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기독교의 발전 과정

수호천사1 2019. 2. 21. 09:37

기독교의 발전 과정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교를 아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신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내포한 종교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두 가지 기본원리 아래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전히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밝히려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역사 속에 구현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의 근거와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을 '사랑의 계약'이라고 한다. 본질이 선 이요 사랑인 하나님은 인간과의 계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하나님은 그 계약의 실현인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서는 이것을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셨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이 세상에 구현되는 원리로서, 이의 육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가장 특징적인 신관 인 삼위일체 의 하나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으로서, 그 자신이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의 3위로서,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나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3위는 하나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 의 차이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로서 구약성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살았고, 또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영적 존재이다. 

이같은 삼위일체의 신앙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그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구현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의의 핵심이며, 본질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교의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 한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자연계시에 의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올바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종교 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 그리스도교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성령강림절)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예수그리스도 시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 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 1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 ’을 근거로 BC 4년경 출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종말신앙 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특히 BC 3세기 초부터는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유대교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까지 약탈당하였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살되었다. BC 2세기 중반에는 반 그리스 전쟁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하였지만, BC 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믿고 있는 야훼신(하나님)이 그들 민족을 구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안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 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헤브라이어의 '마샤'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의 이 말 속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으며, 예수의 제자들도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6)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한다는 정치적인 반(反)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 사도들의 전도

하나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 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베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 바울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이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 로서의 감독 ·장로 , 부제 로서의 집사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2) 고가톨릭교회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를 지나 2세기 이후에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경전으로서 신약성서를 편찬하였고, 유대교에서 계승한 경전을 신약의 준비서로 보아 구약성서라 하여, 신 ·구약성서를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이 때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한다. 
이 시기의 교회에 명확한 개념을 부여하여 교회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통일에 대하여》라는 저서 속에서,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기관 이며, 교회의 주교 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가 하나요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하나임을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카톨릭’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하는데, ‘전체적’ ‘보편적’ ‘공적(公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로마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어, 오늘날 ‘카톨릭’이라고 하면 곧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 가톨릭교회는 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이단을 배척하면서 정통신학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 들은 성서적인 증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파 와 그리스도의 신성 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격으로써 일체 를 이룬다는 삼위일체 신학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325년의 니케아공의회 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신격 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3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충돌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 문제였다. 그 무렵 쇠퇴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황제숭배에 의하여 국세를 만회해 보려는 의도로, 황제숭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 전국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듯,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켰고, 교회를 키워 나갔다. 이렇게 되자 로마 제국에서는 회유책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는 313년에 밀라노칙령(勅令)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승인하였고,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3) 중세그리스도교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은 스콜라 신학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기초가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힘을 빌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로는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롬바르두스 등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신과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다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세워 《신학대전 》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에 의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는 신적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 ’ ‘견진 ’ ‘고백 ’ 등의 7가지 성사가 제정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들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W.오캄 등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성으로써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스콜라 신학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 그리스정교회 분리

국교로서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 로마 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전체 교회를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 중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세 교구는 7세기에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교구가 동서 양쪽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는 각각 비잔틴제국과 게르만족 국가 사이의 상이한 정치상황 탓으로 서로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는 황제를 교회의 수장 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 를 따르고 있었고, 서방의 로마교회는 황제권과는 독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협조체제는 무너져 갔다. 이 후 11세기에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와의 정면충돌로 결정적인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교회와 갈라져 그리스정교회로 독립하였다. 

- 교황권의 전성기

게르만 민족 중에서 중세 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프랑크족은 이미 5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교회와 제휴하여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교황의 지지를 얻어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한 피핀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벌하고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하였다(756).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인데, 이러한 경제적 거점을 얻게 된 교황은 세속적으로도 서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황제와 대립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가 죽은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서임권 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서로 다투었으나, 결국은 교황권이 황제권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 때는 교황이 서유럽의 전 군주 위에 군림하였다. 이같이 교권이 강대해짐에 따라,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세속화도 심화되어 갔다. 교황은 교황령의 지배자로서, 또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로서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게 되었다.

- 수도원의 개혁운동

교회가 부패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적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룬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 비롯된 은둔생활에 그 기원을 두지만, 이것을 사회적 공동체로 성립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이다. 그는 6세기에 몬테카시노수도원을 세우고, 청빈 ·정결 ·순명 의 생활로써 하나님을 찬미하고 세상에 봉사하는 수도생활을 창시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은 이 베네딕투스파의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그 후 11∼12세기에는 각지에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코회 와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회 가 유명하다. 이들 수도회는 사유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탁발생활을 하는 가운데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수도회를 탁발수도회 라고 한다. 수도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과 청빈생활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교 안에 신선한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학문연구와 사회봉사 등을 통하여 세계역사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4)교황권의 쇠퇴

