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그것은 실수였는가
각 시대를 밝힌 종교 개혁자들
역사를 통하여 각 시대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로부터 전수된 진리의 횃불을 밝히는 교회와 무리를 보존해 오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성경이 말하는 초창기의 순수한 진리를 그대로 고수하는 이 남은 무리는 대부분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핍박과 시련과 고문과 어려움을 당했으며, 진리의 빛을 이 세상에 비치고 전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고난 속에서 진리의 빛을 후세에 전한 빛의 전수자들은, 결국 후일 어두워가는 신앙의 필드에서 종교 개혁의 진리의 횃불을 밝혀들 용사들을 길러 낸 진정한 종교 개혁자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자신이 진리의 빛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빛을 환하게 비추고 세기를 밝힌 진정한 종교 개혁자들이었던 것이다.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을 찾아서
1세기~7세기
1세기|초대교회
1세기를 빛낸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께로부터 직접 진리를 듣고 배운 사람들이었다. 1세기에 탄생한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하심을 입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사도교회였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세상에 진리의 빛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초대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그들의 사명을 성취하였다. 초대교회는 초기의 빛의 전수자로서 진리 때문에 심한 핍박을 받았는데, 특히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다. A.D 70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오히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도들은 각 지역에서 그들의 힘과 목숨을 다하여 진리의 빛을 전하며 그 당시를 휩쓸고 있는 종교와 신앙의 사조를 경고하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참 복음을 전했다. 투옥과 매 맞음과 굶주림과 쫓김이 이 초기 개혁자들의 몫이었고 순수한 진리의 복음을 전한 값이었다.
역사의 기록에는 12사도들의 대부분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야고보는 진리를 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으며, 다대오와 도마도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처참하게 순교를 당하였다. A.D 96년에는 사도 요한이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에 의해 잡혀가 끓는 기름 솥에 넣어짐을 당했으나 죽지 않자, 죄수들만 보내지는 밧모섬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계시를 받고 그 유명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후세에 예언의 빛을 밝히 비춰주는 일을 하게 되었고,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 야고보, 바울, 베드로 같은 제자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게 한 그 당시의 잘못된 종교를 뒤엎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탄생하게 했던, 사도들의 순교와 피의 대가로 치러진 초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는 복음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2세기|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
2세기에 빛의 전수자들과 종교 개혁자들은 수많은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 당시 등장한 이교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극렬한 핍박에 의해 수천수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위한 증인으로서 그들의 생명의 피를 뿌렸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로마의 도시 외곽에 있는 카타콤의 지하동굴 안으로 무서운 핍박을 피해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 컴컴한 땅 밑에 숨어 살면서 비밀리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재물과 자유를 잃었지만, 아무것도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고 단념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믿고 알고 있는 진리의 빛을 전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소망이었다. 시련과 고통은 그들을 더욱 구세주 예수께로 가까이 이끄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그들의 간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 되었고, 순교자들의 피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태어나게 하는 종교 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3세기|안디옥의 루시안
3세기 역사에 아시리안(Assyrrian)과 네스토리안(Nestorian) 교회로 알려진 동방의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중국까지 퍼지게 되었다. 물론 그 교회에는 도마가 전한 인도의 그리스도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안 교인들은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아시리안 교회의 지도자였던 안디옥의 루시안은 그 당시 서서히 퍼지고 있던 마니교와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섞이는 것을 막은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였다. 성령께서 이 위대한 학자인 루시안을 택하셔서 그에게 영적인 안목과 이해를 주셔서 세기를 거슬러 인류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하셨다. 루시안은 거짓 교리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으며, 인간의 유전과 전통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보다 더 높이 올려놓는 것을 비판하고 성경 외의 외경을 거절하였다. 그는 안디옥에 신학교를 세웠으며, 헬라어 신약 성경을 편찬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이교인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신약성경을 전해주었다.
