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도시 - 투르판
투르판의 이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각기다른 견해가 있는데 그중에 982-983년에 작가를 알수 없는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호두둘 알렘이라는 책에서 투프칸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지역을 중국어로는 탄한샨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것은 천산(탱으르타그)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이 말이 점차 변해서 투르판이 되었다고 한다고 본는 견해가 있으면 또한 천산이라는 말의 발음이 변해서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텡으리라는 말과 연관이 있는 타프칸를 천산이라고 본다 그래서 타프칸-투프칸-투르판-투르판 의 변화의 과정을 저쳤으며 투르라는 말는 야쿠트어에서 텡으르(하늘,신)이라는 뜻이다. 판이ㅓ 라는 말은 페르시아,소그드과 투르크어로 위대한,넓은,성스러운등의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돌궐어대사전에서는 튑과 안의 결합으로 땅,분지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토번에서 온 것이다라는 견해이다(토번은 티벳의 옛이름이다.)
몽골어로 투르판이라는 말은 과실이 있는 땅이라는 말이다.
고대위구르말로서 테키체(벽장)이이라는 의미의 타르반 혹은 투르반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라는 견해로 고대 삭어에서 위구르어로 변화된 말이다라는 견해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투르판에 대한 말은 낮은 지역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이 지역이 역사에 알려진 것은 전한시대부터 잇다. 중국인들은 한서에 이 때를 차사전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란계로 알려져 있고 차사국의 세력은 천산 남북 멀리 우루무치부근까지 방대한 지역에 미쳤지만 실제로 많은 인구를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사전국을 후견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흉노였다. 흉노는 한 소제(BC 87-74) 때 투르판부근에 4천기의 둔전병을 주둔시키면서 차사국으로부터 조공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끊임없이 대적하고 있었는데 투르판이 서역일대의 세력판도를 가늠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되자 기련장군정광명,도료장군범명우,한증,조국충,전순등의 다섯 장군과 20만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흉노는 정면대결을 파하여 재빨리 철수해 버렸고 고립무원하게 된 차사전국은 하는 수 없이 한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시 차사전국의 수도가 바로 교하성이었고 호수는 7백,인구6,500명 병사 1,865명이었는데 고하성은 더 적을 것이다.
한군이 물러가자 흉노는 다시 세력을 뻗쳐 한에 대적해 왔고 이에 따란 한은 다시 기원전68년 정길을 대장으로 한 원정군을 파견 함락시킨후 주민들이 한나라 기지가 있는 거리로 옮기고 이 지역을 흉노에게 넘기고 말았다. 흉노의 지배 때에 교성은 불투명하지만 후에 반초(32-102년)가 서역을 통치하고 있을 때 투르판의 고창성에 둔전병이 있었고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기지를 두어 간접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부터는 지방왕국이 고창군으로 삼고 태수를 파견 직접통치를 했는데 그후 후량.북량등의 세력이 연이어 부침했다. 북위 때 북량왕의 동생 등 왕족이 투르판에 망명왕국을 건설하였고(442년) 유연,고차등의 후원을 얻은 왕국이 교대로 투르판을 지배핫는데 497년경에 국씨 고창국이 세워져 140년간 번영하게된다. 국씨고창왕국의 수도는 현 고창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의 왕국이나 군의 수도는 확실하지않다. 당나라때에는 고창성 대신에 고하성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실제로 중국이 투르판을 지배하였던 것을 아주 짧은 시기였으며 대부분 흉노(훈)과 돌궐(투르크)와 위구르민족이 투르판의 주인이었다.
당대이전에도 위구르인들이 투르판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고차라고 부른다. 당나라 때에는 이드쿠트(이드:주인, 쿠트:행복,하늘)위구르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독립된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번영하였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시대에 (860-1270)에 실크로드상에 중요한 역할들을 했는데 그것에 중요한 것은 서역의 문화가 대부분 투르판을 통해서 동으로 전달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와 마니고 조로아스터교등의 종교사상이 발전하고 이곳에서 한번 받아들여 진다음에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사료들에서 증명을하고 있다. 중국은 이곳을 서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서쪽의 하나의주라고 하는 명칭으로 이드쿠트왕조를 아래로 보고 부르는 사상이다.
