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도시- 서안
실크로드는 서안(장안)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바이고 한반도에서도 많은 비단이 생산이 되었던 것과 당시의 소그드상인들과 중앙아시아상인들이 오고 갔으며 신라와 고구려에도 대상(낙타을 탄 상인-카라반)들이 사용하던 낙타가 있었던 점들을 보면 한반도도 실크로드에 있어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역의 문물과 문화들을 장안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하는 중국식 사관에 젖어 있는 우리로서는 서역에 우리 선조들과 서역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직접오고 가서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도록 가리워진 역사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안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보면서 그 여정에서 있었던 도시들을 만나 본다.
1) 서안
서안은 중국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섬서성의 성도이다. 섬서성은 서안.보계.동천.함양등 4개의 직할시와 6개의 지구로 되었다. 북쪽에는 황토고원 남쪽에는 진령산맥이 자리한다.
서안은 황하강중류의 한 지류인 위하가 이루는 기름진 평야의 중심에 위치에 있다. 2백만이 웃도는 인구이며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며 회족과 몽고족.만주족등의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기후는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여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므로 실크로드의 다른지방에 비하면 습한 편이다. 서안의 기후가 건조하기 때문에 밀등이 많이 생산되므로 음식도 밀가루로 만든것들이 많다. 각종 국수와 중국빵등이 주류를 이룬다.
서안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중국의 8대 도시에 속하며 북경.남경.낙양.개봉.항주.와 함께 중국의 6대 고도로 꼽힌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농경이 시작된 황하강유역에 자리한 까닭에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서안 동쪽 교외에서는 반파유적에서 양소문화가 대표적이다.
서안은 무려 1천1백여 년 간 13개 왕조의 수도로서 중국 역사에 자리 매김해 왔다. BC 11세기에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서안 서쪽에 있는 풍경과 호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BC 740년유왕의 실정으로 주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진나라의 시황제가 위하 유역 함양에 수도를 정했다. 한 나라 때에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 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안이라는 이름은 '장은 길다'라는 뜻이고 안이라는 이름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이전부터 이곳은 흉노(훈)등의 북방과 서역의 유목민족들의 줄기찬 공격과 약탈등에 의해서 늘 안녕을 유지 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장안에서만도 여러왕조와 국가가 갈리고 많은 왕들이 반란에 정권싸움에 죽어갔으므로 장안은 길게 안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갈망을 담은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안은 그 후에도 삼국시대.5호16국시대등을 거처 신망.전조.전진.대하.후진.서위.북주의 수도를 지냈고, 수.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중국전국을 지배하는 황제의 도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서안은 그리이스 아테네.이집트의 카이로.이탈리아의 로마와 더불어 세계4대 수도로 손꼽히고 있다.
한 무제 때에 장건이 중앙아시아에 파견되면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서방 세계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진귀한 물품과 문물의 교역이 이루어 졌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는 비단이 수출되고 옥이나 보석,유리제품 등이 수입되었다. 또한 포도.석류.호도.완두.참깨.오이 등의 식물류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음악과 무용.요술.곡예 같은 무형의 기술과 인도의 불교.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파의 그리스도교인 경교.이슬람교 등의 서방 종교까지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주철 기술과 양잠.제지접과 화법을 서방에 전했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동서문화의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나라 때는 천산산맥 서부 북쪽에 자리잡은 서돌궐을 정복하는데 실크로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말기 황소의 난을 비롯한 수 차례의 전란이 일어나 서안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명나라에 이를 기존의 당나라 장안성을 본따 서안부성을 만들고 도시를 재건하였는데, 현재 서안 시내 성벽 안에 남아 있는 도로들의 원형이 바로 6백년전 이 때 형성된 것이다.
종루와 고루
서안 시내 지도를 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도로의 원형은 6백년전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인데, 성벽 안 중심을 관통하면 곧게 뻗은 네 개의 도로 교차점에는 명나라 당시 종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종루가 있다. 종루가 건설된 시기는 1384년 높이 38미터, 너비35.3미터의 목조 건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2층을 올린 것이 특징이며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3층처럼 보인다. 원래 이곳에 있던 종은 비림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몇 년전에 주조한 종이 전시되어 있다.
종루에서 광장쪽으로 다시 보면 또 한 대문이 있는데 대문위에 큰 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고루이다. 고루는 1380년 명나라 대 만든 것이로 높이는 34미터,면적은 1천9백24평방미터이다.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청진대사
고루를 벋어나면 회족거리가 나온다. 회족들은 당대에 아랍에서 대상들이 무역을 하려고 왔는데 이들의 수가 3천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당은 이들이 장안에 눌러 앉아서 살면 이들을 통해서 많은 비단을 수출할 셈으로 이들에게 성안에 살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한편 이들에게 영원히 눌러 앉도록 아내를 주어서 살도록 하였다. 이들의 마음은 항상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당에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돌아갈 '회'를 써서 회족이라고 했으며 이들이 믿는 이슬람을 '회교'라고 불렀다.
회족음식시장을 조금 들어간 곳에 중국4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이자 서안에서는 최대의 규모을 자랑하는 청진대사가 있다. 청진대사가 창건된 시기는 현종때인 742년. 1천2백50년이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청진대사 입구의 목패방 문은 빛이 다 바래었다.
