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하나님의 영광

수호천사1 2014. 6. 27. 14:38

하나님의 영광

 - 이다윗 목사

 

 

 

 

하나님의 빛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그 빛이 오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것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미약한 촛불이라도 어둠 가운데 있으면 어둠은 곧장 물러가고 맙니다. 이것이 빛과 어둠의 전부입니다. 빛에 거하는 사람은 어둠가운데 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들 마음에 비춰셨습니다. 이 빛을 충만이 받고 사용할 때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예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니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당신에게 빛이 임했으니 일어나 빛을 발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어두움이 물러나고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이 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으며 빛을 사모하는 마음마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는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요 3:19)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고 그 빛 가운데 살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빛을 쬐는 것입니다. 이 빛은 하나님만의 개념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빛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겔 43:2)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봤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 빛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1)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

 

하나님이 볼 때는 빛이지만 인간이 볼 때는 불이 됩니다. 성경은,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출 24: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산 위에 임했을 때 사람들은 그 영광을 불같이 느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불을 받는 것입니다.

영광과 빛, 그리고 불은 같은 개념입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의 빛이요 그리스도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을 통해서 빛으로 발산됩니다. 그래서 빛과 영광과 불은 서로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육체에 속한 사람은 세상을 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단순하신 영으로 존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단순한 영적 존재 이상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모습도 갖추거나 취하지 않는 영적 존재하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2~3)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벽옥과 홍보석과 무지개가 둘러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만큼 크고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또 다른 사람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기록한 글에서 자세하게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칠십 장로와 함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발을 봤으며 하나님을 보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실제로 본 사람입니다.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

 

하나님의 형상을 본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6~28)

 

에스겔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켜 ‘사람의 모양 같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허리 위와 허리 아래 부분을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고 이상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이런 형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하나님이 짐승의 형상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런 존재하심도 없는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루는 여느 때처럼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문을 열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예수님의 피를 사방에 뿌리고 나 자신에게도 피를 뿌린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의 기도는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육의 기도, 혼의 기도, 영의 기도입니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겠지만, 나는 이 세가지 순서를 가급적이면 따르고 있습니다.

육의 기도가 끝나고 마침내 혼의 기도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영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성령님의 음성이 전해 왔습니다. 성령님은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영아, 너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너란다”

 

성령님은 나의 마음을 아셨던지 좀 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영아, 하나님께서 언제 가장 기뻐하시는지 알고 있니?

 

나는 성령님의 질문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해 버렸습니다. 내 속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의 생각은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나 봅니다.

 

“하영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너’란다”

 

정말이지, 성령님의 말씀은 나의 모든 인격을 완전히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성령님의 말씀에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에 너무 놀랐습니다.

성령님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곁드렸습니다.

 

“하영아, 하나님은 너의 사역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시단다. 하나님은 단지 ‘너’만 있으면 기뻐하신단다”

 

성령님은 그 말씀과 함께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을 한참이나 생각하게 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하나님은 나만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만을 찾아 헤맸던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은 나만을 바라보며 기뻐하셨는데 나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고 사역을 잘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느 부모도 자녀를 추하거나 부족한 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여전히 그 자녀는 부모에게 있어서 영광스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마음은 다 똑 같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더 관심이 가는 자녀는 못난 자녀입니다. 조용기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조목사님이 천막교회를 하고 있을 때 매우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세 드신 할머니가 매일마다 조목사님과 철야기도를 함께 했다고 합니다. 조목사님의 마음이야 고마웠지만 연세 드신 할머니의 건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침이 되면 큰며느리라고 하는 자매가 정성스럽게 커피를 끓여 오는데 옷 입고 다니는 행색이 부잣집 여인처럼 생겼답니다. 너무도 궁금하고 이상해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보아하니 며느님이 잘 사시는 것 같은데 왜 며느님과 함께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지 않고 이렇게 추운 천막에서 날을 새십니까?”

