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대수일까?
오늘날 선교지에서는 선교사가 현지인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 외에 주력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다.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일이다. 이런 신학교는 지역에 따라 다소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는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여러 명의 선교사들이 서로 연합하여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것이요, 다음은 선교사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일이다.
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것은 선교를 위해 아주 소중한 일이다. 그것은 선교지의 미래교회를 이끌어 갈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선교사들의 공통된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지 석연치 않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얼까?
어떤 이가 '선교지에 가서 보면 한인 선교사가 열 분이 계시면, 신학교도 열 개가 있더군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칭찬일까, 조롱일까? 설마 조롱이랴. 그렇지만 어쩐지 말투가 칭찬으로 들려지지는 않았다. 어떤 아쉬움이 묻어나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뭐라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그냥 웃어 버릴 밖에....
어떤 지역에서의 일이다. 한 때는 호텔로 사용된 듯한 건물에 신학교가 셋이나 있다고 했다. 모두가 한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라고 했다. 그렇지만 저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척 외면하며 상호간에 교류가 전혀 없다고 했다. 서로가 별개의 공간에서, 별개의 시스템을 따라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오히려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 역력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파송되면 처음부터 신학교를 세우지는 않았다. 선교의 연륜이 쌓이면서 현지인으로 교회 지도자를 양성할 필요성이 느껴지면서 현지인 지도자 양성을 위한 과정을 시작한다. 물론 이렇게 시작한 현지인 지도자 영성과정은 신학교라고 부리지 않았다. 성경학교, 또는 제자훈련학교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양성기간도 3개월에서 6개월로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
그 때는 참 유익했다. 현지인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깨달아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막상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운 바가 없던 현지인들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려면 막연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사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배웠기에 배운 효과가 당장에 나타났다. 선교사에게서 배운 성경의 기초적인 지식으로 복음을 활발하게 증거하는 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에게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신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고 싶었다. 가르치는 기간도 1년에서 2년까지 연장했다. 성경과 함께 신학을 가르치기에는 3개월이나 6개월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는 대부분 성경학교라는 명칭을 유지했다. 또한 순수한 현지인 복음전도자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서서히 현지인을 지도자로 가르치는 1년에서 2년도 불만족스러웠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어 3년에서 4년으로 기간을 연장했다. 그 때부터 명칭도 성경학교가 아닌 신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명칭이 신학교로 바뀌면서 가르치는 내용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던 것이 이제는 서서히 성경보다는 신학이라는 학문을 더 많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신학교의 체제를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는 경우에 따라서 한 지역에 하나가 아니다. 어떤 지역은 얼마나 많은 신학교들이 있는지 파악 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렇게 많은 신학교들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경을 짧은 기간동안 가르치던 성격학교가 오랜 기간동안 가르치는 신학교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전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부작용은 복음전도자 양성의 감소다. 현지인들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복음의 열정이 더 강화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차갑게 식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은 많이 증가했지만, 순수하게 복음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도자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은 복음을 증거할 전도자 양성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부작용은 신학 유랑자의 양산이다. 유랑자란 본래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다. 신학 유랑자란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로 내가 임의대로 만들어낸 말이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이곳저곳의 신학교를 기웃거리며 떠 돌아 다니는 이'들을 지칭했다.
그 외에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선교사들이 세우는 신학교들은 대부분 큰 도시에 소재하지만,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시골에서 모집된다. 시골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여 도시에서 신학을 공부시키려면 저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칠 학생들을 모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다시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골에서 모집된 학생들 중에는 도시생활이 처음인 이들이 대부분이다. 저들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도시생활의 편리함을 경험한다. 어떤 신학교는 약간의 용돈까지 지급해 도시생활을 직접 맛보게 한다. 이렇게 도시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시골로 돌아가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도시생활이 시골생할에 비해 월등히 편하기에 다시 불편한 시골생활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시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또 다른 신학교들이 많다는 사실과 신학교마다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편의가 똑 같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된다. 따라서 자기의 욕구에 맞는 신학교를 선택하여 일방적으로 학교를 자주 옮기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다른 신학교는 부실하다고 여겨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가 운영하는 신학교만이 정통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선교사들 중에는 다른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회유하여 자기 학교로 옮기게 하거나, 이미 다른 신학교를 졸업한 이까지 다시 받아들여 공부를 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서 일어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도시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 시골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에 그대로 남게 된 이들은 다른 신학교를 물색하여 무의도식하는 삶을 유지한다. 이런 일은 신학교들이 너무 많기에 아주 쉬운 일이다. 이렇게 신학교들을 유람하듯이 떠돌며 호시탐탐 도시에 남을 기회를 엿 본다.
