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월간 <너울> 2008년 9월호
이원태 |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연구실장
한글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그 의미와 조형적인 형태 등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다. 다만 한글을 활용한 조형물이나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데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특화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상품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또 조형물의 디자인이나 문화상품 소재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상품 판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고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씨 하나하나가 모두 디자인 소재
몇 년 전 보르네오 섬 북단의 소국 브루나이왕국을 여행하던 때의 일이다. 히잡(hijab)을 쓴 무슬림 여성이 ‘알라딘’이라는 한글이 디자인된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외국에서 한글을 발견한 기쁨에 말을 걸었더니, 당시 인도네시아의 최신 패션 제품이라고 했다. 아마도 아시아권에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던 때라 한글 디자인 가방이 유행한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내 기념 삼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그날 이후 여행을 계속하면서 한국 기업의 외국 현지법인이나 판매 대리점의 간판, 건축물, 심지어 기념품이나 여성들의 액세서리까지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황당한 한글 디자인 상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뜻 모를 한글과 잘못된 우리말로 디자인하거나 오용된 한글 디자인 상품들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외국에서 이런 상품들을 발견하면 약간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한글 오용을 걱정하기보다 가볍게 웃어넘기게 된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주위의 거리 조형물이나 건축물의 디자인, 심지어 여성들의 손가방이나 의상 디자인 등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의외로 한글 디자인 상품이 많았다. 다만 한글 문자를 단순히 활용하는 수준의 디자인 상품은 비교적 흔히 발견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한글을 응용한 구조물이나 건축물 등 환경 조형물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제 한글을 의미를 가진 말로만 사용하기보다는 한글의 조형성 자체를 활용하여 새로운 문화상품이나 아이콘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우리 문화가 세계에 점차 노출됨에 따라 우리 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한글은 그 과학성과 아름다움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외국에서는 한글의 언어적 가치가 아닌, 그 자체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상품’으로 인정받는다. 이에 대하여 한국전략연구소 신승인 소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글은 현대적이고 조형미를 갖추어 디자인 소재로 아주 우수하다. 가로, 세로, 직선, 사선, 네모, 동그라미 등이 골고루 섞인 문자이기 때문에 한글이 이뤄내는 형상은 기하학적이고 현대적이다.
또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글자는 2,350자이지만 완성형 글자는 1만1,172자에 이른다. 두께와 기울기 변형도 자유로워 다양한 글자꼴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각 문자의 조합으로 글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문자별로 색상을 입힐 수 있고 손으로 쓴 글자꼴도 활용할 수 있다. 붓뿐만 아니라 면봉이나 나무뿌리 등 다양한 재료에 각자의 개성이 더해지면 다양한 필기체가 나올 수 있다. 4,800만 명의 글씨들이 모두 디자인 소재인 셈이다. 그만큼 각양각색의 디자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라고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글 조형미 활용한 문화전략 있어야
한글을 읽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한글은 의미소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형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자 고유의 기능 강화나 문화 확산을 통한 문화전략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다양한 서체를 가진 한글의 뛰어난 조형미에 공감하는 분위기를 활용하는 것은 더 큰 문화전략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상상은 한글을 사용한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 좀 더 명백해진다.
이미 외국에서는 문자를 조형물 제작이나 지자체와 도시 CI 개발에 적극 활용하는 사례가 흔하다. 미국 뉴욕 시가 1975년에 ‘I♥NY’이라는 상징물을 개발해 관광사업 등에 적극 활용한 사례는 알 만한 사람은 안다. 그 뒤 ‘I Love New York’이라는 CM송까지 등장하면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는 ‘I♥NY’은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을 의미하는 상징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의 예술작품에서도 문자를 활용한 디자인이 한 도시는 물론 국가 전체를 상징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LOVE’ 조형물은 1966년 스테이블 갤러리(Stable Gallery)에서 선보였다. 그 뒤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은 뉴욕 시 6번가를 비롯하여 필라델피아의 러브 파크 등 미국 내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반기고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이 조형물은 다양한 버전으로 미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서울 강남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문자를 활용한 상징 조형물은 로버트 인디애나의 예술작품 외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파리의 신도시 라 데팡스(La Defense)의 신 개선문과 육군사관학교 앞에는 전 세계 분단국가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조형물이 서 있는데, 한글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말로 ‘평화’라고 쓰여 있다.