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져 있으며 봉황정을 지나 석패방을 넘어가면 바로 예배대전이 보인다. 대전은 중동식의 둥그런 돔과 미나렛이라는 첨탑 대신 푸른 기와를 얹은 중국식 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대전은 1천면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행사를 할 수 가 있다. 하루에 5번씩 예배가 열린다.
성벽
당나라 장안의 옛 남아 있는 고층 건물과 상점들이 즐비하 서안 시내에서 그 옛날 장안의 자취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따 명나라 때 건축한 성벽이다. 처음 건축할 때는 성벽 둘레 길이가 총 13킬로미터였으나 1985년 북쪽 성벽의 일부를 터 기차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는 11.9킬로미터만 남아있다.
성벽의 동서남북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그 쓰임이 다 달랐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서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들어오고는 곡식, 생필품들의 공물들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황제가 다니던 남문은 3중곽,서문과 북문은 2중곽, 동문은 1중곽으로 되어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황제는 남문을 열고 친히 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안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서쪽 대경로로 가면 대상이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된 거대한 하얀 석상군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한. 당나라 때 실크로드 출발점 석상들이다. 1992년에 조각상을 세움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은 서역고 활발한 경제.문화교류를 가졌다.
팔로군 서안사무소기념관
성벽 안 서오로와 북신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기념관은 팔로군이 국민당을 피해 혁명활동을 수행하던 근거지로 1959년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에서 등소평,주덕 등이 팔로군을 지휘하면 중국 형명의 발판을 만들어 갔다.
흥경군
성벽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당나라 현종이 태자시절 거처로 사용하던 흥경궁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흥경궁은 황제로 등극한 현종이 이곳에서 양귀비와 사람을 나누며 정사를 봄으로써 한때는 당나라의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했으나 안사의 난 이후 이전의 명성을 잃어버렸으며, 수 차례 걸친 전란으로 인해 결국 황폐해졌다. 흥경호는 현종이 뱃놀이 즐기던 곳으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동문쪽에 자리잡은 침향정은 현종과 양귀비가 꽃을 보고 즐기던 정자인데 모란을 좋아하던 이백인 이곳에서 모란에 대한 즉흥시를 지었다고 한다. 침향정 앞에는 술에 취한 누워있는 주중선 이백의 조각상이 놓여있다.
대안탑
소채동로와 대안탑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솟은 탑을 보게 된다. 높이 64미터인 대안탑이다.
대안탑은 646년 당나라 고종이 일찍 사명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새운 대자은사경내에 위치한다. 고종은 절이 완성된 후 자신이 거처하는 함원전에서 매일 조석으로 두 번씩 자은사를 향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ㅅ찰 경내로 들어가보면 곧게 나 길 끝에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 뒤로 돌아가면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는 장소로 상용하기 위해 쌓아 올렸다고 하는 대안탑이 그 웅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입구 좌우에는 제술랑이 직접쓴 대당삼장성교서와 대당삼장성교서기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대안탑은 5층으로 건축되었다. 10층으로 중건을 했는데 지금은 7층만 남아있다.
대안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기러기 설화가 가장 신빙성 있게 전해진다.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이 어느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 때 어디에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길을 인도해 주었다. 부처가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와 주었다고 생각한 그는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기러기탑"으로 이름을 하였다.
소안탑
시내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천복사공원으로 가면 707년에 중국 당나라 승려 의정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경전 번역본을 보관하기 위해서 세운 소안탑이 있다. 탑은 15층음 높이 45미터 였으나 지진에 의해 위쪽 두 층이 파손된 채로 당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안탑에는 기단석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1487년 섬서성에 진도 6급의 지진이 일어나 기단석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34년이 흐른 1521년 또 한번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다음 날 기단석을 살펴보니 갈라졌던 돌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에 놀란 사람은 이 것은 신이 합쳐 주신 것이라 하며 '신합'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실 건축물을 지을 때 기단에 반구형 돌을 쓰는 것은 고대부터 중국 장인들이 사용해 오던 방법이었다. 외부에서 반구형의 돌에 힘을 가하면 돌 안에서 내부응력이 생겨서 갈라진 돌이 서로 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인데, 소안탑 기단석이 붙은 것도 이와 같은 과학적인 이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거대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의 대안탑은 남성적인 탑이라면 소안탑은 1천2백93년동안 비비람에 깍인 탑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어 은은한 여인의 자태를 느끼게 하는 탑이다.
병마용
진시황의 6천대군, 진시황병마용
서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8킬로미터 정도 달려가면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이 나타난다. 진시황제능에서 1,5킬로키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에는 진시황이 죽은 후 군대의 일부를 순장시키는 대신에 흙을 구워 만든 병사들을 묻어 두었는데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3개의 병마용갱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그 모두를 합친 면적이 21평방킬로미터로 마카오의 면적보다 크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발굴된 병마용갱은 1호 갱으로 1974년에 발굴되었는데 3개의 병마용갱에서 가장 커서 규모가 14,35평방킬로미터가 되며 갱 위에는 거대한 돔이 얹혀져 있다.
