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주기도문

수호천사1 2016. 10. 13. 10:49

바른 기도의 신앙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의 가장 적절한 전제가 되며 이 기도의 첫 부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준다.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1)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배우게 하는가?

(1)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며 유한(有限)한 인간은 그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함을 배우게 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무한을 공간 관계에서 말할 때 무소부재(無所不在:GOD IS EVERYWHERE-OMNIPRESENT)하시다고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간에 한정(限定)지워져서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주에 편만하여 계시며, 영이시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 할 때 그것은 그 존재와 속성들이 무한하며 완전한 것을 뜻한다.

또한 무한하다(Infinite)는 말은 "한계나 제약이 없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이란 말이 하늘에만 제한되어 계신다는 그의 편재성을 제한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속에서 흔히 "하늘의 하나님"(느혜미야2장20절)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열왕기상8장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 오리이까"라고 솔로몬은 기록하여 하나님의 편재성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별한 의미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계신다. 왜냐하면 그곳이야말로 주님의 위엄과 영광이 가장 뛰어나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이사야66장1절)" 이 말씀을 깨달을 때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깊은 경외심과 경외감에 가득차게 된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영광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기 때문에 유한한 인생을 하나님의 존재와 무한성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이라는 머릿글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2) 하나님은 영원(ETERNAL)하시기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삶에 대한 지식을 땅에서 배운다.

시편 90편2절에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하였으며, 시편 102편12절에는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원은 영원한 현재에 있다.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영원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은 시간을 채우시면서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우리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기 어렵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을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계시록 1장8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시작 시키셨고, 하나님께서 시간을 끝맺게 하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현재 라는 영원에서 계신다는 사실이다.

현재라는 영원에서 계시는 그 분의 실존을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며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 무상 하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된 말씀은 영원(Etenal)한 삶의 지식을 배우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이라는 주기도문의 머리말이 참으로 합당한 기도가 되는 것을 재인식 시켜준다.

(3)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심을 배우게 한다. 그의 주권적 권능은 창조 사역에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 사역에서 보여 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전능(God is all Powerful-Omnipotent)하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과 모순되지 않는 한도내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그 결정에 따라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그의 권능은 말씀(Word of God)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고, 모든 인간의 심판자이시며, 모든 능력을 소유하심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1장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셨고, 창세기 18장14절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였으니"하셨으며, 예레미야 32장27절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 하시고, 시편 115:3에는 "이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그는 우주를 다스리시고 땅에 사는 그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어려움과 위험과 곤경에 처했을 때 모든 사건들을 살펴 주신다. 하나님의 전능은 창조의 역사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인류 구속에 대한 구원 역사에서도 나타났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마귀의 종 되었던 자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장16절에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이라고 주기도문을 드릴 때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시고 마귀의 세력을 능히 멸하러 오신 주님의 목적을(요한일서 3장8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이루는 삶이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능력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다.

(4)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므로 인간은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고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삶의 모든 짐을 알고 계심을 배운다.

시편139편 1장6절에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루시며 내게 안수 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전지(God Know Everything-Omniscient)하시므로 모든 지식을 갖고 계시고 그 분에게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하게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상과 사건과 감정과 행동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의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知識)의 특수한 면은 하나님의 지혜(智慧)로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다고 지혜의 처소를 사람의 마음으로 의인화 시켜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혜의 원형(原型 Original Pattern)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무결하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는 그가 설정하신 최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채택하는 데에 나타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지혜에는 시행 착오나 실패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는 구원의 역사(役事)가운데 나타났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구원의 도리에 감격하여 로마서 11장33절에 이렇게 기록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주기도문을 외울 때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과 결합되는 삶을 통하여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감사하며 육신의 삶은 모든 사물이 그의 눈에게는 벌거 벗었고 정체가 폭로됨을 인정하며(히브리서 4장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5) 하나님은 장소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존재 하시며, 그 곳은 신자들의 종국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삶의 위로를 주고 있음을 배운다.

