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나는 몇년전 어치에 대해 <제3시>에 썼던 글을 다시 찾아 보았다. 날짜를 보니 2005년 겨울이었다. 약 2년 몇개월 전에 '어치'를 만났던 것이다. ................................2005.11월 <제3시>의 글... 솔직히 이 새를 만난 후에 나는 '온유'에 대하여 참 많은 것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너무 섯부르게 나누기 보단 깊이있는 경지를 안 후에 나우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님 오늘은 저 새를 아주 가까이서 보게 해 주세요. 어떤 모양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나는 새를 자세히 관찰한 후에 조류 도감에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그 새가 갑자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깜짝 놀라는데..이 새가 내 발밑으로 떨어지더니 계곡의 조금 남은 물을 푸두덕 거리며 튀기는 것이었다. 놀라서 자세를 가다듬는데..어느새 새는 날아가 조금 떨어진 그루터기 나무위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물속에 있는 '가재'를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쪼아 먹는 것이다. 순간 ..."저것은 전갈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가 가재를 잡는 것도 특이하지만..왜 가재를 전갈이라고 생각했는지..이상한 일이었다. 전갈..악한 영..성경은 가재..악어..전갈등을 '악한 영'으로 상징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가재를 잡는 새...섞인 새...그것도 그루터기 나무위에 앉아 그 가재를 쪼아 먹는 특이한 광경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누구입니까? 저 섞인 새는.. 전갈을 쪼아 먹는...저 새는 누구입니까?' 세상에 이런 황당한 물음도 없으리라 여기지만...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 순간..새를 찍으려고 켜놓은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나는 여전히 누구입니까..하며 핸드폰을 열었다. 거기에 이런 문자가 찍혀 있었다. '정진호'... 정진호 교수가 갑자기 전화를 한것이다. 그런데..나에겐 그 물음의 답으로 여겨졌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같은 이 씨츄에이션이 전율적으로 느껴졌다. "그 섞인 새가 ..메마른 계곡에서 전갈을 잡아 쪼아 먹고 ..그루터기 위에 앉은 저 새가 정진호 교수입니까?" 나는 당돌하게 물었다. 아무런 답은 없었다. 진동은 집요하고..나는 전화를 받았다., 혹시 시간이 언제 나느냐는 것이다. 무조건 오늘 오시라고 했다. 내일이 더 자유롭다며 약간 망설이는 교수님에게..평소에 안하던 태도로 오늘 오세요...했다. 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되겠지... 부흥과 통일을 놓고 영적 전투를 외롭게 벌이는 구르터기...정진호 교수와 저 새는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다만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정진호라는 문자가 나온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만 여겨서도 않된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님은 그런 극적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답을 주시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나는 이 묘한 상황이 정말 주님이 연출하시는 것인지..실험해 보기로 했다. "저 새를 제가 가까이서 보도록 해 주세요" 내가 너무 주님을 시험하고 요구가 많은 건가...했지만..그분이 구하고 시험하라 했으니.. 내 책임은 아니다. 이 세상에 산속에서 이런 짓을 하는 종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정말 조금 후에 그 새가 내 눈 앞까지 다가왔다. "주님이 정말 이 새를 통해 말씀하시는 거군요" 나는 감동되었다. 녀석은 산새답지 않게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쳐다봤다. 나는 쯔쯔..새소리를 내며 여기 앉아 보라고 (성프란시스처럼)손바닥을 폈다. 그러나 녀석은 오지 않았다. 맘대로 해라..하며 무늬며 생김새를 자세히 살폈다. 그 때..똑같은 새가 어느새 날아와 좀 더 높은 곳에서 왔다 갔다 했다. .............................. 그 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때 쓴 글을 보니, 작업하던 팔복 시리즈의 세번 째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기도하고 있었다. 진정한 온유의 본질을 구할 때마다...갑자기 어치가 등장한 것이다. 그 날 정진호 교수님이 오셔서 어치에 대해 나눴던 것 같다. 어치는 하이드리드...이질적인 두 종자의 섞임....그것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한 은유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그 진정한 섞임...소제의 본질은 자아가 부수어짐이며... 하나님만 경외, 순종하는 그 경배이다. 그것이 '온유'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와서 배우라'라고 하신 주님처럼 오직 자기의 뜻이 아닌..아버지의 뜻만을 구하는 그것이 '온유'임을 배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일'도 그것으로라야 이루어 진다. 