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⑤

수호천사1 2014. 3. 29. 20:34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⑤



  이방 기독교 신자들은 바울이 로마서 11:6에서 언급하고 있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는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교훈인지를 결코 잊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비유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변함없는 신성성을 입증함으로써, 이방인으로 하여금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느님(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된 상태에 처해 있는 유대인에 대해서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됨을 경계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켜 유대인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는 이방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


  17절 이하에서는 구원사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감람나무의 접목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가운데, 이방인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이방인의 유대인에 대한 오만을 경계하고 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어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이 비유에서 원래의 참 감람나무는 유대인, 그 뿌리는 유대인의 조상, 꺾이운 가지는 불신 유대인들, 접붙인 돌 감람나무 가지는 믿게 된 이방인을 말한다. 즉, 이방인이 탈락한 유대인의 위치에서 유대인의 조상을 믿음의 조상 삼아 그 토대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 기독교인들을 “야생 감람나무”로 신중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방인들의 상태는 야생 바로 그것이었다. 곧 그들은 “재배되지”않았다.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하느님의 독특한 수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로마서 9:4에서 바울은 타고난 혈육으로 인한 유대인의 특권을 열거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참 감람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이방인들은 원래 결코 쓸 만한 기름을 생산하지 못하는 “야생 감람나무”의 상태였다.


  이와 같은 그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결코 그들이 지닌 어떤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11:19, 20).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잘려나간 것과 똑같이 믿음을 통해 이제 접붙여진 이방인들도 믿음이 없어지면 다시 잘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믿음이 있든 없든 유대인들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어떤 우월성도 없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물론 이방인들도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백성의 분담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뿌리에서 나오는 이익의 몫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유대인들의 그 “뿌리”의 유리함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들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11:18). 유대적인 뿌리는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들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반대로 이방인들의 이러한 불리함에 견주어 볼 때 유대인들의 유리함은 실제적인 유리함인 것이다(11:24, 9:4,5).* 바로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오만은 배제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 감람나무의 접목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이방 신자들은 유대인들을 얕잡아 보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접붙이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엡 2:19)로 삼으신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영원토록 생명도, 열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새로운 생명은 그들이 접붙임을 받은 이스라엘의 원둥치의 생명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빚을 진 것이다. 이방인들이 뿌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이방인에게는 새 언약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옛 언약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12은 이방인을 향하여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그들을 하느님께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써 언약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백성의 분담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뿌리에서 나오는 이익의 몫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이방인은 유대인을 제쳐놓고 조금도 뽐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방인은 안 믿는 유대인, 즉 잘려버린 가지들을 보고 스스로 낫다고 생각하며 자긍할 것이 아니라, 그 잘린 가지로부터 오직 건전한 교훈을 배워야 할 뿐인 것이다. 왜 그들이 잘렸는가? 불신앙 때문이었다. 만일 교만한 마음이 새로운 가지, 즉 이방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성을 망각하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 대신 자만심을 갖도록 한다면 새로운 가지도, 즉 이방교회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 똑같이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계속 그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지, 그들이 지닌 우월성 때문이 절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은 유대인이 현재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된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여,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유혹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이방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유대인들보다 자신들을 낫게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유대인을 얕잡아 보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같은 태도는 심히 어리석은 것이며 그들도 베임을 당할 것은 명백하다.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방인들은 뽐낼 수가 없으니 무엇보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4:22). 스스로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으니, 그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그들이 지닌 우월성 때문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 교회는 첫 번째 교회인 유대인의 교회와 합해졌으며, 따라서 새로운 하느님의 통치는 옛날의 그것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따라서 아무 경우에도 그들이 가지는 특권은 원래부터 그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부터 나온 이차적인 것이다. 만일 오늘날 이방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자랑하고 기독교가 생겨나온 유대인을 경멸하는 것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증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뎃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자만심으로써 기독교 왕국은 바로 자기의 모체가 되는 유대 민족을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이 버림을 받은 것과 같은 벌을 받도록 심판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다시 일으킴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회복의 약속도 없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대로 불리울 죄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방 기독교인들이 유대 민족을 멸시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들의 죄는 유대 민족의 죄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유대 민족을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이라는 비성경적인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을 속히 추방시켜야 한다. 우리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Wild branches)인 것이다(롬 11:17).

 

  사도 바울은 17절 이하의 감람나무 접목의 비유를 통해서 구원사에서 이스라엘과 구원받은 이방인과의 관계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이방인의 오만을 단호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는 로마서 11장에서 이와 같은 경고를 하였는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화목하게 하는 주요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방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방 기독교인들이 자긍하여 유대 민족을 멸시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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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의 유리함이 이방인들에 대한 그들의 우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방인들의 우월성 주장에 대한 바울의 거부가 필연적으로 유대인들의 우월성에 대한 입증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죄와 심판, 그리고 구원 자체에 관한 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롬 10 : 12, 3 : 9, 참조, 12-21)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은 혈통이나 인종 또는 국적에 근거한 유대인들의 어떠한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쉽게 그리스도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역사를 통해 줄곧 유대인들과 함께 해온 바로 그 똑같은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가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가지들이 원가지에 쉽게 접붙여지는 것은 대단히 용이한 일인 것이다(11:24). 유대인의 민족적 유리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쉽게 믿을 수 있는 배경, 또는 그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 “뿌리”(유대인들)가 이전에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가지들”(이방인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쉽게 믿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믿을 수 있는 배경의 유사성이나 접근의 용이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 관한 그 조건을 같이하고 있다.

 

                                                                                                       -계 속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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