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역사 속의 교회

수호천사1 2019. 2. 21. 09:51

역사 속의 교회
                                                         

제 1 부 초기 교회 

 

제 1 부에서는 교회의 초기 성장을 관찰하려고 한다. 예루살렘의 작은 회중이 어떻게 여러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거대한 조직이 되었는지 교회의 확장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수적인 면과 지역적인 면에서 커가면서 조직과 통솔의 관리 형태로 발전한다. 또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 커가면서 신중하게 신앙 고백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시작된 얼마 후에 교회는 핍박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지만,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이러한 핍박에서 벗어나는지 살펴볼 것이며 어떻게 기독교가 국가에서 승인된 종교가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초기 교회는 북쪽으로부터 공격하여 들어오는 야만족들의 거대한 침략을 겪어야 했다. 야만족들은 거대한 로마 제국의 도시들과 마을들을 노략질하였고 결국 로마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책의 제 1 부는 새롭게 설립된 야만족의 국가들을 교회가 기독교화하며 교육하는 대단한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게 된다.

 

각 장을 읽기 시작할 때 제목과 함께 삽입된 시간대를 주목하도록 하라. 때때로 각 장의 시간대가 다른 장의 시간대와 겹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대를 염두에 두고 각 장을 읽으면 각 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언제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놓치지 않을 것이다. 

 

1. 신약 교회의 탄생 

1) 교회 탄생의 배경 

구약의 내용과 메시아에 대한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기록, 그리고 사도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기독교 교회 역사의 처음 시작을 알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히브리인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구약 시대에 있어서는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구속을 제한하셨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기를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하셨다. 신약 교회가 설립될 때, 복음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확장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다(갈 3:8). 이제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이 참 종교의 가르침 아래 들어오게 될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구약의 진리를 받은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로서 찾아오셨다(히 1:1-2).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친족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들의 거절로 인하여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독교 믿음은 그 뿌리를 히브리 종교에 두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 백성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성취하신 메시아이다. 마태는 이 관계를 자주 상기시킨다. 그는 예수님의 삶 가운데 있던 일들을 기록하면서 종종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언급한다. 

  

2) 교회의 특성

예수님은 가르침과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 ‘교회’를 신약의 교회로 변형시키셨다. 이때 예수님은 신약 교회의 영적인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셨다. 즉, 예수님은 어떤 조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원칙들을 교훈하시며 그 교훈 위에 교회가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의 기계적인 구조가 어떠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도록 하셨다. 심지어 주께서는 제자들이 어떠한 반대세력을 만나게 될지 주의하여 주셨다. 주님은 그 반대 세력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지옥의 문들’(복음을 대적하는 거짓 교훈들을 의미함 - 역주)이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날 즈음에 진리의 영이 오실 것을 약속하시며 진리의 영이 오시면 제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오심은 주님의 제자들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나와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미리 정해진 표시였다. 이러한 가르침 전부가 새로운 신약 교회는 영적인 실체임을 증거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세워지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3) 교회 탄생을 위한 실제 준비들

성경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이룰 예수님의 오심을 위해 온 세상을 준비시키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메시아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는가? 신약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어떤 상태로 되어 있어야 했는가? 

그 당시 로마는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라.)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중요했다는 것은 누가의 로마 제국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분명하여진다. 누가는 이러한 언급들을 하였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 2: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눅 3:1). 

 

거대한 로마 제국은 복음의 확장을 위한 실제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로마 제국은 끊임없던 부족 전쟁을 제거하고 평화를 이루었으며 또한 로마 제국은 그 당시 알려진 모든 세상을 다 다닐 수 있도록 길과 다리를 구축해 놓았다.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배로 여행을 하였는데 로마 제국은 바다에서 노략질을 하던 해적들을 소탕하였다. 또한 강도와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시민들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로마 제국이 국가의 군사 목적을 위해 닦아놓은 수많은 길들이 평화의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들이 되었다. 

 

4) 교회 탄생을 위한 영적인 준비들

이러한 실제적인 조건들이 새로운 복음 사역을 돕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기류와 지식적인 기류 역시 새로운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근동 전체에 그리스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리스 문명이 로마 제국 전역을 정복한 상태였다. 

 

그리스 언어는 세계 공용어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바울은 로마 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바울이 길에서 유대인을 만나 구약을 인용할 때는 구약의 그리스 번역 버전인 70인역(Septuagint, LXX)에서 가져왔다. 70인역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기 이전인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이에 그리스 신들의 이상한 행위들은 서서히 신화와 전설로 바뀌고 있었다. 로마 신들 역시 사람들의 무시를 받기 시작했고 로마 제국의 많은 관료들은 평민들의 폭동을 줄이려는 목적만으로 종교를 장려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종교는 분명한 정치적인 수단일 뿐, 상한 심령들에게 마음의 평강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상황과 함께 영적인 진공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은 평화와 죄 사함과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안식을 약속하며 온 세상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과 용서와 생명과 구원이 증거 되었다. 이처럼 “때가 이르매” 복음의 메시지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복음의 말씀은 신속하게 온 세상을 향해 퍼지기 시작했다. 

 

5) 교회의 확장

여러 다른 요소들도 교회의 확장을 도왔다.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직접적인 환상과 계시를 받은 후에 이방인들 역시 교회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과 사울 및 여러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멀리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오순절 사건을 목격한 후에 구원의 메시지를 들고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바울과 같은 공식적인 선교사들은 여러 많은 이방 공동체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비공식적인 선교사들과 초기 교회의 회심자들 역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였다. 

 

6) 교회의 성격

예루살렘에 설립된 초기 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었다. 그들은 물질을 나누었으며 서로 관심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 

 

하지만 초기의 교회 역시 부패와 불일치에 의해 손상되었다. 교회 회원들의 이기심은 교회의 걸림돌이 되었다. 사도 시대의 교회들은 당파와 소송, 주의 만찬을 남용하는 사건 등의 문제들을 감당해야 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형제우애를 나누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셨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또한 교회를 위해 사도들은 수고하며 고통당하였다. 

이제 성령이 이 땅에 오신 복과 함께 산에서 나온 “손대지 아니한 돌”(단 2:35)은 온 세상을 채울 것 같았다.



2. 단련 받는 교회 (33-313)

 

1) 교회의 영웅시대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미리 경고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교회가 존재하던 초기 300년 동안 교회는 핍박을 통해 불 연단을 받았다. 이 기간을 ‘교회의 영웅 시대’라고 부른다.  

 

2) 핍박당하는 사도 교회

새로 형성된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핍박을 당하였다. 이러한 핍박은 성경에 기록된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이미 시작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 번 이상 옥에 갇히며 핍박당하였다. 스데반과 야고보는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였다. 

 

한번은 바울이 고린도에 거할 때에 유대인 무리들이 합심하여 바울에게 몰려가 그를 로마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갔다. 갈리오 총독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 바울에 대해 강력하게 고소하자 총독은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냈다. 

그리스도도인들이 초기에 받은 핍박은 유대인들에 의해 당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향한 로마 정권의 태도는 심각하게 변하였다. 

  

3) 네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첫 번째 황제

네로 황제가 집권하던 서기 64년 로마에서 불이 났다. 6일 동안 밤낮으로 불이 활활 탔다. 로마 도시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자 네로가 그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로마 도시 전역에 퍼졌다. 네로 황제를 향한 로마 시민들의 분노는 크게 타올랐다. 네로는 이러한 분노와 미움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고소하였다. 이 고소는 결코 사실이 아니었지만 당장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었고 끔찍한 핍박이 가하여졌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로마 병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실로 꿰맨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 꼼짝 못하게 한 후에 커다란 개들을 풀어 놓았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죽었다. 여자들은 미친 소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끌려 다녔다. 어둠이 깔리면 그리스도인들은 네로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매달려 불에 타서 죽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던 로마 시민들은 자유롭게 네로의 정원을 드나들 수 있었다. 네로는 병거를 타고 달리며 그 끔찍한 광경들을 보면서 사악한 즐거움을 느꼈다. 

 

전승에 의하면 네로의 탄압이 진행되는 동안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베드로는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십자가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십자가형을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로마 시민이던 바울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학살은 로마 도시에 국한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탄압은 아직 아니었다. 

 

4) 이그나티우스, 저스틴, 폴리캅

그 이후 약 100년 동안 (서기 68-161년까지) 대대적인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죽음을 당하였다. 이 기간에 순교를 당한 자들 중에 잘 알져진 자들로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 그리고 기독교를 변론하기 위해 용감하고 매우 논리적인 글을 쓴 변증가 저스틴이 있다.

 

이그나티우스(67-110)는 황제의 명에 의해 체포된 후에 로마에서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형을 받았다. 그는 구세주를 위해 삶을 드리는 영예를 바랐기 때문에 이렇게 외쳤다. “맹수들이 온 힘을 다해 내게 달려들기를 바란다. 만일 맹수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달려들겠다. 맹수들아! 오라. 와서 물고 뜯으며 찢으라. 내 뼈를 부수고 내 팔과 다리를 잘라라. 오라. 마귀의 잔인한 고문이여! 그래 보았자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더 나아가게 하는구나.”

 

폴리캅은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배운 사람들 중에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군사에게 체포되어 서머나의 원형 경기장에 서게 되었다. 그곳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들의 형상이나 우상을 예배처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비방하였다. 로마 총독은 폴리캅이 나이가 많은 것을 알고는 마음을 바꾸어 “무신론자들을 제거하라”는 군중 편에 서서 함께 외치라고 설득하였다. 이에 폴리캅은 열광하는 군중들을 똑바로 주시하고는 그의 손가락을 그들을 향하여 지적한 후에 “무신론자들을 제거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총독은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풀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겼다. 그분은 내게 단 한 번도 잘못 대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이신 주님을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총독은 군중을 향해 “폴리캅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고 선포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불에 태워 죽여라”고 외쳤다.

