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도
- 이다윗 목사
영(spirit)과 혼(mind)과 육(body)
성령님께서는 영성훈련 하는 동안 참으로 놀라운 것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언약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설명해 드린 것처럼 언약궤의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약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관심이 없는 것이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언약궤에 대해서 잘 이해한다면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전인격적인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이 말은 육(body)과 혼(mind)과 영(spirit)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이 육, 혼, 영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혼과 영을 묶어서 영혼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영(spirit)과 혼(mind)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body)과도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다음의 세 가지로 형성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흔히 영, 혼, 육의 나눔을 삼분설이라고 하고 영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것을 이분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신학자와 교단관계자들에게 필요한 지식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몸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영과 혼과 육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육의 기도
우리의 몸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세 가지를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혹자는 육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 몸은 그 어떤 것이라도 거룩하고 소중합니다. 단지 육(body)이라는 것이 죄를 짓기에 쉽기 때문에 추한 것이라고 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육체는 한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부모님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육체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병자들을 만나보면 육신의 모양이 제멋대로 생겨버린 모습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분들의 환부에 손을 얹거나 손을 잡고 기도할 때에 조금은 내 몸이 더러워지는 느낌을 들때도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들의 부모입니다. 저들의 부모는 저들의 겉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자녀보다 더 사랑을 표현하고 더 큰 사랑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들의 모습이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육신을 더럽거나 추하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찬양과 경배의 가장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혼과 영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 왔습니다. 나는 이곳에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나는 기도를 드릴 때 세 가지 요소를 늘 생각합니다. 그 세 가지 요소는 육의 기도와 혼의 기도, 그리고 영의 기도입니다.
나는 기도를 할 때마다 이 세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육의 기도(prayer of body)를 드립니다. 그런 다음 그 기도는 혼의 기도(prayer of mind)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기도는 영의 기도(prayer of spirit)로 변화됩니다.
육의 기도는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정결함을 얻습니다. 이미 회개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육의 기도의 또 다른 부분은 육신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육의 기도의 대표적인 것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믿는 자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도는 대부분 육의 기도에서 그치고 맙니다.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육의 기도 시간이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육의 기도는 얻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정욕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사람들은 열심히 구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도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맙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는 말씀을 들이 내밀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선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그것이 분하고 원통해서 그만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등진 사람이 많습니다.
육의 기도는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좀처럼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육신은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정욕대로 구하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세상의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정욕대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구함에는 세상적인 정욕이 눈에 보입니다. 사도요한이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입니다. 비록 구하였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정욕을 위해 구했기 때문입니다.
혼의 기도
혼의 기도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하는 기도입니다. 혼의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혼의 기도는 육의 기도의 결실이며 열매입니다. 육의 기도를 거치고 나면 비로소 혼의 기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육의 기도만 하고 기도실을 벗어납니다. 이제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데 기도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삶을 드리다 보면 기도가 재미 없어지고 실증이 나기 쉽습니다. 대화라는 것이 서로 오고 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혼자서만 실컷 떠들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니 어찌 그 대화에 재미가 있겠습니까?
육의 기도에서 끝나버리는 사람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일종의 넋두리만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는 하나님을 넋두리 들어 줄 대상으로 삼은 것 뿐입니다. 그 사람과 하나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셈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도 그 사람을 모르십니다. 이런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늘 삶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간구와 함께 감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간구와 함께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고마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혼의 기도는 언제나 눈물이 있습니다. 물론 육의 기도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육의 기도는 회한과 한탄의 절규함이 있지만 혼의 기도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혼의 기도에서 멈춰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기쁨과 감격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부흥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부흥회에 참석하면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마치 죽었던 신앙이 다시 살아난 듯 합니다. 마치 잃어버렸던 예수님과의 첫사랑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혼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영의 기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영의 기도
영의 기도는 지성소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육의 기도가 성막의 뜰에서 드려지는 것이라면 혼의 기도는 성소에서 드려지는 기도이고 영의 기도는 지성소에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영의 기도는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육의 기도는 입술로 하는 기도이며 혼의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영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체험은 그냥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외쳐댄다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으로 뜨겁게 열정으로 다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영의 기도는 그냥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는 노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야겠다는 의지도 없습니다. 뭔가를 얻어 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의지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생각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감정도 정리되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고요?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체험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불을 받아서 위대한 인물이 되어 보겠다고요?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체험은 없습니다.