4세기|왈덴스인들
4 세기에 살던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켈트 교회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성경만을 그의 신앙과 가르침의 권위로 삼았던 사람이었는데, 성경을 가르치는 선교 훈련학교를 세워 많은 신실하고 열심 있는 선교사들을 배출시켰다.
또한, 4세기 빛의 전수자와 진리의 개혁자로 유명했던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북부와 프랑스의 남부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지키던, "산골짜기의 주민"으로 불린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이탈리아 산골짝의 도피처로 도망쳐 온 신실한 왈덴스인들의 뿌리는 사도 바울이 이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5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북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있는 알프스 산은 배도한 교회였던 로마 가톨릭교의 분노로부터 이 신실한 무리를 보호하고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그리하여 오류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이 이들로부터 세대를 거쳐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발도우 인이라고 불렸던 왈덴스인들은 유럽에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로 인해 이 번역판이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신앙과 행동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믿었으며, 이런 그들의 신앙은 맹렬한 분노와 생명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핍박의 목표물이 되게 하였다. 수많은 왈덴스인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비질란티누스는 알프스 산맥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유명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성경의 명확한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위에 굳건히 선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그는 그 당시의 종교를 개혁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는 중, 성직자들의 수도원 생활과 기독교 안에 스며든 많은 이교의 풍습들에 대해 항거하였다. 종교 개혁자로서의 그의 힘있는 지도력 하에서 알비젠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위에 굳게 서게 되었으며, 그들이 믿는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에게 투옥과 고문과 죽음이 닥쳐왔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고, 교황권의 무지와 통치 속에서 죽어가는 이 세상에 진리의 환한 횃불을 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교 개혁의 정신은 훗날에 큰 결실을 보게 되어 대 종교 개혁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5세기|중앙아프리카 지역
5 세기 아시아의 알마니안 중에 속해 있던 중앙아프리카는 로마의 다스리는 구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꽤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 여러 세기를 통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인도자로 삼는 신실한 사람들로 존재하고 있었고, 로마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서 벗어나 순수한 진리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성서적인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전수한 진리는 각 나라로 퍼져 면면히 맥을 이어왔고 종교 개혁의 풍토를 마련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6세기|유럽에 복음 전한 콜롬바
6 세기에 진리의 빛을 비춘 개혁자 중에 콜롬바(Clumba)가 있었다. 콜롬바는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세운 선교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오직 하나님의 성경 말씀만으로 사람들을 교육하는 선교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 섬은 위대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디누스(Dinooth)는 웨일스와 영국의 켈트 그리스도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콜롬바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선교사였다. 그도 역시 콜롬바의 본을 받아 켈트 선교 대학을 세우고 복음전도의 모든 방식을 콜롬바의 학교처럼 실시했다. 그는 웨일스와 영국에 굳건히 서서 거짓 교리나 오류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힘썼고, 그러는 동안 진리와 복음은 보호를 받았다. 콜롬바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활동으로 인해 그의 복음 사업은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특별히 프랑스에서는 그의 교육과 복음 전도가 군트렘 프랑스 왕의 환영과 후원을 받게 되어, 올바른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선교 훈련 학교가 세 개나 프랑스에 세워지게 되었다. 경건함과 진리와 사랑과 믿음으로 무장된 콜롬바와 그의 제자들은 복음의 씨앗을 이렇게 유럽 전역에 뿌렸고, 그리하여 독일과 스위츨랜드와 이탈리아에도 진리의 복음이 제시되게 되었다.
