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릴리.. 내 영혼의 고향처럼 여전히 그렇게 푸르른 빛깔로 맞아 주었다. 갈멜산을 떠나 이미 정해진 갈릴리로 우리는 간 것이다. 10년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촬영할 때, 서 있던 바로 그 언덕위로 차가 지나갔다. 길게 드리운 그 물결의 푸르름이 일순 이 땅만큼이나 담담하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갈릴리..주님이 다니시던 땅이다..' 10년전에도 오직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었다. 주님이 걸으신 그 호숫가의 조약돌을 밟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솟았었다. 주님만으로도..그분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늘 짠하고 애틋하다. 갈릴리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언덕위에 미국의 지체들이 세운 기도의 집에서 지친 여장을 풀었다. 어디가나 하나님의 동지들이 낙타무릎으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하여 판단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움도 많지만 진실과 헌신이 온 세상 도처에 가득하다. 잠시 이곳에 와서 섬기고 있다는, 역시 미국인 부부는 엄청난 덩치들이었는데.. 통역을 하는 소담이 왈, 그날이 결혼 8주년이란다. 성질상 축하 케잌이라도 사와야 하는데..안식일이어서 문을 연 가게가 없어 못내 아쉬었다. 나는 저녁 노을 비끼는 옥상에 올라가 갈릴리를 한눈에 내려다 보며.. 주님을 자꾸만 부르고 불렀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품고 그 땅을 밟으며 기도하는 이유도..다른 어떤 프로젝트나 사역이기 앞서..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는 것이다. 원초적 그리움...주님이 보고픈 것이다. 어쩌면 그분에 대한 그리움이 이 모든 추구들의 원천이리라. 저녁에 미국인 부부가 함께 예배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그들을 배려해 익숙한 찬송가들만 골라서 불렀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 때에 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모습을 나 뵈옵고 그후로 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 이 그 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 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 나의 죄짐이 풀렸네 김진섭 교수님이 추천을 하기도 했지만..내게도 이 찬양은 요즘 자주 부르는 것이다. "내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나의 죄짐이 풀렸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복받쳐 이 찬송을 목놓아 불렀다. 그렇게 갈릴리 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어리숙한 제자들 처럼 그분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었다. 어린 시절의 그 주님으로 인한 '감격시대'를.. '첫사랑'을...요즘 더욱 누리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갈릴리에 와서야 나는 그 은혜를 새삼 실감했다. 나는 그 찬양을 부르면서..' 왜 주님은 만인이 기다리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변방의 '갈릴리'에 오셨을까?' 하는 뜬금없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행1:11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던 주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한 이 말이 내내 내 안에 고이고 있었다. 주님의 사역 처음과 마지막 부활, 승천을 지켜 본 이들...그리고 그 영광의 복음을 담지하고 땅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한 주요 인물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다. 옛부터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부정과 손가락질을 받아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소릴 들어야 했다. 온 세상 구주이신 예수님은 모두가 오리라 예상했던 감람산에 그 발이 다윗과 시온의 그 도성..'예루살렘'이 아닌 이 '갈릴리'에서 그 주된 사역을 시작하셨고 펼치셨다. 왜 그러신 것일까? 갈릴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북단 변방이다. 나는 성경을 처음 대하는 소년처럼 그 이유가 무척이나 알고 싶어져서 말씀을 이리저리 찾아 나섰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마4:15 그러다가 이 말씀을 발견했다. 마태는 갈릴리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한다. 주께서 세례 요한이 잡히셨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의 지경인 갈릴리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는데..그것은 '이사야 9장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때부터 주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천국 복음(큰 빛)을 그곳에서 전하시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4:23 나는 마태가 메시아에 대한 언약의 성취로 인용한 이사야 9장을 찾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것은 메시아의 탄생과 통치에 대한 매우 낯선, 그러나 명확한 예언이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이제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는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이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사9:1-6 나는 이 성구를 읽으며 약간 당황 하였다. 이사야가 1절에서 예언한것 처럼 '스불론과 납달리의 멸시'는 B.C 732년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이 갈릴리 지방을 정복하고 주민을 사로잡아 감으로 이루어 졌다.(왕하15:29) 그 후 약 6세기 동안이나 이 지방은 바벨론, 페르샤,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이어 정복되고,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타민족들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여기에 일종의 혼합 인종과 종교, 혼합 문화를 낳고,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사 9:1, 마 4:15)라고 멸시 받는 이유를 그렇게 낳은 것이다. 그러나 BC 101년 경엔 마카비의 후손인 유대인 아리스토블러스가 이 지역을 정복하여 강제로 할례를 행하게 하고 토라의 멍에를 씌워 버렸다고 한다. 그로인해 유대교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 중심의 거주민들을 율법의 결례상 여전히 '불결한 자들'로 여겼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이 비아냥은 그들이 율법의 규례를 온전히 준수하지 못하는 무식한 촌놈들이라는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것을 인용한 고형원 선배의 가사처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신음하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12지파의 땅이요, 이스라엘의 영토였지만 오랜동안 이방의 침략과 포로생할, 혼합주의, 우상과 유대주의의 굴레를 쓴 이 땅의 어둠과 고통을 누구도 주목치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먼 훗날에 이 어두운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뜻밖의 예언을 남기신 것이다. 