 

어느새 로마 군사들이 장작을 모아 높이 쌓았다. 이때 폴리캅은 자신을 묶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를 묶지 말고 그냥 두시오. 밧줄과 못으로 나를 장대에 묶지 않아도 주께서 내게 힘을 주셔서 이 불꽃을 견디도록 할 것이오.” 

장작에 불이 지펴지자 폴리캅은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허다한 주의 증인들의 대열에 부족한 저를 참여시키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이 날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잔에 동참합니다.”

그러자 불꽃이 그를 삼켰다. 폴리캅의 순교는 156년에 발생하였다. 

 

저스틴 마터(100-166)는 철학자였는데 로마에서 다른 여섯 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채찍을 맞고 참수형을 당하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그는 기쁨으로 진리를 증거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주의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구원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였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래 계속된 탄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이 그들을 고발한 자들에게 취할 수 있도록 법령을 선포하였다. 이 법령에 의해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는 뻔 한 것이다. 어디든지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노리는 자들로 가득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수상한 사람만 보아도 정부에 고소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발생하였다. 로마 국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녔고, 로마 군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법정마다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하고 있었으며 종종 가장 잔인한 형벌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은 압수되어 고소한 자들에게 주었다.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Gaul) 남부의 비엔과 리용에 있던 교회에 발생한 일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집권 하에서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로마 정권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져버리도록 하기 위해 가장 끔찍한 고문을 가하였다. 마침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로마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인 경우 참수형을 시켜서 죽였고 로마 시민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인 경우는 원형 경기장의 맹수들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원근각지에서 이교도들이 구름떼처럼 원형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큰 기쁨으로 자신들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지막에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은 블랜디나였다. 그 여인은 여러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원형경기장의 마지막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그녀는 원형 경기장 안으로 기쁨과 감사로 들어갔고, 어디선가 망이 날아들었으며 망에 걸린 그녀는 거센 성난 황소의 표적이 되었다. 황소는 여러 차례 그녀를 뿔로 받아 하늘로 던졌다. 마침내 그녀는 호흡을 거두었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불에 탔고 그 재는 론 강(the river Rhone)에 뿌려졌다. 이교도들은 조롱하면서 “자, 이제 그들의 몸이 부활하는지 지켜보자”라고 말하였다.  

 

6) 폭풍 중 소강상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과 함께 핍박의 기간은 끝이 났다. 교회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집권하던 200-211 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대략 70여 년간의 쉼을 누렸다.

 

한번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폭동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발발하였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오리겐의 아버지도 죽임을 당하였다. 훗날에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 된 오리겐은 아버지가 죽을 때 어린 아이였는데 자신도 순교로 죽겠다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간신히 붙들어 살려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순교한 인물들 중에는 「이단에 대항하여」(Against Heresies)라는 탁월한 변증서를 쓴 교회 교부 이레나이우스가 있었다. 

7) 교회를 파괴하려는 노력들

교회를 멸절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대대적인 탄압을 명령 내린 맨 처음 황제는 데큐스 황제였다. 다행히 그는 단지 249-251까지 2년 동안 집권하였다. 그 이후 7년 정도는 아무런 탄압이 없다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집권 하에 다시 대대적인 교회 핍박이 진행되었다. 그 이후 교회는 또다시 40년 정도 평온한 기간을 지내었다. 하지만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대대적인 교회 탄압을 시작하였고 그 다음 후계자인 갈레리우스 황제도 그 뒤를 따라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31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탄압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해서 이곳에 서술할 수가 없다. 교회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헐렸고, 성경은 불에 탔다. 이 기간의 탄압은 너무나 지독해서 순교 당한 신자들의 수와 그 잔인함이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핍박보다 훨씬 더 능가하였다. 그 당시 탄압은 기독교를 뿌리째 뽑아 지면에서 완전하게 제거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순교한 자들 중에 눈에 띄는 인물은 키프리아누스였다. 오리겐 역시 이 기간에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로마 도시에 거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에 숨었다. 카타콤은 지하로 뚫려있는 통로들이었다. 로마 도시가 서 있던 땅은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돌로 되어 있었다. 도시 경계 내에 죽은 시체를 묻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묻을 때 도시 경계 밖으로 나가 길고 좁은 통로들을 뚫고 그곳에 묻었다. 그러한 통로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 통로들을 서로 연결하면 대략 800 킬로미터가 되었다. 통로들은 사방으로 서로 얽히고설켰기 때문에 커다란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카타콤 중에 대부분의 것들이 지면으로부터 약 10미터 깊이에 있었다. 이러한 통로들의 양측 면에는 위 아래로 구덩이들이 파여 있었는데, 그곳에 죽은 자들이 묻혀 안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카타콤 내에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참사체를 묻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 황제의 집권 하에 진행된 교회 탄압은 모든 교회 탄압 가운데 가장 혹독하였다. 그러나 그 탄압은 마지막 탄압이 되었다. 이교국은 결국 힘이 다하여 더 이상 탄압할 수 없었다. 

 

  

8) 갈레리우스 황제의 탄압 정지 칙령

갈레리우스 황제는 병에 들더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의 병은 끔찍할 뿐만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병이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다가 죽음이 코앞에 이르자 311년에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칙령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합법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과 로마 제국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갈레리우스 칙령은 아직 교회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갈레리우스가 허락한 것은 단지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내린 성의 없는 용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완전한 승리는 이제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3. 내적인 교회 성장 (33-325)

 

1)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제 3 과가 다루는 기간(33-325)을 보면 제 2 과에서 다룬 기간과 겹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교회의 내적 성장은 교리(또는 믿음의 내용)와 내부 조직과 관련한다. 내적 성장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 및 교회 내부의 관리 체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 당시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그 진리들을 거짓 교훈들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큰 봉사를 하였다. 이에 우리는 마땅히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또한 그들이 지지하던 교리들(또는 믿음의 내용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가 어떻게 조직 및 관리 체제를 발전시켰는지 알기 원한다.

 

2) 교리는 중요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리로 인한 여러 다른 의견 때문에 논쟁과 말다툼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교회 내의 여러 분열들은 교리에 대한 논쟁 때문에 야기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리는 결국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논리를 편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으로 인한 효과는 매우 악하였다. 많은 목사들과 교회들이 사람들과 자녀들에게 교리를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 무지하게 되었다.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논리는 천박하고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간교하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마귀의 최고 계략들 중에 하나이다. 

교리에 대한 논쟁 역사는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3) 속사도 교부들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자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속사도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2세기 초반에 활동하였다. 우리는 5명의 속사도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와 헤르마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캅,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바나바(성경에 바울과 함께 한 바나바와 다른 사람임 - 역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더 있다.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속사도들의 글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벌써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성경에 계시된 진리들을 깊게 깨닫고 있지 못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기독교 개념은 매우 단순하였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고 한분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시는 분이며 또한 높은 기준의 엄격한 도덕을 요구하는 율법을 선포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속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더욱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연구하고 생각하며 글을 남겼다.

4) 변증가들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며 핍박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많은 거짓 증거를 하면서 수많은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러놓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책을 썼다. 그 책들 안에는 기독교를 변호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변증가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변증가는 자신이 믿는 내용이 진리임을 변론하는 자이다. 교육을 받고 또한 교양 있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 또한 이교도들의 기독교를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 그들은 성경을 더 깊게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변증가들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저스틴이었다. 그는 사마리아 지방의 고대 세겜 성읍에서 태어났다. 세겜은 조상 야곱의 우물이 있던 곳이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기도 하다. 저스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이교도였다. 저스틴은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철학자의 망토를 입고 다녔다. 그는 에베소에 사는 동안 구약의 예언서를 연구하다가 회심하였다. 그는 자기 책에 한 부분에 “갑자기 불꽃이 내 영혼에 일어나더니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였던 사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알고자 하던 만물의 시작과 끝, 그리고 세상 모든 사건들에 대한 참되면서도 가장 오랜 설명을 한다. 그들은 만물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이신 창조주께 영광을 돌렸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나는 그들의 철학만이 안전하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저스틴은 153년경에 로마에 있으면서 그의 유명한 「 변증 」(Apology)을 썼다. 그는 165년에 그의 신앙 때문에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순교자 저스틴, 즉 ‘저스틴 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켈수스는 변증가는 아니었지만 기독교의 교훈을 매우 잘 알던 이교도였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177년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참된 대화」(A True Discourse)라는 책을 썼다. 켈수스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학식과 재능을 다 동원하여 그 책을 썼다. 그의 논쟁의 많은 주장들이 지금도 여전히 불신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켈수스의 기독교 비판서는 이교주의에서 나온 최고의 비판서가 되었다. 그 책이 나온 후 70년이 지나서야 그 책을 능가하여 무너뜨릴만한 반론의 책이 나왔다. 기독교를 변증하는 자랑스러운 이 책은 오리겐이 쓴 「켈수스를 반박하며」(Against Celsus)라는 책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오리겐에 대해 곧 듣게 될 것이다. 

 

5) 거짓 사상이 일어나다

2세기 후반부에 두 이단 세력이 일어나 교회의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 이단들은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와 몬타누스주의(Montanism)였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를 보내기로 하신 약속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이제 조만간 성취될 것이며 그때는 역사의 끝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두 이단 사상들은 교회에 깊게 침투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은 기독교 진리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거짓 진리였다. 올바른 교리는 중요하다. 잘못된 교리는 교회에 해를 끼칠 것이다. 교회는 거짓 교리에 의해 무너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2세기 후반부는 교회가 큰 위기에 봉착한 기간이었다. 

