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통일과 북한선교 (이광순)

수호천사1 2009. 8. 4. 22:47

통일과 북한선교

이광순


1.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북한 선교의 문제가 나오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한다. 세계 선교를 외치면서도 반도의 반쪽인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은 한국 교회 모두에게 큰 부담으로 짓누르고 있다. 더욱이 북한에 대한 선교의 길이 극도로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되는 현 상황이 한국 교회에게는 한층 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길은 막혀 있는데 선교는 해야 한다는 것은 통일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을 하고 싶은 열망도 크고 또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이미 민족적 합의를 이루고 있지만 통일은 그러한 바램과 열망에도 불구하고 요원한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을 위한 노력을 중단할 수도 없는 것이 또한 한민족에게는 큰 고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는 통일과 북한 선교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토론해봄으로써 무력감과 자괴감을 떨치고 일어나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려는 취지에서 이러한 자리를 마련한 듯하다. 또한 통일과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킴으로써 현실성있는 방안들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도 깔려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어떤 획기적인 안을 제시하기보다는 통일과 북한 선교에 대해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전향적으로 사고하고 전망하면서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통일과 북한 선교에 관한 논의는 자칫 허황된 공론이 될 소지가 크다. 우선 통일은 우리 민족의 바램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주변국들, 예컨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그 외의 많은 나라들의 영향력이 통일에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에는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는 성급한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북한이 경제난으로 궁지에 빠지자 북한의 갑작스런 체제 붕괴를 막고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들을 논하는 데 열을 올린 적도 있다. 하지만 정작 통일의 가망은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 논의는 그것이 연방제 통일안이든 3단계 통일안이든 아니면 흡수 통일안이든 간에 현실과는 유리된 탁상 이론에 불과하게 되었다.

* 이 글은 '98.2.18-20 총회신학교육부 주최 제19회 전국신학교수 세미나에서 발제한 것이다.


북한 선교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남한의 기독교인, 즉 교회는 북한 선교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한 쪽을 보면, 북한 선교는 불가능하며, 다른 쪽을 보면, 북한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이 두 벽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다. 북쪽을 보면, 북한 사회는 극도로 폐쇄되어 있고 또 베일에 싸여 있어서 그 실정에 대해 제한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다. 또한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선교 전략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방법인 선교사가 직접 현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제한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여건에 비추어서 판단해보면 사실상 북한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도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 상황에서 막연하게 북한 선교를 논의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허황된 것이 되기 싶상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북한 선교 전략이나 방법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거나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설사 북한 선교의 길이 막혀 있고 또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남한의 기독교인으로서는 민족의 반쪽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맡기신 책임이자 의무이다. 말하자면 북한 선교는 한국 교회가 불가능 가운데서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한 사명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연구는 한국 교회가 통일과 북한 선교의 불가능의 벽을 넘어 서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한국 교회가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한반도의 통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축적된 정보와 지식이 상당 정도 있다. 문제는 북한 사회의 실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된 정보와 지식의 한계 안에서 통일과 북한 선교를 가로 막거나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검토해보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도 이 주제에 관한 하나의 현실적인 접근일 것이다. 이 글은 비중을 북한 선교에 두고 통일과 북한 선교의 관련성에 대해 먼저 논의함으로써 이 주제를 둘러싼 쟁점이 무엇이며 또한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겠다. 다음으로는 북한 선교를 가로막거나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짚어볼 것이다. 그 다음에 한국 교회가 북한 선교를 위해 지금까지 시도해왔고 또 진행 중인 사업들이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여건 하에서 통일을 앞당기고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검토한다. 끝으로 북한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가 현 상황에서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논한다.