정통적인 유대교인들 중에서 이 예언을 주목한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놀란것은, 그 주목하지 않은 숨겨진 언약을 우리 주님이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것을 ..그 언약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겨우 3번 정도 올라간 예루살렘에 비해 이 흑암의 땅은 거의 그분의 주된 사역지였다. 이것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2.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사마리아의 여인을 만나신 후에 양식을 구해 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가장 본받기를 갈망하는 이 태도는 ..주님께서 진정으로 '아버지의 언약과 예언들'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고.. 치열하게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마태는 주님이 갈릴리 지경에 가서 사신 이유가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다'(마4:14)고 기록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 그것이 주님의 살게 하는 양식이고 존재이유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15:10 바로 이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갈릴리에서 좀 더 나아가 보기로 하였다. 다음날 갈릴리호수를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도 자꾸만 내 생각은 그 파문처럼 어디론가 번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갈릴리 옆의 사마리아다. 갈릴리처럼 '사마리아'도 주님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언약의 땅이었다. 그러나 북단의 갈릴리와 남쪽 유대의 중간지점에 있는 사마리아는 갈릴리보다 더 무시당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던 땅이다. 그러나 성경을 세밀히 살피면 주님은 유대인이라는 누구나 꺼리는 이 땅을 기어코 지나시려 하시는 주목받지 않는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어떤 고대 사본에는,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눅9:51-56 예수님의 공생애 끝 무렵에 일어난 역시 주목치 않는 작은 사건이다. 그동안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북부 지역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남부인 유다 지방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그 중부지방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심도 역시 아버지의 말씀, 그 언약과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다.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그 부정한 땅, 사마리아를 스쳐 가지 않고 돌아서 갈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자(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면서 이를 허락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예수님께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모두 태워서 싹쓸어 버리고 싶다고 주님께 말한 것이다. ('우뢰의 아들'이란 요한의 별명은 이때 생긴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도리어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묵묵히 다른 마을로 가셨다. 나는 이 낯선 풍경에서 낚시 바늘같은 몇가지 의문부호를 보았다. 이미 그전에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신(요4장) 주님이신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앞서 보내셔서 그 땅에 거하실 것에 대한 허락을 받으려고 하셨을까? 다른 지역을 가실 때에는 이렇게 미리 사람을 보낸 적도 허락을 받으신 적도 없으신데, 유독 사마리아에서만 그렇게 하신 것일까? '왜 모두가 멸시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예의를 갖추시고..집착하시는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들게하는 대목이었다. 그 후에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을때, 제자들이 "누가 진정한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것에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리고로 가던 길에 강도를 당한 사람... 그 곁을 지나던 제사장, 레위인..누구도 그를 돌보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안이 긍휼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를 싸매고 주막에 데려가 돌보아 주고...여비까지 주고...(눅10:30-35) 유독 주님은 사마리아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매우 충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까지 말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8:48 그런데 주님은 그 사마리안인이라는 말에는 거부감을 안나타내시고 귀신들렸다는 것에 대해서만 답을 하신다. 주님이 사마리아를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탐구하면 주님이 그 땅을, 누구나 꺼리던 사마리아를 품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통과하는 것을 거절하였을까? 그것도 사자를 보내어 정중히 요청하는데도... 성경은 그 이유가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눅9:53 라고 짧게 말하고 있다. 그 반대의 이유는 주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그 일행의 ‘예루살렘 행(行)’에 대한 거절이다. 그만큼 사마리아인들에게 '예루살렘'은 거부의 대상이었다. 그 거부에 대한..예루살렘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도 놀랍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희를 저희를 다 태워 멸망시키라고 할까요?" 왜 이리 제자들이 극단적으로 흥분하는 것일까? 사마리아 인들의 예루살렘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제자들의 그 땅에 대한 반감이 극렬했던 것이다. 제자들중 상당수는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들을 불로 몰살하자고 나선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벳세다 출신이다. 갈릴리 역시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이 지독했던 것이다. 사마리아는 그 당시 가장 천대받고 다른 민족과 혼합되었다고 멸시 당하고 정치적 억압과 가난과 고통의 극한 땅이었다. 그 땅은 북 이스라엘의 10부족의 수도였다. 