 

교회가 얼마나 이 두 거짓 교리로 인해 심각한 문제를 겪었는지 그 당시 실례를 하나 살펴보자. 영주주의의 지도자들 중에 마르키온(100-16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큰돈을 번 후에 로마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자선을 크게 베풀면서 영지주의 사상을 전파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며 로마에 위치한 교회의 신자들도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 당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던 폴리캅이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폴리캅과 마르키온은 과거에 동방 지역에서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 둘은 우연히 로마의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폴리캅이 그를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려하자 마르키온이 말을 걸었다. “폴리캅, 자네 나를 모르는가?” 폴리캅이 대답하였다. “자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 자네는 사탄의 장자가 아니던가”

 

6) 교부들

교회에서 가장 큰 첫 번째 교리 문제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 위격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임을 안다. 즉,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처음에 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는 않았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는 데는 많은 연구와 생각과 토론이 필요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위대한 교부들의 오래고 혹한 수고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교부들 중에 잘 알려진 교부로는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에 이레나이우스와 터툴리안(종종 테르툴리아누스로 소개된다 - 역주)가 있고 동방 지역에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종종 오리게너스로 소개된다. - 역주)가 있다.

 

이레나이우스는 서기 115-142년 사이에 태어나 서머나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곳에서 폴리캅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서머나에서 현재 프랑스인 갈리아의 리용으로 이주한 후 그 도시에서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서기 200년에 순교 당하였다. 이레나이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의 시작을 담은 「이단에 대항하여」라는 책을 저작하였다.

 

터툴리안은 서기 150-155년 사이에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에 그 분야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 그는 그의 고향인 카르타고로 돌아가 그곳에서 장로가 되었다. 그는 철학과 역사에 남달리 뛰어났으며 또한 탁월한 법률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저스틴과 이레나이우스와 비교할 때 더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언어 사용과 논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언급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약 100년 전에 로마에서 살았던 속사도 클레멘트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에서 매우 유능한 교사였다. 

 

클레멘트의 제자였던 오리겐은 스승보다 훨씬 유명하여졌다. 그는 그때까지 교회가 배출한 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독창적이고 심오한 사고를 할 수 있던 학자로서 수많은 방대한 책들을 썼다. 오리겐의 유명한 책 「켈수스를 반박하여」는 기독교 비판에 대단히 멋진 답변을 던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위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랜 연구와 수고를 통해 귀한 글들을 남겼다.

 

7) 신조와 정경의 등장

교회는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 이단 사상을 겪으면서 세 가지를 결실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신조, 정경, 그리고 조직이다. 이 세 가지는 교회가 바르게 서서 나가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신조(Creed)는 라틴어 ‘크레도’에서 온 단어로서 “내가 믿습니다”라는 뜻이다. 신조는 믿음의 내용에 대한 조항을 말한다. 사도신경은 교회가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신조이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지었기 때문에 ‘사도신경’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내용이기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신은 아마 사도신경을 마음으로 진실하게 고백할 것이다. 사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조이다. 교회가 사도신경을 채택한 이유는 교회가 참된 기독교 교리로서 무엇을 믿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서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의 그릇된 이단 사상을 배격하기 위함이었다.

 

정경(Canon)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책에서 ‘정경’은 ‘목록’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와의 갈등을 통해 만들어진 정경이 바로 신약 정경이다. 즉, 신약에 속한 책들이 무엇인지 그 목록을 정하였다.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와의 논쟁 가운데 교회는 언제나 성경으로 확인하였다. 그 당시 이미 많은 기독교 서신들과 글들이 교회 내에 있었다. 따라서 이 중에 어떤 글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글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교회는 그 당시 기독교 글들 중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글들을 찾아내어 공인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 성경을 이루게 된다. 

 

8) 감독(장로, 주교) 제도의 발전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의 침투로 인해 교회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교회의 관리 형태로 감독 제도(Episcopal Government)가 세워졌다. 이단 단체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사상은 성경의 지지를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회는 성경의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들이 필요하였다. 이에 교회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권위 있는 지도자들을 세워 감독(bishops)이라고 불렀다. 이때로부터 종교 개혁이 발생하는 때까지 교회는 감독 제도를 유지하였다. 오늘날 이 제도를 유지하는 교회 조직으로는 로마 카톨릭, 그리스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감리교 등이 있다.

 

교회 초기의 조직은 매우 간단하였다. 교회를 위한 일꾼들로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다. 초기 교회에서 장도들은 서로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각 지역에서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이 총지휘를 해야 했다. 이에 장로들의 모임이 생겼고 그 가운데 대표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대표는 예배 및 설교를 주관하였다. 장로들은 원래 누구나 감독으로 불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감독이라는 명칭은 장로들의 모임을 대표하는 장로에게만 주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장로들은 서서히 그들 위해서 다스리는 감독에게 굴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감독은 교회를 홀로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어로 홀로 주관하며 다스리는 사람을 군주(monarch)라고 부른다. 따라서 한 지역의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을 주교(monarchical bishops)라고 칭하였다. 

 

교회는 제일 먼저 도시에 세워졌다. 따라서 도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지만 시골에는 여전히 이교도들만 있었다. 시골 사람들을 라틴어로 ‘파가니’(Pagani)(이방인-역주)라고 한다. 따라서 이방인이란 단어는 이교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로부터 시골, 즉 이방인들 사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골 지역에서 회심한 자들은 도시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다. 시골을 주변으로 하고 있는 도시 지역을 ‘교구’(Diocese)라고 불렀다. 그 후부터 도시에 있던 감독은 '교구 감독'(diocesan bishop)으로 불리게 되었다.

 

독자는 이 모든 용어들, 즉 장로, 감독, 주교, 교구, 교구 감독, 감독 제도 등이 그리스 언어에서 따온 것을 알게 된다면 의아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핀 것처럼 그 당시 국제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동방에서 처음 퍼질 때 로마 제국 전역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감독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감독 체제의 교회 조직과 관리는 점점 커지며 발전하였다. 그런데 도시마다 그 성장이 크게 차이가 났다. 어떤 도시에서는 로마 도시보다 더 빨리 주교가 세워졌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며 세웠던 안디옥 교회는 110년경에 이그나티우스를 감독으로 세웠고 서머나 교회는 폴리캅을 감독으로 세웠다. 이 두 사람은 사도들에게 직접 배운 자들로서 ‘사도 교부들’(또는 속사도, the Apostolic Fathers)로 불린다. 로마의 첫 번째 감독은 아니케투스(Anicetus)였다. 그는 154-165년까지 로마의 감독이었다. 2세기 중엽 정도에는 실제적으로 모든 도시의 교회들 위에 주교가 세워져 있었다.

 

감독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감독들이 커다란 권위를 지니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을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강력한 끈이며 또한 이단을 대항하는데 큰 방어막이라고 여겼다. 그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른 것처럼 여러분의 감독을 따르기 바랍니다. 감독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각 도시에 흩어진 교회들은 오랫동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기 200년이 되자 교회들이 서로 한 덩어리처럼 뭉쳤다. 교회는 영지주의 이단과 몬타누스주의 이단들과 갈등하면서 모든 교회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 모든 교회들이 사도 신경을 고백하였고 신약을 절대 권위의 정경으로 취하였으며 교회 조직은 감독 제도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이단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의 작은 교회들을 세웠다. 반면, 이단 교회가 세워진 후에 도시의 주요 큰 교회는 (구)카톨릭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카톨릭’이란 단어의 의미는 ‘보편’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당시 사방으로 번성하는 교회에 대해 교회가 무엇인지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사람은 키프리아누스(Cyprian)이다. 그는 서기 200년경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 살았다. 그는 부요하였고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언변에 뛰어나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246년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회심한지 2년 후에 감독이 되었다가 258년에 참수를 당하여 기독교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오직 한분 하나님이 계시고, 한분 그리스도가 있으며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고, 오직 하나의 의장(원본은 Chair 로 되어 있는데 권위의 중심을 의미한다 - 역주)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교회를 벗어난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통일된 감독들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감독은 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는 감독들 안에 있다. 만일 누구든지 감독과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는 교회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된 때는 제국의 박해를 받는 시기였다. 교회는 점점 널리 퍼져나가 심지어 야만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아무튼 교회는 박해의 시기에 조직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이제 교회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4. 교회의 승리 (313)

 

1) “이 증표를 가지고 승리하라.”

서기 306년에 브리튼 도시에 있던 로마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추앙하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튼, 갈리아, 스페인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로마 제국의 서방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점점 노골적으로 콘스탄티누스를 향해 적개심을 나타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이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막센티우스가 전쟁을 준비하기 전에 이탈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결국 로마에서 약 16 킬로미터 떨어진 삭사 루브라에서 막센티우스의 군사와 콘스탄티누스의 군사가 맞붙게 되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출발하여 티베르 강을 건너왔고 이제 밀비오 다리가 그들 앞에 있었다. 한편, 막센티우스의 군사는 콘스탄티누스의 군사보다 세 배가 많았다. 심지어 모든 로마 군사의 꽃이라고 불리는 황제 근위병이 막센티우스와 함께 하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이제 그 다음 날이면 전쟁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심각한 위험을 느꼈다. 기적의 도움 외에는 승리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트라를 믿던 신자였다. 미트라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워 승리한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에는 미트라를 믿는 신자들이 많았다. 특히 대부분의 군인들이 미트라를 믿고 있었다. 

전쟁 전날 오후에 태양은 지고 있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는 서쪽으로 지는 태양 위로 십자가를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이 증표를 가지고 승리하라”는 글씨가 빛으로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다음 날, 즉 312년 10월 28일,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주 맹렬한 전쟁이었다. 황제 근위대는 사자들처럼 싸웠다. 그들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지만, 마침내 진열이 뚫리고 막센티우스의 군사는 철저하게 패배하였다. 막센티우스는 목숨만은 살려보려고 티베르 강을 지나 밀비아 다리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2) 밀라노 칙령

밀비아 다리 전쟁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전쟁 중에 하나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서방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훨씬 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전쟁을 이긴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느끼고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과거에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온 세상의 참 빛 되시는 그리스도의 종교를 믿는 신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도시에서 종교에 대한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 칙령은 기독교만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공식 종교로 채택한 것도 아니고 이방 종교의 숭배의식을 금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311년에 반포된 갈레리우스 황제의 칙령과는 달리 단지 기독교 모임을 허락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 박해를 멈추게 하였고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였다. 즉,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법 앞에서 타종교들과 똑같은 발판을 딛게 되었다. 

