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은 역사의 종말론과 개인의 종말론이 있다.
요한 계시록과 666 종말론에 있어서 계시록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대다수의 성도들은 잘못 알고 있다. 성도만이 아니라 교회의 설교자들도 잘못 알던지, 알지 못하든지 두 그룹에 속한다. 바르게 알고 있는 분이 지극히 소수다. 이 문제로 인해서 한국 교회 안에서 잘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666 숫자와 관련되는 혼란이 있다. 이로인해 말할 수 없는 혼란과 이단들이 역사속에 존재하거나 사라져갔다.이 사상은 어느 한사람의 설교가나 집필가의 개인적 주장에 대하여 정설로 굳어버린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늦기전에 지금이라도 바로 성경속으로 들어가야 할 시기가 된 것같다. 요한 계시록은 이단을 위해 써놓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666이 말세의 적그리스도의 숫자다. 말세에는 666이 도처에 숨어 있다. 컴퓨터의 이름을 알파벳 숫자로 환산하면 666이라는 것이다. 머지 않아 이 컴퓨터가 전세계의 사람을 통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이 컴퓨터를 사용해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또 신용카드도 666이다. 머지않아 만국 통상화폐가 나오는데··········. 계 13장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도 못하게 하나니” 이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모든 거래가 바코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코드를 받으면 영원한 유황의 불에 빠지게 된는가? 요즘은 진화를 하여서 베리칩을 받으면 지옥간다고 난리며,정작 이단들이 만든 상품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는 것은 베리칩 받는 것보다 더 나쁜일인데 그것은 괜찮다고한다.
우리 교단의 경우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적은 교단이다. 우리 교단에도 그런 분이 있다. 전문가들은 바코드에 666이 없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그것이 영안이 어둡다고 생각한다. 6이 적그리스도의 숫자고 육이 세 개 모여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666이 무엇인가? 정말 6이 세 개가 모여있으면 적그리스도가 되는가? 만약 초등학교 6학년 6반의 6번 학생은 적그리스도인가?
666은 계 13:18에 만 나온다. 이 구절을 정확하게 주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666을 정확하게 주석할 수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벗어야만 요한 계시록을 바르게 알 수 있다. 계시록은 묵시서라고 한다. 구약의 다니엘서도 묵시서이다. 외경의 제사 에녹서, 십이 족장의 계시 등 등의 책이 묵시서이다. 이와 같이 여러 묵시서 가운데 하나가 계시록이다. 묵시서란 계시로 같은 책이다.
계시록은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다. 즉 묵시서는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책을 말한다. 그리고 용이니, 대접이니 하는 말들은 묵시문학적 용어이며, 이러한 양식을 묵시 문학이라고 한다. 계시록은 이와 같은 상당수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의 책이다. 그러면 왜 묵시록은 용, 짐등 등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가? 왜냐하면 묵시서들은 박해시에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박해기의 책이 전부 이와 같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위장 언어를 사용해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즉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상징과 암호를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이니, 짐승등이니 하는 것은 상징 또는 암호이다. 계시록은 도미시안 박해시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요한으로 알려졌으나 일반적 정서는 요한이 아닌 것으로 받아 들여 지고 있다.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박해 때까지 살아 있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시록을 사상이 다른 요한 문서와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체도 너무나 차이가 있다. 상식적으로 같은 사람의 글로 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 누구인가? 추측컨데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일 것이다. 계시록의 저자는 도미시안을 마귀로 생각하였다. 도미시안의 우상숭배에 반대하는 성도들이 죽고 박해를 받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도미시안을 마귀 또는 마귀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를 마귀라고 직접적으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시대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에 임금을 마귀라고 했다면 삼족이 멸할 사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상징과 암호 즉 위장언어를 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암호를 알 수 있는가? 방법은 묵시 문학을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 계속 읽다보면 그 표현 양식을 알 수 있고, 그 공동체에서 그 표현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묵시문학의 연구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 공동체 속에서 무슨 의미로 쓰여졌는지를 밝혀야 한다.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과 암호;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2절 :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 데 뿔이 열이요··············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 용이 ·········. 바다에 큰 짐승이 하나 올라오는 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데 거기에 참람된 이름이 적혀 있었고, 용이 그에게 권세를 주더라는 내용이다. 용은 마귀다. 일반적으로 용은 마귀를 상징한다. 붉은 용은 마귀다. 붉은 용을 공산주의로 생각하는데 계시록 안에는 공산주의가 없다. 짐승은 국가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짐승은 나라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짐승은 도미시안 치하의 로마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나 뿔은 왕들을 나타낸다.