중국의 살료들로부터 지금의 신장지역은 옛날부터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일관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많은 역사의 진실들이 외곡되고 있는데 이 투르판은 더욱더 그러한 면이 짙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는 5개의 도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봄.가을.겨울은 투르판을 여름에는 짐사르(카간의 도시)라고하는 도시를 궁정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위구르인중에 투르판 사람들은 우름치에 가는 것을 '우름치에 내려간다' 라고 하고 우름치에서 투르판에 가는 것을 '투르판에 올라간다'.라고 표현을 한다. 이것은 짐사르가 우름치에서 동쪽으로 천산천지가는 방향으로 조금더동쪽을 가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투르판을 이드쿠트의 오랜 수도이기 때문이다.
투르판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 이전에 중국이 직접 영향을 미친 적을 극히 적고, 중국이 직접 지배하였다 하더라도 짧은 기간 군사기지로 상용되었을 뿐이어서, 문화적인 교류는 오히려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한 교역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인도 내지 이란과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불교사원이나 왕궁건축 등에 서방적인. 특히 인도적인 요소가 재배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중국적 요소가 많아지는 것은 당나라 이후로 생각된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도 인도 이란양식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벽화들은 중국 궁전식이 많은데 벽화가 당통치시대때 다시 그려진 것으로 이해하면 이런 모순이 납득이 된다.
교하고성(야르골)
야르(만나다,교차하다), 골(파이다.우리말의 골과 같은 의미임) 그래서 물들이 교차하는 깊은 골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교하고성은 천연이 요새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냇물을 건너면 30미터나 되는 높다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 절벽을 전체가 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북 1,600미터, 동서330미터의 대지 전체를 파고 뚫어 진흙 건축물로 구축한 것이 바로 교하고성이다. 흙들을 파내서 건축을 하였다고도 한다. 성문에 들어서면 백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뚫려 있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사원지가 있다. 이 사원지 주위에도 많은 사지들이 확인되어 이 구역이 원래 사원구역이었음을 확인된다. 광장북쪽에 있는 중앙사원지는 인도식 사원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80미터,동서40미터의 방형(높이 5미터)으로 들러싸인 거대한 규모인데 남쪽 입구문을 들어서면 광장이 나타나고 좌우로 승방들이 늘어서 있으며 북쪽으로는 3층기단 위에 높이 7미터의 거대한 방형탑이 구축되어 있다. 흙벽돌을 쌓아 방형탑을 세운 것으로 서쪽면에는 아직까지 감실들이 있고 이 안에는 소조불이 부조되어 있는데 파손이 심한 편이다.
담장에 면하여 3미터 사방의 방형 승방들이 줄지어 있는데 입구 문 왼쪽에 기와 무더기가 있다. 이처럼 중앙탑을 중심으로 승방들이 배치된 것은 인도식으로 평가된다.
