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평가 기준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의 정당성 주장을 위한 평가 기준
이단이 아닌 이상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 현저한 이단으로 가는 길의 하나는, 문선명이나 박태선의 경우처럼,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들이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자신이 자의적으로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심지어 천주교회조차도 그렇게 나아가지는 않고, 천주교회도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상적 대리자(vicar)가 필요하며, 그가 교황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천주교회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말해도 실질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대신하여 가려는 이들은 이 땅에도 많이 있다. 또한 그 외에도 각각의 교회가 잘못된 주장을 하며, 잘못된 일을 하여 나가는 일은 무수히 많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각 교회의 말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의 시금석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먼저 각 교회의 잘 잘못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의 시금석을 제시하고, 그 시금석에 따라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모습을 진단해 보고, 그에 근거하여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시금석(criteria)
무엇보다도 먼저
(1) 우리의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신약 교회의 참된 모습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의 시금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러하거니와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오직 성경”의 원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이와 함께
(2) 우리가 교회와 관련한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여 가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기본적인 판단의 시금석이다. 교회로서 우리의 하는 바가 과연 성령님의 지시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 시금석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고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성경이 지시하는 원칙대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일(unbiblical) 뿐만이 아니라, 비성령적인(unspiritual)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지 않는 것도 비성령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둘을 같이 연관시켜 같이 강조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성령님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객관적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온전한 성경적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교화는 참된 의미에서 카리스마적인 교회(charismatic church)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강조하는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때, 그런 교회만이 참된 의미의 카리스마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적임을 강조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지 않는 교회는 성령적(charismatic)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성경적(biblical)이지 않은 교회이다. 그런 모습이 심화될 때 우리는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의 모습을 목도(目睹)하게 된다.
오직 성경적이고 동시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만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여 가는 교회로서 그 존재와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예배에 대해서
1. 우리의 예배는 성경적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인가?
교회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의 예배가 성경적이며, 성령적이어야 한다. 신약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성령님 안에서 예배하였다. 그것이 참된 교회의 바른 예배였고, 오고 오는 시대의 교회의 바른 예배의 토대이다.
그러나 점차 교회에서 성령님께 의존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예배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의식(儀式)들이 예배를 주도하여 교회가 의식들에 사로잡히는 루터의 이른 바 “교회의 바빌론 유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성령님의 임재의 결여를 의식(儀式)들로 보충해 보려는 것이었고, 바로 거기서 일정한 의식(儀式)만 하면 자동적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의식주의(ritualism)가 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할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전 시대의 “사도적 형태와 정신의 예배”에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사도들이 있던 사도적 교회는 이전의 회당 예배를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변혁시킨 예배 형태를 사용하여서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개혁자들은 이런 사도들 시대의 교회의 예배를 전범으로 삼으면서 사도적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예배의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 예배의 요소들에 근거한 예배 형식을 찾아 그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사도적 가르침을 이끌어 내고, 그에 따라 성령님 안에서 예배하는 일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모든 요소를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일소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성경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사도적 기준을 따르는 진리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truth)가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의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향을 피우는 것이나 촛불을 켜는 것과 무릎을 꿇는 것 등을 예배의 요소로부터 제거한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경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은 모든 요소들을 예배에서 제거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일들이 예배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성령님께 순종하면서 그런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예배의 요소 가운데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심정에 호소하는 요소들은 모두 예배에서는 제거 되어야 한다. 여흥 중심의 요소가 예배에 있다면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런 요소를 우리의 예배에서 정화해야 할 것이다. 예배를 통해 결과적으로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의 은혜 받는 것 중심으로 예배가 구성되고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이 가르친 원리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예배하되, 그러나 그 일을 어떤 형식을 따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예배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spirit)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 형식에만 매달리는 무미건조한 예배도 옳지 않음 강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는 성경적 진리의 요소에 근거하여 성령님께 의존하면서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의 예배와 대립하여 서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우리 교회의 제도는 성경적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는 것인가?