참람된 이름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서 자기에게 경배하도록 함으로 스스로 신격화되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이 짐승에게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권세를 용이 주었다는 것이다. 즉 붉은 용이 도미시안의 권세의 근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도미시안의 명령에 저항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주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머지않아 주께서 오실 것이고 용들을 벌하고 성도의 눈물을 닦아주고 영원한 나라는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지금 요한은 소아시아의 박해로 죽음이 눈앞에 있는 성도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과 롬 13:1이하의 바울은 그 내용상 반대되어 있다. 즉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권세의 근거를 하나님(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국가의 권세가 붉은 용으로부터 왔으므로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울의 말씀은 정상적인 국가 권력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국가가 권선징악의 본연의 기능을 담당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국가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러나 계시록의 국가는 지금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있는 참람한 국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하라는 것이다. 도미시안의 권세를 붉은 용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 배후에는 마귀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서의 내용은 많은 폭군들에 의해서 악용되었다. 폭군의 권세는 그러면 어디에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그것은 단연코 계시록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악한 황제들의 의도에 아부하는 설교를 해왔다. 지금 요한은 현재적 도미시안의 배후에 붉을 용이 있으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항해야하고 승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하에서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분별력)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라” 지금 요한의 머리 속에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직접 거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숫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666은 사람의 수인 동시에 짐승의 수인 것이다. 짐승은 국가를 나타낸다.
따라서 666은 국가인 동시에 사람인 존재 즉 그 자의 수가 666이라는 것이다. 국가인 동시에 사람인 존재는 누구이겠는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황제이다. 그 황제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며 마귀라는 것인데, 어떻게 직접 거명할 수 있겠는가? 그 자의 수가 666이라는 것이다. 666이라는 로마의 황제는 누구이겠는가? 많은 학자들은 이 자가 네로("NERON")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네로라고 할 수 있는가? 앞 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름이나 수가 666이라고 했다. 라틴어를 숫자로 환원해 보면 네로는 666이 된다. 그리고 히브리어로도 네로는 666이 나온다.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16이라고 적은 사본도 있다.” 계시록을 사본하고 있던 최초의 사람들이 있던 지역의 사람들이 네론을 네로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616으로 고쳐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 사본자들이 그 당사자가 네로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짐승의 표는 무엇인가? 황제 신전에서 숭배를 하면 숭배를 했다는 표를 주었다. 이것이 짐승의 표다. 그리고 이 표가 있어야 물건을 살수가 있었다. 즉 숭배했다는 증서가 없이는 기초적 인 생필품조차 살수가 없었다. 요한은 그 짐승의 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상 숭배이므로 예수가 와서 심판할 때, 유황 불 못에 빠지게 되므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다. 시대상황은 2000년전의 시대에는 그것을 안받고 숨어 지낼 수 있는 상황은 은둔생활과 수도생활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다른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로와 도미시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계시록 13장에 칼에 상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짐승이 있는 데, 당시 소아시아에는 네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환생설이 널리 퍼저 있었는데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도미시안이 네로의 환생인 마귀적 존재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혹자는 히틀러를 666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읠 숫자를 더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육진법으로 더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없으나 그렇게 더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히틀러의 조상과 후손이 모두 666이 된다. 또 키신저를 666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집안은 다 666이 되는가? 그래서 한 사람도 구원을 못받게 되는가? 이름을 더하면 666이 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사물 중에도 666이 되는 것이 많다.
서달석 목사를 비롯한 666을 선전하는 책을 보면 무엇이 666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 책들이 많이 팔렸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신학적으로 낙후되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666은 로마 황제 네로를 지칭하기 위해서 일회적으로 쓰인 것이다. 7에서 하나가 모자라기 때문에 마귀 숫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그냥 상상한 것이다.
묵시문학 안에는 6이 마귀 숫자라는 내용이 없다. 666은 네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지 마귀와는 관계가 없다. 위의 내용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첫머리에 “예언의 책”이라는 말 때문이다. 즉 예언의 책이란 말의 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해석은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계시록의 해석방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는 말세론적 견해가 있다. 이것은 계시록을 잘 못 해석하는 대표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는 예언서이기 때문에 말세에 일어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련의 침공, 유럽의 통합, 아마겟돈 전쟁등의 말세적 내용이 계시록 안에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며, 한국에서 가장 많이 퍼져 있는 방법이다. 조용기 목사의 요한 계시록 해석도 완벽하게 말세론적 견해이다.