 

 

3) 교회의 놀라운 승리

밀라노 칙령은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나타낸다. 교회의 이번 승리는 세상 모든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이다. 300년 전만 해도 교회는 대단히 작은 조직으로 시작되었었다. 구성원들도 세상에서 천대받는 작은 유대 민족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교육 및 사회특권을 전혀 받지 못한 평민이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어리석은 소리로 들렸기 때문에 교회를 찾는 자가 매우 적었다. 반면에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은 대단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돈과 학력과 문화와 사회 특권과 정치세력과 군사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거의 다 교회를 대적하고 있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들, 그리고 강력한 로마 제국 등, 온 세상이 교회를 대적하였다. 한편, 교회의 회원들 중에 심각한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하여 교회에 수치를 가져오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다. 교회는 또는 회원 징계 문제를 두고 둘로 나누기도 하였다. 외부에서는 이상한 교리들과 지독한 이단 사상들이 계속 교회를 침투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교회 내부에서는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쓴 논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탁한 조건 속에서 교회는 성장이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교회는 300년간 맹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종교 탄압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승리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교회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순교자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순교자의 피가 교회 확장의 씨가 되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순교자의 피가 많을수록 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번성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승리에 대한 완벽하고 포괄적인 유일한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초자연적으로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존재는 참으로 기적 중에 기적이다. 

 

4) 교회 역사의 전환점

교회 역사의 흐름을 급변시키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초대 교회의 첫 번째 전환점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을 때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방으로 빠져나간 사건이다. 아마도 두 번째 전환점은 바울 및 여러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의해 교회가 널리 확장되었던 사실일 것이다. 

 

교회 역사의 세 번째 결정적인 전환점은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보좌에는 기독교를 믿는 황제가 앉아 있었다. 이제 로마 제국은 교회를 박해하는 대신에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세금 등 여러 부과 책임을 면제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큰 기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 여러 곳에 화려하고 멋진 교회 건물을 세웠다. 기독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에 하나인 주일 성수가 이때 제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주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인의 삶을 보면 그가 진실로 기독교의 신앙을 믿었는지를 의심케 할 만한 여러 정욕적인 삶의 모습들이 많았다. 

 

5) 세상의 교회 침략

밀라노 칙령 때문에 세상은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되었다. 이제 기독교인이 되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물질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게 있었다. 기독교인이 되면 정치, 군사, 사회에서 높은 자리까지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름만 기독교인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도 스스로는 기독교 신자라고 하지만 신자다운 성품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기독교는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크게 무너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13년의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은 강력한 부패의 물살이 교회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교회 수문을 여는 역할을 하였다. 

 

처음 3세기 동안 교회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확장되었다. 그 기간 동안의 이교도를 향한 승리는 전쟁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오랜 인내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313년 이후에는 기독교가 종종 교회 확장을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마 군대의 상징은 원래 독수리였다. 하지만 313년 이후 로마 군대의 상징은 십자가로 바뀌었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으로 인한 결과 가운데 우리가 매우 특별하게 주목할 것이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종교의 자유 및 여러 특권을 허락하였지만, 반면에 교회 일들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이에 교회 역사는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사실 313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에 간섭한 영향은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할여될 것이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 문제는 많은 분란과 다툼, 심지어 피 흘리는 전쟁까지 가져왔다. 오늘날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7) 이교주의를 되살리는데 실패한 율리아누스 황제

서기 361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인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자라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이교도였다. 그는 황제가 되자 자신은 이교도라고 선포하였다. 다시 한 번 로마 제국은 이교도 황제의 통치 하에 머물게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되면서 기독교를 버렸기 때문에 배도자 율리아누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지만, 주로 글을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아타나시오스는 “이는 잠깐 지나가는 구름이다”라고 말하였다.) 대단히 날카로운 풍자와 조소를 띈 글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교도를 활성화시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이교도의 신전들은 버려진 채 방치되었고 이교 제단에서는 더 이상 향이 타오르지 않았다. 이교도는 무너지고 없어진 것이다. 

 

서기 363년, 즉 콘스탄티누스가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선포한지 50년 후, 배도자 율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 군사와 싸우다가 창에 허벅지를 맞고 심하게 고통당하다가 사망하였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흘러넘치는 피를 손으로 받아서는 하늘로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자, 갈릴리 사람아! 결국 당신이 승리하였도다.”

  

5. 강건한 교회(325-451)


1) 교회 회의(Councils)의 역할

교회 역사 가운데 많은 교회 회의가 열렸었다. 교회 회의는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중대한 교회 문제를 토론하고 신중한 조언을 하는 가운데 최종 결정을 내리는 모임이다. 첫 번째 교회 총회의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교회 회의였다.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확장되면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가졌던 교회 회의였다. 

 

교회 회의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 종류는 참여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지방 회의(provincial council)는 단지 한 지방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회의였다. 국가적 차원의 교회 회의(national council)는 한 국가 내에 있는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회의였다. 교회 총회의(general council)는 모든 국가들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회의였다. 이러한 회의를 총연합 회의(ecumenical council)라고 부르기도 한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총회의는 첫 번째 가졌던 총연합 회의 또는 교회 총회의였다. 

 

교회 총회의는 교회를 연합시키고 든든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교회 총회의들 중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네 개의 총회의를 주목하려고 한다. 그 네 개의 총회의는, 니케아 총회의(325), 콘스탄티노플 총회의(381), 에베소 총회의(431), 그리고 칼케돈 총회의(451)이다. 

 

2) 니케아 총회의 (325)

교회가 세워진 후에 약 300년간 교회가 가졌던 주된 질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고 참된 하나님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오스는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큰 논쟁을 벌인 대표자들이었다. 

 

이 논쟁이 강렬하게 불어 절정에 이를 당시 아타나시오스는 아직 젊은 청년이었고 아리우스는 상당히 연로한 노인이었다. 아리우스는 매우 경건하였고 누가 보아도 흠 없는 삶을 살던 유능한 설교자였다.

 

이교도는 많은 신들을 믿는다. 아리우스는 아버지가 하나님인 것처럼 아들 또한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두 신을 믿는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를 이교도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점은 많더라도 완전한 하나님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최고의 피조물이었다.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질과 근본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편, 아타나시오스는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 논쟁은 대단히 중대한 논쟁이다. 사실 이 논쟁이 진행되던 기간은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진리 문제가 위기에 놓여 있던 기간이었다. 그 이유는 이 논쟁은 인간의 구원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의 위격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분의 사역은 천사가 나타나서 선포함으로 세상에 계시되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가치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따라 철저하게 달라진다. 인간은 너무나 부패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이를 깊게 깨달은 사람이 바로 아타나시오스였던 것이다. 그는 “내가 나의 구속자로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름없는 분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리우스 논쟁은 오랜 기간을 끌며 교회에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 총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교회 총회의는 서기 325년에 소아시아의 작은 마을인 니케아에서 열렸다. 니케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약 72 킬로미터 떨어진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의 마을이었다. 그 총회의에 300명 이상의 감독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황제의 궁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 모인 감독들 중에는 로마의 심한 박해 기간에 믿음 때문에 고문을 당해 몸에 상처를 지닌 자들도 있었다. 

 

니케아 총회의 결과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바른 교리가 교회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정리된 교리는 이후의 총회의에서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면서 ‘니케아 신조’로 알려졌다. 약 60년에서 70년 동안 진행되었던 신학 논쟁이 마침내 결론을 맺었다. 

 

니케아 신조는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교회 신조이다. 교회는 그 신조를 통해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며 아버지와 동등한 존재(co-substantial)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동등한 존재’라는 말의 의미는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의 본질과 근본과 존재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교회는 기독교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조항을 정리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것이다. 니케아 총회 이후로 이 고백은 모든 교회의 믿음이 되었다. 오늘날도 그리스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개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다

 

 

3) 콘스탄티노플 총회의 (381)

니케아 총회의가 마무리되었어도 아리우스 논쟁은 완전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즉, 아리우스와 그를 찬동하는 몇몇 감독들이 니케아 신조에 사인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아직 아리우스에게 동의하는 교인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총회의가 채택한 신조는 참된 믿음을 표현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황제들 및 몇몇 궁중 각료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아타나시오스는 그가 죽는 날까지 니케아 신조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아타나시오스가 죽은 후에 정통 교리(orthodoxy, 바른 기독교 교훈)를 수호하려는 지도층이 형성되었는데, ‘위대한 세 명의 카파도키아 사람들’로 알려진 세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역 출신들로서 고대 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 중에 끼어 있던 자들인데, 바로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이다. 이 세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역할을 하였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서기 381년에 두 번째 교회 총연합 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교회가 니케아 신조를 믿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였고 또한 성령의 신성을 믿는다고 선포하였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믿음의 근본 조항이다. 교회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충분히 설립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는 최종적으로 아리우스 주의를 완벽하게 거절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회의 이후로 아리우스 주의를 사라졌다. 

