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도시 - 옌지/쿠챠/카쉬카르/예켄
실크로드의 도시 - 옌지(카라샤르)
바인골린주에 속한 옌지회족자치현이다. 이곳에 현을 세우면서 고대에 아기니왕조의 이름이었던 옌지를 현의 이름으로 체택을 했다.
카라세헤르라는 이름은 카라와 세헤르(도시)라는 말의 합성이다. 여기에서 카라는 원래 위구르어에서 검은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또한 카라는 위대한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카라세헤르는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몽골차가타이시대에 이곳에 마가세르라는 군대가 주둔하였다. 군대가 주둔하면서 이곳의 이름을 카르세르라고 불렀으며 위구르어로 카라세헤르로 부그게 되었다는 견해가있다.
실크로드의 도시 - 쿠챠(쿠처)
쿠차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지역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에 대한 많은 견해들이 있다.
1)중국어사료에스는 구스라는 말을 kjwitsi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것이 쿠차라는 말과 비슷하다라고 하는 견해이다. 서양의 학자들고 이것을 kuci로 쿠차의 옛이름으로 본다. 이것은 토흐라부족의 이름으로 중국인들을 월씨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구스라는 말은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후에 산스크리트어의 이름으로 쿠샨이라는 이름인데 이것은 kusana이며 고대 그리이스어로는 kosana,페르시아오로는kusan으로 불렸으며 kusan은 토흐라어의 다른 방언으로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학자중에 한사람은 kusan는 고대 쿠차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퀴센-쿠차는 두 개의 말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것이 티벳어로는 guzan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퀴산(kusan-u는 위로 읽음) 서로 다른 민족들이 서로 다르게 발음을 하고 있는데 후에 kuqar에서 ri는 구대 퀴센어로 도시라는 의미로서 쿠차시가 되는 것이다.
2)쿠차라는 이름은 퀴센인들의 악(흰색)이라는 성으로 kutsi는 "흰색빛을 가진" 이라는의미이다. 이것에 대한 증거를 일본인 학자가 발견한 유물에서 puapa 혹은 buapa(u는 위로 읽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고대 토흐라부족의 언어로서 금꽃이라는 의 이것은 왕의 관직을 금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퀴센어에서 이것이 악(흰색)이라는 성이라는 것이 수나라역사에서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쿠차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아직 일치되지 않은 의견이 있다.
쿠차의 역사는 불명확하지만 기원전 1,2세기에는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고 있다. 한은 쿠차의 동쪽 50-60킬로 정도 떨어진 오루성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실크로드가 열리게되었다.
기원전65년 오손(우이순)으로 시집간 공주의 딸과 혼인한 쿠차왕 강빈은 1년동안 장안에서 체재하면서 한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한이 멸망하자 쿠차는 흉노와 제휴, 카쉬카르까지 속국으로 만들 만큼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나 후한 명제(73년)때 반초장군이 쿠차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게된다. 그러나 반초가 죽은 지 4년만에 107년에는 서역도호부가 폐지되고 다시 독립왕국으로 성립된다. 그후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여광장군과 쿠차왕은 일대접전을 벌였으나 7만 대 70만이라는 수적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만다. 여광은 낙타2만,말1만,곡예.기술사등 전리품을 가지고 하려하게 귀국을 하다가 전진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서회랑에서 후량국을 세운다. 돈황백마탑에서 말했듯이 구마라십은 중국불교계을 혁신한 인물로 중국사상사를 바뀌게 한 인물이다.
그 후 당은 다시 서역을 평정한 후 이곳 쿠차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 전지역을 호령하게 된다. 고구려유장 고선지장군도 이 쿠차를 중심으로 할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구려장군으로 망명한 고사계장군의 아들인데 쿠차의 안서도호부에서 장교로 복무.부도호까지 승진하고 747년 길기트원정을 떠나 이 일대를 평정한 후 안서도호로 승진하였으니, 서역일대는 물론 먼 서방제국도 그의 위명에 놀랐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후예 고선지와 혜초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방들은 장려하다"--현장법사
이날의 대도성 주위가 17,18리라고 현장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성을 8킬로미터 정도의 거대한 성곽도시였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당시 인구8만 남짓에 가람 1백여소, 승려 5천명이었다고 하니 사막도시로스는 대단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한줌을 흙으로 변해 있다.
신라승 혜초는 인도를 다녀오면서 쿠차를 들렸다. "카쉬카르에서 한 달을 가면 쿠차(쿠샨-구스)에 도달한다. 안서대도호부로 중국군대가 대대적으로 집결된 것이다. 쿠차국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불교가 유행하고 있다. 고기.파.부추 등을 먹으며 중국승려들은 대승불교를 믿는다."