또 어떤 이들은 신학교를 마치면 시골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서 바로 취업하거나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내가 만나본 이들 중에도 어떤 점포의 판매원으로, 또 어떤 이는 불법 자가용 영업택시 운행으로 일하며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저들이 몇 년동안 신학을 배운 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도시의 어떤 교회를 봉사하거나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인 선교사가 세워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교단에서 시골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안수를 받은 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안수를 받은지 몇 달이 못되어 교회를 그만두고 외국으로 취업하여 돈을 벌기 위해 출국했다. 이런 예는 이미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고도 그 공부한 것을 헛되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과연 이런 풍토에서 운영된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이들이 선교지의 미래를 위한 교회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미래의 교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신학교였다. 그 취지의 목적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까? 참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한 시간과 자금을 들여 세운 신학교를 통해 무익한 일들이 자꾸만 문제가 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대수일까? 물론 앞에서 제시된 부작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극히 소수일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구더기가 아무리 들끓을지라도 장은 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왕에 구더기가 들끓지 않는 장을 담글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선교지에는 신학교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하지만 세워지는 신학교가 개인이나 어떤 소수의 집단이 자기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길 바라는 바이다. 또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여 그에 대한 대책과 함께 신학교를 세워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운영되는 신학교들은 여건이나 상황이 매우 다르다. 어떤 곳은 불과 10여명 미만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제법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어떤 곳은 교육계획이 제대로 짜여 있어 알찬 교육을 시행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교육계획이 전무한 상태에서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교육으로 교육다운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곳이 있다.
선교지에 있는 어떤 신학교는 아직도 2년제 과정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신학교는 학부제 4년을 가르치고 3년의 대학원제를 가르치는 곳도 있다. 어떤 곳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이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공부를 시키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2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자를 선발하여 가르치는 곳도 있다. 또 어떤 곳은 외국에 있는 학교들과 공동학위제를 도입하여 운영하는 곳도 있다.
어떤 신학교는 선교지 정부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설립된 학교로 인정받는 곳이 있고, 또 어떤 신학교는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정치적인 상황속에서 비공식적으로 세워져 은밀하게 운영되는 곳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주로 창의적 접근지역으로 분류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런 곳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도 있어 양질의 만족한 교육을 시행하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어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건과 상황들이 어떠하든지 선교지에 세워 운영하는 신학교들은 공통적인 동일한 취지와 목적이 있다. 바로 '선교지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선교사가 되어 신학교 하나도 세우지 못한다면 그는 사명을 다하는 선교사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서슴치않는 이도 있다.
정말 그럴까? 신학교 하나도 세우지 못하면 선교사라 할 수 없는 무자격 선교사일까? 따라서 자신의 달란트와는 아무 상관없이 신학교를 세워 운영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 대책없이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신학교의 운영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은 신학교 세우는 일을 가볍게 여기며 신학교 세우는 일에 집착한다. 무슨 까닭일까? 가장 큰 이유는 선교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지교회의 신학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선교지에 신학부재 현상이 심각하여 어쩔 수 없이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그만큼 선교지의 모든 현지교회에는 신학부재의 현상이 심각한 것일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만함과 지나친 편견이 현지교회를 너무 무시하는데서 비롯된 현상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신학은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신학은 대부분이 성경에 근거하여 가르친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기에 학문적인 접근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이 우세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학문적인 견해가 자기와 다르면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하는 배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선교사들의 이런 배타적인 경향이 선교지의 현지교회를 신학부재 현상이 심각한 교회로 오해하게 한다. 또한 자기의 신학적인 지식에 대해 절대 우월적인 자부심과 긍지가 현지교회의 신학을 경시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생각이 결국 선교지에서 자기식대로 신학교를 세워, 자기식대로 신학을 가르치는 어리석은 짓을 자행하면서도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선교지를 더욱 혼란의 늪에 빠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세워 미래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선교의 진정한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추호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지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선교지에서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꼭 필요한 지도자를 선택하시며, 선택한 지도자에게 합당한 사명을 맡기신다.
진실로 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있게 공부한 사람만 하나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지도자는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여 한 영혼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지도자는 반드시 신학교에서 배워 배양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주시고, 가르치시며, 세우실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이해 선교사는 하나님게 쓰임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대수라고 여기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세우기 전에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구해야 한다. 그리고 선교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
이런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혼자 세우도록 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세우게 하신다. 서로 협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들을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서로 양보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하나되는 신학교가 선교지에 세워져야 하며, 이런 신학교로 현지교회와 더 가까운 교류를 이룰 수 있어야 선교지의 미래교회를 위한 좋은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더 깊이 숙고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신학교를 세워 미래교회의 지도자 양성에 비중을 두기 보다는,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는 전도자를 양성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로 오늘날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오직 복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뜨거운 가슴의 전도자가 필요한 시대다. 따라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셨고, 선교사의 가슴이 저들보다 먼저 뜨거워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2012. 11. 17 (토)
글 / 불꽃 石一進
'선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짝이어야 한다 (0) | 2012.11.19 |
---|---|
[스크랩] 선교사가 할 일은 선교(宣敎)인가, 목회(牧會)인가? (0) | 2012.11.19 |
[스크랩]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짓는 것이 대수일까? (0) | 2012.11.19 |
[스크랩] 선교사가 할 일은 선교(宣敎)인가, 목회(牧會)인가? (0) | 2012.11.14 |
[스크랩] 21세기 선교는 자기 중심성 포기해야 (0) | 201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