열왕기상 8장27절에는 "하늘과 하늘들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첫째는 보이는 공중, 둘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라 구분 하거나 도는 첫째 하늘인 지상에는 사람이 있고, 둘째 하늘인 공중에는 마귀가 있고, 셋째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두 가지 견해를 가졌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장 2절에서 "십사년전에 그가 셋째 하늘(Third Heaven)에 이끌려 간지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리라"고 했다.

하늘의 왕국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의 왕국()이 33회로 가장 많고, 하나님의 왕국()이4회 나타난다. 다른 복음서의 경우에는 모두 "하나님의 왕국"이고 "하늘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서에 나타나는 특징적 용어이다.

여기에서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란 두 가지 표현은 한명칭으로 천국을 뜻하며, 천국에 들어갈 조건은 회개를 전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의 첫 일성인 마태복음 4장17절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 곳에서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사실 것을 약속 하셨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주기도문을 외울 때 그 나라에 대한 확신이 더욱 분명해진다.

①천국에서는 고난과 절망과 좌절의 눈물이 없다.
②천국에서는 죽음과 이별이 없다.
③천국에서는 후회와 양심의 가책에서 생기는 번민은 완전히 해소된다.
④천국에서는 "죄"를 영원히 볼 수 없다.
⑤천국에서는 만족과 평안, 기쁨, 풍성한 삶만이 있다.
⑥천국에서는 완전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⑦천국에서는 주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머리말로 시작되는 "하늘에 계신" 이란 짧은 기도는 천국 신앙을 굳게 붙들게 한다. 신자의 산 소망을 붙들고 오늘도 주기도문을 외우실 때 첫 마디 "하늘에 계신"이라고 외울 수 있는 경건과 믿음을 가지기 원한다.

필자의 논문에 주기도문을 외울 때 어떤 태도로 외우는 가에 대한 질문 가운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처럼" 한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중 67.2%였다. 10명중 7명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천국 신앙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이라는 주기도문의 머리말을 외울 때 아직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처럼"외우지 못하시는 분이 있다면 예수, 천국신앙으로 진정한 산 소망의 자리로 나올 수 있어야 하겠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우리 아버지'(Our Father)

예수님은 주기도문를 받으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하나님 아버지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관을 보여준다.

주기도문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간구에 이어서 "우리 아버지" 라고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른 것은 역사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가정의 언어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자녀가 아버지나 노인들에게 존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다.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불경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로 여길 만큼 그들은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36절 37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기도를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기도문에는 한가지 예외 즉,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곳 외에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셨다. 신약 성경 학자 요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많은 유대 문헌을 연구 검토해 보고,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없었고 또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보고 기도할 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도 없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신학자 부슈넬(Horce Bushnell)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 가운데 놀라운 교훈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만으로 그는 인류 최대의 교사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틴루터(Martin Luther)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이름은 아버지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견해들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입증하는 그 중요성을 가르키는 말들이다. 실로 하나님 아버지의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관이며 그 면류관이라 할 수 있다.

2)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가?

첫째, 하나님은 영적으로 믿는 자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을 주님은 선포하시었다. 로마서 8장 14절, 15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기록 되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마음 속에 성령이 임재하여 계신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자신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서 성령님이 사역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갈라디아 3장 26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그의 조물주와 심판주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못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 되었으므로 우리는 양자가 된 것이다.

3)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삶의 고백을 드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나의 삶 속에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다.

세상의 모든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 용감하고 무서움이 없다. 내 아들이 어렸을때 밤중에 천둥이 치면 잠을 자다가도 깨어서 "아빠"하고 내 방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아빠 곁에서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 듯 단잠을 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세상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려 삼킨 자를 찾으로 할 때에도 모든 공포와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둘째: 나의 삶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말 속에는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 하시는 것이면 구하기도 전에 다 허락하시는 아버지라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저희 천부(your Heavenly Father)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루에 몇 번이나 부르고 있는가?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많이 부르고 찾을 수록 그 만큼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특권과 그 축복을 잊지 말자. 그 생활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기도 하셨던 그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주기도문에서도 체험하고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이며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체험한대로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셋째, 나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 받게 된다

자녀는 그의 아버지의 형상을 대부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그 행동과 그의 몸짓, 언어를 본받게 된다. 그래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이 생겨났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그 분을 본 받아야 하겠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하였다.

