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민족 - 위구르(Uygyr)
위구르의 의미
위구르라는 이름은 8세기에 몽골리아에서 흑해까지 돌궐제국이 확장될 때 투르크계 우목민족 명으로 나타나느데 그 뜻은 '연맹.군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11세기의 유명한 카라한시대의 언어.역사학자 메흐무트 카쉬카리가 쓴 '돌궐어대사전'에서 위구르란 이름의 의미는 '강하다, 용맹하다,'등의 의미라고 해설을 하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카쉬카리의 해석을 믿고 신뢰하며 그렇게 스스로 믿고 있다. 언어학을 연구하는 위구르학자들은 카쉬카리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북위시대(384-534)에는 高車(중국식 발음으로는 Gaoche 까오쳐 라고 읽는다. 이 고차라고 하는 이름은 '높은 차를 탄 사람들'이라는 의미로서 위구르어로는 '캉키'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와 유목사회에서는 가장먼저 마차를 탄 사람들이 위구르인들이라고 한다.), 수나라 때에는 외이허, 당나라 때에는 回 (후이허), 송나와 원나라시대에는 외이우얼, 지금도 외이우얼(중국인들은 이렇게 부른다.) 이것은 중국어 음역의 한계로 다른 이름들을 원음과 같게 옮기기 못한다.
위구르인들은 이리가 민족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대표적인 靈山 설화에도 이리는 특별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설황에서 이리는 국가에 은총과 행운을 주는 성스러운 바위가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 환란 속에서 방항하는 위구르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존재로 묘사 되고 있다.
톨라위구르
위구르인들은 흉노의 먼 후손이며 직접적인 조상은 툇뢰스부족연맹에 속해 있는 일개 부족이었다. 퇴뢰스는 중국의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돌궐과는 계속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 외에 이 부족연맹에 대해서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퇴뢰스부족연맹이 7세기 와해됨으로서 위구르부족은 셀렝가 강 상류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 할 수 있었다. 위구르부족장은 에르킨이라고 불렀다. 위구르부족이 강성해진 후에는 지도자의 칭호를 일테브르라고 불렀다. 부족국가의 수도를 톨라강변 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구르는 당시 돌궐제국 내부의 분란을 조심스럽게 이용하여 641년 경에는 이미 동부 스텝지역의 상당한 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일테브르토미토의 통치시대에는 타르두스지역을 통합하여 토쿠즈오구즈(9성오구즈)연맹을 주도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위구르는 656년에는 온옥(열개의 화살)을 제압하고 타쉬켄트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8세기초에 위구르와 토쿠즈오구즈는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쿠즈오구즈연맹은 독립을 상실한 후에도 소멸되거나 와해되지 않았다. 후에 동부 스텝지역에 돌자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중국과 우호관계를 가짐으로써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오르혼위구르왕조
위구르부족은 돌궐제국의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돌궐제국을 공략하였다. 745년 바스밀과 카르룩과 연합하여 돌궐을 물리치고 지금의 몽골리아의 외트켄을 중심으로 오르혼위구르국가를 건설한다. 곧이어 위구르는 동맹부족이며 경쟁세력인 카르룩을 서부 스텝지역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국가는 위구르부족이 9개 부족연맹을 통합하여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온위구르(열위구르)라고 불리웠다. 흔히 오르혼제국이라고 하는 제국이 바로 이 제국이다. 이 제국은 수 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가면서 13세기까지 위구르국가로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골력배라 통치시대에 위구르제국은 그 세력을 크게 팽창해 나갔으며 그래서 골력배라는 쿠트룩 빌게 퀼 카간 이라는 황제의 칭호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후에 카라발가순에 도읍을 정하고 동부스텝지역 통를 강화해 갔으며 745년에는 중국의 당나라로 부터 화인카간이라는 칭호을 얻게 된다.
위구르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하였으며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까지도 한다.
쿠트룩빌게퀼카간의 아들 모옌쵸르 통치시대에는 위구르제국의 영토카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추강, 탈라스 등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휘하는 당나라와 아랍압바스왕조 사이에 발생한 전쟁에서 위구르는 당과 연합하였지만 실패하고 당은 파미르와 서부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었으며 점차 투르크민족과 신장지역에 이슬람이 들어도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오르혼위구르제국은 거의 1세기 동안 동부스텝지역를 지배하였고 최전성기 때에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 이른다. 그러나 위구르제국은 천연재해와 크르그스,카르룩,토번등의 공격을 받고 840년에 분산이 된다.
