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짓는 것이 대수일까?
1993년부터 여러 나라, 여러 지방의 선교지를 방문하며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다. 만난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에 치중하고 있었다. 물론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세우는 일은 귀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지 석연치 못한 뒷맛을 남겼다.
선교사와 교회개척,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 일.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웬지 석연치 못한 뒷맛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먼저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렇지 않아도 될 일이 있다. 그러면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그것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 일은 먼저해야 할 일일까, 나중에 해야 할 일일까? 꼭 해야 할 일일까, 그렇지 않아도 될 일일까?
선교사에게 '왜 선교지에 왔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구동성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해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인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대답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들의 대답이 모두 옳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각자의 깨달음과 생각의 차이가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다. 그 중에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복음을 증거하려면 교회를 개척해야 하고, 교회를 개척하려면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라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말에 동의하는가? 내가 선교지에서 만난 선교사들 중에 많은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했고, 이를 위해 예배당을 짓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한국교회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선교지에 예배당을 세워야 할 이유를 설명하며 후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이런 노력은 열매를 맺어 선교지에 예배당이 지어졌다.
사실 예배당을 짓는 일이란 우리나라에서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짓는 일이랴. 선교지의 정치, 사회적인 여건이나 재정적인 여건이 몹시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위해 예배당을 먼저 지어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열정은 그 모든 어려움들을 딛고 일어나 예배당을 성공적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지으면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배당에는 각종 편의시설들이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완하거나 보수하고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관리도 필요하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재정적인 필요와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선교지에서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예배당을 지은 후에도 운영을 위한 더 많은 재정적인 필요를 선교사나 한국교회가 계속적으로 책임지고 부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지은 예배당의 존립이 한 순간에 위태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모든 일들은 선교지를 위해 합당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무엇이라 답할 수 있으랴. 선교지의 상황과 여건에 의해 합당한 곳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선교지에 합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선교지에서는 그런 일이 현지인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악을 /끼치게 될 우려도 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진실로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간접적인 방법과 직접적인 방법이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여럿이 더불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선교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따라 자기에게 합당한 방법을 찾아 그 일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은 자기의 달란트를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달란트를 통한 일보다는 당장 무엇인가 가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 일이다.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성과물은 더 이상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 일을 위해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해야 할 일이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을 짓는 일이 최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매우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선교사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선교사들이 자기의 달란트에 맞는 일을 찾아 열심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엄청난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이룰지라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일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선교사로 선교사의 책무를 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선교지에는 그곳에 처한 상황에 따라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지어야 할 곳이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교회개척이나 예배당 짓는 일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는 듯이 부정적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선교사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일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시작하길 원할 뿐이다.
참으로 선교지에서 현지인을 위해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을 짓고자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행여나 불필요한 일은 아닌지를 마음 깊이 성찰하며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장 순조로운 방법과 길을 찾아 일해야 한다. 실로 꼭 필요한 당위성과는 상관없이 불필요한 일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그런 일을 위해 불필요하게 불철주야 분주하거나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일을 피해야 한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복음이 전혀 증거되지 않은 미전도지역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지역에는 복음이 증거된 적이 없기에 현지인의 교회도 없다. 따라서 이런 지역이야 말로 선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며, 선교사는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미전도지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복음이 증거되었으나 여전이 선교사가 필요한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런 지역에는 현지인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지역에 파송받은 선교사는 선교지에 이미 현지인교회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처신하여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예배당을 짓는 일은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지역이든, 이미 복음이 증거되어 현지인교회가 존재하는 지역이든 공통적으로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교회를 개척하고 이를 위해 예배당을 짓는 일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는 너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좀더 신중하게 심사숙고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다.
선교지에서 예배당은 누가, 누구를 위하여, 왜 지어야 할까?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이 선교의 본질일까? 그래서 선교지에 예배당을 지으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선교지에 예배당을 짓지 못하면 현지인 선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도 되는 것일까? 무엇이 선교사로 하여금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예배당을 짓고 난 후에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는 왜 간과할까?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좀더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는 일이 어려운 것일까? 이런 반복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웬지 석연치 못한 뒷맛에 마음이 씁쓸해진다.
