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예수님의 기도생활

수호천사1 2014. 6. 27. 14:37

예수님의 기도생활

 - 이다윗 목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변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른 때는 변론에 참여하지 않으셨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변론에 참여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막 9:16)

 

여기서 ‘변론’은 ‘논쟁(argument)’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어떤 한 사람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8)

 

그 사람은 제자들에게 “왜 우리 아들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따졌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의 아들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그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에겐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다가온 그 사람은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언성을 높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의 호된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즉시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4)

 

 

진정한 기도

 

예수님은 아이의 몸에 들어 있는 귀신을 쫓아 내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당신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합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도대체 이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여학생이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거의 죽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목사님은 한 날을 정해 놓고 모든 성도가 모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 중 80% 이상 참석하고 모두 금식하고 기도하면 안 이뤄질 기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그 날 하루를 금식하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금요일이었는데 놀랍게도 거의 모든 성도가 참석했습니다. 모두들 금식을 하고 왔습니다. 수 백 명이 한꺼번에 통성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매는 얼마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자매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도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기도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응답되지 않을 기도라면 왜 하나님께서 시키셨을까?’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새벽예배 시간에 10분 혹은 20분 기도하면 그것이 기도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철야기도 시간에 밤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기도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올려지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나의 의견만 말하고 끝내는 대화는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간구 내용을 하나님께 다 아뢰고 난 후에 급히 교회 문을 열고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서는 씁쓸해 하십니다.

좀 더 기다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바쁩니다. 이런 기도는 의사에게 가서 “나 이곳 저곳이 아프니 꼭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하고선 급시 병원문을 빠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야 하고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약을 먹든지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 있겠습니까? 초등학생일지라도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잘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이 하는 기도를 흉내만 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절대로 하나님께 응답 받지 못합니다. 반드시 기도는 하나님이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간구만으로 다 채워진 기도는 아무런 응답도 없으며 아무런 효력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입장에서 기도한 것은 당신 입장에서 응답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입장에서 기도를 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응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당신의 간구를 다 아뢴 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이 ‘가라’ 하면 가시고 ‘멈추라’ 하면 멈추십시오. 하나님을 나무로 만든 신이나 금으로 만든 신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십니다. 당신이 무시하면 화를 내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당신 의견보다 하나님 의견에 더 귀 기울이십시오. 소래 내어 간구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더 할애하십시오. 백마디 외침보다 한마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정확하고 소중합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 받으신 예수님

 

만약에 당신이 예수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안다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서 능력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 깜짝 놀랄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으셨으며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세례를 받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에 나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셨던 모습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 받으신 후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부분을 누가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조금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당신 스스로 찾아보면 어떨까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쎄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찾으셨습니까? <기도하실 때에>라는 문구가 보이십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혹 이전에 이 문구가 있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놀랍게도 누가는 <기도하실 때에>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기도하실 때에>라는 문구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문구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예수님 세례 장면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적게 그 차이점을 나열한다고 할지라도 <기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의 차이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실 때에>가 의미하는 보다 깊은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심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과 함께 동행했으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새벽에 기도하신 예수님

 

우리나라의 교회치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새벽예배만 자그마치 5부 예배로 드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배가 없어 비어있는 시간이 부끄러울까 봐 시간마다 예배하는 모습은 새벽 별들도 놀라 잠에서 깰만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하지만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새벽기도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기도를 홀로 하면 어떻고 함께 하면 어떻습니까? 그냥 기도하면 되는 것이죠”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이지만 함께 하는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하셨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골방>은 헬라어 <타메이온>으로 <골방> 혹은 <밀실>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게서 골방을 말하실 때 그것의 의미는 홀로 거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를 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윗 본문에 나옵니다. 기도는 <은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밀한>은 헬라어 <크륍토스>로서 <숨음> <은밀한> <비밀의>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기도의 성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가 은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물론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 위해 나오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은밀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목사님 눈치 때문에 나오는 분도 제법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로 기도에 참여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교인들 기도훈련을 시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은밀한 기도를 들으신다면 왜 함께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골방>에서 기도할 수 없을까요?