 

조목사님은 그 때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말이 평생토록 남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조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게는 새 아들이 있다우,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런대로 잘 사는데 막내 아들이 잘 못살고 있다우. 어찌 막내 아들이 편히 살지 못하는데 엄마 된 자로써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 할머니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이 쏠리듯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더 연약한 자녀에게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나’에게만 국한 되어 있음을 알고 난 후부터 교회사역에 대한 나의 태도는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 외의 것들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나’인 것처럼,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여야 합니다. 그것이 도리이고 올바른 이치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도 여러 차례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또 다른 면을 다음과 같이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문맥상으로 보면 댓구 형식입니다. 물과 바다가 댓구 형식을 취하고 있고 영광과 세상이 댓구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조금은 엉성하게 댓구형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정확한 댓구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하지만 구절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이 구절에 대한 궁금증을 성령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영아, 이미 여호와의 영광은 세상을 덮고 있단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은 이미 세상을 덮고 있단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마음에 스며들어 왔습니다. 지금껏 나는 여호와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영성훈련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대한 성령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마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을 덮고 있지만 세상 사람만이 그 사실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이며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종교적인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세상보다 교회는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광의 차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그 크기와 깊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이 각각의 사람에 따라 다름을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41)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단순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영광으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하늘의 영광으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이것도 영광이고 저것도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차이는 반드시 존재 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영광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서로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 또한 다릅니다. 별과 별의 빛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그렇게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더 높은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광 위에 영광이 더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영광의 끝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체험은 계속되어야 하며 더 높은 경지의 수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게 체험하면 할수록 당신의 능력과 권능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단 한번의 하나님의 영광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광 위의 영광은 존재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늘 이렇습니다. 가진 자가 더 갖게 되는 나라입니다. 없는 자는 계속 없을 것이고 자신의 가진 달란트를 개발하지 않는 사람은 가진 것조차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 더 큰 은혜가 부어지는 것이며 능력 위에 능력이 채워집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빛, 그리고 성령의 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성막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 위에 내리 쬐는 ‘불기둥’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났을 때부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저희를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면서 진행했습니다.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민 14:14)

 

이 불기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성막을 백성들 한 가운데 설치했습니다. 12지파는 세 지파씩 나누어 성막 사면에 진을 쳤습니다. 성막이 움직이면 백성도 움직였습니다. 성막이 가는 곳을 백성은 따라 갔습니다. 성막이 진을 치면 백성도 그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것이 며칠이든 수개월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성막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항상 성막에 내리 쬐었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가 신호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레위지파는 성막을 걷기 시작했고 구름과 불기둥이 가는 곳을 따라 갔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출 40:36-37)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밤과 낮을 병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불기둥은 반드시 밤에만 나타났고 구름기둥은 반드시 낮에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나타날 때도 있었습니다.

 

 

홍해에서의 두 기둥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에 다다랐을 때 애굽의 병거와 마병이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 왔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다시 강퍅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급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홍해를 갈라지도록 명했고 백성들은 갈라진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자그마치 2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바다를 건넌다고 하더라도 한 두 시간 안에 건널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밤새도록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놀라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인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름기둥이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 뒤쪽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의 사이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 14:19-20)

 

구름기둥이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애굽 군대가 있던 곳은 어두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무는 곳엔 광명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낮이 아닌 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밤인데 광명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겠습니까?

구름기둥이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가로 막았으며,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환하게 비춘 것입니다. 왜 불기둥이 밤새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췄냐고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기 위해선 빛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쉽게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역사한 것입니다. 성경은,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출 14:24)라고 그 상황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한 것은 밤 중에 일어났으며 그것이 적어도 새벽까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함께 사역을 합니다. 불과 구름이 서로 다른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는 서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기둥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였다면 구름기둥 역시 그러했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가득했기 때문에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5)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온통 구름이 가득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구름은 회막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구름이 회막 안까지 가득 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임했던 것은 모세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완성된 후에도 이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장은 구름으로 인해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1)

 

이처럼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은 그 위엄과 권능이 너무도 크고 거룩해서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으며 서 있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역시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니 성전에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겔 10:4)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은 항상 성막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은 비단 낮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밤에도 구름은 성막 위에 있었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8)

 

밤에 불기둥이 구름 가운데 있었음을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구름이 항상 성막을 덮고 있었듯이 불기둥이 항상 회막을 내리 쬐고 있었음을 인식하시겠습니까? 구름과 불기둥은 있다가 없어지거나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듯 불과 구름기둥도 영원합니다. 구름이 항상 회막 위에 있었듯이 불기둥이 지성소에 항상 비춰졌음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무울 10.05.18. 13:33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 더 큰 은혜가 부어지는것이며 능력위에 능력이 채워집니다....아멘
 
 
항상웃는자 10.07.16. 12:58
항상우리와 같이 계시지만 깨닫지 못한죄를 회개합니다.
 
