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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중(在中)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언 (1)

수호천사1 2008. 10. 9. 11:24
재중(在中)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언

재중(在中)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언 (1)
서로 협력함으로 하나됨을 포기하지 말라
 

중국에는 한인들이 진출하여 터전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한인교회들에 세워지고 있다. 바라직힌 일이다. 한인교회는 고국에서 신앙을 가지고 중국에 진출한 한인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유지하게 도와야 하다. 또한 아직 신앙이 없는 한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신앙으로 외국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한인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중국에 한인교회가 처음 세워지기 시작한지도 어언 10수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인교회의 숫자는 하나둘 늘어났고 지금도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하는 한인들의 증가와 반비례하여 한인교회도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08년까지 재중 한인들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할 것이며, 이에 한인교회도 얼마나 더 증가하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중국에 세워진 한인교회들은 그동안 서로 동반자적인 자세로 아름답게 협력하며 성장해 왔었다. 그러나 최근에 재중 한인교회의 숫자가 증가되면서 분위기는 이상한 쪽으로 반전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재중 한인교회들의 동반자적인 자세로 협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음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재중 한인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변해가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변화가 언제부터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직 대부분의 재중 한인교회들은 이런 변화를 기정사실로, 또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드려지는 상황이었음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쟁이라는 것을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으랴! 어떤 면에서 경쟁이란 상호적인 발전을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재중 한인교회들의 경쟁을 무조건 안타깝게만 여기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경향에도 하자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어느 면으로는 재중 한인교회들의 경쟁이란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경쟁을 통해 서로에게 자극과 도전이 되어 서로가 아름다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면 경쟁을 어찌 나쁘다고만 할 수 있으랴. 이러한 경쟁은 어쩌면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어 피차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발하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경쟁으로 인하여 어느 한 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담감을 가지게 되어 서로의 관계가 껄끄럽거나 불편하게 된다면 경쟁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리라.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오만방자함은 신앙 이전에 부도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방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런 경쟁과 그런 경쟁을 통한 자기성장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경쟁은 구 시대적인 생존경쟁의 악습이 되살아나고 있어 어처구니 없는 분쟁으로 휘말릴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별력이 없는 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분쟁은 적을 만들게 된다. 어느 한 편의 실패와 좌절이 마치 자신들의 성장을 위해 필요악쯤으로 여기는 그릇된 성장논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인정하실 수 없는 경쟁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최초 기록에서 생존경쟁의 해악성(害惡性)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은 자라면서 성품과 하는 일들이 각각 달랐다. 가인은 활동적인 사람으로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되었고, 아벨은 정서저인 사람으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들은 어느 날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각자 자신의 생산물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삼았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그는 농사꾼인고로 곡식단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목동인고로 양을 잡아 그것으로 제물을 삼았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 의해 드려진 제물을 차별하셨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무시하시고 아벨이 드린 제물만 받으셨던 것이다. 이 때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은 무시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으심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경쟁자로 여긴 최초의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불만이란 경쟁의 열매이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만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아벨을 경쟁자로 여긴 가인은 아벨을 제거할 음모를 품게 되었다. 경쟁자를 제거해야 비로소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가인은 자신의 계획을 따라 들에서 아벨을 만나 그를 죽여 땅에 묻었다. 경쟁자를 죽인 것은 가인의 정당성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네 동생이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했음이었다. 가인은 결코 하나님의 질문에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제가 죽였습니다. 용서해주시비오.'라고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가인의 어리석은 경쟁심은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가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음이다.


생존경쟁이란 바로 이와 같다. 생존경쟁은 경쟁의 대상인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는 착각을 가진다. 그러므로 생존경쟁에서는 항상 둘 중에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경쟁이 끝나는 것이라고 여겨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온갖 음모와 술수를 동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경쟁의 상대자를 제거하고 자신만이 살아 남게 되었다고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가인의 예로 보아 그런 것은 결코 아님을 발견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경쟁자로 여겨 죽였으나 생존한 승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기회가 없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가인 스스로 택한 생존경쟁의 결과였다.