용갱에 들어서면 마치 군대 서열하듯 거대한 토용군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은채 무기를 든 형상으로 서 있어 중장비를 갖춘 주력부대로 추정되는데 신기하게도 토용의 얼굴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 이는 느을 만들 때 자신의 얼굴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갱에서 시작되는 부분에는 처음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토용을 발결했다고 하는 자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놀랍게 토용 3열의 첫 줄과 1미터차이밖에 안 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우연 덕분에 용정의 시작지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고 2천2백년 동안 잠자던 토용들을 큰 손상 없이 발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호갱은 크기가 6평방킬로미터이며 1천4백 명의 토병과 말들이 있다. 보병.기병.전차등이 혼합된 지원부대로 추정되며, 현재도 복원작업이 진행중이다. 3대의 모니터에서 2호갱의 발굴작없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3호갱은 5백20평방미터로서 단 한 대의 전차와 4마리의 말, 68개의 토용만이 발견되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형태로 토용이 배치 된 것으로 미루어 경호부대로 추측된다. 전차는 나무로 만들어 썩어 없어지고 쇠로된 부속품들 만이 남았다. 최근에는 진시황릉 서북쪽에서 4호갱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중이다.
용갱의 내부에는 흙벽에 의해 길게 방이 나뉘어 있고 그 안에 토용들이 동쪽을 향재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흙벽은 3개층으로 쌓여 있어 매우 견고하다. 먼저 흙을 쌓은 후 그 위에 굵은 소나무를 깐 다음 쌀뜨물에 이긴 점토를 바르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다시 석회를 펴 바르는 방법으로 쌓았기 때문에 2천2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갱 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다.
현재 병마용에 매장 되어있는 토용의 개수는 1,2,3호 갱을 통틀어 6천여 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토용들이 워낙 많이 파괴되어서 제 모습으로 복원된 토용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토용들이 원래 적,녹,청등의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항우가 함양성을 함락시키면서 병마용의 토용들이 들고 있던 실제 무기를 빼앗기 위해 용갱을 파해쳤는데 그때 병마용의 일부가 파손 분실되면서 체색도 많이 흐려졌다. 다행이 3호갱은 항우의 침략을 피할수 있었던 까닭에 토용의 채색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토용들이 역할에 따라 분류해 보면 크게 보병 궁사기병.장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병이 가장 많은데 키가 170-180으로 머리를 틀어올린 모습을 하고 있고, 궁사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갱 전체를 합쳐서 다 나하 뿐인 장군은 196의 키에 토끼 귀 모양의 쌍엽관을 쓰고 있다. 이 처럼 토용들이 보고 신체조건이 매우 좋고, 또 모든 토용들이 갑옷을 입고 있다. 사실 전국시대 당시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 병사들은 신체가 약해서 철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었다고 하니, 일제 진나라 병사들보다 크게 만들어 졌음을 감안하더라도 이 처럼 신체적인 사항이 월등이 좋았다는 사실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짐작해 준다.(?)
진시황의 구리마차
1980년 2대의 구리마차가 진시황릉 서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 되었다. 그 때 진시황은 생전에 5번 순행을 나갔는데, 그 때 탓던 마차를 2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모형이다. 마차는 철로 주조한 후 구리 도금하여 말 및 다른 부분고 용접하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위에는 우산이 씌워져 있다.
우산은 망간 함량을 다르게 하여 중심과 변두리의 경도를 조절하였다. 구리 마차의 진품은 섬서박물관에 있으며 병마용박물과2호갱에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진시황릉
서안에서 병마용갱으로 향하는 1.5킬로쯤 못 미쳐서 석류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룬 작은 산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46-208년까지 무려 37년에 걸쳐 완공도었으며 총 7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는 진시황릉이다. 유네스코는 1987년 진시황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진시황릉은 개인의 무덤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처음 축조될 당시만 해도 봉분의 높이가 120미터에 달하고 둘레의 길이가 4킬로미터의 내성과 6킬로미터의 외성에 둘러쌓여 있었다. 현재는 높이 46미터의 진시황릉 봉분과 순장묘군이 계속 발굴이 진행 되고있는 병마용갱만이 남아있으며, 진시황제와 순장된 신하들을 모시는 사당들과 성벽은 대부분 훼손.분실되었다.
진시황릉을 오르기 전, 병마용 모형을 전시해 놓은 작은 광장 왼쪽 길을 따라 가면 처음 축조 되었을 당시의 전시황릉을 재현해 놓은 모형을 볼 수 있다. 내성 안 진시황의 사당에서는 시종들이 거주하면서 진시황제가 살아 있을 때 처럼 매일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갈아 넣었으며 순장된 신하들을 살아 있는 사람을 모시듯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진시황은 단순히 봉분 하나만이 아니라 한 지역을 자신의 거대한 릉으로 삼았던 것이다. 진시황릉 중아으로 난 계단 석류나무 숲을 지나가면 봉분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게 된다. 릉 아래에는 순장릉군이 뒤로는 뾰쪽하게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안개 속에 싸여 있는 여산이 버티고 서 있고, 앞쪽으로는 넓은 평지와 강이 한눈에 들어와 단연 명당임을 알 수 가 있다. 능은 먼저 평지에 땅을 파고 지하 궁전을 만들어 진시황제의 관과 순장품을 넣은 다음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에는 구리를 녹여 바닥에 깔고 숲과 산의 모습을 꾸며 놓았으며, 수은이 흐르는 강을 만들어 그 위로 진히황의 석관이 흘러 다니게 했다고 한다. 또한 거대한 중국지도 석각과 다량의 진귀한 보물들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추측일 뿐 지하 궁전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진시황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능을 만드는 데 관여한 장인들을 모두 생매장했다.