맞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해 보신 분만이 알 수 있지만, 골방기도에는 뭔가 숨어있는 기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처음 골방에서 기도하게 되면 기도한 것 같지 않는 느낌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참고 기도하십시오. 마치 집안에 있는 잡신에게 기도하는 느낌도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 같았는데 집에서 기도하려고 하니까 마치 잡신에게 기도하는 느낌이 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할 때는 통성으로도 하고 음악에 맞춰 큰소리로 할 수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분위기는 성스럽고 화려한 예배당이어서 앉아만 있어도 거룩한 느낌이 들었는데 집에서 기도하니 왠지 초라하고 기도 같지 않는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골방>에서 기도하지 않는지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철저하게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좀 심했습니까? 글쎄요……

다시 한번 새벽기도를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한적한 곳으로>라는 단어가 눈에 확 띄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한적한 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골방은 혼자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부엌을 개조하면서 조그마한 방이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그 방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물론 그 방은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제법 컸습니다. 그 방은 나의 방이었고 은밀한 장소였습니다. 나는 그 방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는 곳은 옷장입니다. 옷들이 걸려 있고 옷 박스가 즐비하게 놓여져 있지만 눈만 감으면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밀한 장소로 바뀌고 맙니다. 내 아내는 화장실에서도 기도를 잘 합니다. 조금은 더러운 것 같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니 일(?)보다 기도에 열중인 내 아내의 중심을 보실 것을 믿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에서 했습니다. 지금도 차 안은 매우 좋은 기도 장소입니다. 좁은 장소일수록 영광체험이 강합니다. 기도 장소가 자주 바뀌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자꾸 옮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기도 장소는 기도뿐만 아니라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입니다. 물론 우리 몸은 성전입니다(고전 3:16).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내 몸이 성전이기 대문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영성훈련에 참여한 제자 중에서 아주 열심히 새벽기도에 나가는 분이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이 <골방>에 대해 언급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새벽기도의 맛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열심히 교회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 않는 것보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백 번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의지나 욕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기도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 시간에 골방에서 기도를 했더라면 더 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분위기 때문에 기도하고 전통이나 형식에 따른 기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제로 영성훈련을 인도하면서 훈련자들에게 <골방> 기도를 요구했습니다.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들의 기도는 더 뜨거워졌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원한다면 <골방>기도를 하십시오. 더 큰 능력을 받기를 원한다면 <골방>기도를 적극 권합니다. 그 어떤 추천도 예수님의 추천보다 더 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골방>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심으로 위기를 모면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화가 잔뜩 나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서로 의논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 화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의 음모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너무 한가해 보이지 않습니까?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판에 한가롭게 기도하시다니요?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1~12)

 

아닙니다. 그냥 한가롭게 기도하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갈릴리로 가셨을 때 위험에 처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사렛 어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셨을 때 그곳 갈릴리 사람들이 화가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3절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은혜가 임했다는 말씀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만이 유일하게 병고침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갈릴리 사람들은 화가 났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돌아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 보다 더 낮은 것으로 취급한 예수님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 4:28~30)

 

수많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셨을까요?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까짓 위험을 모면하지 못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신의 말대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인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지금이야 하나님으로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이 땅에 내려 오셨을 때에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태어나셨으며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지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나 나처럼 똑 같은 인간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살아계시는 동안 결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하늘의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마귀의 시험을 당하셨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힘들고 더 천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십자가의 고난까지 참고 견디셨습니다.