2. 하나님의 통일, 하나님의 북한 선교

북한 선교와 통일에 관한 논의는 1980년대 말의 소련의 해체와 동구 공산권의 붕괴, 그 중에서도 독일의 통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분출되었다가 그 열기가 점차 식어갔다. 그 후 1994년 7월의 김 일성 사망과 동시에 이에 관한 들뜬 논쟁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1995년의 해방 희년을 맞이하면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열의에 넘친 논의는 의견 갈등과 대립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값진 결실들을 맺었다. 그 중에서도 북한 선교와 통일을 둘러싼 중요한 쟁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현실 활용이 가능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가능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타진되었다는 점이다.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논제들을 비롯해서 북한 선교의 개념 정의에 관한 논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통일에 관한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각 시나리오에 따른 북한 선교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하거나 통일 후의 토지 소유권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같은 논의들까지도 있었다. 이러한 중구난방의 논의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년 간의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한 시도들을 보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무력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통일과 북한 선교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통일이며, 하나님의 북한 선교이다.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서 기인한다면, 분단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다. 한국 전쟁이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면 인간의 권력욕과 야욕이 한반도의 분단을 50여년이나 지속시킨 셈이다. 북한 공산 체제의 종교 탄압과 말살 정책이 북한 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다. 인간의 과오로 인해 한반도는 두 동강으로 분단되고 북한 교회는 허물어졌다. 한국 교회는 이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애썼으며 북한에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기도와 노고가 50여년이나 계속되었다. 이토록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단은 지속되고 북한 교회는 황폐한 상태에 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통일과 북한 선교는 먼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통일과 북한 선교의 첫 걸음은 하나님의 통일이며 하나님의 북한 선교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오만과 야심 그리고 허영을 버리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적인 계획과 정책 그리고 합리적 계산에 입각해서 통일과 북한 선교를 한답시고 동분서주했다. 진정으로 남과 북이 화해하고 평화하려고 하기보다는, 남과 북이 한 형제자매로서 얼싸안고 춤추고 입맞추기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 통일을 원하고 북한 선교를 하는 척 해왔지도 모른다. 통일과 북한 선교는 공동 선언문을 만들고 공표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그럴듯하게 포장된 회담이니 만남이니 선언이니 하는 데 집착해왔다. 반세기의 인간적인 시행착오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통일과 북한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며, 우리는 단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역사에 참여하고 일구어나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통일과 북한 선교는 한민족 자신의 힘으로도, 미국의 힘을 빌어서도, 북한 당국을 설득해서 외교와 교류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으로도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일이며 하나님의 선교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3. 통일과 북한 선교의 관계성

통일과 북한 선교는 시각에 따라서 동일한 것일 수 있으며, 전혀 별개의 것일 수도 있다. 먼저 북한 선교에 대한 개념 정의를 보면, 보혁 양 진영에 따라 달리 내려지고 있다. 북한 선교와 통일 논의에서 1980년대의 주된 쟁점은 보혁 양자의 시각 차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의 통일 논의를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는 진보적인 교회 진영은 북한 선교는 곧 통일이라는 논리를 펴왔다. 선교는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기치 아래 남과 북이 화해하고 평화를 이룩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북한에 실현되는 것인 분단의 극복이 바로 선교라는 주장이다; 통일은 북한을 억압과 압제 그리고 빈곤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통일은 정의와 평화를 북한에서 실현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그곳에 펼쳐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이 곧 북한 선교이다. 이러한 논리에 바탕해서 진보 진영의 교회들은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재건하는 것보다는 분단을 극복하고 남과 북이 화해하는 것이 북한 선교의 지름길이며 더 시급한 과제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를테면 이 입장은 통일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통일 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보수 교회 진영은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북한 선교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선교의 중심적인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실제 적용 가능성을 무시한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복음 전파 지상주의라는 비판과 아울러 호응을 얻는 데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북한과 자유로운 왕래의 길이 막혀 있었고 심지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남한의 실정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북한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또한 북한의 종교 탄압 정책과 주체 사상의 지배 그리고 김 일성 숭배는 중국이나 여타의 통로를 통해 복음을 몰래 숨겨서 들여가는 밀수 선교조차도 실제로 불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설사 복음을 북한에 들여보낸다고 하더라도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을 뿐더러 전하는 측과 전해 받는 측의 양자 모두가 크나 큰 위험 부담을 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월남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로 주창된 허물어진 북한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선교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 선교의 개념에 관한 양 진영의 논쟁 입지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보 교회의 통일과 선교를 동일시하는 견해의 입지가 약화되는 반면에 보수 교회의 북한 복음화 입장이 활기를 띠게 되는 국면의 전환이 일어났다. 동구권이 붕괴되고 중국 및 소련이 개방되고 공식적인 수교가 되면서 중국 선교 등의 예전에 닫혔던 선교의 문이 열렸다. 이는 보수 교회들이 지향하던 북한 선교가 단순한 망상이나 몽상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공공연히 북한에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교회를 건축할 수는 없지만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의 주변국들을 통해 북한에 복음을 들여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제 교류 등의 남북 간의 민간 차원의 접촉이 빈번해짐으로써 남한의 교회가 북한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들이 다양해지고 또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보수 교회의 민족 복음화가 단순한 선교 구호가 아니라 가능한 선교 목표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 통일의 열광과 감격이 식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속출했다. 이것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데 한몫을 했다. 통일을 이룩하면 민족 화합이 뒤따를 것이며 이는 곧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선교가 완성된다는 진보적인 교회들의 북한 선교론이 오히려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통일이 민족 문제가 해결되는 끝이 아니라 그 시작이라는 인식이 싹트게 되었다. 통일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고 완성된 끝이 아니라 이러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통일은 선교의 완성이나 끝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작이라는 견해가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선교는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북한은 지리적으로는 남한과 접해 있지만 지난 50여년 동안 물리적인 거리 이상으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땅끝 지역이었다. 또한 공산화 이전에는 동양에서 기독교 선교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던 지역이었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복음이 피폐화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 선교는 복음의 불모지인 북한, 곧 땅끝에 다시 복음을 전하고 동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선교를 민족 복음화로 정의한다면, 과연 통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되는가는 북한 선교의 방법과 전략을 결정하는 주된 변수가 될 것이다. 통일이 북한 선교가 아니라 통일은 북한 선교에 영향을 미치는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통일은 북한의 개방이나 교류의 증대 또는 북한 체제의 변동 등과 비숫하거나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부차적인 논점은 통일이 우선이냐 북한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허물어졌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민족 복음화가 우선이냐는 조금은 진부한 논란이 있다. 북한 선교와 통일을 동일시할 경우에는 당연히 통일을 통해 민족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없이 분단의 극복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을 민족 복음화의 한 여건으로 간주한다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통일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통일이 되거나 안되거나 또는 북한이 개방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또는 더욱 구체적으로 김 정일 체제가 공고하게 되거나 붕괴되거나 상관없이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단지 통일 여부를 비롯한 개방 또는 체제 변동 등의 한반도의 변화와 주변국들의 역학적 변동에 따라 북한 선교의 방법과 전략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4. 북한 선교의 기본 방향