진지황릉은 아직까지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 일단 주변의 수위가 높아 17킬로만 파면 물이 나올 정도이며, 능을 개발하려면 전체를 쒸울 수 있는 만한 돔 제작 기술이 있얻야 하는데, 능의 면적이 너무나 커서 현재 기술로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추측만 무성하지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칫 훼손시킬 우려가 많다는 점도 개발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화청지
서안에서 동쪽으로 35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청지는 산세가 뛰어나고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년 간 온천 휴양지로의 명성을 누려온 곳이다. 주의 여궁.진의 여신탕.한의 이궁.당의 온천궁.화청궁이 모두 화청지에 건설된 역대 황제들의 별궁이다.
하지만 현재 화청지는 온천지보다는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화청지에 들어서면 연못중앙에 양귀비 조각상이 서 있다. 전라상의 모슴으로 수줍게 서 있는 양귀비의 조각상을 보면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하는 옛 말이 생각이 난다.
양귀비는 초선.왕소군.서시와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으로 꼽히는데 원래는 현종의 18번째 왕조의 수왕의 비로 황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며느리인 양귀비에 반한 현종은 740년 양귀비를 여승으로 만들어 수왕에게서 빼냈고 4년후 다시 궁으로 들인 후 745년에 자기의 귀보로 책봉했다. 그후 양귀비의 일족은 권세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구룡지 너머로 보이는 여사산에는 주나라 마지막 왕인 유왕이 경국지색의 미인 포사를 위해 거짓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가 있다. 좀처럼 웃지 않은 포사를 위해 어느날 유왕은 화청지 앞 여산 봉화대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를 거짓으로 올렸는데, 급하게 달려 온 제후들이 거짓 봉화임을 알고 허망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포사가 비로소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뒤 유왕은 포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주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다. 후에 유왕은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기 위해 왕비와 태자를 폐하고, 이에 왕비의 일족인 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왕은 급하게 봉화를 올렸으나 이번에도 거짓 봉화라고 생각한 제후들이 구하러 오기 않아 주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구룡지를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양귀비와 현종이 즐겨 목욕하던 해상탕과 연화탕이 나타난다. 해상탕은 탕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탕 안에는 바닥을 다 덮을 정도의 대형 백옥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차가운 옥에 닿아 서서히 식으면서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만들어 주는 역할를 했다고 한다. 연화탕에는 옛날 안록산이 온갖 동물의 모양을 조각하여 바친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현종이 목욕할 때 물에 비친 조각상의 모습이 너무 흉칙하여 시종들을 기켜 다 깎아 버리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그밖에 태종 이세민이 사용하던 성진탕.태자가 쓰던 태자탕.궁녀들이 사용하던 상식탕.사절단을 위해서 준비한 별실 등이 있다.
양귀비의 출생에 관해서는 어버지나 어머니중에 서역인으로 양귀비는 서양의 미인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장안에는 서역과의 무역이 한창 이었으며 당의 조정에도 많은 서역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미인의 기준으로 서역의 미인을 삼았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서역을 지나면서 벽화에서 보여지는 미인들은 모두가 양귀비와 같이 글래머이다....
안록산도 서역출신이다. 아버지로부터 서역의 언어인 위구르어와 소드드어 어머니로부터 중국어등을 배웠으므로 6개국어에 능통했었다고 한다.
화청지 안쪽 끝에는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해 두었던 오간청이 자리잡고 있다. 장개석은 내적(공산당)을 먼저 몰아내고 외적(일본)을 몰아내자는 지치를 내걸고 항일투쟁을 뒤로 미룬채 반공정책을 펼쳤다. 이에 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힘을 합쳐 일본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학량은 1936년12월12일 사안사변을 일르켜 공산당 토벌을 지시하기 위하여 직접 서안으로 내려온 장개석을 감금하였고 결국 이 사건은 국공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양귀비 묘
무릉이 위치한 흥평현에서 12.5킬로를 더 들어가면 작은 마을 마외파가 나타난다. 이곳에 초고의 영화을 누리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친 양귀비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데 초라한 반구형을 하고 있따. 양귀비묘가 다른 무덤들과 달리 벽돌 무덤이 된 데에는 한 아가씨의 슬플 사연이 깃들어 잇따. 마외파 근처에서 못생긴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외모 때문에 시집가기가 어렵자 하루는 천하의 미모를 자랑하던 양귀비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쓰러져 울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가서 보니 못생겼던 얼굴이 예쁘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을 양귀비분이라고 하면서 너도나도 퍼가지 시작하여 결굴 무덤위에 별돌을 쌓으므로써 이를 방지하였다.