북쪽사원지역에도 높이 10미터의 거대한 탑이 있는데 기단 네 모퉁이에 4미터 정도의 건축물이 있고 중심탑 주위에도 소탑4군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역시 사라나르불적,나란다탑군 등의 예처럼 중앙탑을 중심으로 소탑들이 배치되는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이 탑군과 나란히 남쪽으로 5미터 담장에 둘러싸인 사원이 있는데 담장을 따라 작은 승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처럼 대개의 사원형식이나 양식은 인도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점은 고창성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창고성
고창고성은 둘레가 5킬로미터 흙성벽 밑부분의 두께가 12미터 정도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최고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는 데 처음에는 더 높았을 것이다. 교하성이 흙자체를 조각한 조각건축인 반면 고창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파손이 보다 심해서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 거의 폐허화된 도시유적이다. 옛 궁성은 고창성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궁성의 북벽이 곧 고창성과 북벽으로 되어있다. 궁성 안에 남아있는 유적으로 본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4층인데 이것은 왕 집무소와 관련있는 궁전건물로 생각된다. 궁성 남벽은 중성의 북쪽벽과 접하고 있고 이 벽과 접하고 있는 부분에 둥근 성채가 남아있다. 서북쪽에는 높이 15미터의 건물이 있는데 카간성벽(왕의 성벽)으로 불리고 있는데 불고사원의 탑같은 기념건축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남모서리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북량 때의 절 건축을 기리는 공덕비여서 이곳이 북량 때의 사원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찰이 445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고창성이 구축된 것은 후한(61년)때이다. 그 이전 전한 때에는 투르판에 차사전국이라는 나라가 번창하고 있었는데 한의 위협 때문에 흉노와 동맹을 맺어 흉노군이 투르판 분지에 주둔하면서 한과 대적하도록 했다. 그래서 한은 기원전 72년인 한 선제2년에 전광명등 다섯 장군과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흉노가 퇴각한 차사전국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당시의 수도는 교하성이었다. 당시의 고창성은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지만 한이 투르판을 점령한 뒤 고창에다 작은 성채를 쌓고 술기교위로 하여금 5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한 이후부터는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성벽을 쌓아 주둔한 곳이라는 뜻에서 '고창벽'이라 했다. 후한서서역전에 전해지고 있다. 고창은 후한 반초장군이 서역을 통치하던 때에 크게 번성했고,5호16국시절에는 하서의 전량이 군을 창설하였다. 그 후 5세기(442-450)부터는 고창왕으로 부상했는데 북위 효문제 때는 중국인 국씨 왕조가 개국하게 되었다. 이른바 중국인 국씨고창국이라 하는 나라이다. 이 때가 고창국으로서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이고 고창고성도 최절정기였다. 이 당시의 고창성이 장려하고 호화로운 성곽도시였다는 것은 삼장법사전등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어서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현장법사가 고창성에 온 것은 630년 2월겨으로 그후 약 1개월 정도 머물렀다.
고창성은 흙벽돌로 구축한 성곽도시로서 둘레 1킬로미터의 궁전지 주위로 많은 사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가까이에 있는 거대한 절터가 가장 유명하다. 사원의 기본구도는 인도식이고 인도식 복발탑과 거대한 방형탑, 이 주위의 승방 등 일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편이다. 인도식 복발탑은 산치탑과 비슷한 모양으로 복원해 놓았고 방형탑도 일부 복원하여 원형을 다소 유지하고 있다. 방형탑에는 서면 감실 속에 여러 구의 부조상과 벽호광배일부가 남아 있어서 원래의 위용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고창을 방문한 첫날 왕성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후 바로 여 도장에 머물렀다는 그 절이 바로 이 일이 아닐까...주로도 넓고 왕궁도 장려하며 건물지들고 거대하게 보이는 등 고창성은 현재 유지만 보아서도 당시의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이 보인다.
신라고증 혜초도 이곳을 지나갔었다.
아스타나고분군
아스타나고분군은 고창국시대와 당나라구족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수천의 분묘들이 동서5킬로,남북2킬로의 사막에 산재하고 있다. 아스타나는 휴식과 영원한 잠이라는 뜻을 가진 위구르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라는 뜻이다. 영원한 잠을 자고 있던 기의 수백기의 고분들은 1916년 스타인등 서구열강의 학자들이 발굴을 시도한 이래 간헐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다. 1953년 이래 현재까지 중국정부에 의해 14회의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4백기의 고분이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를 복원하는데 최적의 유물들이다. 이기에서 나온 문서중에슨 서진태시9년(273년)의 것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당력13년(778년)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약 5백년간에 걸쳐 조성된 역사깊은 묘군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외부에 보여주는 고분들은 땅 아래로 45도 각도로 땅을 파고 고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중앙에는 관이 있고 관을 중심으로 3면에는 부장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곳에서 발굴된 관용문서들 중에 여행통행증등을 불수 있다. 과거에 이러한 통행증이 없으면 여행이 허가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부역신고서, 교통사고배사청구서,계약서(소작.임대차.고용.매매.교환)등의 문서들이 있는데 교통사고배상청구서에는 어떤 사람이 우마차를 몰고가다가 사람을 치었는데 이것에 대한 배상청구서이다.