북한 선교 전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인 한반도의 남북 관계는 김 일성 사망 이후에 급속한 변동을 겪고 있다: 통일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북한이 점차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남북 간에 공식 또는 비공식의 남북 교류가 증대되고 있다; 경수로 협상과 타결 그리고 식량 원조와 경제 협력 등의 명목으로 미국과 일본 등의 주변국의 개입이 증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의 인접 국가들을 통해 북한과 왕래도 점차 빈번해지고 또 쉬워지고 있다; 미국의 교포들의 북한 방문이 크게 늘어났으며, 남한의 민간인들의 합법적인 북한 방문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95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 원조를 할 정도로 남북 간의 물적 교역이 커졌다; 1997년에는 나진 선봉 지역에 남한의 근로자들이 상주하고, 상주 근로자들과 남한의 가족들 간에 전화와 서신 왕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97년에는 남한 교회가 북한 동포들에게 식량을 직접 보낼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북한 선교에 대해 구체적인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던 한국 교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한국 교회는 북한 선교란 막연히 통일이 되면 그때에나 할 어떤 먼 훗날의 일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북한 선교는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하는 당면한 사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북한 선교에 관한 집중적인 토론과 논의들을 하면서 적어도 몇 가지 원론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 열의가 갑작스레 북한으로 쏠리면서 북한 선교를 둘러싸고 교파, 교단, 교회 간의 경쟁이 은연중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의 열강들이 다투어 식민지 땅따먹기 쟁탈전을 벌이듯이 북한이라는 최후의 선교지를 두고 한국 교회는 서로 경쟁을 벌이는 국면에 들어섰다. 이미 해외 선교, 그 중에서도 중국과 러시아 선교에서 이러한 한국 교회 간의 과열된 선교 경쟁의 부작용들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북한 선교에서는 중국과 러시아 선교의 전철을 밟지않아야 한다는 자성과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만약 각 교파들과 각 교단들 그리고 각 교회들이 제각기 북한 선교를 하게 된다면 결국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열을 새로이 개척된 선교지인 북한에서도 재현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또한 북한 당국과 동포들에게 한국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우려와 자성은 각개전투식의 북한 선교를 지양하고, 대신에 한국 교회가 일치해서 민족 복음화를 수행함으로써 북한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한국 교회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통합적이고 일치된 북한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창구와 조직이 필요하다. 북한 선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초창기부터 단일화된 조직체의 필요성이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교파와 교단 그리고 각 선교 단체들 간의 주도권 다툼과 이해 관계의 차이로 인해 필요성만이 되풀이해서 강조되었을 뿐이며 구체적인 실천 행위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만약 공식적인 협조와 공조 체제를 이룩하는 것이 어렵다면 초교파적인 북한 선교 협의체라도 구성해서 각 교파와 교단의 북한 선교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체는 북한 선교에서 교회의 일치된 견해와 행동을 보일 수 있는 조정 기구이자 대표 기구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공동의 선교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거나 공동의 선교 활동을 펼칠 수도 있다. 현재 초교파적 초교단적 공식적인 협의 기구들이 몇몇 설립되어 활동 중에 있지만 한국 교회의 저력을 결집해서 결속을 시키는 데는 힘이 부족하다. 이러한 기구들이 명실공히 공조 기구로서 활약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들이 이기심이나 명예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협력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북한 선교는 북한 교회를 수혜자로 삼고 남한 교회가 '베푸는' 방식의 선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제안이 설득력있다. 북한 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북한 교회 자체이어야지 남한 교회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세계 선교 역사를 보면 서구 교회들이 비서구 지역에 선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범했던 오류가 바로 서구 교회가 주체가 되어 서구 중심의 선교를 펼침으로써 비서구 지역에서 기독교의 토착화를 저해하고 더 나아가 토착민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토착 교회의 자생력을 손상시켰다. 북한 선교에서도 남한 교회가 경제력과 체제 우위론을 앞세워서 북한의 정치 사회 및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복음을 이식시키려고 한다면 서구 교회와 마찬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북한의 복음화는 북한 동포에게' 맡긴다는 원칙 하에 한국 교회는 북한에 복음의 씨가 다시 뿌려져서 싹이 트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만약 한국 교회가 북한에 들어가 주도적으로 선교를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밭주인은 구경을 하고 있는데 이웃이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북한 선교는 물량 공세의 물질 중심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북한 동포들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남한 교회가 그러한 동포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들의 굶주림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대신에 '영혼의 구원을 바라라' '주 안에서 평안하라'고 설교한다면 얼마나 비현실적인 독선인가. 그러나 선교는 물질적인 구제나 빈곤의 완화가 아니라 복음의 나눔이다. 북한 동포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시키는 데 남한 교회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 원조가 우선되거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북한 선교에서 경제 원조는 어디까지나 복음 전파를 도우는 보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략상 경제 원조를 선교보다 먼저할 수도 있고 또 비중을 더 둘 수도 있지만 경제적 도움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선교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만으로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고 병을 고쳐주고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질적인 나눔이 곧 선교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북한 선교를 위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는 통일 비용에 해당한다. 한반도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상태에서 통일을 했던 독일이 엄청난 통일 비용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들에 봉착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국가가 통일에 대비해서 소요될 경비들을 미리 비축해야 하듯이 교회도 통일에 대비한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것은 통일이 되면 이른바 북한의 교회를 재건할 기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가 통일에 대비해서 자금을 마련하고 또 북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제반 비용을 저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북한 선교를 위해서는 그러한 장기적인 자금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 선교를 위한 자금 조성은 단기와 장기로 구분해서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통일이 언제 될 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금을 적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물론 먼 앞날에 소요될 비용을 지금부터 저축해야 하지만 현재를 위해 쓸 비용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기적인 북한 선교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탈북자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북한 선교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이를 위한 자금을 교회가 부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통일 비용이라는 거창한 명분에 집착해서 장기적인 자금 마련에만 노력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북한 선교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보다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5. 북한 선교에서 봉착할 문제들

