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세계관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양진일)

수호천사1 2009. 8. 4. 22:48

세계관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30년을 사역한 레슬리 뉴비긴 선교사가 인도에 선교하러 가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 알고 지내던 한 선교사님이 오셔서 “당신이 입원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당신이 인도에서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이 병원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인도인의 고통과 삶을 알 수 있으니, 당신의 사고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교통사고라는 명확한 사실에 대한 해석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반면에, 힌두교인들은 전생의 업보로,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브레이크 파열이나, 기계의 결함으로 설명을 할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에 따라 동일한 사실이 다르게 보인다. 우선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세계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그 사람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관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이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에 대해 동의하며 늘 이야기 하는데 반해 그 사람의 실제 삶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세계관은 돈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세계관은 앎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또, 당신이 알고 있는 선교사가 있는가? 당신이 그를 선교사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당신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당신이 있는 그 곳을 교회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당신이 이런 질문에 답하는 교회나 선교사에 대한 기준이 과연 성경적인가 짚어보아야 한다. 혹시 성경적 의미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교사를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선교사란 곧 “사도”인데, 이 “사도”(apostle)라는 말은 “보냄 받았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7장18절, 20장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보냄 받은 자” 라는 말 앞에 예수님은 다른 조건을 달지 않으신다. 그가 안수를 받아야 한다거나 어디 파송을 받아야 한다던가, 보냄 받아야 하는 지역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전혀 다른 지역이나 다른 인종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선교사이다. 단지 내가 파송되는 선교현장이 다른 것이고 그 선교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역의 은사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라는 것을 특정한 어떤 부류의 사람이 하는 영역으로 한정시키고는 나는 선교와 무관한 것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이는 우리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을 거부하는 비신앙적인 자세인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이 있고 십자가가 있고 안수 받은 목회자가 있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마태복음 18장 20절의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겠다”이다. 곧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그들이 모여야 하고 그들의 모임이 예수에 의해서만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이 있고 안수 받은 목회자가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그곳이 예수의 뜻과 무관한 곳이라면 그곳은 인간들이 모여 있는 집회에 불과한 것이지,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용어들이 좀 더 성경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론적 무신론자보다 실천적 무신론자가 더 문제

로마서2장 28~29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표면적인 요인이 아닌 이면적 요인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표면적이라는 것은 회당예배에 참석하느냐 할례를 받았느냐와 같은 것인데, 이런 표면적 활동을 한다고 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만이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표면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이면은 본질적인 것, 숨겨진 것을 말한다. 그럼 어떤 사람이 참 유대인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이 참 유대인이다.

바울은 표면적인 활동을 잘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에 예배가 많지만, 이 예배를 모두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것은 아니다. 회개도 마찬가지고 찬양과 예배도 마찬가지다. 사도바울이 표면적, 이면적 유대인을 구별한 것처럼 지금의 신앙인들도 표면적 크리스천과 이면적 크리스천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바울에 근거하면 그런 표면적인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확증해 주지 않고 이면적 신앙이야 말로 신앙인임을 확증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면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에 있느냐, 예배에 얼마나 자주 참석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는 니체나, “신앙은 유아기적인 발상”이라는 프로이드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와 같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라고 불리지만, 단지 이론적인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신의 부재를 선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자는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부분적인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갈 때가 많다. 세계관을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실천적 무신론을 타파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일상화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의 한 통계에 의하면, 일본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들이 수업 받는 시간이 11,000시간이고 TV를 보는 시간이 22,000시간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받는 수업의 2배의 시간을 미디어에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통계이지만 우리도 비슷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신앙과 관련해서 우리가 공부하고 훈련하는 시간보다 실제로 신앙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로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것에 보내는 시간의 양과 질이 훨씬 크고 넓다. 그러니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배워온 신앙의 내용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접해온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행동심리학은, 사람은 자기가 훈련한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 일화에 의하면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극단적 평화주의자인 재세례파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중에, 자기를 잡으러 오던 사람이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자 이 재세례파 사람이 그동안 훈련받은 본능으로 인해 자신을 잡으러 뒤쫓아 온 그 사람을 구해내고 살려내자마자 체포당해서 사형당해 죽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자기가 평소 해오던 삶의 모습에 근거해서 위기 가운데 처한 사람을 즉시 구해준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일상화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훈련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게다가 모든 훈련을 개인에게 맡겨두고 있다.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는 것에 근거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공동체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 공동체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이야기 해 보자. 모두가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보기 어렵고, 오히려 사람들은 공동체적 삶을 열망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자본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인간을 파편화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돈에 민감한데, 돈이란 것은 모든 인간이 파편화될 때 모여지게 되어 있다. 광고를 보면 열 사람이 TV 하나를 소유해서는 돈을 벌 수 없으니까 “혼자 안락하게 TV 채널을 소유하고 있는” 광고를 통해 일인당 TV를 하나씩 소유하도록 자극한다. 이처럼 자본은 끊임없이 우리를 더불어 있게 하기보다는 파편화시킨다. 나홀로의 TV를 갖고 싶도록 만든다. 우리는 이런 파편화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거꾸로 성경은 공동체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은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옳다는 것을 알고 공동체의 삶을 자신의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열망하지는 않는다. 공동체적 삶이라는 것이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쉽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보니 공동체가 꺼려지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또한, 공동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생각하기보다 내가 잃을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 교회도 공동체적인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

