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짝이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로부터 199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고속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기부터 잠시 주춤하더니 급기야 1990년 말부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로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고속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전반기부터 잠시 주춤하더니 끝내는 1990년대 후반기부터 서서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 2000년에 최고의 부흥과 성장을 이룬 교회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선교 100년도 못되어 1,200만 명의 성도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전체국민 약 25%의 복음화를 이룬 자랑스러움이 있다. 교인들의 숫자로 세계최고의 대형교회가 상위 열 교회 중에 절대다수가 한국교회다.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기적을 일으킨 한국교회는 마땅히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만 하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도 마찬가지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나라의 주권을 일본 제국주의에 빼앗겨 식민폭정 36년의 치욕을 겪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이라는 오늘의 우리나라를 세웠다. 건국 초기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나라였다. 그러나 건국 50년도 안되어 GNP 1만불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다. 마땅히 우리나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만 하다.
한국교회와 우리나라의 경제는 서로 맥을 같이 해왔다. 빠른 성장은 물론 잠시 주춤거린 것과 뒷거름치고 있는 것까지 같았다. 한국교회의 성장이나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과 같다고 하지만, 사회경제학자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한국교회의 성장이나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진실된 실체가 아니라 거품성장의경향이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거품이란 본디 '액체가 기체를 머금고 부풀어서 생긴, 속이 빈 방울'을 가르킨다. 그것을 다른 의미로 사전에서는 '현상 따위가 일시적으로 생겨 껍데기만 있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회경제학자들이 진단하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우리나라의 경제거품성장이 거품경제라는 것은 진실된 성장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으로 껍데기만 있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성장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사회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성장이나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거품성장이라고 폄하(?)하는 데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과 우리나라 경제에 나타난 현상이 거품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상호적인 어떤 관련이 필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이 맥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 날의 서구역사도 이를 동일하게 증명하고 있다. 즉 서구의 열강들은 그 나라의 교회와 국가경제가 서로 나란히 맥을 같이 하여 같이 성장하거나 퇴보하는 현상이 계속적으로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그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다.
한 때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바로 그 때는 영국의 교회인 성공회가 국교로 최고의 중흥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개 나라의 국교인 성공회가 막강한(?) 힘을 지닌 로마 카토릭과 맞설만큼 대단한 위력을 과시할 정도였다. 그런 영국교회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세계적 영향력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영국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신생국가라 할 정도로 역사가 매우 짧다. 그런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오늘날 지구촌 절대강국의 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이런 힘은 막강한 경제력때문이다. 막강한 국가적 경제력이 절대강국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미국의 국제적 입지는 매우 견고해 보인다.
과연 미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나라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일에서 세계 최고가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어찌보면 2세기를 겨우 넘겨 건국한지 3백년도 안된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며 주름잡는 최고의 나라로 절대강국이 될 수 있었는가? 그 배경에는 미국교회의 성장이 있었다. 이는 절대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미국은 헌법상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마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로 비칠 정도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된 나라다.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질 당시부터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국교회의 이런 절대적인 영향력이 미국이 경제성장을 이루는 배후가 되었고, 미국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경제성장은 미국교회의 성장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는 원인이 되어 미국을 세계에서 최고의 절대강국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 미국교회가 오늘날 크게 흔들리고 있다. 건국 이래로 꾸준히 성장하던 미국교회가 성장이 주춤하면서 퇴보하기 시작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반응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적대감이 증대되면서 나라의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미국교회의 이런 흔들림은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리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힘이 점점 약해져서 지난날에 견주어 형편없이 초라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왜 미국은 막강한 힘을 잃어가고 있는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와 나라의 경제가 힘을 잃어가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미국에서 교회의 퇴보가 곧 나라의 퇴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국제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중국의 경제적인 성장은 눈부신 발전일 뿐 아니라 기적이라 할만하다. 이런 중국의 영향력이 오늘날 세계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 막강한 나라로 도약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벌써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G2로 분류되고 있다.