당신의 어떠한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는 혼의 기도에 국한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혼의 기도에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의 기도에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비우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으면 어느새 하나님의 영광이 임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와 깊이가 더해갈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의 불이 임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영의 기도
성경에 보면 영의 기도에 대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선지자들이 영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영의 기도를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노아는 영의 기도를 했던 첫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아담이 영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떠나 살면서부터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담의 7대손이었던 에녹은 365년을 살다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서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이 영의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10대 손이었던 노아는 영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방주를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에 대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때문에 대홍수가 있었을 대 오직 8명만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실 노아는 방주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방주>라는 단어를 검색할 수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방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에게 미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노아에게 들려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믿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창 6:17)
만약에 당신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지었으며 홍수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각종 짐승들을 방주에 넣었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며 대단한 순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믿음과 순종이 생겨난 것일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노아가 영의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노아가 영의 기도를 드렸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저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만 언급이 되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게 “목사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억측입니다.”라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의 기도를 드린다면 내 말이 사실임을 믿을 것입니다.
영의 기도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을 보다 명확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는 다는 사실은 믿음을 크게 만듭니다. 노아 역시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번도 보지 못한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만들었을 땐 큰 확신이 있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큰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에게는 큰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기도의 결과입니다. 영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성경은 그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람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아브라함은 실로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으며 명확하고 정확하게 들었던 사람입니다.
우리 한번 솔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만약에 당신이 아브라함처럼 99세이고 사라처럼 89세였다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할지라도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들 중 대부분은 “No”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보였습니다. 큰 믿음입니다. 이러한 큰 믿음은 영의 기도를 행하는 사람이라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큰 믿음을 허락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영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물론 노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나타나 함께 방주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바로 직전에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6)
아브라함이 영으로 하나님과 동행을 했듯이 모세 역시 그리 했습니다.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에 계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막을 지었으며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습니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8)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들어갔던 곳은 지성소였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져 있습니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놓여져 있고 속죄소 양쪽에 두 그룹이 큰 날개를 활짝 펴서 속죄소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속죄소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지성소는 성막 중 가장 신성한 곳으로서 영으로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마치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었듯이 아무나 들어서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일년에 속죄일 하루 밖엔 못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함부로 지성소에 못 들어 오도록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처럼 영의 기도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수건을 둘러 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강하게 발산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세와 대화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모세의 얼굴에 왜 광채가 생겨난 것일까요?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 34:34-35)
모세는 항상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모세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수건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수건을 둘러 썼습니다. 여호와의 광채를 사람들이 뺐어갈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광채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수건을 둘러 쓴 것은 저들이 여호와의 광채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성소에서 영의 기도를 했습니다. 영의 기도를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도입니다. 영의 기도는 성령님과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영으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체험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것은 또한 베드로의 기도와 바울의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영의 기도였습니다. 단지 모세의 기도와 신약에서의 기도의 차이점은 지성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지성소는 모세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조차도 함부로 지성소를 출입하지 못했습니다(레 16:2). 오직 7월 10일 하루 동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더 이상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이제 더 이상 모세의 성막은 없습니다. 솔로몬이 7년동안 수고해서 지었던 성전도 없습니다. 스룹바벨 성전도 없고 헤롯 성전도 없습니다. 오직 성전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성전은 오늘날 믿는 신자들의 몸으로 변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이제 우리도 날마다 성전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이 쉽다고 말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인 것이 분명하지만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렵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그것은 영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의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우리가 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아직도 세상의 정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당신의 지식이나 의지로 살아간다면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당신과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시더라도 그것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습으로 당신과 동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변하시라고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순종은 당신의 몫이고 당신이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의 기도를 드렸던 수많은 구약의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영의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의 내용을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선지자 역할을 했던 선지자가 있었습니까? 물론 타락한 선지자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선지자라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는 영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랬고 엘리사도 그랬습니다. 이사야도 그리했고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의 기도를 했지만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영의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영의 기도는 특별한 기도볍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니 우리가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법이고 이것이 비결입니다. 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영의 기도를 통해 환상을 보십시오. 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당신의 믿음은 놀라울 정도로 크게 될 것이고 당신의 삶은 천국의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영의 기도
신약에서 영의 기도를 했던 사람은 매우 국한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온 백성에게 임하실 수 있었던 것이 오순절 이후였는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성령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성경은 몇 사람을 통해서 영의 기도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기도를 언급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할 것입니다.