결국, 세계관이 앎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개인주의화된 신앙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일반적으로 너무 쉽게 통용되고 이해되는 내용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고 그것에 대한 실천적 내용과 훈련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현장적 결단을 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들은 상대적 가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앙은 이처럼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위대한 것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킨다. 십계명의 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좁게 생각해서 “아, 부처를 믿지 말라는 거구나. 알라를 믿지 말라는 거구나”라고 오해한다. 만약 우리에게 부처와 하나님 중에 한 신만을 선택하라고 하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 그건 우리에게 유혹거리도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탄이 뿔을 달고 오지 않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온다고 했다. 즉, 외형적으로 우리가 거부할 만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혹할 만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을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에 그들이 즉각적으로 이해한 “다른 신”은 “바로”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인간인 바로를 신처럼 숭배할 것을 요청받았다. 바로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자리에 군림하려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바로는 자본이다. 따라서 1계명의 현대적 의미는 하나님 외에 자본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동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을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근거로 사용하여왔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동전”이라는 메타포(은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있는 형상(이마고)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동전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한 사람이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온다.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만진다는 것은 가이사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동전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가이사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씀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은 가이사에게 줘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것은 하나님에게 주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인간인 가이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은 상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의 절대적 무게가 있다.

조선 백성에게 다가온 기독교 복음

복음이라는 씨(내용)는 반드시 땅(상황/현장)에 심겨진다. 즉 복음의 내용은 심기어질 어떤 현장과 만난다. 조선에서는 알렌과 같은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조선백성과 만났다. 그동안 이 땅은 복음과 무관하게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런데 이 복음의 내용이 조선백성의 삶의 세계관과 만난 것이다. 복음의 내용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현장의 내용이 동일하였다면 아무 갈등 없이 복음이 뿌리내려지겠지만 복음의 내용과 삶의 현장의 내용이 이질적이라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시작을 1884년, 천주교를 1784년으로 잡고 있다.