양귀비의 무덤 주위에는 많은 역대 시인들이 양귀비에게 바친 시를 조각한 비석들이 전시되어있다. 당 희종이 쓴 '황제가 촉 가는 길' 마외에 행차하며 청나라 임칙서가 쓴 '양태진모에 바침,등의 시들이 그곳에 있다.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과 대립하던 안록산은 755년 11월 8천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으로 진격을하였다. 현종과 양귀비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지금의 사천 촉으로 도망갔는데 수행하던 병사들이 모반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위협하여다.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살을 하라고 명하였고 양귀비는 길가불당에서 38세의 나이로 목을 메어 하려한 삶을 마감하였다. 757년 비밀리에 마외파에 양귀비를 묻은 현종은 그 후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그리워 하였다고 한다.
흥교사
당나라 때인 669년 창건된 사찰로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잘 알려지 현장의 사리탑으로 유명하다. 664년 현장이 죽은 뒤 유골은 서안 동쪽 백록원 언덕 위에 매장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황궁 내 함원전에서 그 묘가 보이는 관계로 669년 서안 동남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소릉원으로 이장되었다. 이장과 함께 사리탑이 건축되었으며 후에 당나라 숙종이 흥교라는 2자를 하사하여 흥교사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현재 흥교사의 건물들은 전날에 무너진 것을 1922년과 1939년 다시 세운 것이다.
흥교사입구에 들어가면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 뒤로 3개의 탑이 보인다. 중간에 가장 큰 탑이 현장의 사리탑이고 좌우에 있는 작은 탑은 제자인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다. 현장의 사리탑은 5층 33미터로 현장의 상이 모셔져 있으며, 탑 북쪽에는 당산장대편각법사명의 세긴 비석이 있다. 현장은 12세에 출가하였으며, 629년에는 불경 원본을 얻기 위해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16년 만인 645년 불사리 150알. 불상8구. 경전 520질. 657부등을 가지고 당나라로 돌아왔다.
원측은 신라의 왕조로 3세에 출가하여 627년 당나라에 건너갔고 유식론의 대가가 되었다. 규기는 당나라의 귀족으로 삼차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출가할 때 스승인 현장법사에게 음주와 여색을 허락받아 술. 여자. 경전을 실은 3대의 수레를 끌고 다녔다고 하여 이런 별명이 붙었다.
향적사
향적사는 이백. 두보와 함ㄲ 당나라 전성기의 대시인었던 왕유가 향적사를 지나면 시를 남겨 유명하다.
향적사는 706년 당나라 중종때 정토종을 크게 발전시킨 고승 선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절로 정토종 활동의 중심지였다. 정토종은 엄격한 계율에 따른 생활을 중히 여기던 기존의 불교와 달리 부처를 믿으며 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서민들이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향적사 대웅보전에는 아미타불과 선도의 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의 선도고탑은 680년 13층의 벽돌탑으로 건축되었으나 후에 2개 층이 무너져 현재는 11층이 남아 잇따. 기단 4면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답신의 4면에는 금강경이 새겨져 있다.
건릉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건릉은 서안에서 서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허허벌판에 작은 2개의 봉우리가 호위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건릉이 자리하고 있는 양산이다.
측천무후는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의 비로 황궁에 들어왔다. 26세에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궁을 나와 비구니가 되었는데, 3년 후인 654년 3대 황제인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종의 총애를 받고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된다. 고종의 총애를 배경으로 측천무우는 모략을 하여 황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후가 되었으며, 고종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직접 정사를 관장하게 된다. 고종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두 아들을 중종과 예종으로 올렸다가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의 이름은 주라고 고친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탄압하고 승려 회의, 그리고 장역지 형제들과 추문을 일으키고 세인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선정을 베풀어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방력을 확고히 다지는 등 6대 황제 현종이 당나라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건릉은 당나라 능으로서는 최대규묘인데, 능이 있는 봉우리 주위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원래2중 성곽이 둘러처져 있었다. 내성벽의 둘레는 5천9백20미터. 내성의 면적은 2백40평방미터이며, 남쪽에 주작청. 북쪽에 한무문.동쪽에 청룡문, 서쪽에 백호문이 있었다. 현재는 느으로 올라가는 사마도의 석각과 고종 측천무후의 공덕비. 61개의 석인상만이 남아있다.
산 꼭대기에 웅장하게 자리한 건릉으로 향하는 사마도 양측에는 날개 달린 말. 주작. 관을 쓰고 검을 든 장군상 등 124개의 석각이 서 있다. 배부분 석각이 삼하게 금이 가고 깨져서 남아 몸통만 남아 있다. 석각들의 행렬이 끝날 즈음에 고종의 공덕비 '술골기비'와 측천무흐의 공벅비 '무자비'가 나타난다. 측천무후의 공덕비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사실을 두고 여려가지 설이 내려오는데, 측천무후 스스로 자신의 공덕이 너무 커서 비석에 다 적을 수 없으므로 비워두라고 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밖에 자신이 죽은 후 후세 사람이 알아서 쓰라고 했다는 설 측천무후에 의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중종이 자신의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이 남아서 공덕비를 써주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송. 금을 거쳐 구군가 비석 위에 글자를 새겨 넣어 현재는 유자비가 되었다. 특히 금나라 때인 1135년 여진문자로 적은 낭군행기는 여진문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건릉 입구 양측에는 61개의 석인상이 마치 능을 호위하듯 서 있다. 이근 고종의 장례식에 조문 온 여러 민족의 수장들과 외국사신들을 조각한 것으로 모든 석인상의 등에 국명과 관직. 성명을 적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머리도 다 잘리고 글시고 훼손되어 알아 볼 수 없다.