성경은 바울과 베드로의 기도에 공통적인 단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모두 기도에 뛰어난 용사들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말씀하신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을 때는 평범한 기도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지금 우리가 행하는 그런 기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병든 자를 고쳐야 하고 죽은 자도 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는 <영의 기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기도가 약간 언급된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입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행 10:9~11)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베드로의 기도를 언급했으며 베드로의 기도에 <비몽사몽>이라는 단어를 곁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비몽사몽>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비몽사몽>은 헬라어로 <엑스타시스>입니다. 놀랍게도 영어는 헬라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표기는 <ecstasy>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아지경>, <황홀함>, 혹은 <환희의 절정>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 역본은 <tran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trance>란 단어는 흔히 <입신>, <혼수상태>, 혹은 <졸도>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끔씩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입신의 경지에 못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입신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대부분 “육의 감각이나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다” 혹은 “마치 내 영이 내 몸에서 떠나 활동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영의 기도를 하게 되면 입신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비몽사몽>으로 기도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영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간구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오직 영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기도할 때 육신의 감각을 어느 정도 잃어 버립니다. 그것은 기도의 수준과 깊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는 아니었을지라도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리었던 바울 역시 영으로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고맙게도 누가는 바울의 기도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기도를 봅시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행 22:17)
이 구절에도 <비몽사몽>이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신약성경에 <비몽사몽>이라는 단어가 쓰인 곳은 딱 이 두 군데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기도에 쓰였고 다른 하나는 바울의 기도에 쓰인 것입니다.
이 두 사도가 그처럼 큰 역사와 능력을 보였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영의 기도는 이처럼 큰 능력을 허락해 줍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께서도 영의 기도를 하셨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번도 아니고 항상 그렇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길 좋아하셨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항상 한적한 곳을 택하셨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구절이 왜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골방>은 헬라어로 <타메이온>입니다. 이는 ‘골방’ 혹은 ‘밀실’이라는 뜻입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도의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사역의 모든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님께서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지만 100% 인간이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면서 단 한 차례도 하나님이신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그리 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 모든 능력은 다 기도를 통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리라”(막 9:2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도 가능합니다. 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영으로 기도하면 저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단 한번만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토록 혼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방울처럼 흘러 내릴 정도의 기도를 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을 한쪽에 있게 하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번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변형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처음부터 변형의 산이라고 불러진 산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변형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대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8~29)
사실 나는 ‘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예수님의 입고 계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을까?’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영으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과 어투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권세와 행하셨던 능력, 그리고 보이셨던 사랑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의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을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던 이유는 저들에게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영의 기도를 통해 이와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영의 기도를 하게 되면 손과 머리와 온 몸에 특별한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바울의 손수건을 통해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병든 사람이 나았던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역사를 직접 봤기 때문입니다. 수 없이 많은 성령사역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바울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쓰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도행전이 계속해서 쓰여져야 한다면 바울의 역사도 일어나야 합니다. 사마리아 성 전체를 복음으로 변화시켰던 빌립집사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야 하며 베드로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도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가능하고 또 어떤 것은 불가능하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성경의 내용 중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성경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하신 곳을 찾아 기도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방기도를 하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의 손수건에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옷에도 그러한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이 나은 것처럼 병든 자가 우리 옆에 있을 때 병이 나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는 바이고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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