이승훈이 최초로 영세를 받은 후 개신교가 들어오기까지 1백 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가톨릭 교인이 최소 2만 명, 최대 4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순교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 왜 이들이 순교해야 했는가? 바로 이 땅의 내용과 다른 것을 신앙하였기 때문에 순교한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왕정 중심의 사회였다. 그리고 신분제 사회였고 가부장 중심의 사회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이데올로기가 유교였다. 왕정과 신분제와 가부장제가 조선사회를 유지하는 기둥이었다. 이 신분제를 허물기 위해 사람들이 난을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것이다. “왕의 말이 곧 법”인 사회가 조선이었는데 기독교 복음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럼 왕이 내리신 어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그 때 기독교는 왕이 내리신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옳으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충돌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신분제 사회에서 기독교가 인간을 보는 관점은 다르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모든 인간이 존귀하고 평등하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사실과 신분제 사회는 충돌이 된다. 또한 기독교는 당신 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키고 정당한 임금을 주고 일을 시키라고 말한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었는데, 상호 존귀하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황해도 감바위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세웠다. 감바위교회는 식사할 때 부인과 겸상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상호 존댓말을 쓸 것을 교회가 공고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징계했다. 왜 그런 걸 설정했냐면 신앙은 결국 삶을 통해서만 증거 되어 지고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교회라는 공간과 일요일이라는 시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확인되고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 사회에서 양반이나 남자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에게 있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특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했다. 자기부인과 자기버림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그런 것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종로 연동교회에서는 양반과 갖바치가 장로를 선출하는데 공교롭게도 천민이 장로가 되었다. 3번에 걸친 양반과 천민의 선거에서 계속 천민이 장로가 된 것이다. 영화 <YMCA 야구단>을 보면, 1루수인 양반이 이전에 자기 집 노비로 있었던 3루수의 공을 받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정말 혁명적이었다. 양반과 천민이 함께 모여서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회통념을 깨는 곳이었다. 양반과 천민이 함께 모인 것도 혁명적인데, 양반이 아닌 천민이 그 조직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곳이 교회였다. 가부장 사회를 기독교 복음이 바꾸어 낸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기독교와 만나게 되면서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혁명과 변화로 뒤바꾸어 낸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이 기꺼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포기하면서 바꾸어 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신앙의 근원적인 가치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당시 조선사회는 축첩사회였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이 축첩제도를 “죄”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 남자는 축첩을 포기하든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교회가 징계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징계가 없다. 성도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징계하지 않는다. 루터와 칼빈은 참된 교회의 3가지 증표로 “1)말씀이 가감 없이 선포되고, 2)성례전이 제대로 시행되어야 하고, 3)징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참된 교회 안에 징계가 없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신앙을 가르치는데 이렇게 살자고 결단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삶의 모습에 대해 신앙에 근거해서 권계하고 징계하는 일이 어떻게 없을 수 있는가. 징계가 없다는 것은 목회자가 교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예수님을 좇은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 명예, 권력, 부유함이 그들이 예수를 좇은 실제 목적이었고, 예수님은 그 목적을 이루어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과 도구였던 것이다.

왜 메시아를 소망한 사람들이 실제 메시아가 왔을 때 메시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이는 그들이 규정했던 메시아가 자신들의 현세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보다는 식민지 현실을 타파하고 이방인 민족을 지배할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의 강력한 힘으로 괴로운 식민지 백성의 생활을 끝내고 유대인이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그런 나라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꿈속에 있던 이들의 눈에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파워를 가진 메시아가 아닌, 섬김을 위해 왔다거나 고난을 받는다는 메시아의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을 때 제자들이 순종하는 본문이 있다. 대부분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적용하곤 하는데, 실제로 제자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는가의 문제는 그리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3년을 좇은 제자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고, 더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겠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제자들이 노골적인 반감까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보좌에 오르실 때에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은 분개한다. 이들이 분개한 이유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상도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언젠가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 서열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청하고 분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그런 권력에 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한 순간 예수님을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좇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았다기보다는 예수님을 좇아감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예수님을 좇은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 명예, 권력, 부유함이 예수를 좇은 목적이었고 예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해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과 도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목적으로 하고 좇는 것인가,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 때문에 좇는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쉽게 말한다. 즉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좇는 제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다. 예수님은 자기 구원보다는 자기부인을 먼저 이야기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가장 올바른 선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현세의 축복 때문이라면 이는 정말 이기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모습이 자본주의적 기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목적이 아닌 수단과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만일 아파르트헤이트가 벌어지는 남아공의 백인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당신은 흑인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대하였겠는가.

