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지

[스크랩] 실크로드의 도시 - 돈황

수호천사1 2011. 8. 25. 15:49

실크로드의 도시 - 돈황

 

 

돈황이 중국의 사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111년으로 한나라 무제가 무위.장액.주천.돈황 등 하서사군을 설치하면서부터 이다. 이전에는 흉노(훈)가 살고있었다. 이 지역은 월지.강등 다양한 족속들이 뒤섞여 살았지만 흉노가 이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중국 변방지역을 끊임없이 침공하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이에 위청 곽거병, 이광리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진압하게 하고 여기에 만리장성과 진관을 설치한다. 돈황은 당시 서역도호부가 설치됐던 이 지역의 중심지로 크게 성황을 누린 오아시스도시였다. 5세기 초에 서량과 북량의 전쟁때 폐허가 되었지만 북위,서위,수,당을 거치면서 더욱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당대에는 오르콘위구르제국이 840년 분열이 되면서 5개이상으로 분열이 되는데 몽골초원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위구르제국은 이곳에 겐주위구르왕조을 세운다.


이후에 이들은 중국에게 점점 동화되어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막고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366년 낙준이라는 스님이 명사산에서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굴을 뚫기 시작하여 그 후 북위, 수 당을 거치면서 1천여 개의 굴이 개착돼 서역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겨지게되었다.


이 석굴은 현재 막고굴이라고 부른다.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명사산은 사막보다 높고, 이 높은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을 조성하고 승방을 만들어 예배와 수도를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명사산은 20-30킬로미터 길게 뻗어 있는 황량하고 적막한 모래 언덕이다. "ㅅ가면이 모래언덕으로, 산등이 칼날같아 올라가면 울리는 소리가 나는데 발로 밟으며 허물어지고 바람이 불면 원래 모습대로 된다."이 말은 실제로 명사산에 올라가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명사산이라는 말 자체가 "모래가 울리는 산"인 것 처럼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들린다고 한다.


이 명사산의 동면 절벽에 단애면에는 당초 1천여개의 굴을 뚫었지만 현재는 492개의 석굴만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고 이가다. 그러나 한 석굴을 몇 개로 나누고 있으므로 이 숫자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들 석굴은 2개의 군으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복합굴인 승려굴이고, 둘째는 단독굴인 예배굴이다. 즉 승원굴은 전실,주실 등 예배굴과 측실이 좌우로 딸려 있어서 스님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한 복합굴인데 268굴이나 285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배굴은 불보살에게 예배하는 것이 주목적인 이른바 탑주가 있는 경우와 동형 천장이 있는 경우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이 석굴들은 뚫은 사람이나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어서 모름지기 세계예술의 보고로 널이 알려지고 있다.


돈황석굴은 왕모래와 진흙 등과 섞어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은 형편이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별화를 그렸고, 공간에 따라 강바닥에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했다. 흙으로 만든 소상은 나무골재에 풀새끼를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를 삼베나 모래 등과 섞어 형상을 만들고, 이를 백토로 마감한 뒤 색채나 금박을 입혀 아름다운 상으로 만든 것으로 이른바 채소(색채소묘)라 부른다. 이들 소조작품은 현재 2, 415구가 현존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파손된 것과 도굴해 간 것 까지 합치면 가히 부지기수라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돈황석굴을 채소(색채소묘)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이보다 유명한 것은 벽화이다. 현존하는 벽화만 떼어 백을 만든다면 5미터 높이의 벽면을 25킬로미터가 전개할 수 있다. 이 어머어마한 양이 우선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그보다 전 석굴벽면을 현란하 무비하고 호화찬란하게 장식한 존상도,불전도,본생도,변상도 그리고 각종 공양자상이나 조상연기그림 등이 유명하다.


막고굴 17번 굴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발견한 고문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젼된다.


막고굴은 영국의 스타인과 프랑스의 펠리오,독일학자,소련학자,일본의 오타니등이 경쟁적으로 고문을 헐값에 사갔다...

 

옥문관


옥문관은 한4군을 설치하고 이후에 서역과 공식적인 비단의 교역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우리가 생각할때는 장안에서 로마까지 대상단이 비단을 싣고 길고 험난한 길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의 장안에서는 비단을 이곳 돈황에 가져오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그러면 서역의 대상단들은 현금혹은 물물 교환할 물건과 옥등을 가지고 옥문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단이 도착하면 이곳에서 비단과 옥이 거레가 이루어 지고 서로의 갈기를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측에서 보면 이곳은 옥이 들어오는 문 이라고 하여서 옥문관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교만성


교만성은 청 건륭제때 건설 되었다. 황제가 꿈 속에서 본 모양대로 건축하게 했는데 시공을 담당한 관리들이 사복을 채우고 제대로 공사를 하지를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는 일설이 있다 그러나 축성공사도중 청치사황의 변동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는지 건설 후 폐허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


백마탑


돈황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도식의 한 탑이 있는데 이곳은 사람이나 어떤 신앙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이 말의 주인은 구마라십이라는 쿠챠왕국(퀴센)의 승려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계통의 사람이고 어머니가 위구르인이라고 전한다.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 준 전진왕 부견은 서역 정토군을 떠난 보낼 때 특별히 대장군 여광에게 쿠챠국을 복속시키면 구마라십을모시고 곧바로 장안으로 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구마라십은 쿠챠왕실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간다라에 가서 불고를 깊이 연구하고 돌아온 당대의 명승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어학에 능통하여 역경(불경을 번역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같은 그의 재능은 중국에서 빛을 낼 수가 있었다. 구마라십은 여광과 함께 중국에 왔으나 전진이 이미 멸망해 버린 뒤었고 그래서 대장군 여광이 하서회랑에서 후랸을 세우자 잠시 여광 밑에 머물렀다가 후진왕 요흥의 초청으로 역경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고 그의 생애에 경론 70여부 300여권을 번역하여 일약 남북조 불교를 중국땅에 반석처럼 다져놓은 장본인이자 제1불교황금기를 개척한 불세출을 명승이다.


그의 원명은 카무라치와 라고 하며 그의 역경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금강경이다... 그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돈황을 거쳤으며 돈황에서 자신이 아끼는 말인 백마가 죽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기념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백마탑이다...

 

명사산(월아천)


명사산은 동서40킬로미터, 남북20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산인데 해발 1,650미터의 높이에 월아천 주위 50-60미터 정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철에는 산에서 무너져내리는 모래소리가 영락없는 천둥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명사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산위에서 월아천을 내려다 보면 한눈에 들어 온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하고 있어서 월아천이라고 이름하였다.


돈황부근 사람들에게는 단오날에 이 산에 올라 액을 막기 위하여 모래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유행했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미끄러지므로 이 때 울려퍼지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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