계시론에 대한 바른 견해는 당시대적 견해이다. 이 견해는 계시록은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묵시 문학의 특징과 표현의 양태를 잘 살펴서 당시의 상징과 암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계시록을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시록 해석방법이 이 견해이다.
그러면 예언의 책이라는 개념과 당시대적 견해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당시대적 견해라고 해서 계시록 안에 역사적 예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년왕국, 새 하늘 새 땅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역사적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으로서 계시록 안에는 미래적 내용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은 철저하게 당시대적 역사의 정황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미래적 내용은 박해받다가 죽는 자들은 주님이 재림하시면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그들에게 유업으로 줄 것이며, 이 땅에서 승리하고 머지 않아서 그들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책이다.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은 조만간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유황 불못에 빠지리라는 예언의 책이다. 따라서 말세에 소련의 침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박해받는 사람들의 정황과 생명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첫째 사망은 당시 박해를 받다가 목이 잘리는 것이다. 둘째 사망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정말로 무서운 영원한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며, 이기지 못하는 자는 둘째 사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하는 예언의 책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계시록은 예언의 책이다. 그러나 그 예언은 철저하게 소아시아에서 박해받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예언은 눈에 보이는 현실과 정반대 되는 현실을 예언하는 예언이다. 마귀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고 진정한 승리자는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것이다.
그 상징이 천년 왕국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절망 중에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는 책이다. 즉 희망의 책인 것이다. 정통주의 역사관은 비관주의적 역사관을 말한다. 이 비관주의적 역사관에 이용된 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다. 한국 교회가 바로 이것을 사용했고, 그 출발은 박형룡 박사에서 시작하고 있다.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개혁교회의 역사관은 아니다. 주로 세대주의자들과 부흥운동의 역사관이다. 이들이 비관주의적 역사관을 말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관주의 역사관의 문제는 교회의 역사개혁의지가 없어지는 문제를 일으킨다. 즉 교회의 세상적 책임의식이 없어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즉 세상은 망할 세상이므로 개혁하기 보다는 구해서 천성으로 보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 핵심적인 일이 된다. 이러한 역사관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개혁교회의 바른 역사관은 양자 모두가 아닌 희망의 역사관이다. 희망의역사관이란 낙관주의적 역사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낙관주의적 역사관이 아닌가 하면, 희망주의적 역사관은 역사에 존재하는 죄악성과 마귀의 활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역사의 신뢰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희망적 역사관의 낙관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생각이다. 아무리 마귀가 강하다고 할 지라도 우리 주 예수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희망이다. 결국에는 예수의 도래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에 희망의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을 갖는다면 불의한 역사를 개혁하기 위해서 캄캄한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관은 역사 개혁에 뛰어 들게 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역사관은 그 메시지 자체가 희망의 역사관에 더 가깝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비관적인 것이다. 마귀가 주관하는 처절한 현실의 캄캄한 상황은 당시의 현실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말이다. 죽음도 뛰어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경을 바로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왜 우리나라만 말세론에 휘말려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지는 하나님만 아시리라. 지금은 아무리 바르게 가르쳐 주어도 머리속에 깊이 박혀있는 잘못된 말세론이 귀를 막고,오히려 바르게 가르치려는 자를 공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신앙이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악을 끼치며 예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고집하고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이다. 그것을 어느 개인의 영달이나 교리로 엮은 책이 아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을 소개하고 길을 안내하는 책이다. 주님의 말씀이 박형룡 박사 말보다 못하는 것인가?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깊이 묵상하면서 바른 성경보기를 하여야 하겠다.扈
'설교. 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목회자란 어떤 존재입니까?[2](골4:12-13,140525/이병천목사) (0) | 2014.05.27 |
---|---|
[스크랩] 요한 계시록의 핵심내용을 이루어지는 순서대로 정리하였습니다. (0) | 2014.05.24 |
[스크랩] 죄에 대하여,의에 대하여,심판에 대하여... (0) | 2014.05.24 |
[스크랩]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0) | 2014.05.24 |
[스크랩] 천년왕국의 세계 _카이로스 (0) | 201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