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칼럼> 갑자기 넘치는 것보다는 좀 모자란 것이 낫다

수호천사1 2012. 12. 21. 19:55

갑자기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

 

갑자기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란 것이 나을 때도 많은 같다. 넘치다 보면 넘치는 것을 탐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질시와 반복이 생기어 수도 있고 더한 탐욕에 빠지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우리 주변에서는 많이 생기어 나는 것을 흔히 본다. 우리네 생활도 그러한 같다. 남아서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면 믿음 끈이 짧은 나로서는 어떤 지도층 인사라는 분들과 같이 무어라 답변할 구실을 찾지 못하여 명쾌히 명언이나 유명 인사의 말씀도 인용할 줄도 모르고 그러한 달변 가도 아니다.


지난
인니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적이 있다. 갑자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곳에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이 알려지면서 성공적 사례라며 갑자기 여기저기서 돕겠다고 나선다. 어려울 때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곳이다. 이제는 걸어 다닐 만하게 되니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첨에 도움의 손을 내밀 때는 어디 남의 등이나 치려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도 이것 저것 물어도 온다. 그리고 언론도 이러한 일을 널리 알려야 한다며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시작이지 아직 끝이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는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를 않고 공연히 잠을 자고 커가는 아이를 깨워 자랐구나 라며 볶는다면 이는 오히려 그곳의 앞날을 저해하는 이외 아무런 도움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관심 밖에 나서 어려울 때가 편한 같다는 목사님의 말씀이다.


공연히
누가 찾아 온다면 것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여 것인가 걱정되고 한편 기대하며 기다려지고 여자이니 그래도 연지곤지라도 발라야 하고 교통 편이며 식사, 숙소 이외에 신경을 써야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면 오는 대로 기다릴 것도 걱정될 일도 없는데 그리고 기대할 것도 없는데 사람 맘이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공연히 병이 덧난다고 표현한다. 특히 주민들은 자꾸 기대는 것이 허물어 때가 겁이 난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주 조그마하고 것도 없는 기대가 하나가 주어지면 다음에는 것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이곳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해외선교는
교회의 교세 과시용이나 전시용이 되어서는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사회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모든 면에서 엄연히 서로가 다르다. 그들을 우리의 잣대로 재어 보거나 우리를 닮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바탕에 깔리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로 서로의 상이한 점을 점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으로 서로의 신뢰와 사랑이다. 그들의 관습을 제도를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하여주며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 숟가락부터 무리하게 일방적 요구만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신뢰를 쌓아 수가 없다. 그러려면 모든 것이 넘치도록 과한 것보다는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선교에는
다음이 없다. 모든 것은 현장에서 때에 맞추어야만 한다. 여러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등의 많은 배경과 요소에 의하여 절대 모든 현장이 동일할 수도 없다. 결국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은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의 몫이다. 과연 그러면 우리 교회에 진정한 의미의 해외 선교가 이루어 지고 있는지도 돌이켜보아야 한다. 현장에 녹아 들어 그들의 정신세계에 자리 매김 하는 그러한 선교가 이루어 지고 있는지 우리는 과연 그것을 해외선교라고 정의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삯꾼으로서의 선교사가 아닌지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선교사가 아닌지도 스스로를 돌이켜 보자. 처음의 꿈은 원대하여 보기에는 숲이 울창하였지만 자꾸 날이 갈수록 시들어가는 온실 속의 화초는 아닌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어 들판에 이름없는 풀꽃이어야 하거늘.


사람이
사는 사회란 홀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이다. 속에서의 질서를 위하여서는 규범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이러한 규범은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로 제한된 스스로의 굴레를 만든다. 서교란 이런 이질적 규범 속에서 서서히 스며들어야 하는 것으로 기존 세력과 많은 마찰과 시련을 극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미선교지냐 저선교지냐의 한계에 따라 부딪쳐오는 크기가 서로 다를 것이다.


선교란
그러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잠시 접목을 시도하는 점에 불과할 뿐으로 이것이 영속성 없이 순간의 이벤트 성으로 끝이 난다면 이는 아니 시작하는 것만 못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서 파고드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사회에 누를 끼쳐 결국 혼란만을 야기시키고 많은 희생만이 요구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에게 하나의 생활의 본보기를 보이는 생활 속에서 안착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점이 모이어 선이 되고 선이 하나의 형태를 그리며 영역이 되어가고 영역이 뭉치면 하나의 공간으로 공간에 무엇인가 채워지면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연유에서 점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덩어리로 시작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의 점이 다른 점에 무엇인가를 전이되다 보면 덩어리가 된다면 덩어리 속에는 질서를 지킬 규범이 생기게 된다. 규범 속에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의 행위가 선교의 시작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선 시작이 교세의 과시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로 시작된다. 시작은 정말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얼마 가면 침체기에 접어든다. 교회는 현장에 자기를 증명할 많은 물증을 주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선교대국인가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 유학생 아니면 교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도 선교인가 이들의 대부분은 이미 교회를 자국에서도 다니던 사람들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선교활동이 수가 있는가? 다른 마땅한 명칭이 없어 그리 갖다 붙이는 것인가?


우리가
이단이라고 정의하는 천주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지에 들어 더불어 살며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사랑을 실천한다. 그들의 시작은 아주 미약하지만 창대 하여 날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그저 더불어 살아간다. 그럼 우리 개신교계에는 그런 예가 얼마나 되는가?


다음
국어사전을 보면 선교란 종교를 전도하여 널리 알림을 뜻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며 선교 활동의 예로 다음과 같이 글이 덧붙이어 있다. 그는 선교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 그녀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선교에도 힘썼다.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원주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라는 표현이 있다.

|출처/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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