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은 네트웍 공조에 있다 (1) - 네트웍 공조의 최적(最敵)을 물리쳐라

수호천사1 2008. 10. 9. 11:25
무관심(無觀心)은 네트웍 공조(共助)의 최적(最敵)이다.

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은 네트웍 공조(共助)에 있다 (1)
네트웍 공조(共助)의 최적(最敵)을 물리치라

필자가 중국살이를 시작한지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 갔다. 그동안 필자는 숙소를 한 번 옮겨야 했고 얼마 후에는 다시 숙소를 옮겨야만 한다. 따라서 아직까지 필자의 생활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언제, 어떤 일이 새롭게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긴장된 생활 속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가 중국살이를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때때로 몰려오는 한 없는 외로움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누군가 '포스라운 소리 하지 말라. 외롭다고 느껴질 때마다 더 많이 기도하며 주님의 격려와 위로를 구할 일이지, 어찌 사람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려고 하는가?'라며 필자의 어리석음을 질책할지 모른다. 그렇다. 당연한 질책이다. 그러나 필자가 '왜 이야기를 시작하며 먼저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 놓는가?'하는 근본적인 의도를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가 중국살이를 시작하며 겪는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은 결코 아니다. 고국을 떠나면서 어찌 이만한 일쯤을 각오하지 않았겠는가! 흔히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한다. 하물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고국에 두고 혼자 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이만한 외로움쯤을 극복할 의지가 없겠는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의 위로하심과 격려하심을 받아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쉰을 넘긴 중년의 나이에 비록 건강하지 못한 육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못한 환경을 잘 적응하며 하루하루를 의욕적으로 살아가고 있음도 자부하며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중국살이의 외로움에 대한 푸념으로 이야기를 시작함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다.

필자는 그동안 중국살이를 시작하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여러 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로 서로가 통성명을 하며 교제를 약속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살이를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필자에게 있어서 중국살이의 선배들이다.

필자가 만난 이들이 중국살이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각자 다르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중국살이의 선배로서 이제 갖 중국살이를 시작한 후배로서 그들의 은근한 관심과 배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중국살이를 하면서 체득하게 된 노하우를 전수받아 그들이 이미 겪었음직한 시행착오를 필자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베이징에서 중국살이를 시작한지 두 달이 넘는 동안 필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거나 배려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일들에 몹시 분주하기만 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필자와의 만남을 여러번 약속했음에도 일언반구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변명이나 사과를 듣지 못했다. 참으로 모두들 자신의 일들에만 분주할 뿐, 새로 중국살이를 시작한 필자에게는 무관심할 뿐이었다.

필자의 이런 이야기가 혹자에게 반감을 주게 될지 모른다. 자신은 마음으로 늘 필자를 염려하고 있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필자가 그들이 필자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이라고 단언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필자가 중국살이를 시작한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에게도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음이다.

어떤 이들을 필자를 다시 만날 때 이렇게 말하고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느냐? 몹시 궁굼했다.' 그럴 때 필자는 무용한 일이기는 하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그가 나의 처음 시작하는 중국살이에 관심을 가지고 궁굼해 했을까?' 그러나 '그랬을 것이다'라고 확신이 없다. 왜 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짐짓 인사치레로 하는 말일 뿐'이라고 치부될 뿐이다.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필자에 대하여 결코 궁굼해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들은 필자를 경계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필자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만일 진정으로 필자를 경계하지 않고 오직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필자가 처음으로 시작한 중국살이를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굼할 것이며, 이러한 궁굼함이 있더라면 한번쯤 안부의 전화를 걸어 보았을 것이 분명하리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필자가 그동안 중국살이를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를 받은 바 없음이 이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시 만남이 있을 때에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의 일들로 분주하다 보니 궁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전화 한 번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핑계는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다. 상대방을 경계하지 않고,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한 통의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진정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전화를 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핑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곳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는 것이던지, 아니면 그들의 관심권 밖에 밀려 있음이 스스로 공증되고 있음이라고 받아드리고 있음이 안타까운 심정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전화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아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명이 가져다 주는 최적(最的)의 이기(利器)이다. 아주 간편하게 상대방에게 문안하며, 그의 형편을 물어 그에 대한 궁굼증을 풀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일을 핑계로 상호간에 전화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상대방을 경계함에 있다는 추측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항상 서로에 대하여 궁굼증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궁굼증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요, 이것은 곧 그와 더불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궁굼증은 곧 상대방을 알아가는 첫 번째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궁굼증이 많고, 그것을 하나 둘 풀어가는 과정에서 서로가 상대방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관계는 더욱 친밀하게 증진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하여 궁굼해 하는 행위는 서로가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해동안 선교지를 방문하여 많은 사역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을 만날 때마다 한결 같이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아려오는 일이 많았다. 선교지에서 만나는 그들 각각은 매우 훌륭한 이들이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헌신적인 귀한 이들이라고 여겨졌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맡겨진 사명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사역하는 모습들이 경건하고 아름답게 보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에서 마음이 아려오는 안타까운 연민의 아픔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참으로 외로운 이들이었다. 그들의 대두분은 철저하게 자신의 울타리를 높이 치고 있어 아무와도 교제하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와 나누는 교제는 지극히 의례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보안(保安)과 보신(保身)을 명분으로 서로의 울타리는 점점 더 높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슴을 터 놓고 교제하며 더불어 일하는 동지가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외롭게 사투에 가까운 사역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은 한 없는 안타까움과 아려오는 아픔으로 괴로워한 적이 많았었다.