‘하나님이시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힘들지 않았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시니까 죄를 안 지었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육신의 모든 유혹을 받으셨으며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가지셨던 100%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쩌면 당신보다 더 연약한 몸을 가지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건장하고 잘생긴 예수님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예수님은 영화에서 나오는 그렇게 멋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내가 자신있게 이렇게 말씀 드리는지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한 평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위의 구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으셨으며 풍체도 없으신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한번 보시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멸시 받는 나사렛 마을의 어느 보잘것없는 여인을 어머니로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짐승들을 모아 놓은 마굿간이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귀한 맏아들을 구유(짐승 먹이통)에다가 뉘이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가장 천한 직업 중 하나인 목수였습니다. 예수님 가정의 생활은 너무나 형편 없는 가난한 생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결코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평생토록 자식을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평생 집 한채 가져보지 못하고서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셨습니다. 정성을 다해 가르쳤던 제자에 의해 배신을 당했으며 몸 값은 노예를 살 때 지불되었던 금액인 겨우 은 삼십 세겔이었습니다. 지은 죄도 없이 로마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하셨으며 누구 하나 함께 죽겠다고 달려든 제자도 없었습니다. 로마군인들로부터 침 뱉음과 뺨 맞음과 가시면류관의 갖가지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해야 할 효도를 남의 자식(사도요한)에게 어머니를 떠 맡겼습니다. 죽으셨어도 남의 무덤에 장사 지내셨습니다.

당신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결코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로지 당신과 나를 위해서만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무슨 신비스러운 능력을 행사해서 저들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셨기에 저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미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선지자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

 

또한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이려고 달려 들 것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님께서 그 정도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시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셨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비단 예수님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더 심각한 상황에서도 구원 받은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저들에게 닥친 것은 낭떠러지는 아니었지만 불가마 속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들을 죽이고자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달궜지만 저들은 풀무불 속에서 살아 났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사자굴에서도 살아남지 않았잖습니까? 살아남은 저들에게 위기를 극복할만한 능력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저들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 살 수 있었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저들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하지 않으셨을거란 생각은 낭떠러지보다 더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직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위기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내가 영성훈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기도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약한 사람들로 판단했습니다. 기도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저들의 말은, 마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싫어하는 약한 자들의 생각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목회를 하되 몸으로 보여주는 목회를 하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병이 있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 먹을 것을 사 들고 병원을 찾아가는 것이 방구석에 앉아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몸으로 뛰는 목회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성훈련을 하고 보니 기도처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어떠한 문제도 기도를 하면 다 해결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교회 개척에서 실패한 후 지역을 옮겨 LA로 가게 되었을 때 나의 마음은 상당히 조급했습니다. 비록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성령의 은사도 갖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조차도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목회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하고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오직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만을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6개월 정도를 지냈습니다. 거의 6개월 기간 동안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면 믿겠습니까? (물론 가족들은 간간히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기도하는 것을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내게는 기도가 필요했으며 기도를 통해서 더 큰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배를 드릴 교회도 없었고 교인도 없이 홀로 골방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때 당시 나는 아파트 창고를 기도실로 개조해서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참으로 값지고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지금 사용하고 있는 능력을 받았으며 수없이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광야는 지나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인생수업 중의 최고의 수업인 셈입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광야를 거쳤고 하나님으로부터 <합격증>을 받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물론 LA로 이사가기 전까지도 모든 생활비를 충족시켜 주셨지만 가장 힘들었던 영성훈련 기간엔 한 달에 1500불 정도 적자였습니다. 후원자도 없었고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기도에 열심이었고 아내는 일 나가기 전에 이른 아침에 골방기도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론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 데 참으로 놀랍게도 풍족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른비와 늦은비로 적절할 때에 필요한 금액을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이사를 가게 하셨으며 핸드폰 번호를 바꾸게 하셨습니다.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곤 오로지 기도하기만을 바라셨습니다. 나는 실제로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듣는 음성도 더 잘 듣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받은 능력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할렐루야!

 

 

