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⑥
사단의 술책으로 굴절되어 버린
이스라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이방 기독교회
앞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하느님의 받아들여짐이 되어야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로마서 11:15의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는 말씀 가운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란 ‘부활’을 의미하는 바,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심이 부활의 직접적인 전조가 된다는 뜻으로서 부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이와 같은 교훈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 11장의 약속의 구체적인 성취의 때와 방법을 계시한 계시록 7:1~8절 말씀에 의하여서 보증될 뿐만 아니라(게시판 "이스라엘의 회심과 코리아"에 올린 글을 일독하십시오), 구약성경 호세아 5:15절 말씀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내 곳’ 즉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스라엘이 ‘그 죄’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아니한 그 죄를 그들이 뉘우치고 예수님을 다시 찾기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부터 1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 왕에 대한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압살롬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을 거부하게 선동한 것은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환영했어야 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선동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거부하게 한 것과 유사하다(마 27:17,18).
둘째,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 중 아히도벨을 통해 다윗을 배신케 했듯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도록 된 것과 대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음모와 유사하다(눅 22:1-6).
셋째, 아히도벨이 밤중에 군대를 이끌어 다윗을 공격하려고 한 것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밤중에 잡으러 온 것과 유사하다.
넷째, 아히도벨이 나중에 자살한 것과 가롯 유다가 자살한 것이 같다(삼하 17장).
다섯째, 다윗의 피신 중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다윗을 따랐는데(삼하 15:18~22), 예수님이 유대인의 배척을 받고 오히려 은혜가 이방인에게 임한 교회시대와 비슷하다.
여섯째, 압살롬의 반역사건 실패 후 이스라엘의 여론이 다윗의 복귀를 원했어도(삼하 19: 9~10), 유다족속 중 하나로서 12지파의 왕 노릇을 했던 다윗은 그의 자연적인 골육인 유다지파가 “돌아오소서”라고 할 때까지 환도(還都)하지 않고 기다렸는데(삼하 19:11-15),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신을 좆아 형제 된 유대인들이(롬 9:5) 회개하여 그를 그들의 메시아로 영접하고 환영할 때까지 재림하시지 않을 것임에 대한 표상인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예표이다. 다윗이 복귀하기까지 그의 자연적 골육인 유다지파가 다윗의 환도를 원해야 했듯이,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접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제까지 지연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접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태복음 23:37~39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Jesus looks over Jerusalem and ponders its future; based on Matt. 23:37-39; Luke 13:34-35.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예언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다.
첫째, 언젠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 때 배척했던 메시아 앞으로 돌아올 때가 있을 것임을 교훈한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를 영접하는 찬송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그를 믿는 유대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어느 땐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 앞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이 예언은 임박해 있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언하는 말씀 가운데 있는 한줄기 소망의 빛이 되는 말씀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그를 메시아로 영접할 때까지는 임하지 않을 것임을 교훈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하느님의 받아들여짐이 있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임하지 않는다는 로마서 11:15의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보증이 되는 바,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한 계시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느냐 안하시느냐는 이스라엘이 회심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심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연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개하느냐 안하느냐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 기독교회가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구원 방법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켜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들어 있는 로마서 11:25, 2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그리고 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고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할레어 “후토스”(οὔτω, 그리하여)의 용법은 결코 시간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시간적 순서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하느님의 경륜 방법을 가리킨다. 그 하느님의 경륜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시기심”인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이 앞에서 이미 명백히 밝혀 놓은 것이다. 즉, 때가 되면 이방인에게 격발된 이스라엘이 돌아와 구원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에 대한 시기심의 영향 아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열납되고자 분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로마서 10:19~21과 11:11~14의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11:25,26절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저절로 사라져서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뜻이 결코 아니며, 또한 “이방인이 충만하게”되는 때가 도래하면 하느님께서 열방들에 대한 관계를 갑자기 딱 끊으시고 이방인들을 버리시거나 하느님의 관심을 그들로부터 완전히 돌려버리신다는 의미도 아닌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화목시키는 일을 담당할 주요 도구로 바로 이방인을 택하셨는데,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갑자기 딱 끊으신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로마서 11장의 전체적인 교훈을 바로 이해했다면 이와 같은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을 있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하느님의 경륜 방법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는 이방 교회가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은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하느님의 받아들여짐이 되어야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회심케 하는 주요 도구인 이방인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방인이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하고 완전하게 임하느냐 임하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그때는 자신이 이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야 할 때임을 사단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왕 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사단은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 다시 강림하시는가?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받아들여짐이 될 때 재림의 시기가 임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회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구원받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때 이루어진다.
그런고로 이 땅에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 사단은 이스라엘을 화목시키는 주요 도구인 이방 교회가 그 거룩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파멸시켜야 했다. 악한 사단은 어떻게 교회가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도록 역사했는가?
-계 속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선교(영원한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⑧ (0) | 2014.03.29 |
---|---|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⑦ (0) | 2014.03.29 |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⑤ (0) | 2014.03.29 |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④ (0) | 2014.03.29 |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③ (0) | 2014.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