 

4) 칼케돈 총회의 (4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계시할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도 계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는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며 충분한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 내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여러 다른 많은 견해들이 있어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도 여러 다른 견해가 발생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두 속성과 그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동일한 의견과 분명한 이해를 취하는 데까지 많은 연구와 깊은 사고가 필요하였다.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해 끊임없는 심각한 논쟁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마침내 서기 451년에 교회 총회의가 니케아 근처의 칼케돈에서 열렸다. 칼케돈 총회의는 네 번째로 열린 의회였다. (세 번째 총회의인 에베소 총회의는 다음 과에서 다룰 예정이다.) 칼케돈 총회의가 결론을 내어 작성한 신조는 니케아 신조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분한 신성을 재확인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인성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속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함을 고백하였다. 이 두 속성이 서로 간에 지닌 관계에 대해서는 교회는 그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되 서로 섞이거나 바뀌거나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두 속성을 가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두 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위격만 있음을 고백하였다.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조항을 표현하고 있다. 17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은 서방에서의 교회 연합을 영원히 무너뜨렸지만, 이 신조들을 거절하거나 바꾸지 않았다. 이 두 신조는 오늘날까지 그리스 정교, 로마 카톨릭 교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의 믿음의 고백으로 남아있다. 

 

5) 암브로시우스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서방 교회에서는 세 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바로 암브로시우스, 제롬, 그리고 어거스틴이다. 이 세 사람은 교회를 강화하는데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하였던 라틴 교부들(Latin Church Fathers)로 잘 알려져 있다.

 

암브로시우스(340-397)는 독일의 서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로마 정부의 고급 관료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어릴 때부터 뛰어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북부 이탈리아의 큰 지방을 담당하는 총독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밀라노 도시에 거주하였다. 

 

암브로시우스가 활동하던 당시 밀라노 교회에는 여전히 아리우스 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밀로노의 감독이 죽자,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각각 자기들에게 속한 자를 그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다. 새로운 감독을 뽑는 공동회의가 열렸지만 난장판이었다. 이때 그 도시의 새로운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그 교회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우성치는 그 무리 가운데 갑자기 어린 소년의 음성이 암브로시우스의 귀에 들렸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이다!” 이때 암브로시우스는 아직 교회 회원도 아니었고 세례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 사건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여기고 모든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후에 세례를 받고 374년에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그는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교회의 박사(Doctors) 또는 위대한 선생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찬송을 증진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매우 유능한 관리자였고, 담대하게 기독교 삶의 높은 기준을 부르짖었다. 그의 진실함은 로마 황제를 징계한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데살로니카 도시의 백성들이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는 그곳 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공적으로 그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를 선포할 때까지 성만찬에 참여를 금하였다. 황제는 결국 교회의 징계에 굴복하였다. 이 사건의 멋진 결말로 인해 감독과 황제는 교회와 백성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6) 제롬 

교회의 위대한 또 다른 지도자인 제롬은 서기 340년경에 달마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처럼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롬은 여행을 좋아했다. 그는 대로마 제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그리스도가 탄생한 베들레헴에서 보내었다. 그곳에서 그는 수도승(monk, 묵상과 종교 훈련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하고자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살던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의 동굴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386년부터 살다가 420년에 사망하였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약 200년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을 “70인역 성서”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오랜 구전에 따르면 70명이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과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번역본이 라틴어로 엉성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제롬은 히브리어를 알던 유일한 서방 교인이었다. 그는 안디옥과 베들레헴에서 살 때 유대교 랍비들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 그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특히 그는 구약을 번역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사용하지 않고 원래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 성경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 번역본이 나왔는데 바로 ‘불가타 성서’이다. 이 번역본은 제롬의 최고 업적이며 오늘날까지 그 형태와 번역이 개정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 엄청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7) “그토록 많은 기도로 키운 아들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

교부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서기 354년에 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는 이미 두 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 즉 터툴리안과 키프리아누스를 배출한 상태였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기독교인이었고 교회 역사 가운데 유명한 어머니들 중에 한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어릴 때부터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부모는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고 이에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부모가 마련하여주는 기회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소년으로서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그는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하였다. 훗날 나이가 들고 더욱 지혜로워질수록 그는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한 사실에 대해 깊게 후회하였다. 즉, 그리스 원어로 읽고 싶었던 책이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특히 신약 성경을 원어로 읽기를 원하였다. 

 

어거스틴이 16살이 되자 그의 부모는 그를 북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내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최고의 학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매우 악한 도시였고 많은 유혹이 넘치는 도시였다. 어거스틴은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또한 타락한 삶에 빠져들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쉬지 않고 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눈물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아프리카를 떠나 로마로 갔다. 모니카는 때때로 아들에 대해 거의 포기하였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 친구가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기도로 키운 아들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말을 할 때 그녀는 큰 위로를 받았다.

 

어거스틴은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늘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흥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도리어 위대한 이교도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글들을 훨씬 더 좋아하였다. 한편 그 당시 페르시아 사람 마네스는 철학적인 체계를 세워 마니교를 창시하였는데 로마 제국 전역에서 많은 추종자들이 발생하였다. 마니교는 이교도와 기독교 사상을 신기하게 섞어서 만든 종교였다. 어거스틴은 약 9년가량 마니교를 추종하였다.

 

어거스틴이 일 년간 로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및 연설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이때 암브로시우스가 그 도시의 감독이었다. 어거스틴은 연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종종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러갔다. 처음에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그의 웅변술과 표정 및 손짓 등을 관찰하기 위해 갔다. 

 

한편 이 당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밀라노를 방문하고 있었다. 어느새 어거스틴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니교의 모순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태도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이집트를 방문했던 어떤 포티티안 사람(어거스틴의 친척 중에 한 사람이다 - 역주)이 어거스틴에게 이집트에 있는 수천 명의 수도승들이 어떠한 거룩한 삶을 사는지 말해주었다. 그들 대부분의 수도승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배우지 못한 무지한 자들도 그들의 정욕을 다스릴 줄 아는데 고등 교육을 받은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는 당장 그의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가 들고 있던 바울의 서신이 담긴 책을 의자에 놓았다. 그의 영혼은 저 깊은 곳까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잔디에 누웠다. 그가 그곳에 누워있을 때 옆집 아이가 동요를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돌레 레게 롤레 레게.” 이 가사의 의미는 “취하여 읽으라. 취하여 읽으라”는 뜻이었다. 

 

어거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로 돌아가서 바울의 서신이 담긴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 순간이 어거스틴의 삶의 전환점이었다. 즉, 그는 이 순간 회심하였다. 어거스틴은 이후로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유식한 교수이며 연설에 능통한 학자가 겸손한 자세로 밀라노의 감독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초심자로 등록하였다. 바로 서기 386년 늦은 여름의 사건이었다. 그 다음 해 부활주일에 그는 세례를 받았다. 

 

8)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 성경을 변론하고 해석하다.

세월이 지나 어거스틴은 그가 태어난 북 아프리카 도시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가 죽던 430년까지 그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그는 북 아프리카에 첫 번째 수도원(수도승들을 위한 집)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단을 대항하는 공개 논쟁에서 글을 사용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변론하였고 교회 내에서 교회 분리를 야기하는 자들을 대항해서도 강력한 글을 썼다. 

 

어거스틴은 그의 인생 대부분을 마니교도들, 도나투스파 사람들, 그리고 펠라기우스파 사람들과 다투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도나투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단은 아니었다.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철저하게 정통보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분리주의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교회 내에 분리를 일으켰다. 디아클레티우누스 황제가 심각한 박해를 가하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져버렸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몇몇 감독들은 성경 사본들을 정부 관료들에게 내주면서 불에 태우도록 했었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러한 감독들은 성례를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감독으로 세우는데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함께 물러나 자신들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에 많은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북 아프리카에 생겨났다.

 

독자들은 앞 과에서 교회 조직을 공부할 때 이단이 생겨나 큰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구성하자 본래의 바른 교회들은 자신들의 큰 교회를 카톨릭 또는 보편 교회로 부르게 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북 아프리카의 히포 도시에는 보편 교회 교인들보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대항하여 교회 및 성례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보편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가르쳤다. 그는 보편 교회에 커다란 권위를 돌렸다. 그는 “보편 교회의 권위에 의해 감동받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인간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바른 교리를 세웠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그 사상의 창시자인 브리티시 수도승 펠라기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였으며,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예정론을 부인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은 날 때 부패한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는 아기들은 순전하다고 말하였다. 아기들은 자라나면서 다른 사람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고 배우면서 악해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가르침에 대항하며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 가운데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사람은 누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으로 인해 에베소 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서기 431년에 열린 에베소 총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서기 529년에 열린 오렌지 종교 회의에서는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세미-필라기우스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주장이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주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가장 위대한 교부들로부터 루터와 여러 개혁자들 역시 영향을 받았다. 

 

어거스틴의 가장 유명한 두 작품은 그의 「참회록」(Confessions)과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그의 젊은 시절의 비밀들을 다 털어놓으며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들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에는 그의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9) 대도시와 가부장적인 시스템

제 5 과가 다루는 기간(325-451)에 매우 중요한 발전은 교회 조직이었다. 우리는 제 3 과에서 주교 감독 제도가 교회 전체에서 어떻게 일반화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모든 교회(아마 모든 교구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마다 각각의 감독이 있었다. 맨 처음에는 모든 감독들이 같은 등급에 속하였다. 그 어떤 감독도 다른 감독들 위에서 판단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서서히 로마의 감독이 다른 감독들 위에서 권력을 갖게 되더니 어느새 교황이 되었다.

 

맨 처음 대도시의 큰 교회 감독들은 작은 교회의 감독들보다 더 높은 등급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대도시 큰 교회 감독들은 ‘대도시 감독들’(Metropolitan bishop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다섯 대 도시의 교회들은 매우 특별한 중요성을 띈 교회로 부각되었다. 그 대도시들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다. 이 도시들에 있던 교회 감독들은 대주교(Patriarchs)라고 불리었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네 도시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 문화권으로서 동방에 있었고, 로마만 서방에 있으면서 로마 제국의 라틴 문화에 속하였다.

