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사가 할 일은 선교(宣敎)인가, 목회(牧會)인가?

수호천사1 2012. 11. 19. 11:37

선교사가 할 일은 선교(宣敎)인가, 목회(牧會)인가?


   여러해 전이다. 모 선교지에서 실시된 한인선교사대회에 업서버 자격으로 참관했었다. 그 때 한국의 모 큰교단에서 총회를 대표하여 업서버로 참석한 이가 있었다. 그는 자교단(自敎團)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을 별도로 모인자리가 아닌 다른 교단에서 파송된 전체 선교사들이 함께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가 속한 '교단에서는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교단총회에 소속된 선교사들로 선교노회를 조직하기로 했다'라고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발표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 역시 선교지에 한국교단의 총회산하 노회를 조직한다는 이야기는 생소하고 엉뚱한 이야기로 들려졌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선교지에 한국교회의 교단총회에 속한 선교노희를 조직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얼핏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를 교단의 식민교회로 삼으려는 시도로 여겨지면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대회가 열린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전에 복음이 증거되어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교회가 존재하는 유서깊은 나라다. 따라서 그 나라에는 이미 현지인 교회들로 조직된 교단이 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신앙노선이 선교노회를 조직하겠다는 우리나라 교회 교단과 다를바 없는 교단이 엄존하고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 자기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 교단 총회산하의 노회를 조직하겠다는 발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선교정책의 일환이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 백 수십년 전의 우리나라는 복음의 불모지였다. 서방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증거되고 저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로 여기저기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여러 해 후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신학교가 세워졌고, 신학교에서 배출된 이들이 장립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이 하나둘 증가했다. 바로 그 때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 사람들로 장립된 목사들이 연합하여 비로소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됐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직된 장로교 독노회는 선교사들을 파송한 서방교회 교단총회에 소속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교회들만의 독립된 노회로 우리나라 교회의 교단총회가 세워지게 된 시작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장로교 독노회는 조직되던 처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이들이 참여했고, 선교 50여년 쯤부터 선교사들은 일선 조직에서 물러나고 순수 우리나라 교회의 지도자들로 조직된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장로교단 총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대회가 열리고 있던 선교지에서는 상황은 전혀 달랐다. 선교지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신학교가 있었지만 그때까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립된 현지인 목회자는 배출되지 않았다. 또한 일부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지도급 교인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철저하게 배제된 채 한인선교사들로만 선교노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이는 참으로 엉뚱한 발상으로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 분명했다. 한국교회 교단총회가 선교현장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의적으로 선교지를 선교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참으로 잘못되도 한 참 잘못된 선교정책이라고 여겨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배경을 처음에는 전적으로 한국교회 교단총회의 선교정책 부재로 인한 실책으로만 여겼다. 그렇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찌보면 한국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에게 간과할 수 없는 더 큰 잘못이 있다고 여져졌다. 이는 선교사들이 선교사로서 지켜야 할 직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에서 빚어진 부작용이었다.

   그랬다. 실로 한국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연의 직무를 제대로 인지하기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저들은 선교지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미 엄존하고 있는 현지인 교단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은 현지인 교회의 교단과는 무관한 자기적인 열정에 도취되어 선교사 본연의 직무를 이탈한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한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에 정진했다.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 복음을 받아들여 결신한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현지인교회가 세워졌다. 이렇게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에게서 정체성의 문제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선교적인 마인드보다는 목회적인 마인드가 더 크게 작용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선교적인 마인드와 목회적인 마인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답하기 전에 먼저 '마인드(mind)'를 이해해야 한다. 마인드란 영어로된 외래어다. 이것을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개념에 대한 심적인 의욕이나 경향. 또는 그것에 대한 주의력이나 인지도'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한다.

   이제 마인드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했다면 다음은 '선교(宣敎)'와 '목회(牧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먼저 선교란 '종교를 선전하여 널리 폄', 또는 '종교를 전도하여 널리 알림'이라 설명했고, 다음으로 '목회'란 '
목사가 교회를 맡아 설교하거나 신자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등 공식적으로 행하는 활동. 형태는 교회에 따라 다양하며 초대 교회에서 발전한 형태는 로마 카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따위의 몇몇 교회에 보존되어 있다'라는 설명했다.