북한 선교는 통일 논의와 분리해서 논할 수 없는 논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신빙성이 박약한 정보와 제한된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통일 논의들은 대체로 근거가 빈약한 추측들로 이루져 있을 뿐이다. 미확인의 추측들은 논의만 분분할 뿐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들을 분석하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작업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통일과 북한 선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점검하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신빙성있는 논의가 될 수 있다. 물론 통일이 되는 시기와 방식에 따라 예상되는 문제들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가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논의를 열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통일을 앞두고 북한 선교에서 한국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인 면에서 북한의 주민들이 인권의 부재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국제인권위원회 등의 국제 기구들의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정치적인 인권 탄압이 극도에 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북한 체제의 반종교성과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이다. 세째는 북한의 경제난이다. 이는 1995년 여름의 홍수와 뒤이은 한발로 인한 피해의 결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북한의 식량난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전반의 파탄에 관한 문제이다. 네째는 날로 증가하는 북한 난민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현재에는 탈북자들의 문제이지만 북한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할 것인가에 따라 탈북자의 형태가 아니라 난민의 형태로 대규모의 이주민이 발생할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공의가 넘쳐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1980년의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 대회에서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고]라는 주제와 1989년의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주제에서 보여주었던 '주여 지금 여기에'는 저발전 국가들에서 자행되던 정치적 억압과 압제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선교는 단순히 영혼의 구원을 통한 영원한 삶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전파라는 기본 원칙에 근거해서 인간의 삶의 상황을 더 낫게 개선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성을 말살하거나 왜곡시키는 삶의 상황, 이를테면 정치 및 사회적인 억압과 빈곤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한 보고들은 충격적이다. 체제 초창기부터 주기적으로 자행된 정치적 숙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반 국민에 대한 억압은 일상 생활에 대한 통제를 비롯해서 양심의 자유는 고사하고라도 신체의 자유까지도 부재한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범 수용소의 끔찍한 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식량 암거래자를 300명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등은 현재 북한에는 정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선교는 억눌리고 매인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구속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북한 선교는 북한 동포들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한국 교회가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래서 북한 당국과 갈등을 빚을 수 있다. 그래서 보수 진영의 교회들은 북한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북한 동포의 인권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왔다. 또한 북한 인권의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며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의 선교적 관심은 오로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부차적인 인권의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은연중에 견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교섭이나 협상에서 나은 입지를 구축하고 또 좀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북한 인권을 소홀히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동포의 인권을 거론하지 않고 북한 선교를 논하고 이웃 사랑을 말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나라의 임하심을 바란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복음은 현실의 상황에 무관심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에' 정의가 실현되고 사랑이 넘쳐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북한 동포가 불의 속에서 참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국제적인 인권 단체들이나 제3자에게 그 일을 떠맡기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적 복음의 기본 정신인 정의와 사랑에 어긋난다. 억울하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정의가 실현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면 북한 선교에서 동포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설사 그로 인해 북한 당국의 비위를 거슬러서 손해를 보더라도 또한 설사 내보일 만한 성과가 없더라도 한국 교회는 암담한 처지에 사는 동포들에게 복음과 아울러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전하는 북한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북한 체제는 기독교에 대해 초기의 탄압책과 이어지는 말살책 그리고 최근의 유화책으로 종교 정책을 변화시켜왔다. 봉수 교회를 비롯해서 천주교회와 불교의 사찰 등을 공개하고 종교인들을 초청해서 우대함으로써 북한 당국은 자신들이 종교에 대해 친화적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북한 체제는 반종교적이다. 공산주의 자체가 유물론에 입각해서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라는 점에서 북한 체제가 반종교적일 뿐 아니라 신격화된 김 일성-김 정일 부자에 대한 전인적인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는 주체 사상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반종교적이다. 특히 북한은 주체 사상을 손상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든 기독교든 아니면 개방 이데올로기든 상관없이 적대적이고 배척한다. 북한은 이미 구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로 해체되고 동구 공산국가들이 자본주의와 기독교에 의해 맥없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을 통해 체제의 문제점들을 노출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북한으로서는 과거와 같이 반종교성을 노골적으로 표면화시킬 수 없었으며 서방 세계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북한은 반종교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뒤에 감추어두고 있으며, 대신에 주체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단속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처하고 있다. 북한이 겉으로는 기독교 선교를 반대하지 않는 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종교의 자유가 금지되어 있으며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북한 동포는 공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북한 선교 역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실행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북한은 주체 사상으로 강하게 통합되어 있는 사회이다. 또한 지난 50여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체 사상과 북한 당국이 내세우는 체제 이데올로기 이외의 이데올로기나 사상에 접할 기회가 완전하게 차단되었던 완벽한 폐쇄 사회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서구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극단적인 적대감을 갖도록 북한 동포들을 철저히 사회화시켰다. 그런 면에서 북한은 현재 남아 있는 선교지 중에서 복음에 대해 가장 완강한 저항력을 가진 척박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북한 선교에서 부딪힐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 권력층의 반종교성이 아니라 오히려 완강하게 마음 문을 닫아걸도록 사회화되어 있는 일반 북한 동포들의 마음과 영혼의 경직성과 폐쇄성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북한은 앞으로 불가피하게 체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며, 그 방향은 개방 쪽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선교에 대해 적어도 중국과 같은 정도로는 멀지 않아서 허용될 것이다. 그 때의 북한 선교에서 가장 큰 장벽으로 다가올 것은 바로 종교와 복음에 대해 강팍해진 북한 동포의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북한 선교에서 부딪힐 문제는 정치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닌, 기독교 선교 역사의 시초에서부터 있었던 인간의 죄성,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강팍한 마음이다.