 

모든 교회는 자연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 교회는 이 땅에 교회가 없던 때에 처음으로 생긴 교회였기 때문에 모 교회(the mother church)였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곳에서 첫 번째 교회 총회의가 열렸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 가운데 유일한 교회였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타 도시에 새로운 교회들의 세워지면서 쇠퇴하였다. 특히 서기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끈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또한 132년부터 135년까지 하드리아누스 황제 하에서 다시 박해를 받은 후, 예루살렘 교회는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비록 매우 연약한 상태기는 하지만 수세기 동안 계속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의 맨 처음의 초기 영광과 관련하였기 때문에 그곳 감독은 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안디옥 교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안디옥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다.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에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다. 예루살렘 교회는 대모(grand-mother) 역할을 하였지만,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의 많은 교회들의 모교회가 되었다. 안디옥에는 많은 뛰어난 감독들이 있었고 신학 교육을 위한 본부가 되었다. 더욱이 예루살렘은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지방 도시인 반면, 안디옥은 로마 제국 가운데 그 크기와 중요도에 있어서 서열 세 번째 도시였다. 이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 역시 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사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오랜 구전에 의하면 선교사 마가가 그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서열 두 번째 도시로서 모든 배움과 문화의 가장 큰 본부였다.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로마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찬란한 도시였다. 또한 그곳에는 유명한 신학교가 있었는데,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알려진 오리겐이 그 학교에서 가르쳤다. 따라서 그곳의 감독 역시 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원래 보스포루스 해협에 놓인 고대 도시 비잔티움이라는 도시였으나 첫 번째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의 거주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황제를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바뀌게 되었다. 그곳 교회는 사도의 기원도 없고 오랜 역사도 없지만 황제가 거주하는 도시의 교회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곳 감독 역시 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로마는 제국의 첫 번째 도시였다. 바울이 그곳에서 수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전에 따르면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설립되었다. 로마 감독은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로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겼고, 베드로는 그 열쇠를 로마 감독에게 전수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로마 교회의 감독에게도 대주교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서방뿐만 아니라 동방에서 있었던 교회의 모든 논쟁은 로마의 대주교에게 건너왔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속성에 대한 커다란 논쟁 가운데 정통 교리는 로마 대주교의 지도력에 따른 서방의 영향력 때문에 큰 승리를 얻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교회들 가운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목소리는 교리 논쟁 가운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사이에는 패권 다툼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로마 대주교의 우위를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패권 다툼 가운데 종종 로마 대주교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는 감히 로마 교회와 견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187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레나이우스가 쓴 「이단에 대항하여」라는 책이 있는데, 이로 인해 모든 교회는 로마 교회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때때로 로마 대주교의 주장에 대항하는 강력한 반대 의견들이 있었지만 결국 서방 교회들은 로마 교회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정과 함께 교황제도가 발생하였다. 로마 대주교는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아버지’이다. 교황은 교회 위에서 최고 높은 머리로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이후 교황 아래 있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부르게 되었다. 교회사의 전개는 교황의 발전의 중요성과 관련한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칼케돈 총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의 권위와 로마 대주교의 권위는 동등하다고 선포하였다. 이 결과에 대항하여 교황 레오 1세가 항의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레오 1세는 461년에 죽게 되면서 고대 교회의 마지막 교황이자 중세 교황들의 첫째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6. 교회의 부패 (100-461)

1) 많은 악한 일들이 발생하다

제 6 과와 관련한 기간(100-461)을 보면 앞 과에서 다룬 기간과 또 다시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이 교회가 시작하여 존재하던 처음 5세기 동안을 다 다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기간의 교회사는 한 마디로 요약하기에는 대단히 복잡하다.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주로 고무적이고 선한 내용들이었다. 우리는 교회가 오순절 날에 하늘의 역사로 인해 탄생하는 것을 보았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박해 가운데 든든히 뿌리를 내리며 이교도를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를 보았다. 

 

하지만 초기 5세기 동안 실망스럽고 악한 일들도 많이 발생하였다. 교회사는 정직해야 한다. 이전 과에서 우리가 배운 내용들은 사실들이지만, 아직 모든 사건들을 다 다룬 것은 아니다. 

 

2) 부패의 초기 증상

사도들의 서신들과 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면(물론,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밧모 섬에 있던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교회의 부패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시대는 대략 서기 100년에 마치게 된다. 그 후 속사도들(사도 교부들)이 그 뒤를 따라 활동한다. 우리는 속사도들의 글에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부패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 이후 400여년이 지나면서 교회는 계속 끊임없이 부패하여진다.

 

5세기가 끝날 무렵, 비성경적인 교리들과 행위들이 교회에 버젓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한 비성경적인 교리 및 행위들은 다음과 같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죽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깨끗해지기 위해 고통 받는 장소)에 대한 믿음, 사순절을 지킴, 성만찬을 제사로 여기고 사제들이 그 제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견해, 교회 성직자(교회 관료들)와 평신도(일반 교회회원)의 철저한 구분, 순교자들과 성인들에 대한 숭배, 특히 마리아 숭배, 죽은 영웅들을 기념하여 촛불 및 양초를 태우는 일,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유물에 대한 숭배, 교회 안에 사진들과 그림들을 걸어놓고 또한 제단을 만듦, 성직자들이 휘황찬란한 복장을 함, 복잡하고 까다롭고 정교한 여러 많은 예배 의식들과 절차들, 설교의 중요도의 약화, 성지 순례, 수도원주의, 세속주의, 이교도 및 이단들에 대한 박해 등이다. 

 

3) 부패의 요인들

독자들은 어떻게 교회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아할 것이다. 부패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상세하게 추적하기보다 핵심만 다루어 보겠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중생한 성도일지라도 죄와 허물을 저지를 수 있는 성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고대교회는 구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 가운데 오해하는 부분 및 잘못 해석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성경은 한편으로 분명하고 쉽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매우 심오하다. 교회가 성경의 의미를 알아내는 데에는 수 세기가 걸렸다. 그 작업은 사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언제나 이교도의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세기 동안 이교도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 전체가 이교도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며 교회에 큰 호의를 베풀자 수천수만의 이교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은 채, 대거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강력하게 침투하였다. 이에 교회는 세속의 물결에 범람되어 속수무책이었다. 너무나 많은 이교도인들이 교회로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이교도인들이 교회 안으로 그들의 이교 사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따라서 이교도를 향한 교회의 승리의 순간이 도리어 교회가 이교 사상에 물들게 되는 가장 큰 위험에 처하는 순간이 되었다.

 

모든 이방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제사 제도와 사제들과 제단이 있었다. 어느새 교회는 그들의 제사 제도와 사제들과 제단을 영입하였다. 이교 종교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상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사방으로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어느새 순교자들과 성자들이 이교도의 우상 신들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성자들과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우상과 그림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교도는 미신으로 가득하다. 어느새 십자가 조각에 미신이 붙기 시작했고,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유물, 즉 그들이 사용하던 옷 부분이나 머리카락이나 뼈다귀 등도 미신이 되었다. ‘배도자’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뼈다귀 숭배자들’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교도가 있던 많은 곳에는 수도승들이 있었다. 어느새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승과 수녀들이 되었다. 

  

4) 부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수도원이 발전하다.

기독교 수도원은 이집트에서 시작하였다. 기독교 수도원의 창립자는 테베(고대 이집트의 수도) 출신의 안토니오였다. 그는 서기 270년경 그의 고향에서 수도승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약 15년이 지난 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사막의 동굴로 들어가 홀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본받았다. 한편, 여러 다른 사람들은 수도원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집에서 각 수도승이 각자의 작은 방을 얻어 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기독교 수도원은 이집트로부터 모든 동방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때때로 수도원은 괴상한 형태를 지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시리아에서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30년 동안 굴뚝 꼭대기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여러 굴뚝들을 지었는데, 나중에 것들은 이전에 지은 것보다 더 높게 지었다. 그가 지은 마지막 굴뚝은 높이가 18미터 정도였고, 꼭대기는 평방 1미터였다. 그는 주상(굴뚝) 시몬으로 알려졌다.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시리아에는 상당히 많은 굴뚝 성자들이 있었다. 아타나시오스는 수도원주의를 서방에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암브로시우스, 제롬, 그리고 어거스틴은 수도원주의를 증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수도원주의는 중세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되었다.

 

왜 사람들은 수도승과 수녀들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악에 물든 세상으로부터 탈피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었다. 

 

5) 교회가 이단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다. 

이교도가 교회를 향한 박해를 멈추자마자 교회는 이교주의자들과 이단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교회는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이교 제사를 금하고 많은 이단들을 추방시켰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핍박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테오필루스는 간교한 계략을 통해 위대한 설교자 한 사람을 멀리 버려진 외딴 마을로 유배시켰다. 그 설교자는 바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이었다. 크리소스토모스라는 이름의 뜻은 ‘황금의 입’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그가 고대 교회가 배출한 설교자 중에 가장 유창한 설교자였기 때문에 주어졌다. 그는 노인으로서 폰투스(소아시아 동북부의 고대 국가)로 유배되었다. 그는 가는 길에 뜨거운 사막을 맨발로 지나야 했고 작열하는 태양 빛을 맨 머리로 견뎌야 했다. 그는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어거스틴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 교회의 박해를 옹호하였다. 이 사상은 중세 시대와 종교 개혁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을 고문하고 박해하는데 발판을 마련하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7. 교회의 존립과 재성장 (376-754)

 

1) 고대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요약

교회사는 장거리 여행과 같다. 교회사는 오늘날까지 벌써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다. 우리는 지난 6과까지 벌써 500년 정도의 장거리 여행을 달려왔다. 우리는 지난 초기 500년의 여행 중에 세 번의 커다란 전환점을 지났다. 처음 전환점은 그리스도의 군사인 교회가 원래의 본부이던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사건으로서 그 이후 교회는 북쪽으로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시리아의 안디옥(Antioch, 안티오크)까지 이르게 되었다. 두 번째 전환점은 교회가 바울의 인도 하에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이방 세계를 향해 나아간 사건이다. 세 번째 전환점은 교회가 약 30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피 비린내 나는 박해를 이기고 313년에 발포된 밀라노 칙령과 함께 이교도를 향해 승리를 얻은 사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인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인 스페인까지 승승장구하며 전진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지중해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이른 셈이다. 우리는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즉,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갈리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등을 다녔다. 또한 여러 도시들도 방문하였다. 예루살렘, 사마리아, 카이사레아, 안디옥, 서머나, 니케아, 칼케돈, 콘스탄티노플, 로마, 밀라노, 베들레헴, 리용,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타가스테(현재 알제리 - 역주), 그리고 히포이다. 