 
태양 10.07.26. 01:16
자세하게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낙타무릎 10.07.27. 12:30
아멘~!!
 
 
animati 10.08.11. 00:59
평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어느정도 이해하게되었어요..
 
 
살찐여우 10.08.16. 01:59
하나님! 감사합니다.
 
 
친구 10.09.06. 10:15
하나님의 영광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
주님 주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적재적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나늘 인도하시는군요
주님을 찬양합니다
 
 
콩이 10.09.07. 01:39
인터넷 방송국에서 성경말씀을 열심으로 전하고 섬기시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도 목사님과 같은 답을 받으셨다고 고백 하신게 기억나네요.
권사님은 그 방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최선을 다 하시는 분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권사님이 여러 영혼에게 끼치는 섬김과 헌신이 나의 기쁨이다... 라고 하신게 아니라,
권사님 한분으로 기쁘다 라고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권사님의 방송에 기뻐 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권사님의 사랑을 기뻐하신다고...
바로 목사님이 받으신 말씀과 같은 맥이네요.
"나" 가 하나님의 영광이고 기쁨.
 
 
주님 안에 10.09.14. 04:14
글을 읽고 있는대 성령님께서 이제 육체에서 나오라 하시며 이제부터는 내가 쓸것이라 하시며
때가 되었으니 이 지역을 위하여 목사님과 함께 일 하실거니 보라하시네요. 할렐루야. . .
 
 
삼족오 10.09.28. 12:34
아멘..아멘..아멘...귀하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enag 10.10.04. 20:40
항상 무엇을 잘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을 다시 깨달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임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에반젤리 10.10.22. 01:52
스바냐 3;17 이 말씀 앞에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귀한 간증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오직예수사랑 10.10.26. 23:02
스바냐 3장 17절말씀이
저도 받았던 말씀이라서 읽으면서 그 의미를 깨닫고 더욱 감사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바로 "나"라니..
귀한 말씀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미라클 10.10.28. 02:20
아멘,
 
 
사랑 10.10.30. 09:53
아멘!




 
 
인치심 10.11.11. 13:21
하나님 영광 위의 영광을 체험하기 원하며,
그러기 위해 정결과 거룩으로 자신이 비워져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찬미이레 10.11.16. 20:13
주님은 바로 나를 원하심을 알았습니다.
아멘~!
 
 
예수님만이나의주 10.11.17. 17:58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바로나임을 가장기뻐하시는것도 바로 나임을 깨달았습니다
 
 
요나의표징 10.11.20. 23:42
아멘..
할렐루야...
 
 
sbsung 10.12.12. 17:15
 
 
Kiminsun 10.12.22. 08:49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은 그 어떤 화려한 나의 사역이 아닌 '나 자신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차원 10.12.28. 17:13
하나님의 대해 또 불기둥과구름에사역에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보라1 10.12.28. 19:32
영광의 빛으로 감싸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살아 가고 있음을 감사 드립니다
 
 
열국의 어미 11.01.28. 19:47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과 은혜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하옵소서.
 
 
호호맘 11.02.11. 14:59
불기둥 구름기둥이 항상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지금 현재 제게 참 큰 힘이되어 다가옵니다.
 
 
해피앤드 11.03.11. 12:54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그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길 원 합니다.
 
 
바다 11.03.14. 23:02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드보라1 11.03.17. 04:38
하나님의 영광이 나임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샘물 11.03.31. 01:29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JBLOVE 11.04.09. 11:38
Amen!!
 
출처 : 국제성경연구원
글쓴이 : 이다윗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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