   이것을 다시 다른 단어로 함축하면 '선교'는 '증거'라 할 수 있고, '목회'는 '지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국어사전의 설명으로 이해하면 '증거'란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의미하고, '지도'란 '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가르쳐 이끎'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서로 겸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선교사'와 '목회자'에 대한 국어사전의 설명을 확인해 보면 선교와 목회가 반드시 겸전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닌 또 다른 상관관계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어사전에서는 '선교사'란 '
외국에 파견되어 기독교의 전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목회자'란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국어사전의 설명만으로도 선교사와 목회자의 역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두 역할이 서로 같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이로서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목회자의 마인드로 목회자의 역할에 충실하기 보다는 선교사의 마인드로 선교사가 가져야 할 고유의 역할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다. 너무 많은 선교사들이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결과가 앞에서 언급한 모 교단에서 해외 선교지에 한국교회의 교단총회 산하 선교노회로 조직하려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실로 너무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더 무모하고 황당하여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동일한 일들이 지금도 선교지 여기저기에서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교지의 한 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방문한 교회는 한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지 10여년이 된 교회였다. 교회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세련되게 꾸며진 예배당과 현지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 위한 컴퓨터실이 마련되어 있고, 친교실을 겸한 조그만 식당도 있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목회자를 위한 목양실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숫자는 약 100여 명으로 선교사 가족을 제외한 모든 교인들이 현지인들이라고 했다.

   교회가 세워진 지난 10여년은 형언하기 어려운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여 오늘의 교회로 성장하기까지는 한국교회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고 했다. 이제 교회는 비록 소수이지만 현지인들로 제직회를 조직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의 재정관리는 선교사가 직접한다고 했다. 현지인 교인들의 일부가 헌금생활을 시작했지만 너무 미미하여 교회가 자립할 수 있기까지는 요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교사에게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선교사의 대답은 '교회를 좀 더 확장하고, 교회의 시설들을 증설하여 지역민들을 위해 개방해 나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많은 계획들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착각에 빠졌다. 선교사에게 해외 선교지에서 앞으로 해야 할 선교사역을 위한 계획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교회성장을 위한 열망으로 가득한 목회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랬다. 분명히 선교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선교이야기가 아니라 목회자의 목회이야기였다. 비로소 한국의 모 큰교단에서 선교지에 한국총회에 소속된 노회를 조직하겠다는 망발(?)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만했다. 그들은 지금 선교를 통한 복음의 세계화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오직 자기가 속한 교단의 세계화에 관심을 두고, 그것이 곧 선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미국 등의 해외에 한국교회의 교단총회에 소속된 현지 노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현지인을 위한 교회라기 보다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한 교회다. 따라서 그 교회에서 사역하는 이들도 스스로를 선교사라고 칭하지 않고 '우리나라 교민들을 위한 이민목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회적인 마인드로 교회를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선교지에서 현지인을 위해 교회를 세운 선교사들게 있어서 목회적 마인드는 분명 옳지 않다. 선교사가 교회목회에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선교사로서 합당한 역할을 상실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사로서 합당한 역할을 상실하였기에 선교지에 한국교회 교단총회의 선교노회를 조직한다는 엉뚱한 발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선교사는 선교사 본연의 직무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선교사는 목회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선교적인 마인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들을 현지인들에 의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일이 직접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선교사는 자신이 처음 시작한 교회에 미련을 두고 자칫하면 선교지 교회의 목회자로 전락될 수 있는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선교적 마인드를 상실하고 목회적 마인드로 현지인교회의 목회자로 전락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떤 선교사가 '항상 선교지에서 언제든지 철수할 각오를 하고 산다'라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사는 이유를 '바울도 한 선교지에서 3년 이상을 머물렀던 적이 없지 않았는가?'라는 말로 대답했다. 그렇다. 선교사는 항상 언제든지 철수할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처음 시작한 교회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이런 각오와 결단이 없으면 선교적 마인드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선교사는 선교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했으면 저를 하나님 안에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에 대해 전적인 권한과 책임을 함께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나 선교지에 가서 살고 있는 선교사가 서로 연합하여 서로에게 항상 신실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어야 한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더 이상 파송한 선교사를 간섭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현지인을 위한 교회의 목회를 위해 파송한 것이 아니라 선교지를 선교하기 위해 파송했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선교현장의 사정은 선교사가 더 잘 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에 대한 결정권과 행사권을 전적으로 위임하여 믿음 안에서 소신껏 일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지구촌 방방곡곡에 수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대국이라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과 긍지가 한국교회로 하여금 더 활발한 해외선교를 위해 쓰임받게 되는 비결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런 자부심과 긍지를 갖기 전에 다시 한번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곧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할 일은 선교인가, 목회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선교는 증거요, 목회는 지도라는 함축된 사실을 재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대국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오히려 한국교회를 향한 세계복음화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선교와 목회의 정확한 인식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2012. 11. 11 (주일)

  글 /
불꽃 石一進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왕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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