여기에서 보시다시피 혜초가 보았던 쿠차성은 당시만 하더라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불교사원도 번영일로에 있었다.
현장은 또"큰성 서문 밖 길 가 좌우에 입불이 서있는데 높이가 90여척이나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가 어딘지 조차도 모른다. 이 입불상에서 5년마다 한 번씩 열린 일체평등의 대범회인 무차대회는 굉장히 유명하다. 위로 왕에서부터 아래로 병사,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십일 동안 개계를 지키고 설법을 듣고 경을 받는 일에 여념없이 지냈다고 한 사실로 보아 이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상상이된다.
후에는 9세기에 카쉬카르를 중심으로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점차 쿠차왕국도 이슬람을 받아 들이게 되면서 모든 시스템이 이슬람으로 되어버렸다.
쿠차의 가장 유명한 승려는 돈황의 백마탑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구마라쉽이라는 걸출한 인물이다.
키질석굴(크즐천불동-붉은천불동)
무자트강이 도도히 흐르고 이 북안에 깎아지른 절벽이 연이어 있는데 2킬로미터 절벽에 걸쳐 뚫려있는 수백 개의 굴들이 바로 키질석굴이다. 현재 2백36개의 굴이 확인되었지만 더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굴은 인적이 드문 벽지에 있는 탓인지 회교도들의 파괴는 그리 심하지 않다. 그러나 소련,독일,일본인들이 이곳에 벽화를 본국으로 가지고 갔다. 3세기에 만들어진 키질 최고의 17굴에서 10세기의 석굴에 이르기까지 벽화와 불교미술들로 가득찬 키질석굴은 대승소승불교의 불교미술에 인도.이란.중국적요를 조화시켜 가장 서역적으로 만든 특징있는 미술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오타니가 가지고 온 설굴의 벽화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도시 - 카쉬카르
케시케르라는 이름은 고대에 빌라르사군이라고 하며 이것은 돌과 벽돌로 장식한 큰 도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이것은 9세기에 와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당나라시대에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케시케르라(kashghar)는 카시(kash)와 가르(ghar)이라는 단어로 구성이 되었다. 카시라는 말은 카시티시라(옥)이라는 말과 가리(ghari) 즉 고대 상어로 지역, 국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옥이 많이 나는 곳 이라는 의미가 된다. 중국어 표기의 (kashi 카스)라는 말은 카시커얼(중국어 표기)의 줄임말이다.
실크로드의 도시 - 예켄
케쉬케르주의 현의 이름이며 하나의 강의 이름이다. 이 이름의 원래이름은 야르켄드로 후에 예켄으로 되었다. 이 이름을 많은 학자들이 카라한왕조때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되 견해라고 본다. 예켄의 중국어 이름의 사쳐라는 이름은 고대에 suakiwo였으며 sarki,sarko혹은 sake,saka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 것은 지금의 타시코르간주변에 sariko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다. 야르켄드이 곳은 중국어로는 루어치양으로 이곳이 루어의 고대의 발은 yer혹은 yar에 가깝고 창은 kancd에 가까운 발음이다. 이 곳은 기원전에 있던 것으로 야르륵 세헤르(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도시.혹은 친구들이 있는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아마니사한과 12무캄
아마니사한은 예켄왕조의 술탄 압두리시트의 왕비로 위구르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스스로 음악를 좋아 했다. 그는 그동안의 위구르인들이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모으기 시작하여서 이것을 근거로 위구르 클래식음악이 '위구르 12무캄'이라는 위구르 특유의 음악의 장르를 연다..
위구르인들은 고대로 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 하고 즐기는 민족이다.
고대로부터 있었던 음악들을 모아서 음악체계를 형성한 것은 후대에 위구르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위구르 음악에는 현대 오케스트라을 연상케하는 다양한 종류의 악기들이 있다. 이러한 악기들은 페르시아와 인도,그리이스,중국 등의 악기들과도 흡사한데 여기에는 많은 문화의 교류로 인해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12무캄은 위구르 음악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갖는다.
12무캄은 12명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위구르전체를 대표하는 12무캄이 있고 각 도시에 그 도시에 12무캄이 존재한다.
몇년 전 중앙대 음대 교수 중의 한분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차와 버스만을 타고 터어키와 이란고원을 지나 파미르를 넘어 카쉬카르를 거쳐서 우름치에 오면서 한국의 음악의 뿌리는 찾아 보려했다. 그는 위구르음악을 들으면서 우리의 굿거리장단과 위구르음악의 기본 장단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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