쉽지는 않지만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문자를 활용한 조형물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대학교 정문 조형물인데, 이 조형물은 각각 ‘국립’, ‘서울’,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ㄱ, ㅅ, ㄷ’을 따서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 중구와 전주 월드컵경기장에는 효 사상을 진작하기 위해 한글 ‘효’ 자를 디자인한 ‘효 헌창탑’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 중구와 전주의 두 사례가 단순히 문자를 활용한 조형물이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문자를 응용한 디자인 조형물이 있다. 매년 도자기축제가 열리는 경기도 여주의 생활도자관 광장에 설치된 도자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경기도 성남의 율동공원에 있는 책 테마파크에는 ‘책, 세상의 배꼽’이라는 부제를 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상징이 배꼽이라면 책은 지식이 성장하는 바탕이라는 의미리라. 책 테마파크에는 세계 각국 말로 된 바람의 책, 책의 역사를 그린 미로 형상의 시간의 책,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밑바닥에 깔린 하늘의 책 등이 책과 함께 즐겁게 호흡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이곳의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람, 시간, 하늘, 물 등 여러 개의 테마로 꾸민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은 ‘공간의 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서관이다. 책 테마파크 진입부에 있는 ‘바람의 책, 소리’라는 조각은 책을 이르는 각 나라의 언어가 자음과 모음이 분리된 채 대나무 숲과 한데 어우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예술적 한글의 미래
이러한 분야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아가는 작가 안상수는 그동안 한글이 인쇄물에 실리는 글자의 기능성을 뛰어넘어, 건축물의 일부가 되거나 의상의 디자인이 되도록 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한글의 조형성을 활용하여 사물에서 발견되는 한글의 이미지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풀어낸 결과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글은 소리 한 덩이가 하나의 글자이고 그게 바로 뜻과 연결되기에, 예술적인 한글의 미래는 한글이 의미에서 분리되는 지점에서 싹틀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한글이 조형 자체의 한글로 설 수 있는 지점이 창의력의 씨앗이며 한글의 이미지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라고도 했다. 서울 종로구의 쇳대박물관 건물의 철제 외벽에 설치된, 한글 자음 모양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한 ‘한글 담쟁이’라는 작품은 한글의 생명력을 잘 표현한다.
이렇듯 말을 활용한 작품들의 전제는 텍스트로서의 말의 가치, 즉 해독 가능성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서로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을 가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한글은 글이 아닌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글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그 의미와 조형적인 형태 등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다. 다만 한글을 활용한 조형물이나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데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특화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상품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또 조형물의 디자인이나 문화상품 소재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상품 판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고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 우리 사회도 요즘 공공디자인이나 거리환경 조형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8월 26일 코엑스 컨퍼런스홀에서 지자체, 환경 디자인 회사, 공공디자인 전문 연구소, 공공시설 제작사, 디자인 전문 회사, 건설사 등 관련 업체와 정부기관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오는 10월 말에 개최할 예정인 ‘2008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엑스포’ 설명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아름다운 도시환경을 위한 공공디자인 진흥사업의 일환으로 ‘공공디자인 가이드라인 기본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동안 각 지자체에서 무질서하게 진행한 공공디자인 사업의 실태를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원인 한글을 활용하여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문화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아름다운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당장 앞으로 정부가 광화문 일대에 조성하겠다는 이른바 ‘국가상징광장’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잘 담은 한글 조형물을 설치하여 한국의 랜드마크나 한국 문화의 상징 아이콘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참고자료
<위클리조선>(2007), 한류전략연구소 소장 신승일과의 인터뷰 <주간조선>(2007. 2. 25), ‘한글 디자인 입고 세계로 난다’ 한글다다-안상수 쌈지스페이스
이용제(2005. 2) ‘한글·한글 디자인·한글 디자이너, 어디에 있는가?’ <월간 디자인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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