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지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29:29 한동안 나는 하늘의 '오묘한 말과 일들'을 무척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은밀히 그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의 도구이고 싶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진리가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늘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담지하는 작은 성전인 나 자신에게 절망하고 그것을 투사해 교회에 절망하던 시절이다. 이것보다 더 나은...더 깊은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교회와 역사, 능력의 틀보다 더 놀랍고 위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뒤늦게 성령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서.... 그 '진리의 영'을 날마다 구하는 가운데 나는 점점 자유를 얻어 가고 있었다. 바람처럼... 실로 성령님의 일들은 그러하다. 나는 급하고 강한 바람만이 아니라... (물론 이것도 희구했고 누렸다) 임의로 부나 그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모르나... 그분으로 난 사람은 그렇게 변화 하듯이 내 안의 절망을 추방하며 강물처럼 점점 그 아름다운 자유에 이르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우리 아버지의 일들은 이렇게 기가 막히는 구나! 이토록 아름답고 오묘하구나!" 나는 그 감격과 함께 여전히 성장하고 변화되고 있다. 그 생명의 흐름 속에서 나의 영혼은 그렇게 수없이 탄복하였다. 이것의 희열의 기름부음이며...자유다.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에 여전히 사로잡힌 자는 이 자유를 희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기의 문제와 연민, 과거에 자신을 묶는 것, 자아와 유익에만 집착하여 평생을 허덕이는 것이다. 비록 왕궁에 있을 지라도 화려한 옷을 입었을 지라도 그 근성을 떨치기란 참으로 어렵다. 예전에 내가 그러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으로 나는 조금씩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논리와 경험과 이유, 지식을 초월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그것이 곧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특별한 삶이다. 하나님이 처음 계획하신 삶... 자기의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구별된 삶의 추구를 의미한다. 그것은 회개와 성화의 영역에서만 이해하면 본질을 모른다. 거룩함은 특별한 창조와 자유에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언약을 따라 사는 것이며...아버지의 오묘한 일들을 누리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구별하지 못하여 더 큰 은혜와 자유의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더 큰 자유와 오묘한 일들을 그리워한다. 성령께서 부어 주시기 전에는 도무지 이것을 알 수가 없었다. 지식과 정보로는 턱도 없는 것이다. 본질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며...원뿌리에서 그 진액을 빨아 들여 하늘의 생명과 본질에 연결되는 안식과 평화, 자유이다. 그것이 성취되는 지점이 '희년'이었다. 날마다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구했다. 최근 더욱 더 깨닫고 절절히 느끼는 것은 성령세례나 치유, 이스라엘, 희년, 성령의 권능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등은 그것이 우리의 논리에 맞든 아니든, 교회나 단체의 성장논리와 전도에 유익하든 아니든, 반드시 추구해야할 순종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깨닫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 요14:23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느냐 아니냐의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결국 그것이 진정한 사랑과 순전한 헌신을 증거한다. 그분의 말씀과 명령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자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 명령에 자기 논리와 전통과 필요의 근거로 앞서는 자는 사랑치 않는 자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귓속말로 속삭이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보혈과 십자가'의 새 언약을 말씀 하실 때에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물질 담당을 했을 정도로 신임을 얻은 자이다. 귀엣말을 나누는 친밀함을 추구할 지라도 그분의 언약과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는 진정성을 가진 제자는 아니다. 그분이 명하신 것들이 절박함으로 만져지지 않는 자들은 결국 주님을 팔아 자기 유익을 챙기려 할 것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언약과 말씀에 깊은 이해... 순종이 없는 회개, 비전들, 경배와 찬양, 친밀감의 추구다. 주님의 진리의 성령님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에 그분께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순종하여 구하는 자는 드물다. 어제 읽은 어느 책에서.... 한 경건한 신학자는 수십년을 성경을 연구했지만...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좋으라"(눅9:1-2, 10:8-9, 마10:7-8, 막6:12,14)는 명령을 최근에서야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읽었다. 그는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순종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전통과 체질은 아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기로 마음 먹었다. 성령께서 그를 친히 인도하시고 가르치시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이상하게도 체질로 굳어진 성령의 은사나 치유등에 대한 오해들이 많았다. 하늘의 언어로 겨우 그런 것들에 문을 열었지만...성령님을 제한하는 것들이 여전히 내 안에 많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사도행전을 주목하게 하시어 깊이 읽게 되었다. 누구나 돌아가고자 하는 교회의 본질인 초대교회에 대한 관심으로 부터 읽은 것인데... 그것은 아버지의 언약이 성취되는 주님의 몸이었으며... 