북한의 경제난은 북한 선교의 걸림돌이자 빚장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됨으로써 여러가지 파생적인 문제들을 유발하고 그것은 북한 선교를 더욱 어렵게 하며, 특히 한국 교회가 북한 동포에게 경제적 원조를 제공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선교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경제난은 북한이 외부 세계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대외 교류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북한과 쉽게 접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한 교회가 북한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법을 통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은 북한에 식량을 보태주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지금까지 막혔던 북한과의 교류가 교회 및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더 나아가 선교의 작은 길을 터 주는 것이다.


북한 경제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북한은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엄격히 계획된 폐쇄 경제 체제를 유지해왔으며, 대외적으로는 구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 공산권 국가들에 의존을 해왔다. 우선 북한의 계획 경제는 국민의 생산 의욕을 저하시킴으로써 생산력을 감소시켰으며, 이는 자급자족의 경제를 유지할 수 없도록 했다. 더욱이 계획 경제 체제는 대외 경쟁력을 무시한 경제 구조를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왜곡된 경제 구조는 국제 수지의 악화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 그리고 동구 공산권의 붕괴는 북한 경제를 고립시켰으며 대외 교역의 축소와 구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원조 격감을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1995년 여름의 홍수는 만성화된 식량 부족을 자생적으로는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시킴으로써 경제 전반의 파탄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난은 체제의 붕괴까지도 몰고올 만큼 위협적이었으며, 이는 어떤 면에서 북한이 체제 수호 차원에서 더욱 폐쇄적이고 고립적이며 배타적으로 기울게 했으며, 심지어 체제 불안정으로 인한 전쟁 도발의 위험까지도 증가시켰다. 말하자면 경제난은 북한이 앞으로 연착륙보다는 경착륙을 할 가능성을 높였다. 특히 북한이 경착륙을 할 경우에 북한 선교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가지 난문제들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난은 이처럼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닐 뿐더러 단시일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한국 교회는 이것을 오히려 북한에 사랑을 베풀고 더욱 가까와지며 한층 더 북한을 이해하고 알게 되는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경제난은 북한 선교의 문을 열고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체제의 이상 조짐은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숫적 증가와 출신 계층의 상승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경호씨 가족은 그들의 드라마와도 같은 북한 탈출 과정도 흥분을 자아냈지만 그러한 극적인 사건의 희소성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탈북은 황장엽 비서나 외교관과 같은 고위층이 아니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그것은 첫째는 지난 몇 해 동안 북한을 탈출하는 동포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개방과 소련의 해체로 인해 그곳 동포들의 귀국 및 방문이 빈번해짐으로써 탈북 동포들의 희소 가치가 그만큼 떨어졌으며, 특히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 귀국이나 중국 교포와 연변 교포들의 한국붐과 불법 입국 및 체류 등으로 인해 그들 동포들에 대한 거부감이 은연중에 커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의 탈북자들이 대체로 시베리아 벌목공과 같은 하위 계층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로서는 그러한 탈북자들은 단지 사회 보장 대상자들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사회적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는 짐이었다. 또한 현재 중국이나 연변 등지에 숨어지내면서 귀국 허락을 기다리는 탈북자들의 수 역시 많게는 수천명에 이른다는 보도들은 그들이 부담스럽다는 인식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탈북자와 앞으로 발생할 북한 난민에 대한 대책은 물론 원칙적으로 정부가 세우고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탈북자나 난민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여타 생활 보호 대상자, 이를테면 빈민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 보장의 수준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민간 차원의 협조와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특히 지원 대상자가 많아질수록 정부보다는 민간의 참여가 더욱 더 요청된다. 현재 그러한 사업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민간 기구는 적십자사이다. 종교 단체들 역시 구호와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동참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사업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한국 교회는 탈북자들의 적응과 정착을 도우는 것과 아울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발판으로 삼아서 북한 선교의 확장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탈북자들을 단순히 구호의 대상이나 교회가 짊어져야할 짐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자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족 복음화 사업에 초청해서 쓰임받도록 할 필요가 있다.