개혁자들이 예배의 개혁과 함께 중시한 것이 교회 제도의 개혁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제도가 아닌 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성경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면, 우리는 개혁자들이 제시한 성경적 제도에 우리가 과연 충실한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에는 개혁자들이 피 흘리는 희생을 하여 가면서 회복해준 성도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세우심을 입어 성도들을 다스리시는 장로님들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고, 교회의 자비의 사역을 주관하는 집사님들이 있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감리 교회에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장로와 집사가 없는데도, 우리 한국의 감리 교회에는 성도들 가운데 장로와 집사를 세워 성경적인 제도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감리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언급되기 보다는 좀더 성경적인 모습에로 나아 간 것으로 축하하며 세계 감리 교회에도 수출해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의 장로교회와 감리 교회에 이름뿐만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들 가운데 있는 장로님들과 자비의 사역의 실천자들(집사님들)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적 직분만 있지, 그들이 성경 가운데서 하기로 되어 있는 일들은 알지도 아니하고, 하지도 않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교회적 회개가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우리 가운데서 진정한 목사, 장로, 집사 제도의 의미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온전케 되며, 봉사의 일을 하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가까워지고 그 뜻의 실천에로 나아가며,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 넘쳐 나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각각의 직분이 그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실천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교회로 부름 받은 바를 잘 구현해 갈 수 있게 된다.
또한 목회자들이 지역의 교회들을 함께 목회한다는 정신을 잘 살리는 노회 제도와 교회의 문제가 있을 때 여러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모아서 함께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정신을 나타내는 총회 제도가 있지만, 과연 오늘날 노회나 총회 제도를 정말 그런 의미로 생각하며 이런 제도를 통해 우리를 진리와 사랑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순종해 가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뜻이 있는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들이 이 좋은 제도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과 이 제도를 피 흘려 회복해 주신 우리 선배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 근거를 가지고 우리의 선배들이 피 흘려 회복시켜 주신 이 좋은 제도를 참으로 의미 있게 드러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3. 우리의 관계성은 성경적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인가?
이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실천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교회 성도들 사이의 관계성이 성경이 가르치시고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그러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심각하게 손상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관계성을 회복하셔서 우리들이 참으로 사랑하는 관계 가운데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런 관계성을 제대로 드러내게 하신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런데, 만일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의 관계성이 다시 죄로 물들어 있는 것일 때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바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여러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차별성을 극복한 관계성의 회복이 교회 안에는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용하며 인정하고 더 나아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사랑을 드러내는 관계성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 됨이나 사랑의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하나로 묶어 주신 것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힘써 지켜 나가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라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공동체요, 진정한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임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각각의 교회나 각 교단이 과연 이런 하나 됨을 드러내는 일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내어 놓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성의 회복이 있을 때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4. 우리의 의사 결정과 실천은 성경적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교회의 의사 결정 과정과 그 결정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인지를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여 나가는 사람들임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함께 모여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몇몇 사람이 주도하는 공동체이든지, 함께 모여 함께 결정하여 나아가나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과는 거리를 둔 공동체로 아아 가서 주님의 공동체가 아닌 배교하는 공동체나 사단의 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사 결정에서는
(1) 궁극적으로 그 결정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과 뜻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2)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의 성경과 성령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잘 반영되고 있는지,
(3) 의견 결집 과정에서 성령님을 따라 인격적인 의견 결집이 이루어지고,
(4) 그렇게 성령님을 따라 결정한 것을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에 의존하여 수행하여 나가는가 하는 것이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마치는 말
이 네 가지 측면에서 우리 교회의 모든 측면이 성경적이며 성령님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당히 건강한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측면이 발견될 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고쳐 나가려고 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좋은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가 문제 가운데 있다고 해도 희망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에서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전통이나 우리네 문화의 독특성에 사로잡혀서 현존하는 우리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나아가려고 할 때에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교회나 이 땅에 있을 때는 우리가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깨우치심에 순종하여 가는가 하는 것에 우리의 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경적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회개하면서 고쳐 나가는 교회가 이 땅 가운데서 참 복음을 그 행위로도 증언하여 나가는 교회인 것이다. 개인이나 교회나 우리의 완전성에 의존하여 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서며, 그리스도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하여 지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존재답게 감사하여서 날마다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가는 서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서나 선포에서 뿐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과정에서도 복음을 드러내어 가야하고 그런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머리 도심을 참으로 드러내는 참 교회인 것이다.
부디 우리들에 속해서 우리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들이 모두 이런 시금석을 만족시키며 복음을 선포와 존재 행위로 드러내는 교회이기를 기원한다. 그 때에라야 우리의 교회로서의 정당성이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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