우리는 신학교에도 가보았고 광야와 동굴과 수도승들의 작은 방들과 지하 감옥과 맹수가 있는 원형 경기장과 카타콤과 교회들과 황제의 궁에도 가보았다. 우리는 대단히 다양한 광경들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2) 로마가 대제국의 중심이 된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 교회는 거의 같은 시대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 서방의 로마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하지만 기독교 교회는 계속 전진한다. 하지만 서방 로마 제국의 붕괴는 교회 역사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며 교회사의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사의 새로운 국면을 다루기 전에 서방 로마 제국의 발전부터 붕괴까지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도시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이탈리아 남쪽 섬), 북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전역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로마 군단은 동쪽으로 향하더니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 지경의 많은 영역을 정복하였다. 그 후 로마는 갈리아(현재 프랑스)와 현재 벨기에 및 네덜란드 지역, 그리고 브리튼 섬을 정복하였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서쪽으로는 대서양, 북쪽으로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 그리고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지경을 차지하였다. 

 

로마 제국은 대서양의 서쪽과 사하라 사막의 남쪽으로부터는 안전하였다. 유프라테스의 동쪽에는 파르티아(북부 이란 지방에 있었던 옛 나라 - 역주)와 페르시아가 있었다. 그들은 종종 로마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로마 군단은 늘 그들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부 경계선은 사정이 매우 달랐다. 

 

3) 게르만 민족들이 로마 제국을 침략하다.

라인 강 동쪽과 다뉴브 강 북쪽으로 게르만 부족들이 있었다. 게르만 부족 뒤로는 몽골인 훈족(族)(흉노족이라고도 불린다 - 역주)이 있었다. 훈족은 게르만족을 위협하며 밀어내고 있었다. 게르만족은 야만인들이었는데, 훈족은 더운 야만스러웠다. 훈족 사람들은 보기에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나웠고 큰 무리를 지어 거칠게 말을 몰고 다녔다. 게르만족 중에 서(西)고트 족(族)은 무시무시한 훈족을 견딜 수 없어서 서기 376년에 다뉴브 강의 하류 쪽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침입하여 들어왔다. 그리고 그 후 정확하게 100년이 지나자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오도아케르(434-493, 서방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용병(傭兵) 대장; 이탈리아에서의 최초의 이민족의 왕 - 역주)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처럼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으로 들어온 첫 번째 야만족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고트족이 로마 제국 영토로 침입하였다. 이에 로마 제국의 동쪽 황제였던 발렌스는 서기 378년에 아드리아노플 도시 근처에서 동고트족과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로마 군사는 완전하게 패배하여 전멸 당하였고 발렌스 황제는 살해되었다. 이에 그의 계승자로 테오도시우스가 황제가 된다. 유능한 정치가이며 장군이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고트족을 굴복시킨다. 이에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은 동방 로마 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으로 계속 존립할 수 있었다. 

 

한편,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패배하자 다른 게르만족과 함께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을 공격하게 된다. 로마 제국은 심각하게 부패하여 있었지만 아직은 여전히 덩치가 컸고 또한 전쟁을 치를 힘도 있었다. 따라서 야만족들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는 약 100년이 걸렸다. 이는 서고트족이 376년에 다뉴브 강을 건넌 후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후인 서기 476년 사건이다. 그 해에 서방 로마 제국은 완전하게 몰락하고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을 정복하여 차지하였다.

 

이처럼 서방에서의 로마 제국은 약 100년 동안 엄청난 고통과 비참을 겪어야 했다. 바로 이 어두운 기간에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이 생존하였다. 

 

야만족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로마 제국 전역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여인들과 처녀들, 감독들, 사제들을 능욕하고 살해하였다. 교회들은 파괴되었고 교회 제단은 마구간이 되었다. 성자들의 유물들은 파헤쳐졌고 수도원들은 폐허가 되었다. 강은 피로 물들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남녀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4) 로마제국의 멸망

로마는 서기 410년 알라리크(c 370-410, 서고트족의 왕)가 이끄는 고트족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다. 야만족들은 6일 동안 밤낮으로 도시를 약탈하였다. 어느새 로마 거리는 피로 물들었고 황제의 궁과 귀족들의 저택은 발가벗긴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가의 고급 가구들, 값진 그릇들과 보석들, 비단과 벨벳으로 만들어진 옷들과 커튼,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품 등이 박살이 났다. 온 세상을 노략질하던 도시가 이제는 약탈을 당하였다.

 

‘세상의 음녀’(Mistress of the World)에게 임한 끔찍한 재앙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제롬은 베들레헴 근처 동굴 속에 거하면서 「에스겔 예언서 주해」를 쓰고 있었는데 로마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괴로움과 경악에 빠졌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바로 코앞에 임하였다고 믿었다. 그는 “온 세상이 신속하게 파멸되고 있구나. 로마 제국의 영광이었던 도시 로마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구나. 신성하게 여겨져 왔던 교회 건물들은 잿더미가 되었고, 하나님의 처녀들(수녀들 - 역주)은 사로잡혀서 모욕을 당한 뒤에 살해되었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너무나 큰 공포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일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에스겔 주해서 서론 부분에 “온 세상을 이기고 세워진 로마가 무너졌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만국의 어미가 어떻게 열방의 무덤이 되었단 말인가?”라고 탄식하였다. 

 

로마 제국에 여전히 남아 있던 이방인들은 고대 신들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 신들을 져버린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로마에 재앙이 임하였다고 탓하였다. 어거스틴은 침략을 받은 로마 제국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 가운데 이에 대한 답변으로 바로 기독교의 탁월한 변증서이며 그의 위대한 작품인 「하나님의 도성」을 썼다. 

 

고트족의 침략 이후, 반달족이 또 다시 로마를 약탈하였다. 반달족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에 서기 455년에 지중해 바다를 건너 로마를 차지하였다.

 

한편 모든 게르만족에게 압력을 가해왔던 훈족은 샬롱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451년 - 역주). 이에 훈족의 왕이던 아틸라는 로마로 향하였으나 레오 1세의 중재로 로마 도시는 구출되었다. 


결국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의 서방 전체를 다 정복하였다. 즉,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네덜란드, 브리튼을 차지하였다. 제국은 무너졌지만 교회는 살아남았다. 야만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로마의 감독을 존경하였다. 황제는 야만족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백성을 지키지 못했지만 로마의 감독은 야만족들과 타협하여 백성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이제 전쟁으로 인한 연기와 먼지가 가라앉자 제국의 멸망 가운데 살아남은 교회는 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족들에게 축복을 베풀고 그들을 교육할 준비가 되었다.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하다>

 

 

 

5) 백성들의 흩어짐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을 침략하여 결국 476년에 로마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고대 역사는 야만족들에 의해 마무리되고 중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476년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던 1453년까지 약 1천 년간 지속된다.

 

이제 중세의 교회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각 지역에 어떤 부족들이 살게 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제국의 동방 지역부터 살펴보자. 이곳 지역은 야만족들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다. 동방 지역은 발칸 반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말한다. 동방 지역은 동방 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다. 동방 제국 내에는 여전히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황제들과 시민 대다수는 적어도 그 이름으로는 기독교인들이었다. 동방 제국의 시민들은 예술과 사상에 있어서 대단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이미 이전부터 이교도 그리스인(the Greeks)으로 있을 때 많은 놀라운 책들을 썼다. 물론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여러 많은 귀한 책들을 썼다. 이 모든 문명의 보고(寶庫)는 중세 시대를 통해 동방 제국 내에, 특히 콘스탄티노플에 보존되었다.

 

이제 로마 서방 제국이었던 여러 지역의 주민들을 살펴보자.

 

제일 먼저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는 원래 대단히 많은 서로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한 후에 그곳 주민들은 로마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배워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탈리아 주민들 대다수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야만족들의 침략 이후에 동고트족이 이탈리아에 들어와 그곳 원주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고트족들, 즉 서고트족(Visigoths)과 동고트족(Ostrogoths)은 로마 제국을 침략하기 이전부터 기독교인들이 되었다. 이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고딕어(고트족의 언어)로 번역한 감독 울필라스의 전도와 가르침 덕분이었다. 

 

갈리아의 남부지역과 스페인 북부의 반 정도는 서고트족이 차지하였다. 그들 역시 이탈리아에 자리 잡은 동고트족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을 침략한 부족 가운데는 고트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게르만족도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갈리아 동쪽에 자리 잡았다. 남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반달족 역시 기독교인들이었다. 하지만 고트족과 부르군트족과 반달족은 아리우스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었다.

 

북부 갈리아와 브리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프랑크족이 북부 갈리아, 벨기에, 남부 네덜란드를 차지하였고, 네덜란드의 북부 지방에는 프리지안족(Frisians)이 살았고, 색슨족은 네덜란드의 동부 지역에 자리 잡았다. 브리튼을 정복한 앵글로색슨족은 전부 다 이교도였다.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 살았던 민족들이 있다. 켈트족은 아일랜드에, 스칸디나비아족은 지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자리 잡은 땅에 살고 있었다.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라인 강의 동쪽 및 현재 러시아 땅에 살고 있었다. 이 모든 방대한 지역에 펼쳐져 살던 수백만의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였다. 