7세기|영국에 복음 전한 아디안
7 세기, 아디안은 영국 이교도들의 대표 민족인 앵글로 섹슨 족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그 역시 콜롬바의 제자로서, 그의 인내심 있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성품과 진리에 굳게 선 그의 열정은 그들을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교화시키는 데 성공하게 하였다. 그의 수고로 영국에도 복음 선교훈련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리의 빛은 유럽의 중심이 된 영국에 밝히 비추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y
신앙 2부: 중세의 종교 개혁자들을 찾아서
12세기~18세기
12세기|피터 왈도
12 세기에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든 종교 개혁자는 피터 왈도였다. 그는 프랑스 리옹의 부자 상인이었는데,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전 재산과 열정을 바쳤다. 그는 교황권을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나오는 "죄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또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 번째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는 교황권의 핍박을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명령을 받았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겨 다녔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믿거나 따르는 사람들은 로마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였으며, 그런 사람들의 재산과 땅의 몰수는 물론, 그 가족들을 위해 장례식이나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죽은 몸을 땅에 묻는 것도 금지당하였으며, 그들은 지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받고 살았다. 왈도는 후에 알프스 산으로 피해 신실한 왈덴스 그리스도인들의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고, 성경을 번역하고 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쳐 헌신하였다.
14세기|잔 위클리프
14 세기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는 잔 위클리프였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는데, 그는 로마의 교황권이 인간의 유전과 전통을 성경의 가르침과 권위보다 위에 두는 것을 반대하여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용감하게 교황권이 각 나라의 왕들을 지시할 권리가 없다는 것과 천주교 신부들의 부패 실태를 고발하였다. 그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신학 교수를 거쳐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서임되자,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고의 권위는 성서에 있다고 확신하고, 교황권으로부터의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표방하고 반 교황 정책을 취하며 교회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교황에 대한 공세, 특히 교회령 재산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1379년 이후에는 더 용감하게 목소리를 높여 성직자의 악덕과 교회의 새크러멘트(sacrament: 미사, 성사) 가운데 특히 성찬설을 성서에 의하여 비판하고, 참된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 당시는 성경이 라틴어로 된 것밖에 없어서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없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 1384년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수십 편의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핍박을 받아 대학의 직장과 귀족의 지지를 잃고 은퇴 당하였다. 그래도 그는 설교를 계속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진리로 가르침으로써 명설교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죽었다. 그는 1415년 콘스탄스 가톨릭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그의 유해는 저서와 함께 불태워졌다. 강물에 뿌린 것, 강물 따라 흘러 대양으로, 전세계로. 로마의 교황권은 위클리프의 개혁 사업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펼쳐 놓은 복음과 뿌린 복음의 씨앗은 유럽 전역을 진리의 복음으로 물들였고, 후에 이 운동은 protestant 항거, 곧 개신교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15세기|후스와 제롬
15세기에 진리의 빛을 이 땅에 비춘 개혁자는 진리를 위해 장렬한 순교를 한 "후스"와 "제롬"이었다. 후스는 현재 체코인 보헤미아 남부에서 태어나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학장과 총장직 등을 지냈다. 그는 1400년 가톨릭 사제가 되었는데, 위클리프의 설을 받아들여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성직매매 등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그 당시 분열과 혼란 중이던 로마 교회는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은 후스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핍박과 위협에도 후스는 여전히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교회는 1414년에 콘스탄스 공의회에 후스를 소환하여 그의 저서에 있는 이단사상으로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이를 거절하고 진리에 굳게 서서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했다.
제롬은 후스의 동역자로서 처음에는 죽음을 무서워하여 망설였지만, 후스의 뒤를 이어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종교 개혁을 외치다가 그도 순교하였다. 후스와 제롬은 죽었지만, 후스의 가르침과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많이 늘어났다. 교황권이 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고문했지만 그들의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식을 줄을 몰랐다.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년 동안 몰래 성경이 가리키는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그 중 많은 사람이 알프스 산에 숨어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왈덴스인들과 같이 되었다. 15세기가 끝날 무렵 보헤미아에는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200개의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16세기|에라스무스, 루터
16 1.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네덜란드의 수도승이면서 그리스 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교회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신실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의 위대한 헌신으로 헬라어와 라틴어 신약 성경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성경의 많은 부분이 동방 헬라의 문헌을 참고로 하였으며, 로마 교회의 거짓 교리를 바르게 교정한 성경이었다. 에라스무스가 번역한 성경은 유럽 전역에 걸쳐서 개신교의 개혁이 가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마틴 루터(Martin Luther)
16세기에 일어난 유명한 종교개혁, 곧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상 가장 현격한 변화를 가져온 개신교의 혁명은 독일의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던 중,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라는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가 깨달은 진리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 조항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임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의 조항문과 개혁의 요지는 유럽 전역에 불붙듯이 퍼져 나갔다. 그 당시는 성경의 진리와 맞지 않는 인간이 만든 모든 유전과 로마 교회가 세운 전통이 사람들의 신앙을 좀먹고 있었고,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제도 속에서 고행과 금식과 행위에 의존한 구원론으로 신음하던 중이었다. 루터는 과감하게 일어나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외쳤다. 그는 진리에 홀로 선 채 로마 교황권의 거대한 분노에 맞서 싸웠다. 많은 사람이 루터의 가르침을 듣고 성경과 맞지 않는 로마교회의 오류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종교에는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둥이 되는 굵직한 진리가 개혁되어 세워지게 되었고, 오랫동안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고 무겁게 누르던 오류의 그늘이 조금씩 벗겨지게 되었다.