기도를 통해 모든 결정을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하실 때 기도를 하셨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1~13)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밤새 기도하시고 날이 밝았을 때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이 눈 앞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날도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성만찬 의식을 제자들과 함께 나눈 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 기도가 제자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 가셨지만 함께 기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잠시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쎄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6~39)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지만 따로 세 제자만 데리고 조금 더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따로 조금 더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독 기도만큼은 홀로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홀로 하는 것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다음 날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가 제사장의 무리들과 함께 동산에 도착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아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절)라며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하시며 이미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 지실 것을 마음에 새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예수님은 너무도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인간이셨기 때문에 마셔야 할 잔이 너무나 고난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나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땀이 나는 경우가 없습니다. 강한 영광체험을 하다 보면 어쩌다 온 몸에 땀이 나고 이마에 땀의 기운이 돋는 경우는 있지만 땀이 흘러 내린 경험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도중 땀이 피방울처럼 흘러 내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방울>은 피가 굳어 엉겼을 때 큰 덩어리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피가 흘러 내린 것이 아니라 마치 땀이 흘러 땅에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피덩어리처럼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피가 아닐지라도 그 정도의 땀방울이 떨어지기까지는 얼마나 뜨거운 기도를 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날 기도를 통해서 모든 마음을 정리하셨고 모든 고난의 길을 걸으실 것을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결정을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합니다. 심지어 전화가 올 때에 받아야 할 지를 묻습니다. 누구를 만나야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훈련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일일이 성령님께 물어보고 결정합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에도 하나하나 순서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합니다. 때로는 찬송가를 반복해서 두 번 부를 때도 있고 때로는 갑자기 누군가를 세워 예언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결정은 성령님께서 하시고 나는 그 결정에 순종할 뿐입니다.

LA에서 영성훈련을 시작한지 3개월이 되려는 무렵에 성령님은 내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영성훈련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곱명을 성령사역자로 세우고 저들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날 성령님께서 언급하신 일곱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성령님께서 당신을 성령사역자로 세우셨다고 전했습니다. 일곱사람 모두 기쁨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들을 불러 세워 성령사역자로 세웠으며 기름을 부어 성별했습니다.

 

 

중보기도로 사람을 구하시는 예수님

 

오병이어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먹였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두드러졌던 귀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요 6장)

제자들이 남은 떡과 물고기를 다 거둬들인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급하게 재촉하시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시러 가신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귀한 사역 후에 오는 마음의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가신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신 이유는 제자들을 위험에서 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2~25)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파도에 휩싸여 위험에 처할 것을 미리 아시고 기도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위협적인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 있는 그 시각에 기도하셨고 기도를 통해 파도를 잠잠케 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중보기도는 교회에서 매우 유용하게 운용되는 사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원래 중보기도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사도요한은 범죄함으로 사망에 이르는 형제를 위해 간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간구를 통해 형제를 사망에서 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성령을 거슬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지은 사람만 제외하고는 죄에 빠져 있는 형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형제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을 사랑하셨지만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도요한만 더 사랑하고 베드로는 덜 사랑하겠습니까? 귀한 제자들을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기도로 세상 정욕에서 벗어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셨을 때 가장 먼저 따랐던 사람은 안드레와 요한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 1:40)

 

안드레의 이름은 언급이 되었지만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 하나만 갖고서는 언급되지 않은 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20:31~32)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사랑을 받았던 제자는 다름 아닌 사도요한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제자들 중 유일하게 오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넣기가 차마 부끄러웠던지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수석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였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야고보와 요한의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안드레가 수석제자 대열에 빠져 있습니다. 왜 빠져있을까요? 예수님을 첫 번째 따랐던 제자였는데 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배대의 아들입니다. 어느 날 세배대의 아내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성경에서 엄마의 치맛바람을 가장 강력하게 느끼게 하는 구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내는 자신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시면 두 아들을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에 앉혀 달라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두 아들은 제자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예수님은 화난 제자들을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예수님은 세상의 정욕이 없으셨습니다. 세상보다 더 크고 영화로운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것에 욕심이 있으실리 없겠지만 적어도 제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성인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곤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그 즉시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무엇을 하시려고 가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기도하시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세상의 임금으로 온 것이 아님을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오직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마 20:28) 이 땅에 오신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영성훈련을 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만,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야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야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어 목사가 되었을 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곤 참으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뻐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 후부터 기도는 대화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영광체험을 깊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손에는 치료의 광선이 나가고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때만 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고 순식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큰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놀라운 성령사역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을 원하셨지 교회나 사역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원하시고 나만을 통해서 기뻐하시고 나의 찬양에 감격하는 사실을 깨닫고서 나의 모든 생각과 목회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만을 바라보시듯이 나의 목회도 한 영혼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시듯이 나도 그렇게 작은 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영광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헛된 목회 헛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체험의 기도를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항상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셨을 때에도 홀로 떨어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격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했던 여인과도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구애 받지 않고 대화를 나누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 하셨던 이유는 기도란 그렇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번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세 제자를 데리고 함께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8~29)