백인에게 둘러싸여서 자란 백인 소녀는 백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긴다. 백인 학교에서 백인 선생님에게 백인 중심의 교육을 받았는데. 흑인을 하나님의 형상인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이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 바깥의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한다. 백인 공동체에서만 자란 사람이 어떻게 흑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관계 맺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을 근거로 사고하고 살아간다.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의 틀을 가지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경험해 왔고 교육받아왔던 것들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 기준이 건강한 지,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수용될 수 있는 건강한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자신의 공동체의 건강성은 밖에 있는 공동체와의 의사소통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난히 한국의 교회나 선교단체들은 바깥과의 의사소통자체를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공동체에 확신이 있으면 바깥의 공동체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텐데 그만큼의 확신이 없어서인지 마치 온실 속 식물처럼 온실 속에만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래서 비바람 치는 세상에서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뿌리 깊은 신앙의 틀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정보들을 접해볼 필요가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가 속한 바깥의 공동체에서도 충분히 의사소통 가능한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이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대구지역의 모든 소방서와 구조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구조 작업이 계속되면서 소방서 식당에서 일하는 집사님이 비상이 걸려서 퇴근하지 못하고 수요예배를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집사님은 식당을 빠져나와 수요예배에 참석했고, 이 사실을 들은 교회목사님은 예배시간 중에 이 집사님의 신앙을 칭찬해 주었다. 이 사건은 이 예배에 참여한 청년을 통해 바깥으로 알려졌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 교회중심적으로만 교육받아왔기에, 그 교육에 충실하게 그 집사님은 반응하신 것이다. 오직 삶과 무관하게 예배를 지켜내는 것만이 신앙생활이라고 교육받아온 분들에게는,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하고 있던 일에서 빠져나와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빨간 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빨간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어떠한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성경의 시각인 창조, 타락, 구속의 시각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적 세계관을 자신의 사고와 삶에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세상 살아가는 모습이 동일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실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드러낼 때가 많다. 신앙을 취미생활이나 종교활동 정도로만 여기고 신앙 자체를 내 인생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은 있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행위, 믿음과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절대 삶이라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우리의 현실은 믿음을 삶과 분리해서 강조하고 있다.

개신교가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종교개혁 때부터 개신교의 자기정체성을 말해주는 4가지 개념이 있는데, 이 중에 “Sola Fide”(오직 믿음)의 개념이 한국교회에서 많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은 있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믿음과 행위, 믿음과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을 때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유월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이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지 꼭 그렇게 해야만 되겠냐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것은 절대 삶이라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오직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믿음을 삶과 분리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가장 먼저 외친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이다. ‘회개하라’는 말은 세계관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단어의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생각하고 보는 방법 자체가 바뀌어 지는 것, 의식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한국교회는 믿음을 삶과 연관시켜서 계속 강조했다. 믿는 사람은 첩을 두지 않고 노비를 해방시키고, 아내와 공평하게 대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점차 한국 기독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삶과 신앙 자체를 분리시키는 경향성이 강해지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가장 먼저 외친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이다. “회개하라”는 말은 세계관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단어의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생각하고 보는 방법 자체가 바뀌어 지는 것, 의식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것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다시 성찰하는 것이 회개이다. 성경에서도 노예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데서 출애굽이 가능하였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과 바울 같은 개종자들도 유대교적 교육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은데서 그들의 삶의 새로운 출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세계관의 전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우리의 가치기준을 결정하고, 세계를 일관성있게 해석하도록 도와 준다. 또한, 세계가 어떠해야 하며, 세계 속에 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부흥이라는 개념을 많이 왜곡시켜왔다. 보통 부흥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는 부흥운동의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수적 감소이다. 즉, 부흥이란 것은 사람 수의 증가와 늘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부흥 자체는 사람 수의 증가나 감소와는 무관한 것이다.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람의 숫자는 증가할 수도 감소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부흥을 늘 사람의 수적증가와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통해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흥의 본래 의미가 사람 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많이 왜곡되어진 것이다.