거기엔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은사, 병든자의 회복과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폭발하는 시공간의 역사였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초대교회로 가지 못한다. 동지들이여... 사도행전을 다시 꼼꼼히...성령님께 조명해 주시기를 구하며... 그 인도하심으로 읽어 보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주께서 무엇을 명하시는 가에 깊이 순종되지 않은 자는 그를 진정 믿고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것의 원초적 발아인 성령세례는 그냥 이해의 차원, 비판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행1:4)임을 깨닫고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절박함에 날마다 구하고 구했다. 결국 그것으로 나는 지금의 이 삶에 도달하였다. 천국의 아이가 되어 날마다 가르쳐 달라고 성령님께 구했다. 그 충만함을 구하고자 또 노력했다.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성령님이 이끄시는 '언약'에 인도 되었다. 그전에 일본이라는 사마리아를 섬기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가게 되었다. 그 모든 여정이 생각지 않는 길들이다. 하늘의 언어든 무엇이든 그러하다. 지금 나는 다른 여정으로 인도함을 받는 중이다. 이제 그 땅에 인도하신 이유를 이제사 조금 알 것만 같다. 성령님의 일들은 바람처럼 임하는 것이다. 한순간에 그 오묘한 일들을 다 알 수가 없다. 몸을 이루듯이 하나 하나 깨달아가고 연락하고 상합하여 머리이시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가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과정에서 함부로 판단하고 구속된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지만 그렇게 서서히 변화되고 깨닫고 성장하여 갔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니 요15:15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말씀을 너무 좋아했다.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이 찬송의 가사는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에 새겨진 그 사랑의 원형질이다. 나는 그렇게 주님을 친구로서 좋아하고 사랑하고자 하였다. 음부의 구덩이,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던 시절에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것을 붙들고 어찌하든지 주님의 친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친구'의 이미를 아주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성경적으로 이 말은 '언약의 파트너'라는 뜻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를 언약의 파트너로 삼노라"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지경인지! 성령님이시여 더욱 깨닫게 하소서! 나는 아직도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나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노니 종은 주인이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5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오는 언약...주님의 마음과 긍휼...성령님의 깊은 사랑과 능력... 그것보다 항상 자신이 우선이다. 그것을 구해도 만지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과 필요를 따라 묶여서 사는 것이다. 오묘한 아버지의 일들을 알지 못하고..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까? 행복한 것일까? 주님과 ‘언약의 파트너’가 될 때에 라야 그 비밀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아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언약을 중요시해야 할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요즘 그 아버지의..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아니기를 구한다. 그리하여 역시 날마다 그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왜 그다지 마음에 자유하지도 않던...원하지도 않았던... 이스라엘로 인도하여 주신 것인지 이제사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언약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 원뿌리.... 하나님은 그 언약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우리와 사랑하시기에 그 본질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회복되어야만... 그 원뿌리로 부터 진액을 받아야만 진정한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초대교회와 같은 영광스러운 교회가 이루어 지기에... 창세전에 두신 영광스러운 비밀의 경륜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 시온의 대로에 이를 때... 오묘한 일들을 알게 된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잠1:6 어찌 하든지 오묘한 지경에 도달하고 싶었다. 잠언과 비유, 지혜의 정도를 넘어서는 진리와 그 나라의 지평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성령님께 인도해 달라고 날마다 구한 것이다. 너는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들’을 알게 하겠다고 아버지는 약속하셨다. 성령님은 생각지 않은 ‘희년’으로 인도하셨다. 희년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무엇보다 먼저 주목케 하신 것은 그것이 주님의 메시아적 사명이었으며 그분의 친구가 된 모든 제자들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희년'을 뜻하는 ‘요벨’(Yobel)은 익히 알듯이 ‘수양의 뿔‘ 즉 ‘양각’(羊角)을 지칭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의, 구속과 구원의 나팔을 부는 오묘한 하늘의 일이 희년의 추구다. 이것은 진정 오묘한 언약이다.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언약이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행1:6)하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 ‘희년의 때’를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가장 원초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갈릴리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그 주님의 선언(눅4:18,19)의 원전인 이사야 61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이스라엘에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처럼 명확한 이해와 갈망의 영역이다. 