 

왜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함께 기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굳이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7)

 

아마도 변형의 산에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 갖고도 예측은 불확신합니다. 그래서 변형의 산에 관해 기록된 다른 복음서의 같은 내용을 한번 볼까 합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마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거기에다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라 덧붙였습니다. 도대체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권능은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이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이 단어로부터 영어의 다이너마이트가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에서 말하는 <권능> 역시 같은 단어인 <두나미스>로 써져 있습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권능은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은 단순한 성령세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말한다면 권능을 받지 않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증인이 되었을 것이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기는커녕 동네에서도 증인의 역할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다는 말씀은 바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기름부음심 사건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에 취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저들의 입에선 방언이 나왔으며 권능의 말씀을 전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회개의 영을 심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세 제자들을 기도에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러 변형의 산에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혹 변형의 산 자체가 누구든지 올라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영광을 체험하셨던 것입니다.그리고 그 영광 체험하는 동안 예수님의 옷은 빨래로 아무리 더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희어져 있었고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 9: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체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비밀입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영광체험을 왜 지겨운 씨름이라고 생각하셨겠습니까? 이렇게 황홀한 기도를 왜 한 순간이들 마다 하셨겠습니까? 기도가 이렇게 좋은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행 22:17)

 

이 구절은 바울이 기도할 때의 모습을 잠깐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몽사몽>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엑스타시스>입니다. 이 단어를 비몽사몽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거나 잘못된 해석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비몽사몽>의 단어를 <trance>로 번역해 놓았는데 <입신>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엑스타시스 estasy>라는 단어는 현재 영어에서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듯이 <무아의 경지, 황홀경, 환희의 절정>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했다는 말은 기도의 무아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며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황홀경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기도에 이런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신약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할 때 <비몽사몽>했다고 표현되었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행 10:2~11)

 

신약성경에 <엑스타시스>가 <황홀함>이란 뜻으로 단 두 군데 사용되었는데 그것이 바울과 베드로의 기도에만 사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쌍벽을 이뤘던 최고의 리더였습니다. 한 사람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의 사도라 불렀습니다. 그런 두 사람 모두 <비몽사몽한> 기도를 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리 긴 시간을 중얼거린다고해도 황홀해지지 않으며 아무리 큰 소리로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황홀해지지 않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비몽사몽한> 기도는 영의 기도 입니다. 이것은 육의 기도나 혼의 기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능력이 있었는지는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입니다. 혹시나 해서 두 사람의 능력을 대표할만한 구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에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5~16)

 

두 사람 모두 죽은 자를 살렸던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손수건을 통해서도 병이 치유되었으며 베드로의 그림자만 닿아도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저들에겐 예수님 못지 않는 큰 권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들은 그런 큰 권능을 받았을까요? 바로 영의 기도때문입니다. 저들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지만 저들의 영은 우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영의 기도를 통해서 영의 능력을 키워갔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고 싶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당신도 영의 기도를 통해서 저들처럼 큰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게서도 영광체험을 하셨듯이 당신도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영의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강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때 우리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영광체험을 영의 기도를 통해서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으며 <골방>에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무울 10.05.11. 23:24
최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것과 관련된 여러편의 설교를 들었고 여러권의 책을 읽었습니다만 답이 나오지 않았었는데..목사님의 글을 읽고 맥이 잡혔습니다.정말 감사합니다.골방에서 영의 기도를 드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이다윗 10.05.17. 01:05
영의기도는 지성소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세가 지성소에서 했던 기도가 영의기도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리 하셨고요... 영의기도를 드리시려면 언약궤에 대해서 자세히 아시고, 원하시면 전화로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무료전화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전화를 해 드려도 됩니다. 부담은 갖지 마시고 정말로 영의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면 저희가 훈련한 내용을 토대로 함께 영성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통해서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전해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무울 10.05.25. 21:51
그렇지 않아도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고 싶었었는데 사이트에 전화번호가 나와 있지 않아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저는 한국에 있구요 제 휴대폰 번호는 010-8474-22** 이고 메일은 davidkim9@hanmail.net입니다.제가 전화를 드리는것이 편하실것 같으면 연락처 알려주세요.감사합니다..
 
