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킬 동방의 코리아
④
교회가 이스라엘을 계승한 새 이스라엘인가
그러면 오늘날 일부 기독교계의 통속적 견해인 교회가 이스라엘의 위치를 대치했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성경 해석의 오류로부터 온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계승한 새 이스라엘이라는 근거로 흔히 롬 2:28, 29, 갈 3:27~29, 갈 6:15,16 등을 제시한다. 먼저 로마서 2:28,29 말씀을 살펴보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말씀은 유대인의 자손이면 다 유대인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성령으로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참 유대인이며, 이와 같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참 유대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말이다. 즉, 이 말씀은 이방인도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참 유대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성령을 받음으로서 마음의 할례까지 받지 못하면 그는 참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문맥을 살펴보라. 이 말씀은 2:17에서 “유대인으로 칭하는 네가…”로 시작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의 계속으로서 유대인에게 하는 말이지 이방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이방인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은 로마서 1:18부터 19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성경 구절은 반드시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문맥을 무시하고 이 구절만 따로 떼어보니까 말씀이 실제로 목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진정한 유대인이란 예수를 믿는 유대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 믿는 이방인을 향하여 “네가 진정한 유대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영적 이스라엘, 또는 참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은 성령으로 거듭난 이스라엘인을 말할 때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음은 갈라디아 3:27~29의 말씀을 살펴보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구별이 없어지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구분이 없어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뜻일까?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적 수준을 의심받아야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여자는 여자이고 남자는 남자이지, 여자가 남자가 되거나 성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미국인은 미국인이고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미국인이 한국인이 되거나 한국인이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안에 있다고 고용인이 갑자기 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고용주는 고용주이고 고용인은 고용인이다. 이처럼 예수 안에 있어도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이방인은 여전히 이방인인 것이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삼아 이스라엘과 함께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유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다(참조, 엡3:6).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라는 말은 ‘믿음의 자손’이라는 말이지 육체적으로 이방인이 유대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씀도 교회가 이스라엘의 위치를 대치한 새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이라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 전혀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갈라디아서 6:15,16 말씀을 살펴보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본문은 바울이 할례는 의에 이르는 길에는 아무 효력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한 후, 거기에 따라 행하는 자와 하느님(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복을 비는 말씀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간주하면서, 이 말을 가지고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 새 이스라엘이며 참 이스라엘이라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느님이 교회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 속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즉 참 유대인을 뜻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이방인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가운데 절대로 구원받은 이방인을 지칭하는 데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보증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가운데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이른바 “영적 이스라엘”이라거나 “참 이스라엘”이라거나 “새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단 한 차례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는 믿는 이방인을 가리킬 때 단지 ‘이방인’이라고 했을 뿐이다(참조, 롬 15:25~27). 따라서 이 구절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 역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치한 새 이스라엘 내지는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로 절대 사용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현재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된 상태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폐함을 입지 않았으며(롬 11:1~2; 25~26), 하나의 나라와 민족으로서 선택된 백성으로 하느님 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렘 31:35~37).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치했거나 계승한 참 이스라엘이 아닌 것이다. 근본적으로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예수를 영접한 이스라엘인들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져야 옳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2세기가 될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를 가리키는데 쉽게 사용하고 있는 “새 이스라엘” 혹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는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들로부터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며, 이제는 완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이고 성경 예언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언약은 교회로 넘어와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라는 학설이 주후 185~254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을 변질시켜서 예수는 작은 신에 불과하다고 하며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던 오리겐(Origen)이다. 그는 성경해석방법 중 가장 불건전한 ‘풍유적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 method)이라는 것을 세운 사람이었다. 이 같은 해석법을 이용하여 교회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구세주이신 예수를 배척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준 모든 언약을 영구히 몰수당했다는 사상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약속들은 이제 교회의 것이며 교회만이 지금부터 영원토록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특별한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데에 더 이상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그 자체를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언약의 상속자로서 하느님의 ‘새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한 민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합법적 근거나 권리는 끝장난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러한 견해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리겐의 성경에 대한 ‘풍유적 해석법’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 신학은 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에 카톨릭 교회를 변호하기 위해 어거스틴(AD 354~425)이 쓴 ‘신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책자로 말미암아 더욱 견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책에서 두 거대한 사회인 거룩한 사회와 타락한 사회는 하느님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로 비유되었다. 모든 성도가 살고 있는 곳인 신국(神國; City of God)은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그 모습이 외부로 드러나며, 인간의 도시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이 책에서 어거스틴(그림)은 요한계시록 20:4에 있는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카톨릭 교회의 현재적 통치로 이해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 기관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적인 기관과 구별되어야 하며 인간의 도시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사상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전폭적으로 수용되어 향후 천년동안 세상을 지배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치한 새 이스라엘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서, 유대인은 더 이상 선민으로서의 정당성이 한 치도 인정 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새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는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유대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위치를 대치했다는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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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Richardson, Isreal in the Apostolic Age, SNTS Monograph series 10(Cambridge : At the university press, 1969), pp. 1~32.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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