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스크랩] 중국삼자신학의 이신칭의의 약화 (이기택)

수호천사1 2009. 4. 29. 11:39

중국삼자신학의 이신칭의의 약화

 

글: 이기택

 

 

정광훈은 2003년 ‘화동61(華東六省一市) 신학사상건설 세미나’에서 ‘신학사상건설사역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98년 제남회의에서의 ‘신학사상건설사역강화’ 결의 이후 5년간 수많은 문장과 세미나를 통해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내용이 ‘신(信)과 불신(不信)’의 문제라고 밝혔다.

 

구양문풍(歐陽文豊) 은 서방의 기독교 선교가 절정에 달하던 19세기,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인을 신도로 흡수하기 위하여 인신칭의(因信秤義)와 천당지옥(天堂地獄)을 하나로 연결시켰으며, ‘지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신자의 수를 늘려나갔고, 여기에 근본주의 신학이 일반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쳐 인신칭의(因信秤義) 교리가 중국교회에서 정통신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인신칭의의 교리가 국가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의마시(義馬市) 기독교양회의 한 인사는 인신칭의(因信秤義)의 교리가 반중국분자들의 정치적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신앙과 불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된다. 강택민 주석은 정치에 있어서는 단결∙협력하고, 신앙에 있어서는 서로 존중하라고 당부하였다. 당중앙은 신앙과 불신앙은 단지 믿음의 차이일 뿐이며, 마땅히 서로 존중해야 하고, 정치적으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반중국분자들은 신앙과 불신앙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을 이용하여 의와 불의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두 가지 음성에 대해서 어떤 형제 자매들은 감정을 앞세워 후자를 옹호하는데, 이는 그것이 성경의 진리가 절대 아니며, 도리어 성경 말씀으로 포장된 정치적 음모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광훈이 지적하는 인신칭의론(因信秤義論)의 폐해에 대하여 구양문풍(歐陽文豊)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인신칭의론은 첫째, 중국의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형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둘째, 인신폐행론(因信廢行論) 과 도덕무용론(道德無用論)을 불러왔다. 셋째 신자와 불신자 간에 도덕윤리의 심각한 괴리를 가져왔다. 넷째 중국에서 ‘신(信)과 불신(不信)’은 신앙의 문제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유발한다.

 

정광훈은 ‘신(信)과 불신(不信)’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하여 ‘인신칭의(因信秤義)의 담화(淡化)’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신칭의(因信秤義)의 담화(淡化)’를 건의한다. 생각해 보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인물이라도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에 쳐넣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악인들이 단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이는 옳고 그름을 전도(顚倒)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광훈은 인신칭의(因信秤義)가 기독교문화수준과 신학적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 흔히 주장되는 의견이며, 반대로 신학적으로 성숙한 지역에서는 대부분 인신칭의(因信秤義) 사상이 약화되고 있다고 하였다.

 

로마공회는 2년 전 루터교와 협정을 맺었다. 인신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쟁론을 멈추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쌍방간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은 인신칭의의 문제로 다시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관계를 개선할 것을 협약했다. 지금 유럽에 가보면 비교적 수준이 높은 교회에서는 인신칭의의 문제가 중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인신칭의의 문제가 기독교신앙의 모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신칭의(因信秤義)의 담화(淡化)’는 문제시 할 필요가 없다. 이는 도리어 중국의 기독교문화수준과 신학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이며, 기독교가 인민과의 대화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광도(倪光道)는 1999년 『천풍(天風)』에 ‘누가 죄인이며, 누가 의인인가?’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죄인이다’와 ‘예수를 믿는 자는 의인이다’라는 두 가지 명제가 성경적으로 근거가 희박함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이상의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신중하게 사고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첫째, 인신칭의는 기독교인들에게 교회 밖의 무리를 무시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말할 특권을 주고 있지 않다. 반대로 인신칭의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은혜 받은 죄인임을 깨닫고 더 겸손하게 사람들을 존경할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뭇 사람들과 화목해야 하며, 또한 뭇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둘째, 인신칭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죄를 지을 특권을 주고 있지 않다. 인신칭의는 악인의 보호막이 아니다. 셋째, 인신칭의는 인신폐행론(因信廢行論)이 아니다. 인신칭의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생명에 이를 뿐 아니라, 생활가운데서도 의를 행함으로써 진정한 의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인신칭의(因信秤義)를 담화(淡化)하고자 하는 신학사상건설사역의 노력은 결국 ‘신(信)과 불신(不信)’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지양(止揚)한다. 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전인민으로 하여금 종교를 초월하여 일치단결하게 하고자 하는 당과 정부의 종교정책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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