절정기에 이르른 교황권은 봉건영주의 호응을 얻어, 십자군 원정(1096∼1270)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과 대립하여, 1309년에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유폐 시켰다. 이를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종교개혁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고 높은 변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운동은 몇 가지 시대적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 흐름들은 중세 신비주의 ·회의주의 ·르네상스 ·민족주의 등이었다. 중세 신비주의운동은, 후기 스콜라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고 하나님 이해의 이성적 추구의 가능성을 부인하자, 이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순수체험적인 영적 차원에서 얻으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 J. 타울러, T.아 켐피스 등이 이 운동의 대표자인데, 이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은 신의 내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 안에서 탄생하는 신(God being born within)’을 주장하였다. 이 신비주의운동은 주지주의적인 스콜라 신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의 생동감과 역동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중세기 회의주의운동은 15세기 전반부를 특징짓는 종교운동으로서, 교황청의 분열과 부패 등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였다. 이들은 중세 말기의 교회의 타락을 공박하고 교황의 절대성에 항거하여, 교황권이나 황제권의 근원은 모두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 권한은 각기 자체의 한계 내에서 선용되어야 하며, 교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아니되고, 교회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 모두 처형되고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들에 의하여 장차 16세기에 이루어질 종교개혁의 기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5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고전의 연구와 인문주의( humanism)로 집약시킬 수 있는데, 이러한 근대정신이 종교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전연구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문주의는 인간을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아래서 해방시키려는 운동을 싹트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신중심주의 였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그 때까지 로마교황청에 예속되어 있던 각 민족의 독립의식의 발로에서 형성되었다. 독일은 교황청의 착취를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던 지역의 하나였는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에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입장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가톨릭교회의 전승주의 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 와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가톨릭의 사제제도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 들의 보호를 받아 개혁운동을 성공시켰다. 그는 지방군주적 교회통치제를 확립하고, 1529년에는 제후들의 공동 커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H.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생활 전체의 성화 를 주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도 하느님의 소명 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하였다.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여 루터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특이하게 종교개혁이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발단하여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곧 교회의 지배자가 되는 ‘수장령 ’이 선포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영국국교회’로 분립되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회 라 불리는 이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유럽 각지에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퍼져 나가자 가톨릭에서는 무력 으로 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1545년부터 6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열린 트리엔트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교의가 재검토되고 가톨릭 신학이 재확인되었다. 또 I.로욜라가 창시한 수도회인 예수회는 가톨릭의 포교를 위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획기적인 전도사업을 폈다. 


6) 근대 그리스도교

종교개혁 운동은 제도적인 가톨릭교회에 묶이어 있는 신앙을 개인에게로 돌리려는 데서 일어난 운동으로, 신학적으로는 그 때까지 교회의 정통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이 발흥하고 과학이 진보하자,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은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신론은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사상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상인데, 이것은 근세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유물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신론은 우주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한편 독일의 합리주의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을 사람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역사적인 저술로서 연구 비평하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은 합리주의적인 흐름에 반대하여, 근대 조직신학 으로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은 독일의 F.E.D.슐라이어마허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1822)은 당시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종교와 철학 및 윤리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직관과 감정에 의한 개인의 절대귀의의 체험을 종교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의 주체적 종교를 역사종교로 완성시킨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의 A.리츨은 칸트의 인식론 위에 그 가치판단설을 세워,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가장 근본적인 가치판단은 인간이 자연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인격이라는 판단으로서, 이러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정신의 승리를 얻는 실천적 활동이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이 실천적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기초라는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고, 여기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확인되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에 J.웨슬리를 중심으로 하여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이성적 ·신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영감에 의한 종교체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리었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어, 메서디스트 처치(감리교회)를 형성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뒤 미국으로 전파되어 침례교회( Baptist Church)와 함께 2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룩하였다. 근대 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밖에 여러 교파를 파생시켰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Presby- terians)가,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에 의하여 조합교회( Congregational Church)가 파생하였다. 이 조합교회는 곧 미국으로 건너가 큰 교파를 형성하였는데, 조합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작은 교파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퀘이커파(Quakers)와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근대사회에 휴머니즘 신상을 전파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7) 현대 그리스도교

계시종교이며 또한 역사종교로서의 특징을 지니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000년 동안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하게 인류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인류역사상 그 어떤 세력보다도 깊은 변화를 초래한 영적 세력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세속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종교적 이해와 통찰력으로써는 파악될 수 없으며, 영적 신앙의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지성의 이해와 통찰력으로써 파악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종교가 신앙을 잃고 속화된다는 뜻으로, 극단적으로는 그리스도교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신앙의 종말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부, 특히 변증신학에 의하여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를 ‘비신화화 ’하려는 신학적인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를 세속화시키는 데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회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는 2,000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난관을 겪었으나 늘 새롭게 변모하면서 그 본질을 지켜 왔다. 리스도교회는 본래의 영적 위치로 되돌아가는 힘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은 바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20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갱신운동들은 20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초월 체험을 겪음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새로이 부상(浮上)하고 있는 전례 ·종교음악 ·명상 ·기도 ·경건신앙 등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의 하나로, 교회일치 운동이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유물론적 경향에 맞서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단결하려는 움직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910년 이래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일치운동으로도 번역되는 이 운동은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어, 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일치운동이 목적하는 바의 일치는, 특정한 교리나 의식 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분의 성령이 가져다주는 신앙정신적 일치를 상호 대화 속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 일치를, 다만 교회 안의 일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인류의 일치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여,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교회 전체가 일치 협력하자는 데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 역사 속에서의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 천주교 신자가 기술한 자료로 일부 용어(하느님->하나님/바울로->바울 등)는 기독교 용어로 수정하였습니다. 

blog.daum.net/matsy/7167711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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