 
st_clemens1 10.07.01. 01:44
내용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좋지만 저에게는 특별히 '진정한 기도"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기도하라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적혀 있는 "백마디 외침보다 한마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정확하고 소중하다"는 내용이 좋습니다.
 
 
이주희 10.07.06. 06:48
몇가지를 제메일로 스크랩했습니다 혹 실례가 안되는지...다른곳으로 전파하진않겟습니다..말하지 않으면 도둑질같아서 고백합니다.
 
이다윗 10.07.06. 09:23
아닙니다. 오히려 스크랩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횃불 10.07.17. 12:27
하나님을 만나는 길- 골방기도
기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떳습니다.- 예수님이 추천하신 기도 골방기도
 
 
사라김 10.07.18. 16:04
기도하면서 많이 느낀부분이데, 확증되않아서 혼자서 한달 기도할때와 여러분들과 한달기도할때 영적인 확장의 기름부음차이가 많이나는걸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양 10.07.26. 02:03
골방기도 주님이 하셨던대로 골방기도를 통하여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낙타무릎 10.07.27. 13:01
6년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줄곧 혼자 기도해왔어요..어느 책에선가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짝꿍이 있어야 된다기에 기도짝을 보내달라고 간구한적도 있었지요...지금도 퇴근하자 마자 혼자 기도방에 앉아..기도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도 기도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목사님 글을 쭈욱 읽어보니 제 기도는 혼의 기도에 머물고 있는것 같습니다..지금도 기도할때 머릿속이 동네 한바퀴를 돌며 오지랖넓게 간섭하고 오는데..아.. 저는 지금 기도의 집중력, 기도의 돌파가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주님~..
 
이다윗 10.08.03. 11:11
성막기도를 드려 보세요. 성막기도를 통해 육적인 기도와 혼적인 기도를 뛰어넘어 영적인 기도의 세계를 접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님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In Jesus 10.08.04. 12:52
저는 입신은 하지 않지만, 방언으로 계속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히 졸린 것도 아닌데 비몽사몽 속에 잠잠해지는 시간이 있는데, 이것이 영의 기도에 들어가 있는 걸까요?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좀 멍한 듯한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깨어 제정신이 들면 다시 기도하는데요.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요.
 
이다윗 10.08.07. 16:31
맞습니다. 비몽사몽이라는 말이 입신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물론 비몽사몽이라는 말은 약간 세상적인 표현이긴합니다. 그것이 좋은 표현이 입신인데, 자신이 몸을 조절하지 못하지만 인식은 할 수 있는 상태를 흔히 말합니다. 지금처럼 졸음이 오는 것이 아닌데 몽롱한 상태는 입신의 초기상태입니다. 이것이 깊어질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In Christ 10.08.08. 14:21
그런 경험이 입신 초기이군요. 전 그 잠잠해지는 시간중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 시간에는 정말 넋나간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라 왜 그럴까 싶었고, 그냥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건가 싶었어요. 남들이 말하는 입신은 천국에 가서 주님도 만나고 많은 것을 보고 오는 간증들이라 제 경험이 입신 초기 상태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목사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도 하다 그런 상태가 자주 오면 점점 깊어지는 때가 있을까요? 전 입신이나 은사를 간구하진 않습니다.
 