이 희년의 성취는 이스라엘에게는 수천년의 각인된 구원의 DNA였다. 희년의 나팔을 부는 자들을 통하여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으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고 대대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재건‘(사61:4)하게 된다고 성령님은 선포하셨다. 이것은 오늘도 동일하다. 수양의 나팔을 부는 자들.... 그 나팔을 만들기 위하여 양은 결국 피를 흘려야 한다. 희년은 속죄일과 안식일의 통합된 축제 다음에 온다. 보혈과 창조의 자유가 결함하여 희년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 선포의 실제적 의미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서 내게 더욱 주목케 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익히 아는 것들을 기름부음을 통하여 회복시키신다. 나는 '하늘의 언어'에서 그것을 경험하였다. 기름부음의 중요성은 그것이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는 오묘한 지점이다. 희년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 회복의 때와 시기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결국 ‘증인’이 된다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증인은 그 언약과 명령을 복종으로 성취하는 자이다. 이 주님의 마음과 비전이 심령에 가득차지 않으면 주님의 친구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동지들 가운데 그 심령에 이것이...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이것을 이루려는 헌신이 가득 차 있는지 살펴보기를 권한다. 이것이 주님의 언약이고 명령이다. 가난한 자에 대하여는 좀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차적으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 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주님의 사명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그저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고 싶다고...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희년에 대하여 말한다고.... 학문적인 지식이 있고 프로젝트와 열망과 헌신이 있다고 되는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사... 눅4:18 이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기름부음’이다. 이것이 주님의 모범이요 전략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이 그 희년의 사명을 이루게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희년의 역사를 결실하기 위하여 기름부음에 집중하지 않았다. 관심과 이해를 가지거나 단순히 구했을 뿐.... 그 강력한 권능을 가지지 못했다. 얼마전 통일희년을 추구하는 어느 모임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프로젝트는 주님으로 부터 받은 것임에도 거의 막혀 있는 상태였다. 그 때 주님은 그것을 열고 돌파하는 길은 기름부음이라고 말씀 하셨다. 후에 깊이 나누겠지만....기름부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가장 실제적이며 강력한 권능이다. 막힌 담을 헐고 부수고 회복하는 하늘의 전략과 능력과 모략이요 힘이다. 그러나 그 통일이라는 희년을 추구하는 대단한 지식을 가진 그 그룹들은 이 말씀을 모르고 있었다. 가난한 북한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었으나... 여전히 자기의 힘과 지식으로 그것을 하고자 애쓴 것이다. 그 수고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기름부음이 진정으로 그들이 갈망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날 그것을 나누게 하셨고...함께 강력히 기름부음을 구하였다. 희년에 대하여 탐구하고 깨닫고 거기서 나온 프로젝트와 열정의 소산들로 제사를 드리고자 힘쓴 것으로만은 안된다. 주님은 당신처럼 희년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과 영광스러운 교회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우리의 힘과 능이 아닌...그 여호와의 신이 이룬다고 강력히 말씀하셨다. 적당한 기름부음이 아닌...강력한 그것을 구하고 구해야 할 때다. 전정한 기름부음이 온전히 부어지지 않으면 마귀에게 속아서 자기 의로 나아간다. “주님 제게 기름을 부어 주세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 증인됨을 감당하도록...“ 이것을 깨닫고 나는 날마다 기름부음을 강력히 구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희년을 이루도록...기름을 부어 주세요." 지금도 날마다 수없이..구하고 또 구하고 구한다. 기름부음이 없으면 주님을 닮아 그 희년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기름부음이 그것을 이루어 냄으로... 결국 이것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행1:8)와 같은 내용이다. 성령님이 부으시는 권능이 증인되게 하는 것이다. 권능이 없으면 증인이 될 수 없고... 기름부음이 없으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주님처럼 살 수가 없다. 그분의 친구가 될 수가 없다. 이것을 깨닫고 믿는 자라면 날마다 그 권능의 기름부음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적당히 구하고 다른 놀라운 방식들을 추구하라고 속삭일 것이다. 아주 단순한 깨달음처럼 이해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진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자...내게는 혁명과도 같은 통찰력이 되었다. 돌아보니...성령님은 참으로 놀랍게도 길을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저 각각의 진리에 집착하는 듯 하였으나...그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룬다. 이 ‘착한 일’은 곧 ‘희년’을 이루는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니 이는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10:38 베드로의 이 주님에 대한 요약은 명확한 희년의 실제를 말함이다. 