한국교회에 소개되어진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는 믿고 있는 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 목사님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주 호화롭게 사시는 듯하다. 그룹의 회장처럼 호화롭게 살아가고 교인들도 목회자의 그러한 삶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음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대체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혹여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명제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티기독교 사이트를 살펴보면 그저 감정적인 반감이 아닌, 논리적인 입장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게시판의 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공격은 거의 없고, 현실 교회에 대한 공격,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는 말의 내용과 삶의 모습이 다른 것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샬롬”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청빈과 검소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수백억의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해 합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기독교인들은 공격당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유난히 힘을 중시하는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적 기준에 근거해서 아니라고 생각되면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한다. 예를 들어, 단군상 목 자르고 불상 목 자르고 하는 일에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 기독교인들은 유난히 입장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잘 되어 있지 않다. 만약 단군숭배자들이 야밤에 몰래 교회에 쳐 들어와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행동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사고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 한국기독교는 힘 있는 강자중심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힘에 의한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행동하고 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성직자 중심(교회중심)의 기독교적 가치에 젖어 있다. 예수님에 의해 책망 받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해석하여 준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대부분이고, 목회자 존경을 뛰어 넘어 목회자 우상화의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이제는 목회자 의존적인 수동적 신앙에서 주체적 신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달란트 시장의 경우, 어린아이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경제활동을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인데 대부분의 교회가 하는 달란트 시장의 방식을 보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같은 반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다 모아서 평균케 나누어서 각자 원하는 것을 사게 한다던가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눔의 가치를 이런 주일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실현해 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이런 프로그램 하나를 통해서도 아이들이 성경적 가치를 느끼게 해 주기 위한 깊은 고민이 부재한 주일학교 교육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미국의 문화기독교가 그대로 직수입 되어, 회개는 없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종교 산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또한 불의한 권력과의 야합으로 인해 교회는 온갖 특혜를 누려오고 있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의 반을 기독인이 차지할 정도로 수는 적었지만 기독교의 긍정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1899년 3월 1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는 돈으로 원님자리를 차지한 양반이 부임지를 바꾸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나는 예수교 있는 마을에 가지 않겠소. 예수교 없는 영남 마을로 옮겨 주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대해 과감하게 저항했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건이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운동의 주동자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당시 주동자는 기독교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을 잡아와야 했는데, ‘평일에 길가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무나 붙잡고 네가 기독교인이냐고 물어보라.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기독교임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말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 순사조차도 인정한 교인들의 정직함은 오늘날의 현실과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이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어떻게 한국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인구 천 이 백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그런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은, 자신의 시대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한 힘과 용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자기 스스로를 그러한 부정과 부패로부터 단절시켜야만 사회를 향해 예언자로서의 위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종교법인에는 세금이 안 붙는다는 것을 이용하여 온갖 투기에 열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 땅의 투기문제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겠는가. 종교계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얼마인지 정확한 데이터조차 나와 있지 않다. 목회자의 야망에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법인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법인이 아닌 것조차 종교법인 인척 위장해서 탈세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사회의 담들, 갈등구조와 대결구조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키고 정착시켜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자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하며 그 나라를 거역하는 자신의 삶의 요소들을 청산해내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습관적으로 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가 버려야 할 것에 대한 결단 또한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역사의 동참자로 부르셨는데 기도한다는 핑계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로 떠맡겨버리곤 한다. 우리의 기도에 좀 더 진실성이 담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존재한다. 대부분은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대체로 백인, 서구, 남성 중심적 하나님 상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적 전통인 듯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한 하나님 이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이미지화한 예수가 복음서에 근거한 예수인가 나의 인간적인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인가 점검해 보자. 백인, 서구, 남성, 어른중심의 시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성경을 보고 있다. 강자 중심의 생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현세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설명만 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믿고 따르기 원하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를 돌아보자. 그에게는 늘 환영자와 적대자가 공존했다. 우리의 환영자와 적대자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를 환영하는 자와 적대하는 자를 분명하게 세우셨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를 보고 반응하는 무리가 반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했기 때문에 환영자와 적대자가 분명했다. 한국교회도 분명하다면 적대자와 환영자가 분명하기 마련이다. 누가 우리를 환영하고 누가 우리를 적대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대자였던 무리가 여전히 우리를 적대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무리가 여전히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가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추수가 끝나고 한 겨울이 되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을마다 지혜자와 만남을 가지던 양반 자제가 있었다. 함께 다니던 노비가 “저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지혜로운 분이 있으니 그를 꼭 만나십시오”라고 말하자 주인이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이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겠느냐 폭력적인 힘으로 자기에게 반대하지 못하게 하던가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으로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모습으로 이중적으로 대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선인에게 존경받고 악인에게 미움 받는 자여야 선인이다”라고 답하며 그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다.

오늘날 크리스챤을 보고 부담스러워 하는 존재가 있어야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고 죄성에 지배받고 있는데 아무런 부담감 없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기독인 스스로가 자신의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환영자나 적대자가 있냐는 것보다는 누가 환영자이고 누가 적대자인지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원론을 극복하자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고,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고자 하지 않으며, 복음에 대한 깊은 신뢰와 뿌리 깊은 신앙이 부재한 현실이다.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예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공간은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 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예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 : 양진일(복음과상황 편집위원)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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