루터는 그런 와중에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성경의 가르침 위에 굳건하게 서서 교황권의 오류를 지적하고 엄청난 세력과 권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 도전한 루터의 희생과 노력으로 비로소 이 세상에는 개신교(protestant), 즉 "항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개신교가 태어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루터의 종교개혁 기본 요지의 세 가지는, 첫째,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고,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나 미사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 셋째, 천주교의 사제제도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독일 제후들의 보호를 받아 개혁운동을 성공하게 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3.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
네덜란드의 천주교 신부였던 메노 시몬스는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유아세례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톨릭 교회를 떠나서 재침례파(Anabaptist)에 합류하였고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는 천주교회에서 사제가 하는 세례, 특히 유아세례는 무효이며,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침례는 물에 담그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들이 주장하던 이론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며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증명한,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황권이 만든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 그들은 극렬한 핍박을 받았으며, 수많은 순교자가 그들의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 피를 뿌렸다. 현재 침례교회 등, 이러한 재침례파의 발자취를 따르는 개신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4. 요한 칼빈(John Calvin)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 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 신부 요한 칼뱅이 일어나 유럽의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휴그노"(Huguenots)파라고 불렸는데, 당시 프랑스의 국왕 프란시스 1세는 이들 개신교도의 개혁 운동을 묵인해 줌으로 휴그노파에 의한 놀라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 운동으로 인해 천주교의 "미사"와 성찬설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정죄를 받게 되자 이에 분노한 교황권으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1572년 성 바돌로매 성일에 수만 명의 휴그노파가 살육을 당하였다. 많은 휴그노파가 프랑스로부터 도망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가 비록 예정설을 확립하여 기독교에 또 다른 오류를 들여오는 결과가 있기는 하였지만,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생활 전체의 성화를 주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여 루터 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18세기|존 웨슬리
18 세기, 근대의 가장 혁신적인 종교 개혁자 중에는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있다.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복음주의 운동을 펴서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에 큰 영향을 끼친 개혁자이다. 그는 특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고, 성화와 믿음에 따른 행동과 순종에 대하여도 강조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복음전파, 거듭남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마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많은 핍박과 심지어 출교를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복음 전도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몰고 와 영국을 비롯하여 미국 전역에 놀라운 신앙의 부흥과 개혁을 가져오는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으로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y
우리는 앞 시대를 살고 간 많은 개혁자의 은혜를 입고 있다. 그들의 사투와 고난과 시련과 순교가 없었다면 우리는 진리와 참된 복음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기독교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복음과 가르침은, 우리 선조가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고수했던 성경의 진리와 복음에서 완전히 떠난, 바벨론의 오류의 포도주가 섞인 가르침들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정말 기독교가 개신교의 정신을 버리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 가르쳐지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들이 우리의 선조가 그렇게 항거하고 반대하던 천주교회의 오류에 기초를 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앞서 간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리의 횃불을 밝히는 이 시대의 종교 개혁자들이 되자!