당시 오르혼위구르제국의 왕들의 비석들이 지금 몽골리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비석들에는 오르혼제국의 왕들 자신들이 돌궐의 후손이며 돌궐제국을 계승하고 있다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타부카치 카간'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타부가치라는 말은 흉노와 돌궐의 피을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의 이세민(당태종)의 경우도 타부가치출신인 것을 우리늘 알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형제국가의 왕이라고 대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당이 세력을 떨치기는 했지만 우목제국인 위구르제국과 돌궐제국의 관념에는 모두 형제로 대하고 있다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
왕국이 분열되고 남쪽으로 내려온 위구르인들은 당나라군대에 의해서 토벌이 된다. 또한 부분은 천산산맥의 북쪽의 베시바륵(5개의 도시)의 하나인 투르판을 거점으로 위구르왕국을 건설한다. 이를 이드쿠트위구르왕조 혹은 쿠추위구르왕조등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중국의 사료에서는 서주(서쪽에 있는 하나의 주 정도로 쓰여지고 있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시대에는 불교와 마니교, 경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가 성행하였으며 일부 이슬람의 영향도 나타난다. 특히 이슬람이 위구르인들을 통해서 중국에 전해졌는데 중국이름으로는 回 (후이허-회골)이라는 을 본따서 回敎 혹은 回回敎라고 불려지게 된다.
바르츈 테킨 이드쿠트의 통치시기에 거란족의 카라크타이(서요-카라크탄)에 예속되었다가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에 들어가게 된다.
카라한왕조
카라한은 552년에 세워진 쾨투르크왕조, 745년에 세워진 오르혼위구르왕조우에 투르크부족들이 서역에 세워진 영역이 방대한 문화면에서 이전의 왕조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긴 시대를 통치한 왕조이다. 현대에 카라한왕조가 어떤 부족이 세웠는지에 대한 어떠한 것에 대해서 위구르, 카르룩, 치길, 투루크, 투르크맨, 카르룩-야그미, 카르룩야그마 토쿠즈오구즈등이 세웠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지금 이 주장들이 첨예한 갈등으로 대두되고 있다.
중국어와 무슬림역사문헌들에 의하면 카라한왕조를 야그마부족이 세웠다라는 주장이 역사자료들에서 비교적 우세하다.
고대 중국어자료들에는 야그마부족은 오르혼위구르왕조시대에 중요한 역할를 하였다. 840년 위구르왕조가 멸망한 다음 사르친보이룩과 판테킨이 지도하는 15개부족은 알타이산맥과 예떼수 지역을 지나서 스르, 탈라스강유역을 중심으로한 카르룩지역에 이동했을 때 이 제일 처음 지역에 왔던 부족으로 알려진다. 이슬람역사에 의하면 9세기에 야그마부족은 지금의 중앙아시아의 나린강의 남부에 이동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자기들 안에서 강성함으로 카르룩왕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많은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이스람력 256년(870년)에 야르라부적은 크게 강성하여서 카르룩통치에 도움을 주고 서쪽의 이슬람 사마니왕조(875-999년)과 전쟁을 하고 점차 지금의 악수지역 서쪽, 카쉬카르의 남쪽, 파미르산맥의 동쪽과 서쪽지역를 차지하고 이 지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880년 야그마부족은 발라사군을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카르룩 바이구들은 완전히 야그마부족들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다.