그는 그전에 주의 마음을 모르는 종이 되어 살았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 주님의 진정한 친구로 변신한다. 그는 언약을 이해하였으며 그 언약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자기의 유익과 필요, 자기 연민과 열정에 사로잡혀 사는 노예가 아니다. 그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희년을 이해하고 성취한다. ‘착한 일‘은 그 제물로 믿음의 증거를 나타낸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첫 성도인 ‘아벨’의 제사에 계시되어 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으나 창4:4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제사는 ‘어린 양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한 드림이다. 가인의 제사와 열정, 풍성함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리라. 그는 ‘언약의 파트너’가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창4:7) 그들의 부모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과 그로 인한 저주... 그것이 인류를 ‘가난한 자’로 전락 시켰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하신 삶은 천국의 부요였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고 그분의 생기를 받았으며... 땅의 모든 기름지고 풍성한 것들을 다스리는 축복과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권세와 능력을 누리는 순종의 조건인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언약)을 마귀에게 미혹 당함으로 저버린다. 우리도 깊이 주의해야만 한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그 언약을 상실하고 자기 열심과 지식, 생각의 틀로서 살게하려고 엄청난, 교묘한 노력을 한다.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당했다. 그리하여 동산에서 쫓겨나 땅의 저주, 관계의 저주,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라는 극한 가난 속에 내동댕이 쳐진다. 종신토록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무성한 착박함에서 땀 흘려 수고해야만 사는(창3:17-19) '가난한 자'의 원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서 그 권세를 상실한 것이다. 인류의 모든 가난과 속박과 저주의 원인은 그것에서 나왔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4:6 갈릴리의 그 희년을 선포하기 직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주님께 마귀는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이렇게 유혹한다. 아담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언약을 파기하게 만들려는 간교한 수작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것에 속아서 마귀에게 그 부요함을 넘겨주고 말았다.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그가 하는 이 말을 보라! 이것이 인류가 가난하여 진 원인임을 깊이 간파해야 희년의 본질이 나온다. 결국 가난한 자는 모든 마귀에게 속박당한 자들이다. 영만이 아니라..그 혼과 육의 모든 외연이...땅과 경제와 사상...예술적 감성조차... 다 묶이고 사로잡혀 버렸다. 그렇게 마귀에게 눌리고 묶이고 사로잡힌 가난해진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은 구원과 해방,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여신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지어 입히신 가죽옷’ (창3:21)의 비밀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상식이 아니다. 하늘의 오묘한 일이다. 아벨의 제사는 그 언약을 깊이 이해하고 지킨 것이다. 짐승을 잡아 만든 ‘가죽옷’은 ‘어린 양의 피와 기름’ 의 언약이다. 가인의 열심과 풍요로움은 안타깝게도 이 언약을 무시하고 자기 열정의, 땀의 소산이었기에 열납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두려움이 있다. 하나님의 친구... 언약의 파트너가 되는 것...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 나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처럼 오직 언약을 이루려는 순종을 의미한다. 주님의 삶 탐구하면 온통, 세포까지 그 언약을 이루려는 열심이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친구가 되신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되신 것이다. 다윗이 아버지의 합한 자가 된 것도 그것에 있다. 그는 남들이 다 상실한 하나님의 수백년전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들을 기억하고 성취하려고 돌진하였다. 바로 여부스 족속이 지배하는 그 땅....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포기하여 버린 그 언약을 다윗은 이루려고 돌진하였고 이룬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자.... 이것이 합한 자요..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기름부음 받은 자의 본성이다. 성령님이 오시면...그 진리의 영께서 이것을 일깨우신다. 그 주님의 영광....언약의 파트너로 이끄신다. 언약을 알고 누리고 희년을 이루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사랑... 이스라엘로 이끄심도 바로 그것을 알게 하심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그 언약에 순종하여 삶을 드리는 것...성취하는 것... 그것이 ‘착한 일’...‘선’을 이루는 것이다. “잘 하였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칭찬을 받는 충성이 바고 그것이다. 그 언약을 깨닫지도 헌신하지도 않는 친밀함, 신앙의 유지..자기 자아에서 기인한 지식과 열정과 아무리 본질적 비전의 제스처를 가졌을 지라도 어린양의 피와 기름부음으로 되어지지 않은 것은 불순종이다. 악하고 게으름이다. 진정한 희년...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처럼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는 그것이다. 이 중층적 다층적인 지배구조와 묶임, 사로잡힘의 속박을 깨는 힘은 역시... ‘기름부음’이다. 그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사10:27 이스라엘의 희년을 위한 중요하고 절박한 예언이요 하늘의 전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