신앙 3부: 종교 개혁, 그것은 실수였는가?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 문화와 사회와 경제, 그리고 종교 간에 있던 모든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한 때, 천주교회와 개신교, 그리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사이에 확연한 분리가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협동의 시대가 이르렀다. 신앙 문제에서 서로의 차이를 극소화하려는 현 사조와 흐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종교 개혁, 그것은 실수였는가?"
정말 그것은 실수였을까? 16세기를 뒤흔들며 일어난 그 놀라운
종교 개혁의 개혁자들이, 근 2천여 년간을 존재해 온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로마 교회에 항거한 그 일이 정말 너무 조급한 소치였는가?
개신교주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천 년 이상이나 로마 가톨릭은 서방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독점하여 다스렸다. 로마 교황은 각 나라와 정치가와 왕들 위에 오랫동안 군림해 왔고, 종교가들과 정치가들은 그 막강한 세력에 반대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원칙의 놀라운 힘이 유럽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자리 잡게 되자, 16세기에 이 개신교의 정신은 유럽 전체에 산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부흥과 더불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손길에 의해 그 당시 로마 교회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던 그리스의 문학이 부활하였으며, 이 계기로 인해 에라스무스 같은 석학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개혁자들은 이 에라스무스의 성경 때문에 진리를 연구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고, 종교 개혁시대 동안 개혁자들이 번역한 모든 성경의 원본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더하여 인쇄기가 발명되었고, 성경을 출판하는 일이 더 쉬워지게 되고, 성경은 인간의 양심을 깨우게 되어 개신교의 정신이 퍼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을 일으킨 개신교주의 원칙과 정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개신교도들 사이에 교리를 이해하는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뚜렷한 교리와 진리로 연합된 개신교인들을 로마 교회로부터 확실하게 분리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 제사장 제도 차이점
하늘의 제사장이시며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고 인간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성경의 진리와는 달리, 지상의 제사장인 인간이 죄를 용서하며, 하늘과 땅의 권세를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하는 로마 교회의 제사장 제도의 차이점.
a 하늘과 인간을 분리해서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게 하고 그 사이에 인간이 중간 역할을 하도록 개입시키는 로마 교회 제도의 오류.
b 진리의 결정권자로서의 성경 권위보다 교황과 교회가 가지는 권위를 더 위에 두는 제도.
개신교주의(protestantism)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의무와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개개인 사이에 맺는 직접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권 중심의 로마 가톨릭이 지정하고 만든 특성이 있는 종교를 가지기 거부하였다. 이런 개신교주의 사상은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정치 구조 민주주의를 탄생하게 하였는데, 교회가 국권 위에서 다스리게 하는 로마 천주교의 원칙과 정신 아래서 이런 정치 구조는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신교의 정신 쇠퇴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의 개념이 점점 세속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으며, 개신교주의의 원칙과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기독교에도 세속적인 개념들이 섞이게 되어 진정한 개신교의 정신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로마 교회의 원칙과 정신에 항거하던 개신교의 정신은 이제 더는 기독교 안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교황권에 의해 인간의 권리가 심하게 학대당하던 과거는, 개신교의 가르침과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종교 개혁을 외치던 개신교 선구자들의 힘찬 목소리는 잊힌 채, 이제 개신교는 천주교의 정신과 원칙에 대해 친근감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 가톨릭이 비록 그들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인정하기는 하는 상황이지만, 현재 많은 개신교인은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화해와 치유의 제스처를 보이며 천주교의 과거의 범죄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물론 성경의 원칙인 자비와 용서의 정신은 모든 사람과 일에 대해 관용을 보일 것을 지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종파를 초월한 협동과 지구촌 운동을 통해 종교 연합을 꾀하려는 풍토는 자칫 과거에 그렇게 힘들게 배운 교훈을 잊게 하는 위험천만한 일일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 아닌 인간이 꾀하는 연합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천주교회가 과거에 행했던 "신자들을 잘못 인도한 처사"에 대해 많은 사과를 거듭한다 할지라도, 중세에 가졌던 교황권의 정신과 원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회가 그들의 진정한 뿌리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아마도 현재 교황권에 대해 나타내고 있는 호감과 선호도일 것이다. 요즈음 날이 갈수록 자신이 모든 교회와 기독교의 머리라고 더욱 빈번하게 선포하는 교황을 목격할 수 있다. 어떻게 성경의 진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고 인간의 유전과 전통과 오류로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대체한 교회가, 또한 요즈음 아동 성범죄를 일으킨 신부나 성직자들의 숫자와 면모가 엄청나게 밝혀져 세상에 놀라운 충격을 주고 있는 교회가, 진리와 의를 마땅히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함에도 하나님의 의의 원칙을 보여 주는 대신 성직자들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을 하는 신부들과 성직자들을 그렇게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교회가, 어떻게 모든 기독교의 머리라고 선포할 수 있는가?