 

 

6) 교회가 당면한 두 가지 과제 

중세 시대가 시작될 때의 교회는 고대 교회의 양상과 크게 달랐다. 교회가 처한 상황은 과거와 전혀 달랐다. 

초기 교회는 매우 작고 연약했지만 바울과 여러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문명화되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에 살고 있었다. 로마 정부는 제국 전체를 다스리며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였고, 도로는 잘 닦아져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하는데 편리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여러 방면에서 서서히 부패하였다. 반면, 교회 감독들의 지도 아래 교회는 조직화되고 크게 성장하며 강력해졌다. 또한 거짓 교훈들을 대항하여 바른 교리 체제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제 교회는 로마 정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수많은 야만족 왕국들이 들어섰다. 이 왕국들 중에는 이교도 왕국들도 있었다. 가령, 갈리아의 프랑크족과 브리튼의 앵글로색슨족 등이다. 로마 제국의 영토 밖에 거하던 부족들 역시 이교도였다. 그들은 거칠고 무식했다. 그들은 사나운 짐승들처럼 맹렬했고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교육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에게는 도로도 없었다. 

 

이제 교회는 초기 때처럼 또다시 이교 세계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 복음을 전달받게 될 야만족들은 무식할 뿐이었다. 교회는 중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두 가지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 과제는 새로운 나라들을 기독교화하고 또한 교육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이 과제를 이루는 과정이 중세 시대의 천년 기간이라 할 수 있겠다. 야만족이 로마 제국을 침략한 후 약 500년 동안, 즉 서기 1000년이 될 때까지 유럽의 모든 새로운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들이 되었다. 그리고 천년이 차는 서기 1500년경에는 각 나라마다 지난 500년 동안 전수받은 중세 문명의 토대 위에 나름대로의 문화를 개발하였다. 

 

7) 고대 문화가 보존되다.

야만족들은 무식하였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리석음은 교육되지 않지만, 무지는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야만족들은 완벽하게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종교와 신화가 있었다. 법도 있었고 통치 체제도 있었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 군사들을 이길 정도로 전쟁 기술도 익혀서 알고 있었다. 노래와 이야기를 만들어 취미 생활도 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즉, 그들의 무지는 책에 대한 무지였다. 

 

야만족들이 제국을 침략할 때 많은 책들을 파괴하였지만 다 없앤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이 셀 수 없이 살해되었지만 살아남은 자들 중에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책을 써서 고대 세계에서 배웠던 것들의 상당 부분을 중세 시대에 물려줄 수 있었다. 특히 그들 중에 대다수가 수도승들이었다. 수도승들 중에는 교육을 잘 받아서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인쇄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전부 손으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이 손으로 써서 남긴 글들은 쉽게 낡기 때문에 다시 똑같이 손으로 써서 복사판을 만들어야 했다. 이 일을 바로 수도승들이 수도실에 앉아서 했던 것이다. 그들이 직접 손으로 과거의 글들을 복사하는 일을 함으로써 문명화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고 값진 기여를 하였다.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을 침략한 이후로 약 300년 동안은 책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기간은 암흑 시대였다. 하지만 수도승들은 인내를 가지고 원서를 손으로 복사하는 그 지겨운 일을 지속해 나감으로써 사람들에게 책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새로운 나라들을 교육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니 야만족들은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8) 프랑크족이 회심하다. 

프랑크족은 그들의 왕 클로비스(프랑크왕국의 초대 국왕으로서 481∼510에 재위하였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이다. 프랑크족을 통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수립하였고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과 우호관계를 가졌다. - 역주)의 통치 아래 점차적으로 모든 갈리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 이후로 갈리아는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랑크족은 야만족이 제국을 침략한 이후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첫 번째 게르만 부족이었다. 클로비스의 개종 사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매우 흡사하다. 클로비스는 맹렬한 전쟁 가운데 하늘에서 십자가 표시를 보았다. 그는 그가 만일 전쟁에서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서원하였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이에 클로비스는 서기 496년 크리스마스 날에 랭스 시에서 부하 3천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프랑크족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왕들이 계속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부족 전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한편,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의 이단 교리를 받아들였다. 반면, 프랑크족은 니케아 신조를 믿는 정통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프랑크족은 제국에 퍼져 있던 보편교회와 동일한 믿음을 유지한 반면, 개종한 다른 게르만족들은 이단이 되었다. 

 

프랑크족이 정통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의 교회사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약 200년이 흘러야 했다. 

9) 브리튼 제도(the British Isles)가 기독교화되다. 

서방 로마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기독교 신자가 된 로마 군사들은 브리튼에 기독교를 가져갔다. 제국의 멸망 몇 년 전에 브리튼의 수도승이던 성(聖)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사도”가 되었다. 그가 죽던 해인 461년까지 교회는 그곳에서 굳게 서나갔다. 아일랜드 수도원들은 배움을 위한 유명 장소들이 되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한 교육 장소가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선교사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성 패트릭이 죽은지 약 100년이 흐른 후에 콜럼바라는 아일랜드의 수도승이 스코틀랜드의 서해안 앞바다에 있는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을 스코틀랜드로 보내었는데 그의 수고에 열매가 많았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또 다른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라인 강 동쪽의 독일로 복음을 가져갔다. 

 

콜럼바가 죽기 1년 전인 596년 해에(콜럼버는 597년에 사망했다 - 역주)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수도승 어거스틴(초대 교부인 성 어거스틴과 다른 사람이며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 역주)을 40명의 다른 수도승들과 함께 잉글랜드(로마 시대에는 브리튼으로 알려진 곳 - 역주)로 보내었다. 브리튼은 앵글족과 색슨족에 의해 정복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곳은 앵글랜드 또는 잉글랜드로 알려졌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지독한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이 5세기에 브리튼을 정복할 때 그들은 그 섬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다시 그곳을 이교도 나라로 만들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후에 교황 그레고리 1세가 로마의 노예 시장을 다니던 중에 머릿결이 좋고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청년을 보고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데, 누군가가 교황에게 “그들은 앤젤들(천사들)이 아니라 앵글족입니다”라고 말하며 앵글족을 소개하였다. 이때 그레고리 1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나라를 다시 얻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교사들을 잉글랜드(영국)로 보내었다. 그 후 선교사들이 영국에 도착하여 이교도를 몰아내고 기독교를 심는데 약 100년 이상 걸렸다. 

 

10) 독일과 네덜란드에 복음이 전파되다. 

영국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훌륭한 선교사들이 되었다. 그들은 유럽 대륙의 북부 지역에 있는 이교국들 가운데 들어갔다. 이들 선교사들 중에 가장 뛰어난 선교사는 보니파티우스였다. 그는 먼저 프리시안들에게 선교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라인 강을 건너 독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다. 독일 이교도가 믿던 신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던 이교신은 토르 신(천둥 신 - 역주)이었다. 보니파티우스는 그 신에게 바쳐진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베었다. 그러자 이교도들은 경악하면서 천둥 신 토르가 번개로 그를 쳐서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자 이교도들은 토르 신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선교사 보니파티우스는 상수리 나무를 잘라 예배당을 지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보니파티우스는 “독일의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보니파티우스는 73세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선교하려 하다가 실패했던 프리시안들에게 다시 찾아갔다. 그곳에서 몇 사람들을 개종한 후에 세례를 주었다. 하지만 프리시안들은 여전히 선교사들에게 지독한 적개심을 가지고 보니파티우스와 그와 함께 하던 53명의 선교사들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754년에 발생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수고한 영국 수도승은 윌리브로드였다. 그는 그곳에서 690년부터 739년까지 수고하였다. 그의 수고는 위트레흐트에 대주교의 지위가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현재 그 도시는 네덜란드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본부로 있다.

서기 1000년 정도가 되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의 기독교 선교에 많은 진전이 보였다. 

 

 

11) 그레고리가 중세 교회를 상징하다. 

서방 로마 제국이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야만족 국가들이 서는 때에 가장 중요한 교황은 그레고리 1세였다. 그는 수도승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이 된 인물로서 590년부터 604년까지 교황으로 있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칭호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레고리 1세는 중세 시대 교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형성한 장본인이다. 그는 거대한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첫 번째 교황이었다. 그는 로마 도시에서 이전의 황제들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잡았다. 물론 로마는 법적으로는 여전히 동방 로마 제국에 속하여 있었다. 그레고리 1세는 세상의 왕처럼 시장들을 선임하고 군사를 모으며 다른 나라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한 롬바르드족이 더 이상 이탈리아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활동들을 하면서 무너진 로마 제국이 포기한 더 많은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 이후로 교회는 세상을 통치하는 과제를 껴안게 되었고 유럽의 정치권력들을 이끄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과거의 영토 분리 구간을 성직자들의 관할 구역으로 만드는데 사용하였고 유럽 전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외관상으로 공의를 유지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만일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은 분명히 야만족의 침략 기간에 겪었던 어려운 시절보다 더 어두운 암흑기를 지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 교회가 사용한 방법과 종사한 일들의 종류에 대해 반대하겠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교회는 그 당시 문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실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로마 대주교의 자리는 사도 베드로의 직을 계승한 자리로서 교회 전체를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사역은 선교뿐만 아니라 세상 권력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맞설 자가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그레고리오 성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잘못된 교리들을 교회에 가르쳤는데 다음과 같다. (1) 주의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이다. (2) 성자들은 우리를 도울 수 있다. (3) 연옥이 있다.

 

교회가 탄생한 이후로 약 500년 동안은 로마 제국의 고도로 문명화된 이교도들을 정복하였다. 서방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그 다음 500년 동안은 교회는 북 유럽의 야만적인 이교도를 정복하였다. 

 

교회는 복음 선교라는 끈질기고 거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여러 많은 강력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

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커다란 변화들이 무엇인지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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