본래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맹주였다. 아시아 대륙의 중원을 차지하고 주변국을 호령하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였다. 그런 중국이 서방에서 배를 타고 온 소수의 서방 정예군대가 일으킨 마약전쟁에서 패하여 무릎을 꿇었고, 청일전쟁에서 섬나라 일본에게 패하여 청나라가 무너지고 괴뢰 왕정인 만주국이 세워지는 굴욕을 당할 정도로 나약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런 중국은 공산정권의 수립과 함께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신중국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은 마오쩌뚱의 정책적 실패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나이 어린 청년들을 선동하여 정치쇄신을 목적으로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근대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나이 어린 청년들에 의해 수 많은 지식계층 인사들이 숙청되는 참극을 일으켰고, 당시 동부연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교회를 박해하여 교회의 성장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이런 일의 결국은 중국을 스스로 철의 장막을 쳐서 세계와 고립되어 암담한 나라로 추락되게 했다. 그 때가 불과 30여년 전이었다.
그런 중국이 지금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은 등사오핑의 정치력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진단한다. 등사오핑의 개혁개방정치가 중국의 경제성장이 가져왔고, 중국의 경제성장이 세계를 향한 영향력을 키운 것이라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절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은 간과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교회에 핍박이 가해졌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모든 선교사들은 100% 추방되었고,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시골로 뿔뿔이 흩어 하방시켜 교회성장을 원천적으로 방해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서방교회에서는 중국을 암담하고 참혹한 나라로 여기며 교회가 완전히 소멸되어 다시는 중국에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비관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소치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중국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크신 뜻이 있으셨다. 그 뜻을 이루시고자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중국교회의 박해를 허락하신 것이다. 따라서 중국교회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박해와 시련의 기간은 중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위한 잠복기였고,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원형을 가장 근접하게 회복하여 생명력 있는 교회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 열매로 등사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됨과 동시에 중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교회의 성장, 그것은 중국의 국가경제가 성장하게 되는 진정한 배후요, 동력이었다. 지금까지 역사가 이를 증명하여 한 나라에서 교회가 성장하면 그 나라의 경제도 성장했던 것과 같이, 오늘 중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교회를 통하여 서쪽을 향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일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중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교회의 이런 오늘날의 성장은 과거 한국교회의 성장을 무색하게 할 정도다. 개혁개방정치가 시작된지 불과 30여년 만에 중국교회는 전체 국민의 약 10%에 가까운 복음화를 달성할 정도로 놀랍게 성장했다. 지역에 따라 이미 20%에 육박하는 곳이 있을 정도다. 이런 중국교회의 성장은 서구교회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일이 중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성장이 퇴보하고 있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긍지와 자부심을 부끄럽게 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중국교회를 유의(留意)해야 한다. 21세기 중반에 세계교회를 이끌어 갈 가장 중요한 교회는 한국교회가 아니라 중국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중국교회는 거침없는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결코 중국교회의 성장은 중단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중국교회와 더불어 이룰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더 이상 우월적 사고로 중국교회를 대하지 않아야 한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 중국교회를 가르치거나 훈련하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의 사고와 인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사고와 인식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실로 중국교회는 더 이상 한국교회의 가르침이나 훈련이 필요한 교회가 아니다. 중국교회는 이미 스스로의 역량이 충분하게 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된 교회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제 이런 중국교회의 역량을 인정하고 세워주어야 한다. 더 이상 중국교회를 가르치거나 훈련하려고 하지 않고, 중국교회을 존중하며 격려하고 고무할 수 있어야 한다. 조용히 중국교회를 지켜보며 한국교회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교회는 더 이상 한국교회로부터 하시를 받아야 할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교회를 동반자로 여겨 함께 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할 대상이다. 진심으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완수하기 원한다면, 중국교회를 간과하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더욱 낮아진 자세로, 지금까지의 우월적인 자세로 군림했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의 태도로 중국교회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동반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짝이란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따라서 짝은 서로가 우열을 가릴 수도, 가려서도 안 되는 관계다. 오직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더불어 완성해 가기 위한 관계가 짝이다.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서로의 마음과 뜻을 합해 더부러 이뤄가야 할 관계가 짝이다.
21세기의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더불어 짝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불어 이루기 위한 짝이 되어야 한다. 서로를 보듬으며 서쪽을 향하여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한 쌍을 이루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비로소 중국교회를 한국교회의 진정한 동반자로 받아드리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야 21세기에 서쪽을 향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함께 함께 감당하는 선교적 짝이 될 수 있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짝이어야 한다.
2012. 11. 2 (금)
글 /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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