개신교회가 쇠퇴해 감에 따라 가톨릭 교회는 지구촌과 정치계에 점차 손을 뻗쳐 그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지금 천주교회가 관여하고 세력을 미치는 나라들은 천주교 국가들이 아닌, 국민의 많은 수가 개신교인인 나라들이며, 또 이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바로 여러 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계의 정치를 컨트롤하던 결과로 나타났던 현상들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변한 것은 개신교회이지 가톨릭 교회가 아니다. 오늘날 각국에서는 그들의 정치가들을 파견하여 교황을 알현하게 하므로 교황을 기독교의 주인으로 대접하고 있다. 미국의 초기 시대나 배경에서는 한 국가의 지도자가 교황을 만난다는 사실이 뚜렷한 제지를 받았었는데, 옛날에는 가톨릭의 지도자와 개신교도들이 서로 대화의 통로를 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교황권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계 13:3)라고 하며 다시 세상을 다스릴 것을 언급하고 있다.
개신교의 선조가 세운 미국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 번째 짐승으로 표상된 교황권에 대한 예언은, 마지막 때에 교황권의 세력이 부활하여 그의 종교적, 정치적인 제재를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종교 핍박의 큰 세력을 회복한 교황권과 또 다른 큰 세력 미국에 대하여 묘사하며 끝이 난다. 미국을 건국한 선조들은 한 국가가 로마 가톨릭에 의해 컨트롤을 받고 다스려질 때에 그 중앙 집권적인 체제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인간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제한을 받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황권의 세력에 의해 다스려지고 학대받았던 경험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와 정치세력이 서로 분리되도록 헌법을 세웠다. 그들은 종교에 정치적 세력이 가미될 때 그 세력은 연약한 인간 각 개인 위에 얼마나 강하게 군림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종교 개혁을 실수라고 말하는 현 개신교
슬프게도 개신교회는 힘과 파워를 갈망하는 추세로 흐르고 있다. 이제 개신교회는 영적인 힘보다 정치적인 힘을 더 원한다. 개신교는 여러 가지 연합 기구들을 만들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치의 판도와 흐름을 조종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한 그런 개신교의 뒤 배경에는 교황권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개신교는 오히려 성경의 뚜렷한 진리를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방해하는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명확한 진리를 곧바로 제시하지 못하는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을 진리가 빠진 거짓 연합으로 모으고 있다. 오늘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수단으로 거룩하고 분명한 진리를 사용하기보다는 예배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현대 연예오락의 문화 풍토는 자아를 높여준다. 인간의 자아가 높여지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진리의 근원을 떠나 자유주의의 가르침과 자유주의의 예배형식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다.