그러나 야그마부족은 자기영향을 더욱더 넓히기 위해서 모든 카르룩왕조의 이름으로 일을 더 크게 하였다. 그는 사마니오아조에게 대하여 많은 전쟁도 바로 이 카르룩왕조의 이름을로 하였다. 11세기에 에불폰투흐 압둘구푸르 휘세인엘엘마이가 쓴 역사 <<카시게르>>(이 책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와 14세기포에 자말카르시가 쓴 <<물히카툴 술라흐>>라는 이름의 사전과 <<역사 카시게르>>라는 책의 서문에 쓰여진 자료에 의하면 9세기말중간에 야그마부족들의 지도자인 빌게쾰카드리한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880년 발라사군의 카르룩왕조의 실체권한을 가지고 큰아들인 바르테킨게(바즈르 테킨게)는 위구르식 칭호로 "아르슬란한"이라는 이름을 주고 발라사군을 관리하는 권한을 주었고 작은 아들인 오골착 테킨은 원래 "카드르한"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야그마 종족의 칭호인 "부그라한"이라는 이름을 주고 탈라스을 관리하는 권한을 주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초기에 오굴착 카드르한은 바지르 아르슬란한의 관리에 있었다. 893년 사마니(사만조)왕조의 왕자인 이스마일빈니 에흐매트는 큰 세력으로 탈라스에 공격을 해서 오굴착카드르한의 왕비와 1만5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오굴착카드리한은 탈라스에서 카쉬카르에 도망와서 이 곳을 중심으로 사만조에 대해서 세로운 전쟁을 준비하였다. 914년 바지르아르슬란한은 바라사군에서 죽었다. 카르룩왕조의 정권을 기회를 잡고 발라사군의 야그마정권을 학살하고 빼앗겼던 권한을 다시 빼앗았다. 발라사군과 그 주변의 야그마부족들은 무리무리를 지어서 카쉬카르주변에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오굴착카드르한의 깃발아래에 모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바지르 아르슬란한의 큰아들(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았다.)은 카르룩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서 그의 아직 어린 작은 아들인 사툭테킨(사루르테킨)은 다른 야그마정권과 함께 카쉬카르에 도망와서 삼촌인 오굴착 카드한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913년에 사만조의 궁중에서도 많은 정변이 일어났다. 사마니의 자손들인 에보 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는 아버지인 에흐매트빈니이스마일의 사망을 기회로 왕좌를 물려받았을 때 동생인 에부나시르사만니를 다른나라로 보냈다. 궁중의 정변은 더욱더 거세지면서 이 투쟁 기간에 사마니들에게 정복당한 사마르칸트 마니교도 위구르인들은 에부사시르사마니를 지지하고 나시르빈니에흐메트에게 대항하는 하였다. 사시르빈니에흐메트는 부하라에서 큰 군대를 보내서 마니교도 위구르인들을 제어하고 500명이 넘는 마니승려들을 학살했다.
에브네스르사마니는 카쉬카르에 도망해서 오굴차카드르한의 보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이 유혈사건은 당시에 온 서역위구르인들의 주의를 끌게 하였다. 고굴착카드리한은 에부나스르사마니에게 큰 특권을 주고 그를 아투시에 배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투르판이드쿼도 에부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에게 편지를 서서 "우리나라의 무슬림들은 당신들의 나라의 무슬림들 보다 세배나 많아서 만약에 당신이 이 마니를 죽이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모든 무슬림를 죽이겠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우리나라의 모든 무슬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오"라고 했다. 그러나 에부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 자기 정권의 위구르인들에게 대한 학살을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카르룩왕조의 다른 위구르부족들을 계속해서 압제하고 이들의 이 곳의 영향을 더욱더 제거하려 하였다.그러므로 이 지역의 위구르인들의 한 부분은 서북쪽으로 가서 아랄호주변의 동포들인 오구즈들 안으로 도망가서 이들과 합쳐졌고 오구즈왕조를 세우게 된다. 또 한 부분은 카쉬카르주변에 이동해서 오굴착카드리한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르므로 오굴착카드리한의 권한은 더욱 커지고 원래 야그마부족의 가장높은 칭호인 아르슬란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그라한"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를 하기 시작하고 사툭테킨도 변방으로 보내고 이들의 중심권력으로부터 멀리 보내고 통치권한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바로 이 상황에서 사툭테킨는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사투시에 와서 이곳의 에부니스르사마니의 설명으로 인해 이슬람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사툭테킨은 다시 "아둘키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기 시작하였다. 사툭테킨과 삼촌인 오굴착카드르한간에 대립이 날로 거세지게 되었다. 932년 사툭테킨은 40명의 선봉대인 친구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이끌고 카쉬카르에 들어가서 공격을 시작하여서 오굴착카드르한의 모든 권속들을 학살하고 자기를 "부그라한"이라고 공포하고 야그마왕조의 보좌를 빼앗는다. 이때부터 사툭부그라한는 맹렬한 기세로 카쉬카르와 그 주변의 야그마와 이 밖에 위구르부족들을 모두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고 이들을 이슬람을 신봉하게 하고 이 종교를 국가종교라고 공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예켄의 서북쪽과 악수강의 서쪽등지의 영토와 이 곳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모두 사툭부그라한의 수하에 들어왔다.
942년 자기와 에부네스르사마니의 아들인 에부페트타흐가 지휘를 한 군대와 투르카트다완이십과 나린강의 남부쪽을 차지했다. 후에 다시 급습을 해서 발라사군을 정복하고 카르룩왕조를 명망시킨다. 그로부터 자기를 다시 "카라한"(위대한 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다른 자료들에서는 사툭부크라한은 이 시기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된다.) 그는 그후에 "술탄 사툭부그라카라한 압룰키림"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위구르 야그마부족들이 세운 첫 번째 이슬람국고가 카라한왕조가 출현한다.