건릉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영태공주묘와 의덕태자묘, 그리고장회태자묘등의 배장묘가 자리잡고 있다.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로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사사되었는데 영태공주묘는 이미 도굴당하여 약간의 당삼채와 도기들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묘 내벽에 당시 궁정의 못습을 추정할수 있는 궁녀도가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장회태자는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로 역시 측천무후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묘 내벽에는 신라의 사신이 그려져 있는 영빈도가 있긴 하지만 색깔이 바래고 지워져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소능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능으로 637년에 시작하여 639년 완성되었으며 서안 서북쪽 80킬로지점에 위치한다. 당나라에서는 황릉을 건설할 때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대대로 산을 이용해 왔다. 먼저 가파른 벼랑에 나무 계단을 설치하고 올라가 벼랑 중간에 굴을 뚫은 후 황제의 관과 부장품을 넣고 쇳물을 부어 그 입고를 아예 봉해 버린다. 그런 다음 나무 계단을 불태워 없애 버리면 벼랑 위로 올라갈 수도 없을뿐더러 입구를 완전히 봉했기 때문에 고굴꾼들의 약탈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현재 소릉까지 올라가는 고로를 공사하였으며 묘 내부개방이 안되고 있다.
소릉을 뒤로 하고 당나라 명자 이적의 묘가 있는데, 그 옆에 소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전시한 소릉박물관을 세워 놓았다.
출토된 물품들 중에는 당삼채기법의 삼채용이 있는데 이 채색기법은 현재에도 흉내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중에는 코가 높고 눈이 움푹 패인 서역인들의 모습을 한 도용과 낙타도 있어 당시 실크로도상의 중요한 도시로서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주고 받았던 옛 장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릉
서안에서 함양시를 지나 40킬로미터쯤 달리면 흥평현에 위치한 전한 시대의 무덤인 무릉에 도착하게 된다. 가파르게 각을 형성하며 높이 솟은 능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을 연상케 한다.
무제는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전한의 7번째 황제이다. 그는 자주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 사업과 운하 굴착 등의 사업을 벌임으로써 민생에 힘쓰고, 모자라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최초로 소금.철.술의 전매제도를 만드는 등 세제를 보정하였다. 고관대작의 자제를 임용하던 관례를 깨고 유학을 교학으로 삼아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박사관제자원중에서 관리를 발탁하여 전제적 관료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써 동쪽으로는 고조건을 치고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철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다. 오월국에 파견했던 장건에 의해 서역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무제는 북방의 흉노등을 토벌함으로써 유목 민족들에 의해 막혀 있던 동서 교통로를 열었고 서역과 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무제는 민생에도 힘을 쏟았지만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데도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부터 53년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건축하였는데 매년 전국에서 걷어들이는 세금의 3분의 1을 무릉 건설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무릉은 전한 시대 황제의 9개 능중에서 가장 커 높이는 46.5미터, 아랫부분의 길이는 동서231미터,남북으로는 234미터에 이른다. 한나라의 장안은 지금의 서안시와는 경계가 달랐다. 당시의 장안은 서안 서북쪽 장락궁과 미앙궁의 유적지 주변이었는데, 무릉이 위치한 자리는 이 한나라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에 위치했다.
무릉에서 동으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곽거병묘와 무릉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곽거병은 무제 때 용맹하게 활동했던 명장이다. 무제의 황후인 위황후의 조카로 기원전 123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올랐으며 흉노를 진압하고 곤륜산 하서 지방을 빼앗아 실크로드 개통의 주역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곽거병묘 봉분 앞쪽에 위치한 무릉 박물관에는 무릉과 곽거병묘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묘 앞에 세워 놓았던 석각들이다. 말.소.호랑이 등 14개의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은 높이는 실물과 비슷하며 흉노의 조각상도 선명하고 정교하다. 곰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의 조각도 있는데 생생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섬서역사박물관
섬서역사박물관은 1991년6월에 개관하였다.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전체규모가 5만6천평방미터에 달하여, 기존의 섬서성박물관과 함양시박물관에 있던 유물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중앙 홀에 당나라 고조의 릉에서 나온 돌사자상이 서 있고 섬서성의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황토고원과 황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실은 중국역사의 흐름을 따라 3곳을 나뉘어져 있다. 전시제1층은 선사시대와 주.진시대의 유물, 2층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 3층 은 수. 당과 송. 원.명.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13개 왕조가 섬서성에 수도를 정했던 만큼 전시실에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당나라 때 유물들은 다른 박물관에선 관람하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이다.
선사시대 전시실에는 1964년 남전현에서 발견된 남전원인유골의 머리부분과 기원전 7천년전부터 5천년 간 계속된 앙소문화을 대표하는 반파유적지에서 나온 그릇과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나라 전시실에는 갑골문자와 제사 때 사용하던 향로가 만이 남아 있어 제정일치사회였던 주나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당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워 그것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점을 쳐서 그 결과를 껍데기에 뒷면에 적어 놓았는데, 이 때 사용한 글자가 바로 갑골문자이다. 그 외에 보온을 위해 가운데를 비워 만든 벽돌들, 지배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그릇, 동경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주나라 유물고운데 멸종되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개껍질이 전시되어 있어 역사.생물학적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진나라 전시실에는 진시황 병마용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농업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인공하을 만들어 농업생산량 개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나라전시실에서 주목할 말한 유물은 한 고조의 옥쇄와 함양시박물관에서 볼 수 있덩던 양가만한묘의 채색병마용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특별하게 유명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지배체제의 원할한 통치와 사회안정을 위해 종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불교 도교 등 종교관련유물이 많다.
