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의
‘구체적 성취의 때와 방법’을 예언한 계시록 7장 1~8절⑩
복음전도자들이 “해 돋는 데”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보내심을 받을 것이라는 이사야서의 예언들
① 이사야 41장 25~27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할 자들을 ‘해 돋는 곳’에서부터 보내실 것이라는 예언은 이사야 41장 25~27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같이 하리니
누가 처음부터 이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뇨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사 41:25~27)
먼저 27절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하나님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기쁜 소식’은 이사야 52장 7절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 ‘좋은 소식’과 같은 히브리 원어 ‘basar’를 사용하고 있다. ‘바사르’는 현대 히브리어로도 ‘복음’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52장 7절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 10~1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것, 곧 복음 전파의 보편성을 강조할 때 인용한 말씀이다.
그런데 25절에는 ‘해 돋는 곳’ 즉 동방이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는 땅으로 지명됐다.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25절). 한글개역성경은 25절 첫 부분이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곧에서 오게 하였나니”로 번역되어 있지만, ‘한 사람’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해 돋는 곳에서 ‘온다’는 동사를 3인칭 단수 남성을 받도록 사용하였을 뿐이므로 그를 반드시 사람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one)’로 번역하였다: "I have raised one from the north, and he shall come from the rising of the sun"(KJV). 따라서 이 ‘하나(one)’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라’라는 뜻의 ‘고이(goi)’도 히브리어에서 3인칭 단수 남성을 받기 때문이다. 25절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25)라고 된다.
그러면 25절이 말하는 ‘북방’이란 어디인가?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자는 ‘동방’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주님은 북방으로부터 그를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는 분명히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기쁜 소식’ 곧 복음을 가져갈 자이다. 그런데 그가 북방에서 일으킴을 받는다. 북방과 동방의 두 곳이 엇갈린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주석가 흑기(黑崎)는 이 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확히 그가 온 것은 ‘동북’인데 이를 시적으로 분리하여 두 방향을 든 것이다.”
우리는 이 해석을 취한다. 그러므로 25절의 “해 돋는 곳”이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도록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는 나라인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 돋는 곳” 즉 정동방이면서 또한 북방에 해당되는 나라이다(코리아가 거기에 해당된다). 바로 이 “해 돋는 곳”이 계시록 7장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령의 인침을 받도록 인치는 사역자(복음전도자)들이 출동하는 곳인 “해 돋는 데”인 것이다(2절).
여기에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는 단수로도 언급되고 복수로도 언급되어 있다.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에서는 복수이며,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다. ‘기쁜 소식 전할 자’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나 민족과 같은 집합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복수로 ‘그들’이라고 말할 때는 그 나라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 27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를 성경주석가들은 주전 6세기의 파사 국왕 고레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기쁜 소식 전할 자”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에 의해 해방이 될 때 그 기쁜 소식을 고국으로 달려가서 전달할 “전령”들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이사야 41장의 예언을 전부 구약시대에 파사의 고레스에 의해 성취된 예언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에 일반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사건(근접성취)과 멀리 성취될 종말의 사건(원접성취)을 섞어서 예언했다는 성경 예언의 특성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으로서, 성경 예언해석의 중요한 원리인 “이중 성취의 원리”를 전적으로 간과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이중 성취의 원리
예언의 많은 부분은 예언하는 때로부터 가까운 때의 사건을 일차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므로 이 예언이 나중에 가서 종국적인 성취를 이루도록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일차적인 성취는 나중에 완성될 예언의 표징이다.
사무엘하 7:12~16의 예를 보면,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아들에 관해서 약속을 주셨다. 이 예언은 말할 것도 없이 왕위에 있는 다윗을 계승할 솔로몬에 대한 것이다. 더욱이 14절 하반부 같은 것은 솔로몬에게 한정된 것이다. 한편, 히브리 1:5하반절에서는 14절의 상반부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위대한 아들이며, 솔로몬은 그의 예표였다. 솔로몬은 다윗의 다들이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엄청난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다. 하박국 1:5,6과 사도행전 13:41에서도 구약의 이중적 예언 성취를 내다본 신약성경의 권위를 볼 수 있다.
앞산과 뒷산은 시간적 간격이 있다.