천주교회의 교리의 혼돈과 영적 능력의 결핍이 개신교회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 증거로 이제 개신교회는 16세기에 있었던 종교 개혁을 실수라고 부르고 있다. 개신교주의 정신의 쇠퇴는 예전에 있었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의 업적을 오히려 공격하고 비판하는 현상을 가져왔는데, 로마 가톨릭의 입김 아래, 그리고 "새 세계 질서"의 종교와 정치를 컨트롤하려는 움직임에 길을 비켜주며, 개신교는 중세 암흑시대의 핍박과 잔혹했던 행위를 묻은 채 역사가 다시 기술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적인 교회의 지지자들은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 개혁을 무용지물이었던 실패작이라고 덧칠을 하며 성경의 예언이 미리 예견해 준 마지막에 등장할 핍박과 압제가 나타날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몰고 가고 있다. y
신앙 4부: 종교 연합, 무조건 기뻐해야 할 것인가?
만일, 종교 개혁자 루터가 지금 살아나서 현재의 기독교를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많은 개혁의 선구자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리고 자신이 숱한 고난과 위협과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이룩해 놓은 개신교주의의 정신과 원칙이 완전히 와해된 현재의 기독교와 종교 개혁을 실수라고 부르며 성경의 진리나 교리를 도외시한 채 천주교와 무조건적인 연합과 동맹을 맺은 개신교를 본다면 루터는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1) 천주교와 개신 교회의 공동 선언문
몇 년 전 한국의 기독교계는 전해지는 한 소식에 환희의 박수를 보내며 대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 소식은 다름이 아닌, 500년 동안 나뉘어 있던 천주교와 개신교 종파 간에 이루어진 합의에 대한 소식이었다.
2006년 7월 23일, 한국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 총회 때에 로마 교황청과 세계감리교협의회(WMC)가 "의화 교리"(개신교에서는 "칭의의 교리"라고 함: 역자주)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교황청 교회일치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과 세계감리교협의회 "선데이 음방" 회장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들은 서로의 주장에서 조금씩 양보하는 "구원관"에 서명함으로써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연합을 이루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의 대부분 기독교인은 환호를 보내면서, 이것은 두 종파 간에 있던 불화와 전쟁을 종식하는 종교의 놀라운 진전과 발전의 징조라며 반기고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성경의 진리와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 생명과 가족과 재산을 버리면서까지 싸우다 죽은 순교자들과 개혁자들에게도 이 소식은 반갑고 놀라운 발전의 소식일까?
1. 천주교와 루터 교회의 공동 선언문
종교 개혁자 루터 후예들의 교회인 루터교회 세계연맹은 벌써 오래전부터 교황청과 대화를 시도하여 일치방안을 모색한 끝에, 1999년 10월 "의화교리"(칭의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끌어내었으며, 이제 세계감리교협의회도 7년 만에 이 선언에 동참키로 선언함으로 각 종파의 "종교 연합 운동"(ecumenical movement)이 이루어졌다. 2006년 7월 23일에 한국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렸던 세계 감리교대회(WMC) 에큐메니컬 예배 때 루터교 세계연맹의 이스마엘 노코 사무총장은 "의화(義化)교리"에 대한 합의 공동선언문'(Jointed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흔쾌히 공식 서명을 하며, 감리교회와 천주교회와 같은 교리를 믿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만족을 나타냈다. 루터 교회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반대하며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루터의 가르침을 받들어 생긴 교회임에도 말이다.
복음의 깊은 의미와 가르침을 모르는 많은 기독교인은 "구원론"에 대한 종파 간 합의에 대해 반색을 하며 이 공동 선언문을 세계 종교 평화가 이루어지는 혁신적인 청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성경의 진리에 맞지 않은 교리를 표면적인 단어의 의미와 뜻만을 살짝 바꾸고 양보한 채,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진리에 대한 타협이며, 선구자들의 믿음과 가르침을 버리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기독교에는 더 이상 종교 연합운동이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개신교는 가르침이나 정신에서 이미 종교 개혁 전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리나 진리의 문제가 서로 그렇게 타협을 하거나 양보할 수 있었다면, 왜 그렇게 치열하고 놀라운 세기의 종교 개혁이 필요했겠는가? 그것이 단지 단어의 표면상 의미의 작은 차이점에 불과했더라면, 왜 많은 순교자가 그들의 눈빛과 고개 한번 끄덕거림으로 그들의 신앙을 취소하거나 타협함 없이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가? 정말 그것이 그렇게 쉽게 양보해도 될 만한 가벼운 문제에 불과했다면, 왜 많은 선구자가 그 문제 때문에 그들의 전 생애와 목숨을 걸었겠는가? 재침례파들은 물을 뿌리는 세례가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수만 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를 바로잡으며, 오직 진리가 말하는 대로만 살고자 했던 개혁자들의 신앙과 믿음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2. 구원론의 차이란?
