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의
‘구체적 성취의 때와 방법’을 예언한 계시록 7장 1~8절⑨
2)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는 “해 돋는 데”로 묘사되고 있다. “해 돋는 데”는 흠정역에는 “동방”(from the east)으로 번역하였고, 개역(R.A)에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from the rising of the sun)으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팔레스틴의 동쪽 방향을 가리킨다.
하지만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인 “해 돋는 데”를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 주석가들은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하느냐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계시록에는 상징과 비유로 사용된 용어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한결같이 문자적 해석을 기피하고 있으며 상징적 해석을 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편 84편 11절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본문의 “해 돋는 데”란 “하나님의 방향”을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치는 사역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들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해 돋는 데”라는 말은 참으로 상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본문이 실제로 의도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 동방, 곧 팔레스틴의 동쪽 방향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시 84:11; 말 4:2). 하지만 그냥 ‘해’가 아니라 “해 돋는 데”라는 명사구가 사용될 때는 항상 지리학적으로 “동쪽”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인치는 사역자들의 출처로 묘사되고 있는 “해 돋는 데”라는 말도 예외가 아니다.
만약 “해 돋는 데”를 “하나님의 방향”을 뜻하는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 세심한 주해의 과정을 통해 확립한 본문 이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즉 앞서 이해한 바대로 인치는 사역자가 종말의 때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복음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전도자들이 파송된 나라가 분명히 있을 것인 바, 그 곳이 바로 지리학적으로 팔레스틴의 동쪽 방향인 “해 돋는 데”라는 것이 본문이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 돋는 데”라는 문구는 계시록의 다른 부분들처럼 상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본문이 계시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놓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인 “해 돋는 데”를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인 ‘동방’으로 간주하지 않고 상징적 해석을 취하여서 “하나님의 방향”을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 탄생 당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기사를 주해하면서 그들의 출처인 ‘동방’을 문자적인 동방으로 간주하지 않고 상징적 해석을 취하여서 “하나님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이없는 해석이다. 동방박사들의 고국이 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유럽인지를 알려주는 ‘동방’이라는 말을 그렇게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동방’은 “하나님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학적 동방인 것이다. 문제는 그 ‘동방’이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곧 동방박사들의 고국은 대체 동방의 어느 나라인가 라는 것이 주해상의 문제인 것이다. 본문의 인치는 자의 출처인 “해 돋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다.
인치는 자의 출처인 “해 돋는 데”를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 사용된 “해 돋는 데”라는 명사구는 성경의 모든 용례들처럼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 동방”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곧 그 동방은 마지막 때에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이(롬 11:25~26)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인침을 받도록 복음을 전할 복음 전도자들이 있을 것인 바, 그들의 출처가 바로 지리학적으로 ‘동방’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해 돋는 데”라는 문구가 실제로 의도하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을 통해서도 뒷받침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이방 민족 중에서도 특히 “해 뜨는 곳”, 곧 동방의 어느 한 나라에서 주의 이름이 가장 높임을 받고 크게 될 것이다. 왜? 벨렉의 후손 유대민족과 더불어 천손민족으로 택함을 받은 셈족의 현저한 가지인 욕단의 후손이 동방에서 한 나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창 10:21~30; 11:10~26). 따라서 말세에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쓰임 받을 복음의 나라가 반드시 ‘해 돋는 곳’ 곧 ‘동방’에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주자로 쓰시려고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성민이 동방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해 돋는 데”는 오직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객관적 이유들로 인해 더욱 확실하다.
“해 돋는 데”가 문자적으로 해석 되어야 하는 근거들
첫째, “해 돋는 데”라는 명사구가 요한계시록에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본문 7장에 한 번, 또 16장 12절에 한 번 사용되고 있다. 계시록 16:12에는 한글개역성경에 ‘동방’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이 두 곳이 모두 “아포 아나톨레-스 헬리우-”(απο αντολης ηλιου; from the rising of the sun; 해 돋는 데)라는 말로 같은 말이다. 그런데 계시록 16:12에서는 이 말이 명백히 지리학적 동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아포 아나톨레-스 헬리우-; 해 돋는 데)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계 16:12)
당신은 ‘동방’(해 돋는 데)은 소위 “하나님의 방향”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이기 때문에, 계시록 16:12절 말씀 가운데 있는 동방(해 돋는 데)에서 오는 왕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왕들이라고 해석하겠는가? 그와 같은 해석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동방’(해 돋는 데)이란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을 지칭하고 있으므로 그 동방(해 돋는 데)은 이론의 여지없이 지리학적인 동방(해 돋는 데)인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계시록 16:12에서는 동방(해 돋는 데)이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계시록 7장에서는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겠는가? 즉 사도 요한이 똑같은 말을 계시록 16장에서는 문자적으로 사용했고, 계시록 7장에서는 상징적으로 사용했다고 해석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계시록 16장의 ‘동방’이란 왕들의 출처이며, 계시록 7장의 ‘동방’이란 천사의 출처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동방’이 천사들의 집결 장소라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은 없다. 