선지자의 위치 선지자는 앞산의 정면에서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시간의 전후 관계는 간과되었고,
앞산에 대한 예언과 뒷산에 대한 예언을 겹쳐서 예언했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을 해석할 때 우리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통해 예언 구절이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인지를 파악하되 특별히 예언 당시의 무엇을 가리키며(근접 성취), 멀리는 무엇을 가리키는지(원접 성취)를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발간한 『구약개관(Old Testament Survey)』973쪽에 보면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미래에 대한 예언들은 종종 “선지자적 시각”(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상호 침투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 선지자적 시각 속에서는 가까운 장래의 일과 먼 미래의 일이 서로 엇물려 들어간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에서 스불론과 납달리(앗수르에 점령된 땅의 대표적인 지역들)에 주어진 번영과 기쁨의 메시지는 후에 일어날 일로 옮겨 가며(9:1 MT 8:23, 주: MT = Masoretic Text), 다윗의 보좌에 앉은 “평화의 왕”으로 절정을 맺는다. 그의 통치는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6,7절[MT 5,6절]).”(윌리엄 S. 라솔; 데이비드 앨런 허바드; 프레드릭 윌리엄 부쉬[공저]; 박철현 역, 일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pp. 973~974)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사야 41장은 이중의 성취를 가진다. 다니엘이 헬라의 안티오커스와 종말론적 적그리스도를 겹쳐 보고 있듯이(단 8:9~14). 감람산 강화에서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 파멸과 종말론적 세계 멸망을 같이 보듯이(마 24:15~28), 사도 요한이 먼저는 로마제국을,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종말론적 적그리스도의 권력을 같이 묘사하고 있듯이(계 13장) -그리하여 안티오커스는 종말론적 적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예루살렘 심판은 종말론적 세계 심판의 예표이며, 로마제국은 종말론적 적그리스도 제국의 예표이다- 이사야 41장은 먼저는 동방의 파사를,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쓰임 받을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일으키신 동방의 파사는(사 41장, 45장) 장차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구원(복음으로 얻는 구원)을 위해 동방에서 일으켜 예루살렘에 능히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한 표징이요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많은 성경기자들처럼 고레스(파사) 시대와 종말(End-time)이 함께 섞이는 것으로 본 것이다.
예시적인 나라 파사 제국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동방의 파사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동방에서 일으키사 유대 민족에게 능히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표의 나라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41장과 더불어 파사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45장 말씀을 자세히 상고하면 여실히 드러난다. 먼저 이사야 45장 1~4절을 상고해 보자.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에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는 알지 못하였을 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 45: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해 장차 고레스의 파사 제국을 일으키사 그 나라를 아주 강하고 부한 나라가 되도록 큰 은총을 베푸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능히 해방시킬 수 있도록 나라들을 정복케 하시고, 또 아무도 찾지 못했던 보화와 숨겨진 재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13절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동일한 대상에 관한 예언이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파사 제국을 세워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사 45:13)
초세기의 유대인 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파사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였을 때 바벨론에 있던 다니엘이 이사야서의 본 구절들을 고레스에게 읽어 주어 그를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고레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약 150년이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아시고 선지서에 기록하신 것을 보고 놀라,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파사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에 관해 17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사 45:17)
17절은 파사에 의해 귀환된 이스라엘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며, 영원히 세상에서 수치나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파사왕 고레스에 의해 해방된 이스라엘은 귀환 자체도 충분하지 않았고, 다시 헬라, 시리아, 애굽, 로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환란과 수치와 치욕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예언이 틀렸는가? 그렇지 않다.
분문이 말하는 ‘영원한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레스의 파사 제국은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즉 고레스의 파사 제국은 말세에 등장할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종말의 때에 동방(해 돋는 곳)에서 일으키실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한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즉 구원의 복음을 능히 전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마침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동방의 한 나라 파사 제국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듯이, 마지막 때에도 동방의 어느 한 나라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는 후자의 모형이며, 예표의 나라이다.