그 아브라함과 야곱의 자손의 땅이 왜 그리 멸시받는 땅이 되었는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왕17:16-18 결국 '우상숭배'다. 바알과 아세라..일월성신 즉, '태양'과 '달', '별들'을 '하나님으로 경배한 죄다. 이 민족의 신사참배와 같다. 신기한 것은 남쪽의 유다도 동일한 배교로 심판을 자초한다. 므낫세가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대하 33:3 이것을 보면 우상과 배교 불경건 가운데 우리를 함몰시키는 영적 배후의 동일선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최후에 무너질 그 거짓 영의 집결지..바벨론이다. 그 바벨론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을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깨어 성령님께 이것을 분별하고 내 안에도 그 지배가 없는가 살펴야 한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인줄 알고 섬긴 것이다. 우리라고 예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는 당시 호전적인 강대국 '앗수르'의 침공이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그들을 사로잡아 갔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데 사람의 여로 고을에 두었더라 왕상17:6 유브라데스강 저편 페르샤의 여러 강역으로 끌려가 흩어진 것이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나 후대의 학자들에 의하면 이 사라진 10부족(the lost 10 tribe's)은 그 후 동방으로 계속 이동하여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인도, 중국, 중앙 아시아, 몽골, 미얀마 등에서 그 흔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갈릴리 다음날 그 '사라진 이스라엘 10부족'을 40년간 연구했다는 랍비 아비하일을 만나서 인터뷰와 대화를 했다. "지금 가장 이 흩어진 이스라엘의 흔적이 구체적으로 많은 곳은 일본입니다." 라고 그가 말했을 때, 우리는 너무나 놀랐다. 그는 전세계는 물론 일본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스라엘의 흔적을 찾아내고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저술한 책들을 보니 흩어진 유대인들의 흔적은 엄청나다. 그런데 왜 그리 일본에 그토록 많은 것일까? 최근 주님꼐서 한국과 일본 속의 그 이스라엘 흔적을 통하여 새로운 전략을 보이시는 중이라..그가 한말은 하나의 확증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 흩어진 10부족의 본향이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7:8 에브라임은 요셉의 자손이다. 이 요셉지파의 후손들이 왜 그리 패망하였는고? 우리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 중심으로 한 역사에 너무 무게중심을 두어왔다. 그러나 주님의 여정과 그 심정을 따라 가다보면 사마리아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그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 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만지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를 침략한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을 지배하기 위해 민족을 혼합하는 정책을 썼다. 피를 섞어버리면 불온한 세력들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정치적 계산 때문에 자기들이 정복한 수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북왕국 이스라엘에 살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마구 뒤섞어 국제결혼을 시켜버렸다. 이렇게 피가 섞여 태어난 혼혈인들이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고통을 당하며 이스라엘 땅에 남아 고토를 지킨 것이다. 결국 동일한 우상숭배로 심판을 받아 뒤늦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남 유다 사람들은 고토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인등을 선민을 혈통을 더럽힌 부정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성전재건에서 소외시킨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거룩한 사업에 참여 하기를 원했으나 유대인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는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수 백 년 동안 그 감정과 상처의 골은 깊어져 예수님 당시까지 그들은 서로 극한 원수였다. 요세푸스의 <유대고사>가운데 갈릴리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주님은 유대인으로서 그런 사마리아를 기어코 지나시려는 것이다. 그것도 사자를 보내어 미리 양해를 구하시며... 왜 그러신 것일까? 갈릴리를 떠나면서도 나는 내내 차장 밖을 응시하며 그것을 생각했다.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보이신 주님의 태도는 그들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멸시와 천대의 땅...그 영혼들..주님의 자비와 긍휼은 그들을 기꺼움으로 품으시며 회복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종교화된 형식과 외모를 넘어 주님의 긍휼로 품어 안는 그릇...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2:13 어쩌면 사마리아는 오늘 우리가 가까이 대하기 어려운 이들이거나.. 저 북한, 일본, 이슬람...또는 우리가 미워하는 변질된 이단과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주님처럼, 그 긍휼을 품고 다가갈 수 있겠는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사마리아인들을 품으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은 원수처럼 여겨지는 이들이었다. 흔들리는 차창에 스치는 여러 편린들을 붙들다가 문득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예수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눅24:44 이 말씀을 읽으므로 그것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모두가 꺼리는 사마리아로 가고자 하심은 아버지의 언약을 이루고자 하심이다. 부활하신 후, 주님을 부인하고 갈릴리로 다시 내려간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구우셔서 먹이시며(이토록 자상하시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행1:8) 갈릴리는 빼고..'사마리아'라고 하신 것이다. 그 사마리아를 반드시 거쳐야만 '땅끝'으로 간다. 예수님의 삶은..그가 움직여간 발걸음 하나 하나가 모두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다. 분명 사마리아에 대한 그 언약을 주님은 붙들고 계셨으며..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사마리아를 지나고자 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나의, 우리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략에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코드로 나아갈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그 주님이 붙든 언약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