당나라 시대 유물 중에서는 영태공주묘,장회태자묘,의덕태자묘 등에서 출토된 궁녀도와 영빈도, 궐루의장도등의 커다란 채색벽화, 그리고 당삼채,삼채용등이 유명하다.
비림박물관
무제는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전한의 7번째 황제이다. 그는 자주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 사업과 운하 굴착 등의 사업을 벌임으로써 민생에 힘쓰고, 모자라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최초로 소금.철.술의 전매제도를 만드는 등 세제를 보정하였다. 고관대작의 자제를 임용하던 관례를 깨고 유학을 교학으로 삼아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박사관제자원중에서 관리를 발탁하여 전제적 관료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써 동쪽으로는 고조건을 치고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철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다. 오월국에 파견했던 장건에 의해 서역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무제는 북방의 흉노등을 토벌함으로써 유목 민족들에 의해 막혀 있던 동서 교통로를 열었고 서역과 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무제는 민생에도 힘을 쏟았지만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데도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부터 53년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건축하였는데 매년 전국에서 걷어들이는 세금의 3분의 1을 무릉 건설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무릉은 전한 시대 황제의 9개 능중에서 가장 커 높이는 46.5미터, 아랫부분의 길이는 동서231미터,남북으로는 234미터에 이른다. 한나라의 장안은 지금의 서안시와는 경계가 달랐다. 당시의 장안은 서안 서북쪽 장락궁과 미앙궁의 유적지 주변이었는데, 무릉이 위치한 자리는 이 한나라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에 위치했다.
무릉에서 동으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곽거병묘와 무릉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곽거병은 무제 때 용맹하게 활동했던 명장이다. 무제의 황후인 위황후의 조카로 기원전 123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올랐으며 흉노를 진압하고 곤륜산 하서 지방을 빼앗아 실크로드 개통의 주역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곽거병묘 봉분 앞쪽에 위치한 무릉 박물관에는 무릉과 곽거병묘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묘 앞에 세워 놓았던 석각들이다. 말.소.호랑이 등 14개의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은 높이는 실물과 비슷하며 흉노의 조각상도 선명하고 정교하다. 곰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의 조각도 있는데 생생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섬서역사박물관
섬서역사박물관은 1991년6월에 개관하였다.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전체규모가 5만6천평방미터에 달하여, 기존의 섬서성박물관과 함양시박물관에 있던 유물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중앙 홀에 당나라 고조의 릉에서 나온 돌사자상이 서 있고 섬서성의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황토고원과 황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실은 중국역사의 흐름을 따라 3곳을 나뉘어져 있다. 전시제1층은 선사시대와 주.진시대의 유물, 2층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 3층 은 수. 당과 송. 원.명.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13개 왕조가 섬서성에 수도를 정했던 만큼 전시실에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당나라 때 유물들은 다른 박물관에선 관람하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이다.
선사시대 전시실에는 1964년 남전현에서 발견된 남전원인유골의 머리부분과 기원전 7천년전부터 5천년 간 계속된 앙소문화을 대표하는 반파유적지에서 나온 그릇과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나라 전시실에는 갑골문자와 제사 때 사용하던 향로가 만이 남아 있어 제정일치사회였던 주나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당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워 그것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점을 쳐서 그 결과를 껍데기에 뒷면에 적어 놓았는데, 이 때 사용한 글자가 바로 갑골문자이다. 그 외에 보온을 위해 가운데를 비워 만든 벽돌들, 지배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그릇, 동경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주나라 유물고운데 멸종되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개껍질이 전시되어 있어 역사.생물학적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진나라 전시실에는 진시황 병마용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농업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인공하을 만들어 농업생산량 개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나라전시실에서 주목할 말한 유물은 한 고조의 옥쇄와 함양시박물관에서 볼 수 있덩던 양가만한묘의 채색병마용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특별하게 유명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지배체제의 원할한 통치와 사회안정을 위해 종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불교 도교 등 종교관련유물이 많다.
당나라 시대 유물 중에서는 영태공주묘,장회태자묘,의덕태자묘 등에서 출토된 궁녀도와 영빈도, 궐루의장도등의 커다란 채색벽화, 그리고 당삼채,삼채용등이 유명하다.
비림박물관
서안에는 중국의 여타 도시와 다르게 비석들만 모아 놓은 비림박물관이 있다. 원래 공자문묘였던 곳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입구에는 공자문묘 특유의 호수와 돌다리가 놓여 있다.
중국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공자문묘는 지명도나 규모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가장 높은 등급의 문묘는 공자의 고향에 있는 것으로 원형의 호수가 놓여 있다. 그에 비해 이곳의 문묘는 등급이 높지 못해 반원형의 호수를 두고 있으며, 공자를 존중하기 위해 불교사찰과는 반대로 문을 동서로 만들어 놓았다.