이사야 41:25~27은 바로 이 이중적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구절의 완전한 성취는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다. 이 예언은 파사의 고레스 시대에 그 부분적인 성취를 두고 있으며, 그 마지막 성취는 장차 복음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할 동방의 한 나라에 의해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그 동방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 주석가들은 이사야 41:25~27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고레스에 의해 해방될 때 성취된 예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 구절은 당시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할 ‘전령’들에 대한 예언으로서 이미 구약시대에 끝났다는 것이다.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를 무시하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목적을 놓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어디까지나 요한계시록 7:1~8과 병행구절인 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나라를 “해 돋는 곳” 즉 동방에서 일으키시어, 바로 그 동방의 한 나라로부터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도자들을 보내주실 것을 예언한 말씀인 것이다. 결코 고레스 시대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사야 40장부터 계속해서 그 이하의 전 내용은 신약에서는 복음 시대에 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사야 41장과 45장 및 그 이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여러 병행 구절들은 이중의 성취를 가지는 예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예언들은 가까이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출시킬 동방 페르시아에 대한 예언일 뿐 아니라(근접성취), 멀리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영적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능히 복음을 전할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원접성취).
페르시아를 통해 그 부분적 성취를 본 이사야의 예언은 마지막 때에 또 하나의 동방 나라를 통해 완성될 사건의 모형이며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동방의 한 나라를 사용하셨듯이, 마지막 때에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도구로 동방의 한 나라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이중의 성취를 가진다.
만일 우리가 성경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 즉 직접 예언과 예표 예언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사야 41장 25절 이하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를 파사의 고레스라고 해석하고,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들”을 파사의 고레스에 의한 유대인의 바벨론 해방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만 단정해 버리면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고레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닌데 41장 25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점이다.
왜 고레스는 '해 돋는 데'서 오는 자가 아닌가
25절에 의하면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레스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배화교)의 신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다. 고레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릴 때에도 역대하 36:23에 보면 어디까지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 또는 “하늘의 신”이라고 불렀지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난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따르며 예배하는 자를 말한다(창 4:26).
이사야 12:4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고 기록하였고, 64:7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라고 기록하였고, 사도행전 2:21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으며, 9장 14절과 21절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 받았나이다···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기록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성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으며, 로마서 10:13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다.
그러므로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고레스일 수 없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석가 류폴드(H.C. Leupold)는 19세기에 발견된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의 기록에 의거해 고레스가 개종자가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 원통으로부터 우리는 고레스가 자신의 성공(바벨론 정복이나 다른 일들에서)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에게 돌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호르무즈드 라쌈(Hormuzd Rassam)’에 의해서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이 발견되었다. 그 원통은 점토로 된 것으로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발표한 칙령(조서)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인 즉, 바벨론 왕인 나보니더스(Navonidus)와 벨사살 왕이 행한 실책들과 저들이 마르둑(Marduk) 신을 경배하지 아니한 점을 제시한 후, 고레스는 어떻게 마르둑이 자신을 합법적인 통지차로 선택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고레스는 자신의 성공(바벨론 정복이나 다른 일들에서)을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에게 돌렸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그의 칙령이나(에스라 1:1~3) 원통에 기록된 기사는 모두 고레스의 것인데, 성경에는 그가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개종자였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고레스는 다신론적 견지에서 상충되는 진술들을 했던 것이다. 고레스가 공포한 칙령은 느부갓네살이 그 당대에 발표한 것(단 4:1~3)보다 더 진실된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H.C. 류폴드, 이사야주석(하), 크리스챤서적, 1990, pp.768~769)
페르시아왕 고레스(559~530 BC)의 원통(Cyrus Cylinder) 이 실린더의 길이는 약 9인치이고,
거기에는 536 BC에 기록된 고레스의 필적이 있다. 이 필적은 에스라 1:1~3의 내용을 확증해 준다.
고레스는 이교도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신론자였을 뿐 개종자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41장 25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가 고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물에 의해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존 C 윝컴(John C. Whitcomb, Jr)이 쓴 논문『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난 고레스』에서 발췌한 글인데,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비록 고레스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고 그에 관하여 위대한 말들을 하였지만, 참으로 여호와를 믿는 자는 아니었다. 대략 50.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왕의 선포에 응하여 스룹바벨/세스바살(Zerubbabel/Sheshbazzar)과 예수아(Joshua)의 지도 아래 유대로 돌아왔다(스 3:1~2).