그이 초기 수도는 카쉬카르로 이 시기에 오르다켄트(궁정이 있는 도시)라고 불렀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과 국외역사자료들에서 술탄사툭부구르한이 세운 이 왕조는 여러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예를들면 메흐뭍카쉬카리가 쓴 돌궐어대사전에서 하카니에(왕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에 보면 하카니에(왕조)라는 말은 단지 카라한왕조의 중심이었던 지역인 카쉬카르주변을 가리킨다.
카라한학자들은 "카라한" 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강한", "용맹한", "위대한", "고상한"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의 견해는 카라한왕조의 통치는 고대투르키언어(위구르어)에서 위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로 이 말를 자기의 칭호로 사용한 것 외에도 이들은 오르혼위구르왕조시대에 명예를 얻었던 처음카간인 퀼빌게카간후에 이 왕조의 기초을 놓았으며 이 찬란한 시대를 살았던 조상인 모윤츄르카라카간(747-759)를 기념하고 자기의 새로 세운 왕조를 바로 이 오르혼위구르왕조의 계승으로 보았던 것을 의미하고 지지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술탄 사툭부그라한 조상들은 오르혼유역세서 이동해 와서 가장 초기에 정착하였다. 발라사군를 차지한 다음 자기를 "카라한"이라고 공포했다.
카라한왕조는 술탄부그라한(937-955), 무사부그라한(955-992), 하룬부그라한(992-998년)시대에 가장 융성한 발달을 했던 시대이다.
이처럼 카라한 왕조는 이슬람을 받아 들이고 이슬람의 종교이념에 의해서 국가를 운영하게 된다. 카라한왕조의 수도는 카쉬카르와 발라산군이라는 두 도시인데 카쉬카르는 당시에 수학,천문학,물리학,지리학,철학 등이 당시 그리이스와 로마의 가장 선진사상들과 동시대에 연구되어 졌으며 교류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1세기 이후에는 이슬람람 학교가 카쉬카르와 부하라에 세워진다. 그러므로 중세 카라한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양대산맥은 카쉬카르의 이드카모스크와 부하라의 모스크는 이러한 이슬람학교의 역할을 한다.
당시에 유명한 학자로 후세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메흐무트카쉬카리와 위숲하스하집이라는 학자이다. 모두다 집권층에 배경을 두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왕조의 통치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다.
메흐뭍카쉬카리
메흐뭍빈니휘세인메흐뭍카쉬카리는 1020년에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카쉬카르의 아직(지금의 토쿠작현의 오팔)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메흐뭍카쉬카리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자료는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의 유명한 돌궐어대사전이라는 작품에 기술되어진 자료들에 근거하여 그가 카라한왕조의 왕인 술탄사툭부그라한의 두 번째 아들 술라이만투간일릭한의 자손 즉 후에 카라한왕조에서 형성된 헤센파의 대표격인 하룬부그라한에우왈의 증손자이다.
역사문헌들에 의하면 그의조상인 술라이만투간일릭한은 원래 이씩호수의 남부의 바르스한(도시)의 책임자였다. 그는 992년 그의 아들인 하룬부그라한이 왕좌에 오르고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카쉬카르에서 발라사군에 이동했으며 그의 큰아들인 위수프카디르한에게(위수프빈니엘헤센하룬카디르한)에게 탐가치부그라한 이라는 칭호를 주었으며 카쉬카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후에 술라이만투간일릭한 가족은 가르스한에서 카쉬카르에 이동해 와서 지금의 오팔지역의 아직에 살게 되었다.
아직은 이 시기에 카라한의 궁정사람들의 기거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위수프카디르한의 두 번째 아들인 무헴메트위수프는 이러므로 그의 아버지와 무헴메트빈니위수프의 크아들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는 바로 이 아직에서 태어났다.