또한 변방군여에 대한 탄원서도 발견되고 있다.
1973년에 발굴에 의해서 출토된 장웅의 묘지는 국씨고창국의 멸망에 얽히 사실들을 잘 알려주고 있는데 장웅의 고모가 국왕 국문태의 모친이므로 국왕과 고종사촌간이고 그의 아내 국씨 또한 왕실의 공주로 짐작이 되는데, 묘지의 내용을 보면 장웅은 고창국의 대장군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고종사촌인 국왕 국문태의 정치적 판단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자주 간언하였지만 거절 되었고 그래서 화병이 도져 50세세인 631년에 병사하였다. 이때는 현장법사가 고창에 머물고 있었던 때인데 국왕과 의형제를 맺을 때 입회한 장태비는 장웅의 고모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장웅의 부인은 27세였는데 그후 55년가 수절하면서 당으로부터 영안태랑군으로 책봉을 받고 귀족으로 살다가 측천무후시대인 688년에 82세의 나이도 돌아갔다고 한다. 그 직후 아들 장회석은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묘(아스타나206)에 합장(689)하였는데 이를 증명하듯이 발굴품도 고창국 말기의 유물과 당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은 투르판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이들은 회화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회화로서는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점을 복희여와도와 위기사녀도, 그리고 무악도같은 병풍화의 묘벽실에 그린 벽화들이다. 이 외에도 각종 직물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베제크릭석굴(천불동)
원래 이름은 베젝릭천불동이다. 베젝릭(아름답게 장신된)이라는 뜻이다.
57개의 석굴안에는 아름다운 소조조각과 호화로운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서늘한 굴에서 수도하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굴실안에는 관리가 허술하여 엉성한 생각이 든다.
4호굴(지금20호)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어떤 테마를 가지고 있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화로서 모두 전생의 석가부처가 과거불에거 공양을 올려 미래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윤색해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은 20세기 초까지 그대로 있었으나(그냥 방치되었 거거 무슬림들이 난도질을 했다.) 독일인 그륜베델,영국의 르콕,일본의 오오타니,러시아의 올젠버그,영국의 스타인등이 차례로 드나 들면서 벽화와 소조불상들을 본국으로 가지고 가서 현재는 세계각처에 유랑하고 있다. 이곳에서 떼어온 백화단집 네 점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벽화들을 복원하는 연구가 국립박물관 안병찬교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9호굴(지금27호) 4호굴과 흡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독일을 르콕에 의해서 베를린박물관에 복원지열되었으나 2차세계대전때에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처럼 베제크릴석굴은 현재 엉망이 없지만 우리의 토함산 석굴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보여주고 있어서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 석굴은 굴실을 뚫어서 만든 것도 있고 흙벽돌을 쌓아 전실과 본실을 일부 또는 전부 조성한 굴실도 상당수가 있다. 이런 것은 인도 간다라의 부트카라 제2사원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부트카라사원은 돌벽돌로 쌓았지만 베제크릭석굴은 흙벽돌로 바꾸었고 우리의 토함산석굴은 판석으로 축조한 것이다. 이는 축조석굴사원의 변천과 발절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 높이 평가 된다.그러므로 토함산석굴과 잘 조화가 된다.
