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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종교와 사상-제4부 중국 전통철학의 절정기 ― 성리학의 성립과 굴절

수호천사1 2011. 7. 9. 17:59

중국의 종교와 사상

 

제 4 부 중국 전통철학의 절정기 ― 성리학의 성립과 굴절

당?송 교체기는 중국의 전통사회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의 건국까지의 과정에서 되풀이된 전쟁과 혼란은 기 존 정치?경제?사회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맞게 하였다. 이에 따라 사상과 학술에도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북송 중기 의 유학부흥운동을 통해 성리학이 나온다. 북송 초기 황제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문교진흥책과 이에 따른 과거제도의 시행, 그리 고 유?불?도 삼교 존중정책을 폈다. 특히 과거 합격자를 대폭 늘리는 한편 마지막 시험을 황제 앞에서 직접 치르게 함으로써 최종 결정권을 확립하였다.

불교와 도교는 송나라에서도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한차례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새롭게 정비된 과거제도를 통해 대량으로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반이단 투쟁을 통해 이론적인 극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을 낳게 되면서 다시금 유학의 시대로 접어든다.

제1장 북송시대 주자학의 태동

북송시대에는 수당시대까지의 사상문화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유학부흥운동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유학부흥에 나섰던 유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이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들의 사상적 연원을 찾아 나서면서 당시 유학의 학풍도 함께 비판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는 한유 등이 위 진 이래의 사장학을 비판하면서 고문으로 돌아가 성인의 도리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학 방면에서는 비판의식이 결여된 ???사기??? 류의 역사 서술을 배격하고 ???춘추???의 전통을 이어받아 도리에 입각해서 시비를 가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학 방면에 서는 문자의 뜻풀이에만 매달린 한당시대의 훈고학을 비판하며 의리적 해석을 주장하고 경전 자체를 의심하는 ‘의경’의 태도까지 주장하 였다.

유학부흥운동은 ‘도통론’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유학 내부의 정통론과 맞물려 있으며, 외부로는 이단론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하여 외 래사상이나 문화를 단호히 비판하고, 초현세적이고 부도덕한 사상에 대해 철저한 도덕주의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의 ‘북송오자’를 든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지어 우주발생론적 사고를 주장 하였고, 장재는 기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특히 정이의 리본체론,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을 나누어 보는 심성론은 뒷날 주자학을 집대 성한 주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

제2장 주자학의 성립과 전개

주희는 정이의 리본체론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주돈이와 장재의 기본체론을 자신의 사상 체계에 맞춰 해석하면서 북송 성리학을 집대성하였 다. 주자학의 이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존재계 일반을 리라는 무형의 형이상자를 가지고 보면서 ‘리일분수설’을 통해서 리 와 만물의 절대적 관계를 확립하였다. 둘째, 심통성정론과 본연?기질지성론을 통해 전개한 심성론이다. 본체의 리가 인간 본성의 도덕성을 보증하는 근거가 되어 ‘존천리 거인욕’하자는 가치론으로 완성된다. 셋째,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공부론이다. 그는 공부를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나누어 제시한 뒤 경공부와 치지공부를 여기에다 연결시켰다. 그는 지와 행의 관계를 호발 병진하는 관계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지선행후를 동시에 말한다. 그리하여 도문학공부를 말하면서 격물치지설을 끌어오고 있다.

주희는 당시 사상가들과 3차례 논쟁을 펼치면서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첫째 논쟁은 장식과 마음의 존양공부에 대해서 토론한 ‘중화논쟁 ’이다. 장식은 마음공부가 이발할 때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주자는 경을 통한 미발의 심체공부를 마음공부의 본령으로 여겼다. 둘째 논쟁은 진량과 함께 도덕과 공리, 왕도와 패도의 문제를 따진 ‘왕패논쟁’이다. 셋째는 육구연과 존덕성?도문학의 공부 문제에 대해 토론 한 ‘아호논쟁’이다. 육구연이 존덕성 공부만을 주장했다면, 주희는 존덕성 공부와 도문학 공부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주자학은 원 나라의 주륙화회론을 거쳐 명나라에 오면서 관학의 지위에 오르게 된 뒤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절대적 지위를 누린다.

제3장 양명학의 등장과 분화

명대에 들어서면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양명학이 나온다. 양명학을 발생시킨 사회적 배경으로는 명나라 중기 이후 중국 사회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자본주의 맹아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이 현상은 남쪽 해안지방 상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봉건도덕에 매몰된 인 간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까지도 긍정하는 주체적 자아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조응하면서 일어난 사상이 양명학이다 . 양명학은 주자학의 기본 틀인 리 중심의 학문을 심(心) 중심의 학문으로 전환시킨 데에 가장 두드러진 이론적 특징이 있다. 곧 주자학에 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주의 객관적 법칙을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시킴으로써 개체 중심, 인간 중심의 사상을 열어간 것이다.

양명학의 중심 이론으로는 주자학의 성즉리설을 비판한 심즉리설이 있다. 양명학에서는 마음속에 만물의 이치가 다 들어있다고 보았으며, 그 마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닌 보편적인 마음인 동시에 바로 내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주자학에서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 로 나누어 인심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일원적 입장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왕수인이 말 한 마음의 본체는 양지이다. 양지란 맹자가 말한 양지양능을 가리킨다. 하지만 양지양능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만물의 존재 근거이 므로 인간 주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일체가 된다. 왕수인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지행합일론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주자학의 지선 행후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주자학의 격물치지설 대신 치양지설을 제시하였고, 구체적 실천을 통해 자신의 양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경우 치양지란 마 음과 이치가 하나로 합일된 경지로서 인간 자신이 타고난 도덕적 자각을 완성한 상태이다. 왕수인 생전에 제자들과 나누었던 사구교 논쟁에 서 양명학 분화의 싹을 보였다. 이것을 빌미로 왕수인이 죽은 뒤 양명학은 현성파라 불리는 양명좌파, 수증파라고 불린 정통파, 귀적파로 불린 양명우파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수증파와 귀적파는 주자학으로 귀결되었으며 현성파가 양명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 새로운 흐름 을 만들어 갔다.

제4장 명말청초 사상의 등장

명나라 말기부터 새로운 사상경향인 실학과 고증학이 출현한다. 만주족인 청나라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은 한족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었다. 그 결과 지배적 위치에 있던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한 반성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상을 열어간 대표적인 학자가 황종희, 왕부지, 고염무이다. 황종희는 양명우파의 입장에서 주자학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하고 마음을 본체로 삼았으며, 마음을 기로 규정하였다. 그가 주장 한 경세치용사상은 맹자의 민본사상을 계승 발전하여 계몽주의적 입장을 나타냈다. 학문적으로는 경학을 중심에 두고 사학을 그 보조 수단 으로 삼아 학문의 현실적 효용을 정치를 통해 실현해 보고자 하였다.

왕부지는 북송시대 장재의 사상을 이어받아 기철학을 발전시키며, 기론을 바탕으로 실재론의 입장에서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구체적이며 표현 가능한 기로 도를 설명하여 정신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사물이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리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 에 종속시키는 기일원론을 펼쳤다. 고염무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지나치게 공소했던 학풍을 비판하고 한당시기 훈고학풍을 이어받아 실사구 시적인 고증학을 전개한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청대 고증학을 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 사학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수필체에 가까 운 그의 저서 ???일지록???에는 경학에 중심을 두면서도 지리?역사?풍속?제도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고증과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이 밖에도 음운학과 문자학에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을 보였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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