그 분을 삶의 본보기로 삼아서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렇게 사신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닮아 일생을 사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기도에서 가르치셨던 예수님은 시편 37편 1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예수님처럼 나 자신이 온유한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온유"란 단순한 상냥함이나 기질의 온화함을 포함한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품 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온유란 야생말이 길들어져 명마가 되듯이 하나님께 길들임 받아 하나님 앞에 순복하고 이웃에 대해 말과 행동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진 자를 말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닮았는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8장 12절은 이와 같이 말씀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신 예수님께서 겸손의 최고 순종인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겸손을,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마다 마음에 새겨 보자.

"우리 아버지" 라고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살아가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가 접촉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 삶을 본받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처럼 닮아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 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처럼 닮아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실천 강령 그대로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처럼 닮아서 내가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살아야 할 평생의 삶을 두고 오늘도 무릎을 꿇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이 드리신 기도를 드리는 마음을 게을리 하거나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넷째, 나의 삶 속에 그의 자녀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시편 133편 1절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향기가 온 땅에 가득한 것 처럼 비유 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 "형제를 사랑하며"라고 하였다. 사도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의 본체이신 것을 요한일서 4장7절과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언급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태어난 것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주기도문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은 것이다. 따라서 형제나 자매를 미워 할 수 없음에 대하여 다시 요한일서 4장 20절과 21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 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주기도문을 드릴 수 없는 거짓된 입술로 기도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의 첫 간구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동안 우리 입술과 행동에 사랑의 열매가 없음을 회개하고 성령 충만의 열매이기도한 사랑을 열매 맺으며 주기도문의 참된 간구의 정신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나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꼐서 계시는 천국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주기도문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소망 속에 사셨다.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성부되신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되신 성부와 관련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도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참된 예배정신을 가르치시면서도 요한복음 4장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하셨다. 주님의 날이 된 안식일의 참 뜻과 교훈을 가르치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전하는 것을 평생 사명으로 알고 일하셨던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사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영생의 양식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도 요한복음 6장 32절에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하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41절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대해서도 마태복음 24장 36절에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고 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 고난의 잔을 준비하시면서도 누가복음 22장 42절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도 누가복음 32장 46절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지고 말씀 하셨을 뿐 아니라, 성부께서 계시는 집 천국에 영원한 소망을 두셨고, 그 소망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선포하셨다.

예수님꼐서 복음 전하시던 첫 음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라고 마태복음 5장 17절에 말씀하셨다. 그 천국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다. 천국의 소망을 부여해 주시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자들이 갈 수 있는 천국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위대한 선언을 해주심에 우리는 다시 감격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서 육신의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집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그러나 인생이 사는 날 동안 함께 제한된 손으로 지은 집이지 영원한 집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다.

인생은 누구나 한번 밖에 없는 일생을 산다. 그러는 동안 육신의 아버지가 있을때 아버지는 자녀로부터 분명한 신분과 위치를 가진다. 육신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을 자녀는 다른 친구들에게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땅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을 친아버지(요한복음 5장 18절)라 하여 반대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고난 곳에서도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또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버지"를 기도 중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땅에서 나쁜 아들이 있다면 육신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할 때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 15절에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養子)의 영이 함께 하심을 확신 하신다면 크게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 보시기를 바란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6절) 고 하셨다.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성령은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고난 많은 땅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신다. "아바 아버지" 여기에서 성령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라고 하신 기도를 하도록 도우신다. (로마서 8장 27절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첫번째 간구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이 기도를 믿음으로 드릴 수 있게 하시며 첫번째 기도의 열쇠를 우리 손에 주시고 하늘의 기도문을 열게 하신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 : 9)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 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대표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름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고 사용해야 한다는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마틴 루터는 "이 땅에서 최고로 많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 주기도문이고 그보다 더 희생 당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며, 주기도문에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 신약 성경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는 하나님이시다(He is God).

