: J, Moltmann/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15.

16)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도 자신의 선재(先在)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는 말씀으로 증언하신다.

17) 이점에 관하여: H. Merkel, Bibelkkunde des Neuen Testaments: Ein Arbeitsbuch, 박창건 옮김, 신약성서연구입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3), 79.

18)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19) 다른 고대 사본에는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이’로 되어 있음(필자가 진하게)

20) Hendrik van Oyen, Theologische Erkenntnislehre, Zürich 1955, 152.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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