에스라 1장의 조서에서 고레스는 “하늘의 신 여호와”를 자신에게 “세상 만국”을 주신 분이요 자신을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을 고레스가 여호와에 의해 “의로” 불리움을 받을 것이며(사 41:25),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41:25), 그가 “의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45:13),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할 것]”이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과 비교할 때, 우리는 쉽게 그가 참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였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여호와께서 친히 고레스에 대하여(사 44:28에서) “나의 목자”(이 호칭은 렘 23장과 겔 34장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신정왕국을 다스릴 왕에 대해 사용되었다)라고 언급하시고, 그리고 45:1에서 실제로 그를 “그의 기름 받은” 자(문자적으로는 “그의 메시야”, 참조, 시 2:2와 단 9:25)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화려한 호칭들을 신정적인 의미(the theocratic sense)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들에서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나오지 않고(참조, 신 18:15, 18), 동방에서(사 41:2), 북방에서(41:25), 그리고 심지어는 “먼 나라”에서(46:11) 올 이방의 정복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고레스에게 특별한 임무를 위임 하신 것은 느부갓네살을 여호와의 “종”(렘 25:9)이라 부르시며 위임하신 것, 다메섹의 무자비한 군주 하사엘을 엘리사를 통하여 “기름 부으시고” 이스라엘에 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행하게 하신 일, 그리고 언젠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적그리스도(슥 11:16)를 세우시는 것과 잘 비교가 될 것이다.
고레스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으며, 그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여 억압 받던 다른 민족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세속 역사의 자료로부터 풍성한 증거가 있다. 고레스 원통에서 이 새로운 정복자는 자신의 바벨론인(人) 신하들에게 베벨론의 신 마르둑이 어떻게 자신을 택하여 세웠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르둑은 “온 나라들을 샅샅이 살피며 기꺼이 (매년 있을 연례 행진에서) 자신(즉, 마르둑)을 앞세우고 진행할 의로운 통치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안샨(Anshan)의 왕 고레스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온 세상의 통치자로 선포하였다… 위대한 주요 그의 백성의 보호자이신 마르둑이 그의[고레스의] 선한 행위들과 그의 바른 마음을 기쁘게 보셨으므로 그를 명하여 자기의 성읍 바벨론으로 행진해 들어가게 하셨다. 그는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고레스를 마치 진정한 친구처럼 자신의 옆에서 진행하게 하셨다… 마르둑은 고레스로 하여금 전쟁도 치르지 않고 자신의 성읍 바벨론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그로써 바벨론을 그 어떤 재난도 당하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즉, 마르둑]을 섬기지 않는 왕 나보니두스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고레스가 실제로는 다신론자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고레스를 분석하며 말씀하신 두 서술로서 잘 확증되는 것 같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사 45:4~5). 그는 여호와를, 이사야 선지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는 후렴구와 같이 반복되는 표현에서 “너는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라는 표현이 지닌 비극적인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구약신학 논문집, 윤영탁 역편,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8, pp.152~154).
고레스는 유일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이었다. 그렇지만 이사야 45장 1절은 그를 가리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메시아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이교도인 고레스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서 고레스에 대한 이같은 과분한 칭호는 이 예언이 가지는 이중의 성취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난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레스는 예표의 왕이었다. 즉 당시에는 왕이 곧 나라와 동일시되는 개념 -왕국- 이었으므로,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는 말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국가적으로 기름 부어 주실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표 예언인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페르시아를 통해 그 부분적 성취를 보았으며, 마지막 때에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볼 것이다. 본문이 예언하는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고레스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도록 장차 동방의 한 나라에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결코 과거에 종결된 예언이 아니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갈 동방의 한 나라에 의해 성취될 예언인 것이다. 27절 하반절에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하셨는데, 앞서 지적했듯이 “기쁜 소식”이란 종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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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 :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칙령(조서)을 발표했었다. 그 칙령이 적힌 점토로 된 원통이 19세기에 ‘호르무즈드 라쌈(Hormuzd Rassam)’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인 즉, 바벨론 왕인 나보니더스(Navonidus)와 벨사살 왕이 행한 실책들과 저들이 마르둑(Marduk) 신을 경배하지 아니한 점을 제시한 후, 고레스는 어떻게 마르둑이 자신을 합법적인 통지차로 선택했는지를 기술한다. 그는 바벨론에서 바른 경배가 회복되도록 조처하고 포로된 신들과 백성들을 각기 그 신전과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는 칙령을 선언한다(에스라 1:1~3, 6:3~5 참조). 이 유물은 성경의 진실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입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을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원통의 글을 제시하며 성경이 실제 있었던 일을 미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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