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가? 그의 사역에서 자연을 다스리시고, 사망을 정복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등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에 대해서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을 곧 하나님 이시니라"(요 1:1)라고 기록되었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음에 대하여,"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요 1:14)고 말씀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도성인신(道成人身-Incarnation)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자신을 기도의 대상으로 포함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들은 어떻게 표현 되는가?

생명의 떡, 생수, 길, 진리, 생명, 부활, 선한 목자, 하나님의 어린 양, 골짜기의 백합화, 문 둥으로 표현 되었다. 구약성경 이사야 9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에 관해 제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이름들을 열거 하고 있다. 즉 기묘자(奇妙者, Wonderful), 모사(講士,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 등으로 기록하였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표현한 이름들에 대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 4장 30절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며 표적과 기사(奇事)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의 기록처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선포 되는 곳에 오늘날도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록 믿음으로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성경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기록되었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전할 때이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면서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삶의 현장에서의 고난도 기뻐 할 수 있다.

사도행전 5장 4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과 환난 당하는 우리의 삶이 있을지라도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삶의 기쁨이 넘친다.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진정한 주기도를 드릴 때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

다같이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은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에 대하여 이사야서 6 : 3 에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라고 기록한다. 인생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구원 받은 이후의 성도의 삶은 그 거룩하심이 계속 드러나야 한다. 이것을 구원 얻은 성도들의 성화(聖化-Sanctification)라고 한다. 어떻게 거룩하심이 계속 드러날 수 있는가? 주기도를 통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드러난다. 기도할 때 마다 주문이나 독백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기도할 때 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삶을 살도록 마음에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진정한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사는 삶은 무엇이며(What), 어떻게(How) 사는 것인가?

1)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삶이다.

출애굽기 20 : 7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계명은 언급하고 있다. "망령되이"란 말의 히브리 성경을 영어 성경에서는 헛되다(Vanity)로 번역 한 곳이 있다. 이 뜻은 허탄, 무익, 허사, 허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령되이"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 여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 없이 허탈하게 불성실하게 불러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남용 되거나 오용되거나 악이용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분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도록 그대로 묵인하시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12 : 36-37에서는 "사람이 무슨 유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대방을 저주 하는 욕설에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이름이 섞여 사용되는 것을 흔히 듣는다. 매우 잘못된 일이다. 미국에서 교육 받고 자라는 신자의 자녀들도 화가 나면 함부로 그런 욕설을 사용 하는 것을 본다. 큰일 날 일이다. 우리는 어떤 때 짐승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주기도문의 진정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망령되지 않는 입술의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을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2)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시편 45 : 11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 할지어다." 요한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 배할지니라"라는 말씀처럼 예배는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 하신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은 참된 예배를 드릴 때이다.

3) 그의 이름으로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렘 17 : 22)라고 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들어온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주의 날 (The Lord's day)이라 불리워진다.(계 1 : 10) 우리는 이 날에 엄숙한 태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할 때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을 살아갈 수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주기도문의 둘째 간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3 : 2)고 외치신 예수님의 전도의 촛점은 하나님 나라였고 전도의 목적도 하나님나라 건설이었다. 유대인들은 기도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주기도문의 둘째 기원은 가장 짧지만 중심적이고 포괄적인 기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덧붙여진 송영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기원 중 "나라" 만은 다시 한 번 결론에서 언급된다. 참되게 헌신하는 영혼은 "나라이 임하옵시며"(Adveniat regnumtuum)라는 이 간구에 진심으로 참여해야 한다.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을 때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세계에서의 나라 관념과는 다르다. 즉 거기에는 지상의 나라처럼 경역(境域)적인 개념이 없는 하나님의 주권 또는 통치를 뜻한다.
 

2.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나라를 가르키고 있는가?

분명히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 15)라는 이 말씀과 같이,"그리스도의 말씀(골 3 : 16)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별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의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와 다를 바 없다.
 

3.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특징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로 묘사해 두고 있다.