게다가 계시록 7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인”이란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구원의 보증으로 받는 성령의 인이며, 따라서 그 인치는 사역자로 묘사된 천사는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를 가리키므로 그와 같은 대답은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계시록 7장의 본문 자체에서 “해 돋는 데”(동방)라는 말이 16장의 “해 돋는 데”(동방)라는 말과 다르게 상징적으로 쓰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요구하는 그러한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본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속으로 내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내 생각을 먼저 세워 놓고서 내 편견에 성경을 맞추기 위하여 거기에 적합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인용해 가면서 말씀을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이 “해 돋는 데”(동방)라는 명사구를 분명히 계시록 안에서 문자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6장 12절), 계시록 7장의 “해 돋는 데”(동방)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계시록 7장의 “해 돋는 데”(동방)라는 문구를 해석할 때, 상징적 해석방식을 취하기로 먼저 결정해 놓고, 거기에 적합한 온갖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본문이 의도하는 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시 84:11의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해 돋는 데”(동방)란 “하나님의 방향”을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이다. 그 밖에도 계시록 7장의 “해 돋는 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그릇된 견해들이 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이 동방에서 온다는 예언의 성취(Swete)
② 외경에 메시야가 동방에서 오신다는 사상에서(Lohmeyer)
③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때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았다는 말과 관련해서(Berclay)
④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이 동방에서 옴으로(Wette)
⑤ 복음의 빛이 처음으로 비추어진 기독교 지역이 동쪽이기 때문(Stern)
⑥ 자비의 방위(박윤선)
⑦ 밧모섬에서 동쪽은 유대 나라
이상과 같은 여러 이론들은 본문이 실제로 의도하는 바가 전혀 아니다. 이와 같이 혼란스러우리만큼 다양한 해석들은 본문의 “해 돋는 데(the rising of the sun)”라는 말이 문자적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릇된 가정과 편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본문의 “해 돋는 데”라는 말과 똑같은 명사구가 계시록 16장에서 분명히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 7장에서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로 묘사되고 있는 “해 돋는 데”라는 말이 계시록 16장의 “해 돋는 데”라는 말과는 달리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필연적인 근거도 없다. 그런데 왜 계시록 7장에 사용된 “해 돋는 데”라는 말을 ‘하나님의 방향’을 의미한다고 상징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만일 사도 요한이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가 ‘하나님’임을 의도했다면, 그는 상징적 용어로 “해 돋는 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단지 “해로부터”라는 말로 충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84:11은 ‘해(sun)’가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 돋는 데”는 지리학적 용어로서 ‘해’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해 돋는 데”라는 문구를 오직 문자 자체가 의미하는 바대로 팔레스틴의 동쪽 방향, 곧 ‘동방’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계시록 7장의 “해 돋는 데”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해야 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본문은 “해 돋는 데”라는 말을 상징으로 해석할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둘째, 신·구약에서 “해 돋는 곳(the rising of the sun)”, 또는 ‘동방(the east)’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그 말은 언제나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 동방을 뜻하며, 이 제1차적인 의미를 떠나 “하나님의 방향”을 상징하는 용어로서 그 말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쓰인 용례는 없다. 물론 성경에서 ‘해(sun)’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시 84:11; 말 4:2). 그러나 “해 돋는 데”라는 명사구는 단지 “해 돋는 데”, 곧 ‘동방’을 뜻할 뿐이며, 이 기본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한 용어로서 쓰이지는 않는 것이다. ‘해(sun)’라는 단어와 “해 돋는 데(the rising of the sun)”는 명사구는 의미와 용례가 전혀 다르다. 만일 본문이 인치는 자들의 출처를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라고 표기하지 않고 “해로부터” “내려와서”라고 기록했다면 “하나님의 방향”을 뜻한다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인 “해 돋는 데”(동방)는 결코 영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 동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가 팔레스틴의 서쪽 방향도 아니고, 남쪽 방향도 아니고, 북쪽 방향도 아닌 동쪽 방향, 곧 지리학적 동방이라는 것이다.
셋째, 인치는 사역자의 출처인 본문의 “해 돋는 데”(동방)가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 동방을 뜻한다는 사실은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기본 원리인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명백히 밝혀진다.
이 원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불분명한 구절은 보다 분명한 다른 성경 구절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해석되어야 할 성경 본문을 성경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저저(Auctor Primarius)는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성경의 각 부분은 유기적 통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해석 방법은 우선 병행구조를 찾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선뜻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은 그 짝을 찾아보면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가령 히브리서 7장 20절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읽는 독자는 예수께서 언제 맹세와 함께 제사장이 되었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짝인 시 110:4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 앞에 “여화와는 맹세하고···”란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 7장 20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께서 제사장이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금방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짝을 찾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 방법이다.
그러면 아시아 서쪽의 유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해 돋는 데”(동방)로부터 복음전도자들이 간다는 본문의 짝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짝은 구약성경 이사야 41:25~27; 52:7~10; 46;10~13; 55:1~9이다. 이 말씀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복음을 전할 자들을 “해 돋는 데”(동방)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 7장 1~8절의 예언은 사실상 구약의 대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을 반복한 것이다.
-계 속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좋은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⑪ (0) | 2013.04.24 |
---|---|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⑩ (0) | 2013.04.24 |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⑧ (0) | 2013.04.24 |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⑦ (0) | 2013.04.24 |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민족의 부르심⑥ (0) | 2013.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