6. 북한 선교의 현재

한국 교회가 북한 선교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 실태를 보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교는 열의와 그 열정에 바탕한 실천의 결합과 병행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면서 북한 선교의 당위성과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책임이며 사명인지를 강조해왔다. 개 교회 단위에서도 북한 선교를 위한 기도와 헌금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범교회 차원에서나 개 교회 차원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북한 선교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실천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지적하자면,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아직 선언문들을 공포하는 말의 단계에 있을 뿐 행동의 수준으로 옮겨가지 못했다. 현재의 북한 선교에는 선언문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의 행동이 요청된다.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는 1996년의 개신 교단의 연합 부활절 예배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신교 교회들은 연합 부활절 예배에서 북한의 봉수 교회와 칠골 교회가 참여하는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했다. 또한 고난주간 동안 거리 모금과 성금요일 금식 운동을 전개하고 부활절 특별 헌금을 해서 북한 수재민을 돕기로 했다. 부활절을 계기로 개신교 교회들 뿐 아니라 북한 교회까지 하나로 되는 일치의 모습은 매우 의미있다.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운동을 교회가 주체가 되어 펼치는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면, 연합 예배나 공동 선언문은 말잔치에 불과하며 그러한 잔치는 기껏 한 주간 동안의 교회 일치를 과시하는 전시 행사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 선교는 선언문이나 전시적인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그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실천 행동으로 옮겨진 북한 선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은 꾸준히 진행되어온 북한 선교의 조그만 실천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는 민간 단체로서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 기구의 북한 지원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남한 기독교인의 사랑을 북한에 전달하는 데 애써왔다. 연변과 중국의 조선족들과 숨어 사는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그들의 복지를 향상시킴으로써 간접적인 북한 선교를 해왔는가 하면 그렇게 해서 주의 제자가 된 동포들이 북한의 친지를 방문하게 함으로써 직접 북한에 선교하는 길을 열어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것은 연변과 중국의 조선족을 기독교 안에서 교육해서 북한 선교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의 교포들, 이를테면 미국이나 캐나다의 교포들이 한국 교회를 대신해서 직접 북한에 선교하는 기회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연변이나 중국 등에 기지를 마련해서 북한 선교의 문호를 넓히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교회가 주축이 되어 탈북자들을 위한 지원 단체를 결성하고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정착하는 것을 도우고 있으며, 이러한 지원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7. 북한 선교를 위한 과제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이처럼 아직 실천의 면이 결여된 초보 단계에 있다. 이러한 북한 선교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먼저 해야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 과제, 즉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선교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한국 교회는 지난 수년 동안 동남아시아를 비롯해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지의 해외 선교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대체로 해외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선교지에 대한 사전 답사와 연구를 했으며, 그러한 사전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선교사가 간다면 어떻게 현지에 적응하고 정착하며 어떠한 전략으로 복음을 전하며 토착화시킬 것인지의 계획을 세우고 선교에 임해왔다. 북한 선교 역시 선교지인 북한에 대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및 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흔히 남한과 북한은 한 민족이고 동일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동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교를 위한 별도의 선교지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언어나 문화적 장벽도 없으므로 선교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반세기에 걸친 분단은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한민족을 전혀 이질적인 둘로 갈라 놓았다. 50여년 동안 북한은 일인 독재의 공산 체제를 유지하면서 한민족의 공통적 특질들을 모두 말살시켜 놓았다. 정치 사회 경제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했을 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까지도 왜곡하고 바꾸었다. 또한 한민족의 민족성이나 인간의 인간성 조차도 외부 세계와의 철저한 고립과 정보 통제 그리고 유아기부터의 사상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변질시켰다. 더욱이 북한 사회의 폐쇄성과 외부 기피증으로 인해 북한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지식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이 걷힌 현 시점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고 베일에 싸인 사회가 바로 북한이다. 그러한 점에서 북한은 선교지로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지이며 미지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 선교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북한이 동일 언어의 동일 문화 지역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여타의 선교지에 접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하며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독일 통일과 동구권의 붕괴 과정에서 교회가 한 역할들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은연중에 북한 교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북한은 공산화 이전에 동양 최대의 기독교 지역이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북한의 지하 교회가 한국 교회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호응해서 다시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러나 북한은 동독이나 동구권과는 전혀 다르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동독과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 등의 옛 공산 지역은 오랜 기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기독교가 단순히 종교라기보다는 문화로서, 그 중에서도 일반 대중의 일상 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문화로 존재한다. 그러한 사회들에서는 설사 체제가 아무리 독단적이고 전제적이라고 하더라도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를 말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부정한다는 것은 사회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해방 당시의 북한의 기독교는 역사도 짧았을 뿐 아니라 교세 역시 겨우 2000 교회와 30만명의 교인에 불과했으며 토착 종교가 아니라 외래 종교였다. 