지금도 구 시대적인 생존경쟁의 사고는 항상 상대방을 제거해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상대방을 쓰러지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 간다. 결국 불필요한 싸움을 피터지게 싸워 피차 멸망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생존경쟁은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각오로 전개하는 살생(殺生)의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자아생존을 목표로 상대방을 살생하는 것이 생존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이라고 착각한다. 상대방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언젠가 자신이 당하고 만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에 가서는 자신도, 상대방도 함께 공멸(共滅)하게 되는 결과가 생존경쟁의 말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생존경쟁의 태도로 경쟁하는 듯이 느껴지고 있다. 상대방이 있기에 자기 교회가 손해라도 보고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빼내는 옹졸하고 졸렬한 행위를 일삼는다. 이제는 결코 상대방을 동반자로 여길 수 없고 오직 생존경쟁을 위한 피터지는 싸움을 위한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왜 재중 한인교회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한 것일까? 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그것도 선의의 경쟁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가 구 시대적인 생존경쟁의 어두운 전운이 감돌 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시대는 아름다운 경쟁의 시대였다. 한국에 선교하기 위해 한 날 한 시에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상륙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첫 선교사들은 상호적인 경쟁을 피했다. 그들은 우호적으로 지역적인 분할을 통해 한국선교를 전개했다. 침례교회의 첫 선교사도 그들과 상호적인 경쟁을 피하여 그들이 선교하지 않는 지역을 거점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했었다. 그런 결과가 오늘날까지 지역적으로 특정한 교파가 편중된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 이유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경쟁이 있었기에 한국교회는 세계선교 역사에 가장 찬란하다고 할 정도로 빠른 기간에 뿌리를 내리는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국선교의 지역분할적 전략으로 인해 약간의 형편적 불균형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국적인 입장으로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선교는 자기 집단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이 초기 선교사들은 다소 불균형적인 가능성을 간과하면서까지 상호적인 치졸한 경쟁을 피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더 큰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있었음이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경쟁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재중 한인교회들 속에서는 그러한 느낌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자기 교회의 교세를 확장시키기에 혈안이 된 듯한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너 때문에 우리교회가 성장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한 느낌으로 상대방을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교회만은 부흥해야 하는 것으로 믿고 행동하는 듯한 졸렬함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따라서 재중 한인교회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오직 자기교회의 성장은 상대방 교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견제하는가에 달려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음이 완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현실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이었다.


재중 한인교회들은 이제라도 불필요한 경쟁을 포기해야 한다. 하루 빨리 초기의 동반자적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서서히 분열되어 분규의 길로 달려가는 재중 한인교회들의 연합은 한층 더 강화되어져야 한다. 서로가 자신교회가 중요하다고 여기듯이 상대방의 교회도 매우 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공동의 과제를 향한 발걸음을 나란히 걸을 수 있어야 한다. 구 시대적인 생존경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상호적인 보완 속에서 아름답게 형성되어가는 연합을 공고하게 이루어 나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재중 한인교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공동적 승리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 중국에서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을 깨달아야 한다.


재중 한인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개체적인 세력화를 형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세력화는 집단화를 만들고, 집단화는 상호공존이 아니라 생존경쟁을 통한 상대방을 흡수하거나 통합하려는 극도의 이기심을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기적 집단화는 독선저긴 욕구의 팽창으로 인해 과부화가 걸리게 된다. 이기적 집단화의 과부화는 결국 공중폭발로 인한 공중분해가 일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적 교회는 종래 파멸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재중 한인교회의 모습은 자립이 가능한 최소의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조금 성장하게 되어 많은 성도가 모이게 되면 그 교회는 작은 교회들로 세포가 분열하듯이 분화(分化)되어야 한다. 하나의 교회가 대형화되어 큰교회가 되어 가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사도행전 시대에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대형화되어 결국은 교회가 무너졌던 전철을 재중 한인교회는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작은 교회로 중국땅에 널리 흩어져야 한다. 또한 작은교회로 서로가 연합하여 중국에서 크게 역사를 이루는 저력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개체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힘이 아니라 전체 재중 한인교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힘이야말로 이곳에 세우신 한인교회의 진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재중 교회가 자립이 가능한 최소의 교회를 지향(志向)하면 교회의 힘이 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지 말라. 스스로 약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상대방과 연합할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여럿의 연합한 작은 힘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재중 한인교회들이 스스로 연합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최소화를 지향할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재중 한인교회는 시행할 수 있을 것임을 믿는다. 한 교회의 부족함은 다른 교회와 더불어 협력할 때 상호간의 넉넉함으로 풍요로와져서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게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은 거침없이 계속 성취될 수 있음을 믿는다.


참으로 재중 한인교회들이 가야 할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개체적인 만능이 되기 위해 대형화의 길을 모색하지 말고, 소수의 부족함을 각오하는 분화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협력함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소수(小數)의 하나됨을 통하여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 크고 놀라운 사역을 넉넉하게 성취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수고와 노력이 재중 한인교회들 속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재중 한인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참 뜻임을 깊이 성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재중 한인교회들이 세워졌던 초기의 정신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서로가 동반자적인 자세로 아름답게 협력했던 그 때로 돌아가길 소망한다. 참으로 재중 한인교회들의 하나됨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가 양보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대협력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개체가 들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628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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