문묘로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 세 갈로 나뉘어 있는데,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길이 달랐다. 가운데의 가장 큰 길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과 직위가 높은 고관대작, 동쪽길은 향불을 가지고 가는 제관, 서쪽길은 낮은 직위의 유생들이 사용하였다.
호수 위의 돌다리를 건너 문을 들어서면 길 양쪽에 늘어선 정루와 조각상을 볼수 있다. 이 조각상들은 말과 낙타의 고삐를 묶던 말뚝으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에 가까이 왔는데 아직도 고삐자국이 남아 있다.
정루 안에는 황제가 쓴 공덕비가 들어 있다. 문의 동쪽에 위치한 정자에는 서안 시내의 종루에 달려 있던 경운종을 옮겨다 놓았다. 서쪽 정자에는 석마 한필이 놓여 있는데 이는 흉노의 한 파벌인 대하족을 서안을 지배할 때 남긴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 입구의 현판을 잘 들어다 보면 '비'에 점하나가 없는 것이 보인다. 이 현판은 청나라 때 아편을 싣고 온 영국 선박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부른 임측서가 전쟁이 화친으로 돌아서면서 전쟁도발자로 몰려 신장위구르지역으로 유배 갈 때 쓴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풀려 오는 길에 나머지 점하나를 찍겠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는 바람에 끝내 글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비림의 입구에는 비림에서 가장 큰 규묘라고 자랑하는 석태효경이 우뚝 서 있다. 745년 당나라 현종이 친필로 효경(공자와 그의 제자인 증자가 효대 대해 나눈 문답을 적은 경서)을 적은 것을 비석에 새긴 것이다.
제1실의 개성석경은 873년 당나라 때 114개의 석판에 65만여자를 사용하여 주역.상서.시경등의 12개 경정을 새긴 것으로 국자감태학에 있었다. 12개의 경전을 영원히 보관하려는 뜻에서 돌에다 새겼으며,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전을 필사하여 공부하던 유생들이 이 석판을 견본 삼아 자신의 실사본이 틀린 곳이 없는지 비교하곤 했다고 한다. 제2실에는 당나라의 이름난 서예가 안진경이 쓴 안씨 가문의 족보를 비석에 새긴 안씨가묘비와왕휘지의 글씨를 볼 수 있는 대당삼장지효서비가 유명하다.
당나라 때에 만든 당대삼장지효서비는 삼장법사의불교경전을 새긴 것인데, 서진 때 문필가인 왕휘지가 글씨로 집자하기 위해 전국에 공문을 보내고 글씨 한 자를 찾는데 일천금을 내 걸었다는 믿기 어려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 3실에는 한나부터 북송, 위진남북조 시대까지의 비석과 묘지명을 모아 놓았다. 이곳에는 또한 장욱이 초서로 쓴 '천자문비'가 있다. 초서는 이백과 더불어 장안의 2대괴물로 불리던 광초화초가 창안한 글씨이다. 술을 안 마시면 글씨를 못 쓰는 화초가 어느날 술에 취하자 자기 머리를 풀어서 갈겨 쓴 글씨가 초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제 4,5,6실에는 원,명,청대의 비석들이 있다. 6실에는 탁본실이 있다.
함양박물관
서안에서 28킬로 떨어진 함양시에 위치한 함양시박물관은 과거 명나라 때 공자문묘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제일 유명한 문물은 도량형 통일의 기준이 되었던 안읍하관종과 한나라 양가만한묘에서 출토된 채색병마용이다.
진시황은 중국 국토만 통일 한 것이 아니라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 시켰는데, 제1실에 있는 안읍하관종은 전국시대 위나라 때 물건으로 후에 진시황이 곡물에 넣으면 13두가 한 말의 크기로 나온다. 제2,3실에는 진나라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진시황이 세운 함양궁의 건축재료와 배수시설도 볼 수 있는데, 3층으로 만들어진 함양궁은 항우에게 함락된후 다 파괴되어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후 철제품과 병기를 다 수거하여 녹였는데, 쇳덩어리 중 형태가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어 함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3실에는 전리품과 화폐가 있다.
제5,6실에는 1965년 양가만한묘에서 출토된 채색 병마용이 있다. 이 곳에 출토된 병마용과 은 하나의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다.
반파유적박물관
반파유적지는 신석기 문화 중의 하나인 앙소문화의 유적지로 지금으로부터 7천년전에 존재 했던 모계씨족사회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21년에 발견되어 주거 유적46개,가축우리2개,성인묘174개,유아 묘인 옹관73개, 도기제작장6개,부장물품2백여점 등이 발굴 되었다. 1953년 반파유적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물관 제1실에는 석기.어구,뼈바늘등의 주요 생산용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마제석기와 주요 생산용구의 정교한 모습,토기에 그려져 있는 예술적이고 추상적인 문양으로 미루어 볼 때 물질적.정신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3실은 반파유적지 위에 건물을 올려 신석기인들의 주거환경과 사회생활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곳이다. 마을을 경계는 참호를 파 들짐승이나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았다. 마을 북쪽 가장자리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안쪽으로는 가축들을 키우던 축사가, 중앙에는 사람들이 주거지가 있다. 신석기인들의 집은 지하와 반지하,지상을 아우르며 나름의 필요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지어지고 모양 또한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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