이다윗 10.08.18. 10:19
네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면서 더 큰 능력을 받게 되고 성령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animati 10.08.11. 15:25
저는 기도는 무조건 교회에서 해야된다고 생각해서 매일 교회가서 기도했는데..
골방기도가 중요하네요..굳이 교회 안가도 집에서 혼자 주님과 깊이 교제해야겠습니다..
사실 매일 하루라도 교회가지 않으면 불안했어요...얼굴도장찍고 싶었거든요...
저에게 바리새인의 의가 충만했어요..저도 골방에서 주님과 단둘이 교제하길 원합니다.
 
 
살찐여우 10.08.16. 02:01
하나님! 그저 감사만 나오네요. 찬양합니다.
 
 
jenny 10.08.18. 00:52
아....!탄성이 저절로 납니다 왜 제가 떨어졌는지....
물론 저의죄가 일차적이고요
저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주일예배와 가끔 수요예배만
참석하고는 거의 골방기도를 하면서 넘치는 은혜를 받았는데
흔히 주위에서 하는 기도의 모닥불효과와 모여서하는
새벽기도의 중요성 기도만하면 안된다는 심리적 부담감 그래서
애써 행함으로 증거하려던 노력, 대화기도로 전환하려는시도
등으로 지금은 거의 골방기도를 안합니다 교회에서는 너무나
기도가 안되어 제가 잘못하는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골방기도의 은혜를 회복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
하는데도 예전의 그집중이안되어 막막 답답하던차에 인도
되었내요 할렐루야!
 
 
콩이 10.09.07. 16:32
아멘.
 
 
번개 10.09.25. 03:46
in jesus 님 처럼 저도 방언을 하다보면 꼭 졸고 있는것 같이 멍하닌 내 생각은 없고 입으로 방언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는데 이것이 입신의 초기이군요. 깊은 깨달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는 프린트해서 볼려고 합니다. 일일이 찾아보기 힘들때가 있으니까요. 프릔트 해 놓고 자주 볼려고요. 이주희 님은 스크랩한것도 도둑질 같다고 햇는데 저는 인쇄를 했으니....감사합니다.
 
 
주사랑7 10.10.06. 10:31
저도 몇년전에 어떤 집사님의 동생이 죽게 되었다고 기도을 부탁해서 열심히 기도을 드렸습니다.
아침과 저녁을 금식하면 100일 기도을 작정했었어요. 헌데 제가 주님께 하겠다고 한 기도라서 백일이 넘었는데도 끝나지가 않았지요. 나중에 금식은 그만 하게 해 달라고 했더니 156일만에 끝나게 해 주셨기에 금식기도도 내 마음데로 하는게 아니라는걸 알았습니다. 암튼 기도 드리던 그 형제님도 이세상을 떠낫답니다. 낙심하여 왜냐구 여쭤 보았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그후 6개월이 지나서 책속에서 알게 되었답니다. 세상적인 저는 그분이 살게 기도을 드렸는데 주님에 뜻은 따로 있었더군요. 그 형제님을 놓고 기도을 드리기
 
 
주사랑7 10.10.06. 10:35
시작했던가 나중에는 150명도 넘는 분들을 놓고 중보기도을 드리고 있었답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고 제 생각이 나서 답글을 답니다. 아마 그떄 아버지에 뜻또한 교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서 아버지께 기도 드리며 오직 아버지에게 메달리시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모으셨을것 같습니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위해 앞으로는 그렇게 기도 드리라고 알게 해 주셨을꺼라 믿습니다.
아버지에 인도로 골방기도 2년 반만에 해방이 되어 6월 3째주 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어 넘넘 감사 드리고 있어요.
그간 교회에 나가서 기도 드리게 해 달라고 기도을 드려도 무릎꿇고 앉아 골방에서 기도 드리는 제 모습만 보여 주시면서 기도 하게 해
 
 
주사랑7 10.10.06. 10:38
주셨는데요 결과는 절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거에요. 그렇기에 그저 감사~ 감사~
사랑에 아버지께선 우리들을, 여러분들을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하세요. 내 귀에 안들리고 안보여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아버지시기에 이렇게 영적이야기들을 나눌수있는 공간이 있기에 그저 감사 드립니다. 감사해요 목사님.
 
