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은 네트웍 공조(共助)에 있다 (3)
네트웍
공조를 원한다면, 조직(組織)을
경계하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관계를 가지면서 서로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조직을 만들어 일하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가지면서 함께 하나님의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조직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조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사람들은 일을 핑계로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선호하는 조직에는 몇 가지 속성들이 존재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직의 특성, 또는 조직의 의미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서로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경계하노니, 조직을 조심하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누구에게인가 이런 말을 들은 바 있었다. '조직은 필요악이다'라는 말이었다. 과연 그럴까? '필요악(必要惡)'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왜 조직을 필요한 악(惡)이라고 하는가? 무릇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성경은 충고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처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필요악이란 없다. 악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경계하지 아니하면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음이다.
조직은 결코 필요악이 될 수 없다. 참으로 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을 위해 네트웍 공조를 원한다면 조직은 경계해야 한다. 필자가 조직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것의 속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조직의 속성이 위험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조직은 통일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속성 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통일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어사전에서 조직을 '사회, 단체 등의 통일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회, 단체 등의 통일체' 란 무엇인가? 사회나 단체는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적 집합체를 의미한다. 조직이란 이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엮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이다.
'통일체' 라는 말이 듣기에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실체를 알면서도 사람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할까?' 필자는 어쩌면 그 생각하던 바가 달라져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통일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인가? '통일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서로 다른 개체들을 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통합'이란 '개체와 개체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 일정한 표준화를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개체들을 하나가 되게하기 위해 표준화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그럴 듯한 이야기이겠는가? 참 좋은 일이라고 여겨질만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묶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통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사실에는 엄청난 음모가 있음이다. '통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변하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체(個體)적 속성을 몰수하거나 압류, 또는 강탈하여 독점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개체적인 속성을 체계적으로 말살시켜 개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일정하게 표준화된 조직단위의 특성만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음모가 '통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는' 숨어있는 음모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조직으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라.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에서는 어느 한 곳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어떤 조직으로 발전하여 하나될 것을 명령하신 말씀이 결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조직에 대한 기록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항상 무관하였음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조직을 만들게 하거나 그 조직을 관리하게 하신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거나 그 조직을 관리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의논한 적이 없었다. 임의대로 조직하여 그것을 시행했을 뿐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첫 조직의 형태는 시날평야로 이동하던 노아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시날평야에서 바벨탑을 쌓았다. 이는 그들이 조직을 만들었음을 반증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조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권에 도전하여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조직을 와해시키셨던 것이었다. 바벨탑의 붕괴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 민족을 사사를 통해 직접 다스리셨다. 그것은 신정정치였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정치를 기피하고 이방의 나라들과 같이 왕을 세워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왕정정치를 갈망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통해 여러번 그들을 설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정정치를 요청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기구한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결국 민족이 철저하게 망하여 세계로 흩어져 유리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음을 상기해야 할 일이다.
신약시대에도 조직에 대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일이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운 일이었다. 이는 주께서 승천산에서 마지막 당부하신 말씀과는 배치되는 사건이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명령하셨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한 예루살렘성의 복음화 운동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하심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다. 그랬더라면 예루살렘교회가 관리를 위해 집사를 세워야할 만큼 외형적으로 비대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흩어지지 않고 단일집단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그들은 조직을 필요로 했다. 그럼으로 그들은 교회의 조직을 시도하면서 주께 기도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봉사와 관리를 위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워 조직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예루살렘교회는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조직된 교회는 와해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이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 주님의 명령이 수행되게 하기 위한 강제발동이라고 할 수 있음이었다.
조직을 경계하라. 조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조직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위적으로 하나되는 통일체를 바라지 않으신다. 인위적인 통일체를 통한 개개인의 개체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이를 통합, 장악함으로 몰수하거나 압류, 강탈하여 개체를 표준화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둘째, 조직은 계통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조직은 구성된 개개인의 개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항상 어떤 계통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항상 어떤 계통에 의해 움직인다' 함은 '어떤 정해진 규범이나 제도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독자성을 상실하고, 독자적 의사와는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 형성된 '그 어떤' 것의 지배를 받아 행동해야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세력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행위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사람들에게 독자성을 허락하셨으며, 그 독자적 개체성을 유지하며 상호적인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조직은 항상 계통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조직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관례적인 습관에 따를 것을 종용하고,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일정한 제도의 체제에 순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어떤 관례적인 습관이나 일정한 제도의 체제에 순복하면 조직의 구성원된 개체는 이미 개체가 아니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행위를 나타내게 되며, 이것은 결국 허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조직의 계통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 조직이 만들어 낸 관례적인 습관의 추종자가 되지 말라. 관례적인 습관에 의해 조직이 만들어 낸 일정한 제도의 체제에 굴복하지도 말라. 참으로 이런 것들을 경계하고 자신의 개체성이 상실되지 않고 유지되기 위하여 노력하라. 자칫하면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 버릴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조심하여 조직을 경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개개인의 독립된 개체와 개체의 연합을 원하신다. 여기에서 연합이란 결코 조직화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오직 자신의 독자적인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 안에서 상호적인 교류를 통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것을 내어 놓아 서로가 서로를 위해 공유함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러한 관계가 곧 네트웍 공조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이며, 그것의 최종적인 단계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하심과 뜻을 성취하시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 조직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형식이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격식'을 의미한다. 내용이 부실한 껍데기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한다. 형식은 때에 따라 변화한다. 형식에는 결코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것이 형식이며, 이것의 변화가 언제일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형식이기에 형식에 의존한다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조직은 형식이다. 내용이 없는 빈껍데기와 같은 조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조직이 성취하는 것은 언제나 내용 없는 빈껍데기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용의 충실성이다. 내용의 충실성은 항상 개체의 충실에서 비롯될 뿐이다. 개체와 개체가 충실하여 자기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여 만나는 만남을 통해 관계를 이룰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용의 충실성이기도 하다.
형식을 조심하라. 하나님은 결코 형식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번제물을 핑계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선지자 사무엘의 질책을 받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리받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이야기의 끝을 맺기로 하자.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관계를 가지면서 서로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조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꾸만 조직을 만들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을 그 조직으로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 왜 사람들은 개개인의 개체가 서로 공조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일까?
이제 조직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일은 결코 조직에 의해 이룰 수 없음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우량한 조직과 함께 일하신다고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결코 어떤 조직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개체를 드린 헌신된 개개인의 개체와 일하기를 즐겨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호하심은 사람과 사람들이 개개인의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적인 관계로 형성되어 유기적으로 더불어 일하는 것을 기뻐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독립된 개체들이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더불어 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네트웍 마인드이며, 이러한 네트웍 마인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시대적인 지침인 것을 상기해야 한다.
참으로 21세기 선교사역을 성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을 네트웍 마인드로 변화시키라. 조직의 허상을 경계하고 오직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을 견고하게 지켜나가라. 자신의 개체적 독창성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 놓고 형제와 형제, 형제와 자매가 서로 유기적으로 더불어 일하고자 하는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함의 실체가 유형적인 조직이 아니라 무형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네트웍 공조의 핵심이기도 함이다.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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