내 열망과 비전과 헌신만으로는 올무와 함정에 빠진다. 나는 어치를 통해 내 안의 그런 정과 욕심들을 부수는 것에 대하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후에 나는 전혀 생각지 않은 '일본 땅'으로 인도되었다. 역시 그런데..돌아 보니...일본의 형제들과...그 땅과 하나되는 그것이 바로... '어치'와 같은 것이었다. 두개의 원수같은..이질적인 것의 섞임... 일본으로 향하며..정말 내 마음이 깨지지 않으면...자아가 죽고...오직 주님 명령처럼...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치 않으면 결실이 없음을 절절이 느꼈다. 그 여정에서 나는 '온유함'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산에서 어치를 만난 후에 나는 그것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발견한 것들을 그 당시 역시 <제3시>에 글로 썼었다. .................................... 어치새는 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새다. 까치와도 비슷하게 생겼는데... 같은 까마귀과 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내가 조심스레 관심을 키우는 것인데..'까마귀와 비둘기'가 섞인 그 모습... 아직 더 연구해야 하지만..노아 방주에서 나온 비둘기와 까마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여 주시는게 아닌가..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 부분을 혼자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다. 거기엔 동이족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타포가 들어 있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나누리라 (나는 그 당시 쓴 이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미 이 때 내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치를 통해 그것을.....그래서 포항의 그 의사 선생님이 2,3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했구나!!... 그러나 그 당시엔 깊이 생각하거나..심령 가운데 강렬히 알지는 못했다.) 어치는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치가 사는 지역은 참나무 분포지역이 정확히 일치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치를 만났던 그 숲도 참나무 숲이었다. 어치의 학명 중 ‘glandarius’는 ‘도토리는 좋아하는..’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녀석도 싸이질을 좋아하나 보다..ㅎㅎㅎ) 도토리가 많은 숲에서는 어김없이 어치를 볼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치는 다른 새들과 달리 도토리를 숨기는 습성이 있다. 숲속의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은 가을이면 도토리를 떨어뜨려 쌓이게 한다. 이것은 참나무들의 놀랍고도 교묘한 번식전략이다. (숲숙에 우두커니 있는 피조물들이라고 얕보면 않된다. 그들도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다.) 특이하게도 먹이를 숨겨 놓는 버릇이 있는 어치는 그 도토리를 바로 먹지 않고 참나무 껍질이나 떨어진 잎새들 틈새에 감추거나 땅속에 묻어놓는다. 한겨울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씩 찾아내 먹기 위해서다. 다람쥐도 겨울잠을 자는 동안 먹을 식량으로 도토리를 모아 땅속 보금자리에 저장해 놓는다. 그러나 어치는 한군데 모아 두는 것이 아니고...여기저기에 그냥 숨겨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치는 건망증이 심하다고 한다. 한군데 모아 두지 않으니...도토리를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겨울 잠을 자던 청설모며 다람쥐들이 도토리가 떨어지면 어치가 숨긴 도토리를 찾아 내어 먹는다. 이 어치가 숨겨 두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그것이 결국 참나무 숲의 번식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어치의 무심함..바보스러움이 없었다면 우리를 풍요하게 하는 그 참나무 숲은 보기 힘들었을 터이다. 놀라운 사실은 ..독일이 자랑하는 그 아름답고 거대한 ‘검은 숲‘(黑林)이 이 어치가 가꾼 것이란 학자들의 연구가 나왔다는 것이다. 전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의 숲에서도 이 어치의 건망증으로 인해 1년에 십 수만그루의 새로운 참 나무들이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예상치 못했던 깊은 감동의 의미를 품은 새가 어치였다. 처음에 내가 본 새가 어치란 이름을 가진...흔한 새라는 것에 약간 실망했었다. 무언가..신비롭고 이 세상에 없는 새 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어치의 의미를 알고 나자..오히려 나의 그런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창조안에서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들을 통하여 계시되고 이루어 간다. 하나님은 이 어치를 통해서 요즘 내가 구하고 고민하는 하나님 나라를 ..그 땅을 유업으로 얻는 축복...‘온유함‘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너무 섬세하신 우리 하나님 만세!!) 그리고 그 새를..정진호 교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그가 어치처럼...