생각하기(1)
중국에서는 서구열강들이 많은 중국의 유물을 빼 돌렸다고 하는데 신장의 유적과 유물들은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으며 유물에 대한 가치 마져도 사실 모르고 있었던 시기에 서구의 의식있는 학자들이 이 잊혀진 실크로드상의 유적들을 목숨을 걸수 찾아 나서면서 잊혀진 역사들이 하나하나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많은 유물 특히 불교유물등은 무슬림들에 의해서 난도질 되었으며 근대사에서 문화혁명때에 무신론주의자들인 홍위병들이 다시 무참하게 나도질을 하므로서 얼마만한 유물들이 소실 되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나마 서구학자들이 가지고 갔던 유물들은 학술적인 진실과 가치가 밝혀지면서 세상에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사실 외면되었으며 도굴꾼정도로 이야기가 되고 있다.
돈황에서도 많은 고문서들이 서양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에 막고굴을 관리하던 승려들의 탐욕과 무식이 이러한 것들을 서양인들을 손으로 해석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을 손으로 넘겨준 것에 대해서 지금은 양심적인 평가가 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청말의 어지러운 중국의 정치상황 그리고 국공전쟁,소련과의 갈등,먹고 입는 문제로 최근까지 싸워왔던 중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 가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어쩌면 서구열강들의 연구가 시작되자 중국의 학자들이 그것을 기본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소공탑
소공탑은 어민탑.보은탑이라고도 한다. 현지 위구르인들을 이곳을 투르판탑이라고 한다. 1778년에 건축하였다. 이 탑은 신장 최대의 고대탑이며 중국에서 유일한 고유의 건축품격의 고대탐이다. 아래는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주형이며 높이는 37미터. 아래직경이 10미터이고 벽돌로 쌓아졌으며 15종의 기하도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탑의 중간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창문이 14개가 있다. 탑 입구에 석비가 세워져 있는에 윗면에는 한자와 위구르문자로 이 탑의 연유가 기술 되어 있다. 이 탑은 투르판군왕 술라이만이 아버지 이민의 준가르귀족반란(준가르국과의 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중 세운 혁혁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축한 것이다. 이 탑 밑에는 투르판최대의 모스크가 있다. 탑과 모스크가 하나로 되어 았다. 모스크는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는 전당이 있고 몇천명이 예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무슬림들은 매주와 절기마다. 이곳에서 대 집회를 연다.
이것은 신장에서 몇 안되는 이슬람건축물이다....
카르즈(카알징)
카르즈와 만리장성.경향대운하는 중국의 고대 3대공사에 속한다. 투르판의 카르즈는 수천갈래에 달하며 전체의 길이는 5천킬로미터에 이른다. 구조는 대체로 4부분으로, 수직으로 뚫어진 우물과 지하수로 지면의 수로와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투르판분지의 불쪽 보그다산과 서부의 카라우청산에서 봄과 여름에 대량의 눈이 녹아 흐러 계곡의 자갈사막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산의 각도를 이용한 진기한 방법을 창조해내서 카르즈를 만들었으며 건조한 더운기후에 대량의 수분이 증발을 하는데 이 물을 지하로 흐르게 해서 관개농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딩호
투르판분지의 낮은 곳에 위치하며 투르판시내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동서의 길이가 40킬로이며 남북으로는 8킬로,면적은 152만평만미터이다. 가장 낮은 곳은 마이너스152.43이다(해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을 사해로 마이너스391이며 이곳은 두 번째로 낮은 곳이다. 이전에는 이 호수의 1천배가량이 되는 담수호였다고 한다. 지금의 아이딩호수는 서남부의 낮은 호수이외에 대부분이 마르고 주름잡힌 듯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 소금 결정체가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현지의 위구르족에 의해서 월광호라고 이름을 지어졌다.
우름치에서 투르판으로 가는 도중에 염호가 있다. 이 염호는 중국의 14억인구가 일년동안 먹기에 충분한 소금이 있다. 이 소금은 요오드가 없어서 지금은 요오드를 첨가해서 가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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