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지

[스크랩] 실크로드의 도시 - 우룸치(우루무치)

수호천사1 2011. 8. 25. 15:49

실크로드의 도시 - 우름치(우루무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의 이름으로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전에 위륌치는 몽골어의 uluji(위뤼지)라고 발음이 되면 아름다운목장(초원)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고대위구르어의 oronmtai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는 견해가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손으로 쓰여진 책중에 삭어의 문서에서 irumcina(위림치나)라는 이름이 나온다. 925년 호텐에서 삭어의 동일한 위림치나라는 곳이 있었다. 이것은 iru과 cina 두 개가 합성이 되어서 된 이름이다. iru는 삭어에서 "가지 숲",cina는 "우거진"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위륌치라는 말은 호텐삭어에서 우거진숲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1955년10월1일에 정식으로 자치구로 정해졌다. 신장이라는 말은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역사에 신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1884년11월17일이다. 이전에는 서역이라고 했는데 서역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역의 광의적 의미로는 신장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인디스탄,페르시아,유럽,중아아시아,신장,감숙,티벳 등 서안을 중심으로 서쪽의 총칭을 서역이라고 한다. 협의적인 의미로는 지금의 신장을 의미한다.


서역이라는 말은 기원전104년에 나타난다. 기원전에 보여지는 서역이라는 말은 광의적인 의미로 서쪽의 국가들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 이전에 신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는 36개국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실크로드상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 했었다. 투르판국,옌지국,퀴센국,호텐국,석국(타쉬켄트),사마르칸트 등의 도시국가들을 말한다.


  신장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1884년의 일인데 청나라 시대에 야쿱백이라는 코켄트사람이 카쉬카르에 와서 무슬림정권을 세우고 전신장을 통일한다. 이 때에 야쿱백정권은 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도 호락호락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은 야쿱백과 화친을 할 것을 제의하고 쿠물(하미)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당시에 아쿱백은 청의 말을 그대로 믿고 협상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군사들에게는 발포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그 때를 기회로 무장이 해체된 야쿱백진영을 유린하여 기습공격을 가하여 삽시간에 하미,우름치,투르판,다반청등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에 야쿱백은 갑자기 사망을 하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충격으로 노졸증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라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밝혀진 바는 아니다.


야쿱백은 총한번도 쏘아 보지 못하고 청군이 진격을 하는 것을 돕는 처지가 되었다. 청군은 신장의 중요도시에 진격을 해서 야쿱백진영은 항복을 하게 된다.


신장이라는 말은 청나라가 서몽골왕국(갈단왕조-준가르왕조-천산북부)를 몰아내고 다시 천산남부의 카쉬카르에 진격을 하여서 호자정권과 맞붙어서 호자정권은 무참하게 패하고 만다. 호자형제는 인도로 도망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청나라는 북으로는 준가르로부터 남으로는 호자형제의 정권으로 부터 천산남북을 빼앗고 나서 이곳의 이름은 '세로운 강역'이라는 의미로 신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신장에서 천산의 남쪽은 회장(무슬림들의 땅),북쪽은 준장(준가르의 땅)이라고 불렀다가 후에 천산을 중심으로 남장,북장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우름치는 이드쿠트위구르(869-1270)왕조 시대에는 투르판에 속해 있었다. 이는 고창국시대를 말한다. 우름치는 이 처럼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었던 작은 목장지역에 불과 하였다.


고대의 신장의 중심은 투르판.쿠차.카쉬카르등이고 근대에 와서는 구소련과의 국경지역이었던 이리(굴자)가 중심이 되었다.


1736년 청나라 시대에는 디화라고 불렀다. 이것은 비문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름치는 고대시대로부터 우름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현지인들을 정부의 명칭과 관계없이 우름치로 부르고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곳에 쟁탈전을 벌이면서 이곳의 지역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1945년 우름치를 시로 승격을 시킨다.

공산당이 신중국을 세우고(1949년), 1955년10월1일 신장자치구로 명명을 하면서 우름치는 서북의 창으로 발전을 하게된다. 이곳은 모택동의 동생인 모택민이 국민당에 억류되어 사망을 당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신장대학에서 연안로정거장 중간에 팔로군사무소가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모택민이 집무를 했던 곳이다.


현재의 우름치는 인구2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을 하였다. 우름치는 중앙아시아를 연격하는 실크로드상의 물류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는데 소련과 중앙아시아.파키스탄등의 나라들과 터어키등지로 직접 육로를 통해서 무역이 진행되고 있다.

 
우름치는 공산당이 신중국을 세우고 나서 많은 중국인들이 신장건설이라는 목적으로 신장에 늘어왔으면 병단(유사시에는 군인,평상시에는 농민)들이 대규모로 들어와서 신장에서 농사가 가능한 지역에는 모두 들어가 있다. 정부의 공식인구조사에서 신장의 위구르인구는 7백만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300만정도가 된다고 비공식적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2천만이 넘는 인구중에서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40퍼센트라고 하는데 실제로 군인경찰과 상인들을 포함하면 지금은 위구르인구를 완전히 초과한다.


신장의 대부분 도시들 중심에서 가장 큰 건물과 직장은 군부대이다. 이처럼 아직도 경찰력과 군사력으로 통제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름치에서 중국인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위구르인들이 10퍼센트정도가 된다. 위구르인들을 남문을 중심으로 남쪽에 살고 있다. 남문중국은행 옆에 남문모스크가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남쪽에 산시항과 뒹쾨위릭(이교도-얼따오치아오)와 연안로,단결로,경마장들의 지역들에 위구르인들이 집중해서 살고 있다.


신장의 각 대학들은 우구르민족을 쿼터제로 뽑고 있다. 신장대학의 경우 50퍼세트는 위구르인으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소수민족우대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각 대학에서는 위구르인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신장대학은 중심대학으로 위구르문학과 위구르역사연구방면에 참고서적들과 우수한 교수진들이 있다. 인문학원내에는 신장민족민속박물관이 있다.


우름치는 천산의 북록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보고타봉과 가깝고 준가르분지에 접해 있다. 그러므로 우름치의 부근에는 천연 목장들이 있다. 천산천지,남산목장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우름치시내에는 홍산(우름치가 건설되고 인공으로 나무를 심고 녹지를 조성한 공원)에서는 우름치시내를 모두다 볼수가 있으며 홍산 정상에 우름치의 발전상을 사진으로 전시 해놓은 전시관이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은 중국에서도 독특한 전시물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미이라등이 현실감있게 관람할 수 있으며 실크로드상의 문화와 종교등을 한눈으로 볼수 있게 되어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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