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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⑫

수호천사1 2013. 4. 24. 08:44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의

‘구체적 성취의 때와 방법’을 예언한 계시록 7장 1~8절⑫

 

 

 

③ 이사야 46장 10~13절

 

  이사야 46장 10~13절도 요한계시록 7장 1~8절과 병행구절이며, 앞서 살펴 본 이사야 41장 25~27, 52장 7절과 짝을 이루는 예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마지막 때에 동방의 나라에서 시온으로 사람을 부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 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사 46:10~13)


  먼저 12절 말씀을 살펴보자.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여기에서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참조 10:2~4). 또한 “마음이 완악하여”란 구절은 유대인들이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롬 11:7). 즉 12절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스라엘아 나에게 청종하라”는 뜻이다.


  왜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게 청종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13절에 있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의’란 ‘하나님의 의’로서 ‘복음’을 뜻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주석학자 박윤선 박사는 본문 13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힘쓰나 하나님은 그로 더불어 가까와지시기를 원하신다. 그가 ‘의’를 가지시고 우리에게 ‘가깝게’ 오심은, 필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 그는 우리의 공로 유무를 보시지 않고 우리 구원의 대가가 될 하나님의 의를 친히 가지고 오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내것이라고 하기만 하면 그대로 되어진다.”(박윤선, 성경주석 이사야서, 서울: 영음사, 1982, p.450)

 

  베이커 성경주석도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13절)는 말씀이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예언인 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본문의 성취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갖는다. ‘의’는 하나님께서 가깝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구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주어지는 가장 성실한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마련함과 동시에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마련한 의에로의 구원이기 때문이다(롬 9:30). 그리고 구원은 그것이 하나님이 의의 판단자이신 한 공정하시리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의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간이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없는 의를 인간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에 단연코 ‘하나님의 의’이기도 하다.”(베이커 성경주석 이사야(중), 기독교문사, P.641)

 

  13절에 기록된 ‘의’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12~13절 전체의 뜻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까이’ 가져가시어 그들을 구원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12절에 있는 “의에서 멀리(far) 떠난 너희여”라는 구절과 13절에 있는 “나의 의를 가까이(near) 할 것인즉”이란 구절은 ‘대구’를 이루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실 것인가?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11절 말씀이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여기에서 ‘동방(the east)’이란 말과 ‘먼 나라(a far-off land)’라는 말, 두 곳에 밑줄을 치라. 하나님은 동방의 먼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냥 ‘동방’이 아니고 ‘먼 나라’ 동방이다! 즉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동방’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땅(a far-off land)’에 있는 동양의 나라이다. 11절에 기록된 이 계시는 마지막 때에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로 보내심을 받게 될 복음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제까지 서구 주석가들은 이 예언도 파사의 고레스 왕 때에 성취되었다고 해석해 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0절을 보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10절 이하의 예언은 문맥 속에서 해석할 때 분명히 ‘종말’에 성취될 예언인 것이다. 게다가 파사 나라는 굳이 ‘먼 나라’라고 명시해야 할 만큼 이스라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땅(a far-off land)도 아니다. 그러나 서구 주석가들과 그들의 해묵은 이론을 그대로 베껴서 가르치는 성경연구가들은 이 구절을 고레스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앞서 지적한 바처럼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46장은 1~9절까지는 '바벨론의 우상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이사야 47장은 '바벨론 자체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언 사이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종말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예언한 말씀이 46장 10~13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고레스 시대와 마지막 때가 겹쳐서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를 고려하지 않는 주석가들은 46장 전체를 몽땅 고레스 시대에 성취되었다고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바벨론은 파사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자주 고레스(파사) 시대와 종말을 함께 섞어서 예언했다. 이에 관해 주석가 류폴드(H.C. Leupol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사야는 여러 곳에서 고레스(파사) 시대와 종말(End-time)을 함께 섞이는 것으로 보았다. 시간의 전후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선지자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이런 일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한 사건이 일어난 후 얼마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 다른 사건이 일어날지에 관해 알지 못했던 것처럼 봉니다. 그것들의 도래는 확실하지만, 그 전후 관계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H.C. 류폴드, 이사야주석(하), 크리스챤서적, 1990, PP.760).

 

  이사야 46장 10~13절은 41장 25~27, 52장 7절과 짝을 이루는 계시인 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향해 구원을 베푸시려고 동양의 먼 나라로부터 복음전도자들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인 것이다. 결코 고레스 시대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을 일컬어 ‘독수리’를 부른다고 말씀 하시는가? 어떤 하나의 성경 구절은 반드시 문맥 속에서 해석 되어져야 한다. 그 해답은 13절에 있다: “…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은 ‘빨리’ 구원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 시온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빨리’ 가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독수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큰 날개를 가지고 높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누구보다 빨리 이동하기 때문이다(욥 9:26; 애 4:19)*


  하나님은 ‘합당한 때’를 지키신다. 그러므로 때가 차면 ‘서둘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독수리처럼 빠르게 동방의 먼 나라, 즉 극동의 한 나라에서 시온을 향해 달려가게 하실 것이다. 앞서 설명한 이사야 52장 7~10절은 바로 그 전도자들의 모습을 회화적 표현 방식으로 예언한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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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여기에 독수리가 언급된 것은 아니다. 독수리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맹조(猛鳥)’, 즉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위로부터 와락 덤벼드는 새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새는 독수리일 수도 있고 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맹조, 즉 ‘사나운 날짐승’은 문맥상 독수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핵심내용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 시온으로 복음전도자들을 ‘빨리’ 보내주실 것이라는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의 흐름상 ‘독수리’로 번역해야 훌륭한 번역이 된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어떤 맹조들보다 이동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빠름’을 비유할 때 독수리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본문의 ‘맹조’는  단연 ‘독수리’로 번역해야 합당하다: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욥 9:26).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자으려고 매복하였도다”(애 4:19).


- 계   속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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