또한 공산화 직후 대부분의 북한 기독교 교인과 지도자들은 월남을 했으며 특히 1.4 후퇴와 함께 대거 월남을 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신자들은 그 전후로 순교를 당했다. 그래서 북한의 공산 정권은 탄압과 말살 정책을 통해 지상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없애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북한의 기독교는 문화로 뿌리내리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중요한 사회 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이처럼 동구 공산 지역에서는 기독교 교회가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민중을 지도하고 동원하는 사회 세력으로 역할할 수 있었는데 반해서 북한의 교회는 명맥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북한 선교는 북한 교회를 다시 소생시킨다는 생각보다는 복음이 전혀 없는, 어떤 면에서는 그 어느 지역보다 복음에 저항하는 척박한 선교지라는 인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동구 지역에서와 같이 통일이 되거나 공산 정권이 무너지면 교회가 자생적으로 되살아나리라는 환상이다. 북한은 미지의 미개척 선교지이다. 북한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호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느 지역보다 복음의 씨를 뿌리기 어려운 선교지이다. 복음의 결실은 씨뿌리는 자의 수고로 맺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북한에서도 뿌리지 않은 복음이 열매를 맺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 선교는 따로 언어를 배우거나 문화를 익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선교지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릴 때 그 다음의 과제가 보이게 된다. 그것은 북한 선교를 위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해외 선교를 위해서는 교단이나 선교 단체 또는 학교가 전문적 지식과 소양을 갖춘 선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선교 훈련 과정에는 효과적인 의사 소통과 전달을 위해 선교지의 언어 교육은 물론이고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양 교육 그리고 심지어 현지 적응과 정착을 위한 극기 훈련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 선교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의 선교 훈련이 필요하며, 그러한 교육 과정을 통해 전문 선교사들을 양성해야 한다. 특히 북한 선교를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은 파괴된 민족의 동질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관한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통일된 지 9년이 다가오는 현 시점의 독일에도 가장 큰 문제가 동서 독일인들 간의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심리적 통합을 이룩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북한 선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남과 북의 한민족이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넘어서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가 되는 것이 더욱 시급하게 요청된다. 이를 위해서는 남과 북을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의 복음으로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하는 전문 교육을 받은 북한 선교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 선교를 위한 전문가의 양성은 몇 가지 방향에서 시행될 수 있다. 첫째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전문적인 정규 신학 교육 과정에서 북한 선교 전공자를 양성하는 방법이 있다. 이를테면 신학대학교의 신대원에서 북한 선교 전공 과정을 개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북한 선교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을 신학대학에서 계속 교육 프로그램으로 북한 선교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북한이 개방되거나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 선교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북한 선교를 위한 전문 인력의 저변 확대를 위해 신학대학의 비정규 과정과 선교 단체들에서 평신도 교육의 일환으로서 북한 선교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 열정을 조직화해서 구체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총회 산하의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는 북한 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북한 선교 훈련 과정을 개설했다. 세째는 개 교회의 교회 교육에서 북한 선교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다. 네째는 중국과 연변 등지의 교포 신자들과 목회자들을 신학대학에 유학시키거나 그곳의 기독교 대학, 이를테면 연변과학기술대학 등에서 수학하게 함으로써 북한 선교 전문가로 양성하는 것이다. 아마도 현 상황에서는 이들을 통한 북한 선교가 가장 가능성있는 방법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탈북자들을 제자로 삼고 북한 선교 전문가로 교육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과 연변에 숨어지내는 다른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할 수 있으며, 북한과 자유로이 왕래를 할 수 있을 때는 그들이 북한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선교하고, 더 나아가서는 북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선교 역시 전담하는 선교 기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 기지는 가칭으로 제1, 제2, 제3 기지로 명명할 수 있다. 제1 기지는 북한 선교를 계획하고 추진하고 지휘하는 본부가 자리잡고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현재로서는 한국 교회가 제1 기지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초교파적이고 범교회적인 북한 선교 기구를 설립하고, 이 조직체가 북한 선교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총체적인 지휘와 조정을 하도록 한다. 제2 기지는 북한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역에 설립된 선교 기지이다. 이를테면 현재로서는 중국과 연변의 교포 교회들이 제2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제2 기지는 본부인 한국 교회와 선교지인 북한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로서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담당한다. 제3 기지는 지역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북한과의 교류와 왕래가 쉬운 지역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국과 캐나다 등의 교회가 제3 기지로서 기능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을 세계 도처에 가지고 있다. 이들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은 북한 선교와 통일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의 교회가 직접 북한과 접촉을 하는 것은 아직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을 징검다리로 삼는다면 북한과 한결 쉽게 교류할 수 있으며 한결 수월하게 복음을 들여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북한으로의 모든 통로가 막혀 있는 듯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길을 준비해두셨다. 하나님의 통일과 하나님의 북한 선교를 위해서 이들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을 예비해두셨다.