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이다..ㅎㅎ 정진호 교수를 만나 이 얘기를 해주며.."교수님이 바보새 맞잖아요"..하고 농담을 했다. 정교수는 "흐르는 물위에 떡을 던지라”(그의 책<떡의 전쟁>을 읽으시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 어리석음...바보스러움...누구나 천착하는 그 떡(물질, 야망, 권력, 조직)을 다람쥐처럼 자신만을 위해 한군데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그냥 어치처럼 계산하지 말고 던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번식 방법'이다. 하나님은 어치나 정교수에게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라...그 하늘의 확장과 번식 원리를 알기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내게 큰 도전과 기쁨을 주었다. 그것은 이 실용주의 적인 세상의 논리로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이 자신의 것을 비우고 공치사하지 않고 이름을 내세우거나 소유하지 않으려는 영적인 건만증...그것이 진정성을 내포하고 또한 궁극적으로는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한다. ..............................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여러번 놀랐다. 나는 그 때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었다. 그 본질을 날마다 주님께 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어치'라는 작은 미물을 통하여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그 후에 나는 더욱 그 온유함의 본질을 구하고 그것이 내 안에 체득되기를 갈망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길이다. 거기서도 주님은 어치처럼 하나됨을 위해...나를 부수고..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그 진리에 복종하는 그 온유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일본을 섬긴 결과가 '이스라엘'로 인도 되는 것이다. 정진호 교수도 성령님의 확증 가운데 그 길로 이끌려 갔다. 이 '어치'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 깨닫게 된...'한 새 사람'(ONE NEW MAN)의 비전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회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엡2:14-16,18 주님의 십자가의 본질은 바로 그 '섞임'이요...'한 새사람'이다. 아아...이것이 바로 주님이 꿈꾸신 영광스러운 교회다. 바울은 이 '섞임'의 본질인 언약의 제사인'소제'(蔬祭)를 깊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의 비밀을 깨달았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10:16,17 이 떡은 자기를 부수어 기름으로 다른 부수어 진 것들과 섞임으로 불에 구워진 그 소제의 무교병이다. 주님은 십자가로 그것을 이루셨다.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게하시기 위하여... 그러므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자라면...이 크고 비밀한 일과 약속에 집중해야 하리라. 주님이 십자가로 이루시고자 했던....'한 새 사람'..'한 떡'... 이것은 남과 북...한국과 일본...교회와 이스라엘...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 하늘과 땅...그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야....전갈을..죽음의 영과 음부의 권세를 깨트리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본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 부수어짐..자기를 깨트림이 그것을 이루는 본질임을 우리 주님이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고...이방과 이스라엘을 한 몸으로 만드셨다. 주님이 그 십자가로 자신을 깨트리심으로 ...이방인인 우리에게 언약과 구원, 아브라함의 축복에 접붙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하리라.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안에 주님과 하나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북한의 형제들을 회복하는 ..그들과 한 새사람이 되는 일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의 형제들과 하나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그것을 명하신다. 그것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회복도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북한을 향하게 하시고.... 일본을 향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에 가기 전...먼저 이들과 하나 됨을 경험해야만 한다. 오직 십자가를 관통하여 그것을 능력으로 이루는 것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가장 '크고 비밀한 일'이요 능력이다. 그것을 어치를 통하여 배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