어떤 선교사는 예배당을 짓고 난 후에 현지인 목회에 치중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선교사는 이름만 선교사일 뿐, 한국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는 담임목사로 착각될 지경이었다. 그는 현지인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교회의 가시적인 성장과 확장에만 급급한다. 선교사로서 마땅한 본질적인 선교에는 소홀한채 자기가 하는 일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어떤 선교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지은 후에 현지 정부의 정치적인 압력을 받아야 했다. 결국은 예배당의 모든 재산권과 운영권을 현지인교회에 무상으로 이관시켜야 했다. 그뿐 아니라 예배당을 지은 선교사는 예배당에 관여할 수 일을 극히 제한하거나 아예 전혀 관계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은 선교사가 예배당을 지은 목적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결과를 당하고 만 것이다.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을 지은 후에 당한 또 다른 사례가 하나 더 있다. 현지의 불량집단이나 불량배의 간계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예배당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다. 이렇게 선교지 정부의 압력에 의하거나 불량집단이나 불량배에 의해 예배당을 빼앗기는 일은 대체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선교가 일부 허용되는 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례들은 모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찌보면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지은 일이 무익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선교사가 현지인의 목회자로 전락(?)된 것도 예외가 아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는 결코 바람직한 목회라 할 수 없다. 현지인의 목회는 현지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에 의해 이뤄지는 목회는 현지교회의 참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초기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박혀 죽으신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사 40일동안을 세상에 더 머무르셨다. 그후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당부는 요청이기도 하셨다. 따라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전혀 성령의 임재를 대망하며 기도에 힘썼다. 그들의 숫자는 120여명이었다.
열흘 후, 오순절에 이르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 모두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다. 저들은 모두 성령을 말미암아 놀랍게 변화되어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다. 이제 저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복음이 증거되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복음을 듣고 믿는 무리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저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했다.
저들에게는 예배하기 위한 예배당이 필요하지 않았다. 회당이나 거리, 한 개인의 집들이 모드 에배할 수 있는 예배당이었다. 복음을 듣고 깨달아 그 복음을 믿는 이들이 자기의 집을 개방하여 그곳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에배를 드리면 그곳이 바로 교회요 예배당이었다. 따라서 저들에게는 예배당을 지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결국은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예배당을 지으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예배당이 먼저 필요한 시대다. 예배당을 교회라 지칭하며 예배당이 있어야 전도나 선교가 가능한 듯이 여기는 시대다. 그래서 너도 나도 예배당을 짓는 일에 매달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예배당을 짓는 일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예배당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성도들이다. 저들이 함께 모여 당신을 예배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모든 공간이 바로 예배당인 까닭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배당과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배당 짓는 일을 성전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그 피를 흘리는 제사로 예배드리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다. 아무데서나 짐승을 잡이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성전은 불필요한 장소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더 이상 성전시대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었다.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성전은 필요없는 시대다. 오직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시대다. 더 이상 짐승을 잡아 그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한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단 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마다 그곳이 바로 예배당이다. 특별하게 지은 장소만을 예배당이라 고집하는 것은 구약적인 성전예배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더 이상의 깊은 이야기는 멈춰야 할 듯 싶다. 자칫하면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라는 불필요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예배당을 짓는 일은 심사숙고하여 고려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 일은 선교를 위해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은 특정한 장소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예배당은 복음을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자기의 집이나 사무실을 개방한 곳이 모두 예배당이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성도들의 무리가 곧 예수님을 수장으로 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모두가 모여 함께 예배드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면 이는 선교지에서 성도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마련할 수 있게 해야 할 일이지 선교사가 예배당을 지어주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지인의 교회는 현지인 스스로가 성장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상기하기를 원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이 세운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이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120여명의 성도들이 모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신 말씀을 따라 열흘동안 전혀 기도에 힘쓰는 성령대망회를 가졌고, 그 일로 예루살렘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예배당을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복음의 위대한 분화구였다. 많은 초대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사방에 흩어진 곳마다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마다 특정한 건물로 세워진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교회들이 스스로 자기 집을 개방한 성도의 집이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성도들이 예배당을 짓지 않았지만 때를 따라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의 변화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어려움들을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장소가 어디든지, 그야 말로 초막이나 궁궐을 구별하지 않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여겨 감사했던 저들의 놀라운 저력이! 그런 까닭에 신약성경에는 어느 한 곳도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교회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믿는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일 뿐이다. 결코 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장소는 단순한 예배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를 복음을 믿는 이들인 성도들의 모임으로 여기지 않고 장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경향이 크다. 그런 경향이 예배당을 짓는 일에 집착하게 하고, 그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짓는 일을 가장 우선하여 치중하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진실로 선교지에 예배당을 짓는 것이 대수일까? 선교지에 예배당을 짓지 않으면 선교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도행전 시대와 같이 현지인들로 하여금 자기 집을 개방하여 예배당이 되게 하고,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예배당을 짓게할 수는 없을까? 예배당을 짓는 일부터 시작하여 보수하고 관리, 유지하기 위한 일까지 선교사가 모두 담당하는 것을 선교라 할 수 있을까? 선교사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목회하듯이 현지인 목회를 위해 전념하는 것을 선교라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선교와 목회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혼돈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로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직 선교사에 의해, 선교사로 말미암아 개척된 교회와 예배당은 선교지의 먼 훗날의 전망을 암울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진실로 선교지에 세운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려면 현재의 모습을 하루 빨리 벗어 버려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위해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소수의 성도들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선교사가 선교지에 세운 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선교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질 수 있다.
2012. 11. 15 (목)
글 /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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