북한이 개방이 되거나 통일이 되어서 자유로운 선교가 허용이 되면 이러한 선교 기지의 구분과 역할은 달라져야 한다. 제1 기지는 한국 교회가 아니라 북한 교회로 바뀐다. 북한 교회는 북한 선교의 주체가 되어서 선교 전반에 관한 총체적인 기획과 지휘를 하고 북한 교회가 자립하고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한국 교회는 제2 기지로서 북한 교회가 토착화하고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보조한다. 제3 기지는 북한과 남한을 중개하면서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에 동참하는 중국 및 미국 교회들이 될 수 있다.


선교는 과감한 실천이다. 북한 선교는 오랜 준비 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준비를 위해 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다. 아직 미비한 상태지만 북한 선교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실천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북한과 많은 접촉을 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할 수 있으면 가장 좋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북한 이외의 장소에서 북한 동포를 가능한 한 많이 자주 만나는 것도 선교를 위한 실천이다. 아니면 북한에 경제적 지원이나 의료 지원과 같은 물적 인적 자본의 교류를 통해 북한과 접촉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선교적 실천의 하나이다. 미국이나 제3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북한 동포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선교의 실천이다. 어느 분은 역설적으로 납치를 당해서라도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선교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선교의 과감한 실천에는 이처럼 순교의 각오까지도 해야 한다. 베드로의 순교가, 바울의 순교가 있었기에 복음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북한 선교에 설사 큰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실천에 옮겨질 때 민족 복음화가 시작되고 또 완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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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선교 계획과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통일도 북한 선교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완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북한에 복음의 그루터기를 남겨놓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음의 문이 열리는 날에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가지가 자라게 될 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북한 선교의 문을 여시고 복음의 불길을 피워올리실 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원대한 민족 복음화의 계획과 뜻에 동참하고 성취해야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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