1)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있었던 나라이다.
2) 개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장소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이다.
3) 이 나라는 내적, 영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실현이 가능한 나라이다.
4) 영원한 영광의 날이 시작되는 그 날에 임하는 나라이다.
5) 이 나라의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6) 이 나라는 죄가 없는 거룩한 나라이다.
7) 이 나라의 확장은 무한정한 나라이다.
8) 이 나라의 광채는 영원한 나라이다.
9) 하나님께서 절대 권능과 통치권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 하셔서 지배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천국의 국민은 모든 성도와 천군 천사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 라는 칭호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중심적인 메시지였고 주기도문의 중심적인 기원이며,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인 만큼 공관 복음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샤마임 말쿠트는 신약 헬라어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η βαοιεία τον θεου)나 "하늘나라"(η βασιλεια τὥν ουρανων)와 의미상 다른점이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쓴 마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란 호칭을 쓰기를 꺼려했으므로 "하늘"이란 말을 썼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에서 마가, 누가, 요한은 주로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썼기 때문에 "하나님의나라"로 쓰는것에 대해 자유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5.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 와 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도래를 선포하신 후 그의 공생에 사역에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파송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케 하였다. 또 한편 대적자인 사단의 세력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셨는데 마지막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 사건은 이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마태 3 : 2 에서 공생애 제 일성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미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 발전과 확장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마태 28 : 19-20에서 최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일을 계승할 교회에 주신 선교의 대과제이다. 그러므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 된 오해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1)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세상적으로 해석하고 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의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가치관이나 관심사 등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성경은 딤후 4 :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며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한다. 여기에 데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일 수 있고, 예수님이 아니고 돈일 수도 있다.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주기도를 드릴 때는 자아, 돈, 명예, 세상 향락이 나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 천국으로 해석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혁명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해방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노력과 행동으로 건설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7.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임한다.

1)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구원의 수단을 통해서 임하신다는 말이다 (롬 10 : 9-17). 즉 이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나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에 임재하는 믿음을 가진 중생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부터 시작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법이 우리 삶 속에서 집행되며 우리 생활에 의해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도록 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확장 된다.

중생된 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통해서, 그의 몸의 지체된 성도들에 의해 선포되므로 온 세계에 확장된다.

하나님께서 지상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 세계에 확장하는 데에 있다(마태 28 : 19-2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 : 1)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임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 되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입술의 고백을 통 해서 확장 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는 곳에는 사단의 나라가 좁아지며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외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 계속 확장되어 질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원은 이루어지는 것 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왕이시고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과 함께 완성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 말은 마라나타(Marana-tha)였다(고전 16 : 22). 이 말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이다. 사도요한은 계22 : 20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그의 재림의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의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함께 재림 하실 것이다.

하늘의 성도들과 땅에 남아 있던 구원 받은 자들이 그분의 제사장들로서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리게 될 것이다(계 20 : 6). 요한 계시록은 이것이 천년 왕국이 될 것이라 말한다. 천년왕국 시대에는 예수님은 사단으로부터 온 모든 그릇된 것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고, 이 세상을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한 성도들은 기도의 응답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다스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는 저주와 죽음은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에덴동산이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의와, 평강과, 영원한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찬양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더 이상 드리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나라를 소망한다. 따라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8.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 할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땅의 시민권을 하늘의 시민권으로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1) 회개에 의해서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슬퍼 하며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 속에 "회개"의 기도가 포함되어야 한다.

2) 그 나라 시민권자로써 합당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되도록 우리의 삶에 성화의 영향(Sanctifying Influence)을 끼치게 할 은혜(Grace)를 열심히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전적으로 주님의 성령에 의해 지배되며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할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의무를 올바르게 순종하며 수행하여 하나님 나라 천국 시민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여기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두 번째 간구를 드리는 기원자의 자세를 잘 요약한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으로 결론을 맺는다.

"……나라이 임하옵소서 라 함은 사단의 나라가 멸망하고 은혜의 나라가 홍왕하여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로 들어가 항상 있게 하시고 또 영광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옵심을 구하는 것이다." 아 멘!

 

(계속)



 

김석원 목사는
부산 고신대, 총신 대학원, Heritage College(M.R.E., D.R.E), Luther Rice Seminary( D.Min 졸업), Westminster Seminary (D.Min 수료),에서 공부하였고, 서울 충현교회 부목사, 올랜도 충현 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다 은퇴하였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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