이번 공동 선언문에서 합의를 본 구원론, 즉 "의화교리"(칭의의 교리)에 대한 합의는 서로 조금씩의 양보(?)를 함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충돌되던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루터교 및 개신교의 주장과, "인간은 신앙과 함께 행위를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라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교리 사이에 합의점을 찾음으로 완성되었다. 즉, 신앙에는 행위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맞는다고 동의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개신교가 정의하는 "행위"의 의미와 천주교가 정의하는 "행위"의 의미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다. 천주교에서는 신도들이 반드시 미사에 참석하여 성찬식을 먹어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천주교회에서는 성찬식에서 떡을 먹을 때 그 떡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살로 변하여 우리의 죄를 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의무적으로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 성사를 해야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 또한, 성직자들이 해석해 놓은 성경의 해석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중보자의 위치에 있는 마리아와 교황과 성인 숭배와 고행 등을 통한 인간의 선행과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또한, 선행을 베푸는 일을 해야 하고, 천주교회가 만들어 놓은 전통과 유전을 따라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고 믿는 개신교의 "행위"의 올바른 정의는, 믿음의 결과로 순종과 행위가 생기는 것이라고 믿으며,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한 생활, 곧 성화의 생활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믿음과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서로 합의한 천주교와 개신교의 "행위"의 정의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2) 진리를 배제한 화해, 이대로 좋은 것인가?
1999년 공동 선언문이 발표되었을 때,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합의에 근거, "몇 세기 만에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 같은 길 위를 걷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감리교는 루터교와 가톨릭의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문에 동의한 근거를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중심사상인 "선행 은총"이라고 설명하며, "선행 은총"의 개념에는 "개인의 신앙"과 "선행의 실천"이 이미 조화되고 있으므로 합의문에 동참하는 것은 가톨릭과 루터교와 감리교의 기존 교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이 서명이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에서 이뤄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한반도 상황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으며 루터교 세계연맹의 이스마엘 노코 사무총장은 "이번 WMC 대회의 주제가 '화해'인 것에 비춰 이 서명식이 특히 적절하다."라고 밝혔다. 감리교 세계대회에 하루 앞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한 을 개최, 양측의 발제자와 논평자들이 교회 일치에 대한 주제 발표와 토론을 주고받기도 했다.
감리교의 존 웨슬리가 말한 성화의 개념, 즉 "선행과 행위"의 정의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선행과 의미가 아주 다른 것으로서, 존 웨슬리는 믿음과 신앙에 따르는 순종과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 것이지 천주교의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개신교는 교황권의 정책을 따라가고 있다. 1994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보내진 교황의 조서에 의하면, 개신교에 오순절 성령 운동과 축제 예배를 일으키고 퍼지게 하여 교파 간의 차이점을 없애는 데 주력하라는 칙령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개신교는 가르침이나 복음에서, 또한 지향하는 목적과 정신과 방향에서 종교 개혁 이전의 상태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마치면서..
종교 개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루터가 미처 세세하게 개혁해 놓지 못한 진리의 부분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하는 것이 후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에도, 성경의 진리를 배제한 채 화해와 용서만을 부르짖는 개신교는, 이제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종교 개혁의 정신과 뿌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역류하고 있다. 우리는 투철한 개신교주의의 정신과 원칙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에 섞인 바벨론의 오류를 가려내어 성경이 말하는 확실한 진리에 굳게 서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대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종교 개혁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종교 개혁자의 정신과 원칙을 가지고 살자!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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