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민족 - 흉노(훈)
흉노는 하나의 민족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연맹의 성격에 가깝다. 그래서 흉노를 하나의 민족개념으로 생각을 하면 많은 오해를 낳게 된다.
흉노는 시베리아 고아시아족과 우랄족 등 비 알타이계 부족들도 다소 있으나 대개 투르크.몽골.만주-퉁구즈.한족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연합체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투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가 건설되기 이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다.
초기에 흉노제국의 통치영역은 호르콘(오르혼)강,셀렝가강 유역과 외튀켄평원 그리고 오르도수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강과 스르(시르)강 유역과 카스키 해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들로써 그들의 적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말경으로서 중국의 전국시대와 때를 같이한다. 흉노가 중국을 크게 위협하는 고로 진나라는 기원 221년 만리장성을 구축하기에 이른렀다. 흉노는 다른 북방민족들과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흉노는 연.진.한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황제가 구축한 만리장성은 감숙성의 린타오에서 요동에 이른 것으로 약5천킬로미터에 달한다.
진의 만리장성 구축과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흉노 등 북방세력이 잠시 쇠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묵돌(튀멘-'일만'이라는 뚱)의 등장으로 흉노는 세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묵돌(튀멘)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텡그르쿠트:탱그르-하늘.천자. 쿠트-하늘의 절대적인)라는 공식적인 왕명을 가짐으로서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묵돌은 자신의 아버지 튀멘이 후궁 연씨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는 것에 반발하여 10만기병대를 출동시켜 구테타를 일으킴으로서 정권을 탈취하였다. 선우가 된 묵돌은 정권을 강화한 다음에 먼저 서쪽으로 천산산맥과 감숙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후에 동쪽으로 만주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국을 명말시키므로서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북방을 장악한 묵돌은 중국까지 공격을 했고 기원전 201-199년 중국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전쟁있었으나(백등산전투) 마침내 묵돌은 한 고조를 격파하고 승리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198년 한의 신하 유경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화친조약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흉노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킨다.
2. 비단, 곡물 등 매년 조공을 바친다.
3. 흉노와 한은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한다.
4. 만리장성을 경계로 상호 침입을 중지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화친조약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군사적인 우위에 있는 흉노에게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영역 확장을 위한 묵돌의 군사 원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정복 사업의 결과로 묵돌의 통치 시대에 제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만주 지방, 서쪽으로 아랄 해, 북쪽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쉬강 유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위수지방과 티벡고원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로서 약 26개의 종족과 국가를 복속하여 통치권에 두었다.
이처럼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 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제국을 발전시켰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를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이치이(오랑케로 오랑케를 무찌른다)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노선이 되었다.
기원전174년 묵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상선우가 등극을 하였다. 노상은 부친의 정책에 따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복속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키고, 중국 도성 장안 근교까지 진군하는 등 중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압력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화친조약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침입이 잦아지자 중국 조정 내에 흉노 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노상선우를 이은 군신선우 때에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은 흉노제국 내의 민족 분열과 흉노족 지도층 내부 분열을 조장해 흉노세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렇게 흉노제국이 약화되자 후한의 광무제는 지난 60여년간 지속된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국가 경제의 주요 재원이 되는 비단의 수출 증대를 위해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흉노 정벌이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이리하여 한무제는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이 후에 제국 내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흉노는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되었고, 비단길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경제가 궁핍하게 됨으로써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마침내 흉노는 기원 후 155년 다른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면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이 시작되어 5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분열시대 2세기-6세기고 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으나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었다.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다. 최조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구체적인 실정에 대해서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수세기 후에 등장한 투르트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조직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를 흉노의 전통이 후대 유목제민족제국 내에서 전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흉노의 언어는 알타이어이며 지도층이 사용한 어어는 기원 후 3세기 북위(타부가치)에서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궐어의 원시어이었으리라 추정된다.
흉노의 사회에서 혼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간의 문제였으며 형이나 동생이 죽었을 때 형수나 계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제도가 존재했다.
흉노의 신앙체계에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탱그르쿠트)는 천신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국의 황제를 천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흉노의 사상에서 전달되었다고 한다. 흉노의 사회는 샤머니즘의 흔적도 많이 나타나는데 의술을 행하는 무당을 박시(Bakshi)라고 불렀다.
훈제국
흉노제국이 선비족과 중국의 연합군에 의해서 AD155년에 멸망한 후에 흉노의 지도층은 세력을 잃고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 서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서진하여 지금의 카자크스탄과 남시베리아에 이르러 이 지역에서 우랄계 부족들을 비롯한 선주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중국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갈고 닦은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선주족들을 장앙하고 규합하여 새롭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 후 흉노족들을 계속 서진하여 우랄 산맥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게르만계 고투족들과 접하게 되었다. 약 2세기 동안 우랄계 부족들과 고트족등과의 접촉을 통해서 혼혈이 이루어 지면서 알타이계 흉노족들은 특히 언어적으로 우랄화가 되었다.
흉노제국이 분열이 된 후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 온 훈족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가능성이 많아.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 '흉hyung'이라는 말과 '노'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생긴 말고 훈 또는 흉족을 경멸시 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진 조어이다. 즉 흉노인들을 자신들이 흉 혹은 훈이라고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 조로 이 말에 노예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이다. .
훈제국은 기마를 사용한 기동력과 기마전술을 가지고 동고트를 공격하고 게르만미족의 대이동이 있게 했으며 훈족에게 밀린 서고트의 로마 유입으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급격히 분열된다.
북흉노제국(AD155)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중국과 함께 일조을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은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의 권력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기원 후 400년경에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민족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이라고도 불리워 지는 연연이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연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연연은 타부가치tabach즉 북위(A3D86-543)의 창립자인 탁발규(AD386-409)의 치세 기간동안 역사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그 무렵 사륜이라는 지휘한이 나타나 카라샤르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캉키-위구르민족의 조상이라고부른다.)를 명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중국에 이웃한 이 강력한 세로운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안되어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는 흉노와 관련이 있다고 하고 어떤 자료들은 동쪽의 미개인인 동호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위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왕조 자신들의 조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정치적인 목적의 허풍과 과장이 다분이 첨가되어 있으리라 보여진다. 연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명인 것 같다. 연연은 '꿈틀거리는 벌레'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두 개가 합성된 이름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우이순),고차(캉키-위구르의 조상) 등 소왕국들과 동맹을 관계를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연연의 통치가가 사망하지만 연연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결국 북위 왕조는 연연을 패배시키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수동적으로 연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에 북위는 연연보다 먼저 534년 멸망을 하게 된다.
한편 연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는 돌궐족이 6세기초에 연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위의 도움을 받았으리는 추측을 하게 된다. 연연 내 돌궐족의 세력이 강해지자 돌궐의 부족장이었던 부민은 연연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자 이를 구실로 552년 북위의 계승자 서위(535-554)이 도움을 받아 연연을 공격하여 격퇴를 시킨다. 이 때 연연의 통치자는 자실을 하고 곧 이어 연연은 내부 분열로 패망하게 된다. 555년 돌궐은 연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천명의 연연인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써 연연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탁발혹은 토파, 타브가치라고도 불리는데 2세기에서 6세기말로 이어지는 중국역사의 암흑기에 출현하여 북중국을 통치한 투르크계 국가이다. 이들은 연연과 계속적으로 대립하였는데 후에 지도층이 성씨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는 등 철처히 중국화됨으러써 중국에 동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북위의 통치자들은 국사적 귀족으로 남아있으면서 모든 행정을 중국인들에게 맡겼었다. 북위는 불교를 수용하고 국교화했으며 중국에 불교를 토착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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