우리 옛 속담에 이르기를 '백짓장도 마주들면 가볍다'고 했다. 선교지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더불어 일하면 일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쉽게 더불어 일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불필요하게 강화되고 있는 보신주의(保身主義)는 어느 누구도 신뢰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그를 경계하는 안타까운 일만 벌어지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동안 서로가 나누면 유익한 정보의 공유는 원천봉쇄되고 있었고, 정보의 공유가 원천봉쇄된 상태에서 사역의 효율성을 전혀 기대할 수는 없는 답답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사역자들이 서로 나누면 나눌수록 유익한 정보의 공유가 단절되는 것은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의 선교자산들이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낭비되고 있었으며, 허망하고 비효율적인 과대투자와 불필요한 중복투자는 극심하게 반복되고 있음이 목격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볼 때 통일된 대의명분이 아니라, 지극히 편협한 집단이기주의적인 성취지상주의(成就至上主義)의 노예로 전락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 초라하고 애처롭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진부한 상태로 사역의 효율적인 열매를 기대하지 못한채 제자리 걸음만 반복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장을 목격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리고 슬픔으로 저며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은 결코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집단의 독단적이거나 이기적인 비젼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보내신 모든 사역자들이 더불어 함께 할 때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보내신 모든 사역자들의 네트웍 공조(共助/동역 同役)으로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교지에의 성공적인 사역은 네트웍 공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집단에서 파송을 받은 사역자들만의 공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 지역에 파송된 하나님의 모든 사역자들이 상호적인 공조를 이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전횡이 있어서는 안된다. 상호적으로 대등한 수평적 관계 속에서, 각자의 달란트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서 자신이 확보한 정보를 상대방과 공유하고자 하여 자신을 비우며 긴밀하게 협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완성되어질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역자들을 만능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각자에게 특별한 재능(달란트)을 허락하셨고, 그러한 재능들을 서로 공유하시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나눌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은 효율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서 나눔이란 수직적 관계정립에 의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눔은 철저하게 수평적 관계에서 지체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지체적인 역할 분담의 나눔은 서로가 서로의 개체적인 기능적 역할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면서 상호적인 보완을 통하여 교제의 친밀도를 높일 때에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은 네트웍 공조에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네트웍 공조를 성공하려면 먼저 네트웍 공조의 최적(最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적을 물리쳐야 한다. 적을 물리치지 않고는 결코 성공적인 네트웍 공조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네트웍 공조의 최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결코 네트웍 공조는 이룰 수 없다.

네트웍 공조의 최적은 무엇인가? 필자의 이야기를 주의하여 읽은 이들은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으리라 믿는다. 네트웍 공조의 최적은 무관심(無關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결코 공조를 이룰 수 없다. 특히 네트웍 공조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명령계통이 확립된 피라밋 조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등한 유기적인 관계로 말미암은 평면적인 조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조직에 의한 유기적인 관계로의 네트웍 공조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관심만이 성공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지극히 작은 하나에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관심이 그 기둥이 되고 있음이다. 또한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궁굼함과 서로의 마음이 상통되는 그윽한 애정으로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증진되어 발전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 지역에 보내신 사역자들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역자들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네트웍 공조는 일어날 수 없으며, 네트웍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21세기 선교의 성공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 같은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궁굼한 마음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자.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그 궁굼함을 풀어가기 위한 작은 관심을 기울려 나가기로 하자. 서로가 서로를 지나치게 경계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이해해 가는 척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위한 21세기 선교사역의 상호적인 네트웍 공조는 아름답게 완성되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자.

필자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중국살이의 외로움이 다른 이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듯한 뉘앙스를 비쳤음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중국살이의 외로움을 탄식하고 있음이 아니었음에 대한 진정이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이들에게 전달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21세기 선교사역의 성공을 위해 네트웍 공조는 반드시 필요하며, 네트웍 공조에 있어서 무관심은 최대의 적임을 이야기하고자 필자의 최근 상황을 연유했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행여나 필자의 이 이야기로 인하여 필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미안함을 이야기의 미말에 붙어 전하고 싶다.

이제부터 네트웍 공조(共助)의 최적(最敵)! 서로가 서로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을 물리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717

출처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