 
icanfly 10.10.24. 13:20
골방기도의 위력.. 안그래도 새벽제단을 교회에서 쌓으려고 했는데 목사님 글 읽고 집에서의 골방의 기도 한 번 해 봐야겠네요. 근데 장소의 기름부으심 때문인지 교회가 더 기도가 잘 되는 듯 하던데.. 목사님 지적대로 골방기도는 많이 안 해봐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아직 골방의 기름부으심이 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궁금합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enag 10.10.29. 06:38
심한 아이의 기침으로 새벽3시30분 쯤 일어나 아이의 등을 두들겨주다 4시즘되어 밖으로 나와 기도해야겠다 마음이 들어 앉았는데 한 동안 기도를 노았던 시간이 힘들었습니다 성막기도가 생각나 컴퓨터를 켜고 이 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다보니
심하게 기침하던 아이는 조용히 잠이들었고 저넌 요한 1서 5장 16절 말씀에 귀가 쫑긋 성경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 시간은 벌써 6시 35분이 되어갑니다 찾지않았던 골방기도의 시간 동안 저는 표류하는 배와 같았는데 이 새벽 이 말씀이 꿀 송이 처럼 달고 좋습니다 4차 성막기도가 빨리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시작하는 것인지 엊제시작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기대합니다
 
 
찬미이레 10.11.16. 21:07
예수님기도의 100분의1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홧팅
 
 
에버그린 10.11.29. 21:11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예수님께 사랑을 지극히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무지로 인해 상처가 깊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오랜시간 알지 못했던게 오해였음을 알았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 회개 또한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았고, 제대로된 회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순전함 10.12.08. 13:53
나와 만나고 나와 교제 하고 대화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확신 시켜주셔서 감사 합니다. 아멘1
 
 
sbsung 10.12.11. 22:02
저도 1년을 방하나를 정해놓고 골방기도와 말씀을 읽으면서 몇가지은사를 성령님께서 주셨는데 너무기쁘고 힘이되어 지금까지 말씀읽고 200명정도 중보기도하고 되었는데 이젠 ㅎ의음성을 듣고 ㅎ의뜻대로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Kiminsun 10.12.22. 09:39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임을 다시한 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간구와 고백의 기도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하는 기도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드보라1 10.12.28. 20:10
경험에 의한 좋은 말씀을 읽으면서 아멘 아멘 소리가 가슴에서 우러 나옵니다~골방기도 영의 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렵니다~~
 
 
4차원 11.01.01. 20:36
저도 앞으로는 골방에서 기도를 드리며 영의 기도를 통해서 영의 능력을 키워가겠습니다.
아멘
 
 
미친 사람 11.01.07. 01:50
교회에서 행하는 기도회나 새벽기도에 매일 참석해야지만 참된 신자로 인정받는 분위기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심으로

사람이 원하고 사람한테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고 인정하시는 기도와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께 미치고 싶은 열망은 크지만 아직 아기신자인 제게 세상과 싸워 나갈 담대함을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beloved 11.01.09. 21:36
결론은 골방에서 하는 성막기도가 하나님 영광을 체험하는데 최선의 길라잡이 같습니다.
 
 
열국의 어미 11.01.28. 20:22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과 교회에 관심있는 것이 니라 '나' 자신과의 교제를 원하심을 기억하겠습닉다.
골방기도를 계획하고 결단하게 하옵소서.
 
 
입이 선한자 11.02.10. 04:08
열심히 나가던 새벽기도를 못하고 이 시골에 와 갈 교회도, 갈 새벽기도도 없어 힘들었던때가 생각 납니다.저의 외로움을 아신 주님, 친구통해 성막기도 알게 해 주셨고 오늘 더 깊게 그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골방기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다 11.03.15. 00:17
골방기도 해보겠습니다.
 
 
아가피아 11.03.21. 11:59
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를 소망해봅니다 아직 골방기도를 해보지 않았지만 사모함이 있습니다 결단하고 시작할수 있기를
 
 
샘물 11.03.31. 02:09
기도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출처 : 국제성경연구원
글쓴이 : 이다윗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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