휘세인빈니무헴메트는 아직과 카쉬카르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연구한 학자였다. 그러므로 1024년 위수프카디르한이 카라한의 왕좌에 오르고 난 후 그는 궁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그는 바로 이 해를 앞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과 소학교들을 카쉬카르에서 배웠다. 1042년에 카라한의 두 개로 나뉘고 나서 동카라한왕조의 카라한인 술라이만아르슬란한(위수프카디르한의 큰아들)은 메흐뭍카쉬카리의 아버지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를 바르스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메흐뭍카쉬라키도 아버니와 함깨 가서 바르스한과 발라사군에서 각종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1056년 술라이만아르슬란한과 탈라스와 이스피잡지역의 책임자인 동생인 휘세인우수프간에 심한 갈등이 생겼다. 술라이만아르슬란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서 죽게 되었다. 무함메트빈니위수프는 카라한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지만 15개월 이후에 자기의 자리를 큰아들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에게 물려주었다. 이 일은 무헴메트빈니위수프의 왕후간에 갈등을 초래했다. 그는 그의 작은 왕후는 무헴메트빈니위수프와 아들빈니무헴메트을 권속들과 함께 독약을 먹여서 죽이고 그의 아들인 이브라힘빈니무헴메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유혈사건은 오직 휘세인빈니무헴메트의 아들 메흐뭍카쉬카리가만 도망가서 먼저는 부하라에 가서 후에 이샤푸르를 통해서 아랍압바스의 수도인 바그다드에 가서 피난을 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바르사간에 간 후에 한동안 오구즈와 투르크맨, 치길, 크르그즈등 다른 부족들이 언어와 역사, 문화, 지리, 의학등과 그밖에 상황들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바그다드에 간 후에 1072년 세계적인명작인 돌궐어대사전을 쓰기시작하고 1074년에 마쳤으며 이 시기에 아랍압바스의 헬립(왕-이슬람의 학자)인 에부하심압둘라빈니무크테드에게(1975-1094) 선물을 한다. 그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또 투르크언어의 조업법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이 작품은 우리의 세대에게 남겨지지가 않았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그는 1080년 사망했다고 한다.
위숲하스하집
역사문헌에 의하면 그는 1015-1016년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라발사군에 한 부자집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발라사군에서 지냈다. 1042년 카라한왕조가 두 개로 분열되고 나서 서카라한(일릭한)과 동카라한의 중간에서 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한동안 발라사군의 정치국면은 아주 급박하게 되었다. 특히 동카라한의 통치권력타툼으로 심한유혈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일은 발라사군에 집중 되어 있었던 학자들과 이슬람학자들의 평화를 깨고 그들을 카쉬카르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카쉬카르에서 상주하는 탐가치부그라하룬엘헤센빈니술라이만의 많은 학자들을 자기에게 흡수하고 이들의 창조활동을 위해서 좋은 조건들을 준비해 주었다.
위숲하스하집은 바로 이 시기에 발라사군에서 카쉬카르로 왔다고 본다. 그가 카쉬카르에 와서 그의 저명한 작품이 쿠타그구빌릭(행복을 가져다주는 지식)을 쓰기 시작한다. (1069-1070년) 18개월에 걸쳐서 마무리를 했다고 전한다.
자기의 작품에서 자기 자신이 50이 넘어서 이 글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엘헤센빈니술라이만카라한(1074-1130)에게 선물을 했다. 이 작품은 카라한왕조시대와 카라한왕조만의 독특한 문학임과 동시에 카라한왕조시대의 사화와 이데올로기, 사상, 철학, 정치와 사회도덕등의 문제들을 기술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작품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정직의 상징에 속한 퀸투그디(해가 뜨다)와 행복의 상징인 달이 차다, 지혜의 상징, 만족의 상징등의 4개의 인물형상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작품은 1439년 카라사일이라는 책의 고대위구르문자(토쿠즈오구즈문자) 으로 옮겨 쓴 위나본(혹은 에라트본)과 아랍문자로 옮겨 적은 카히르본과 엔멘간본등의 세 가지 본이 있다.
이작품은 카라한왕조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기여한 공로가 클 뿐 아니라 19-20세기의 세계의 학자들의 주목들 받고 있다. 프랑스학자인 자우프라트암비드는 1823년 이 작품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어와 독일어, 터키어, 우즈벡어와 현대위구르어들으로 번역이 되었다.
카라한왕조 13세기 이후에 몽골제국에 편입되면서 몽골제국의 차카타이왕조가 서게 되는데 차카타이왕조는 카라한이 지배한 대부분의 영토와 이드쿠트위구르왕조의 모든 부분을 어우르게 된다.
차가타이왕조
카가타이우루스는 1224년 칭기스한이 자기에게 속한 모든 영토들을 자기 아들들에게 분할준 다음에 형성이 되었다.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영토들은 일리강의 상류, 발카시호수의 남부의 예떼수자역,제이훈(아무)강까지에 이르는 마와라운네히르지역과 위구르이드쿠트왕조에게 속한 퀴센(쿠차)지역까지였다. 차가타이우루시의 정치중심은 지금의 서부타림분지와 그의 주변의 지역인 코르가스현에 속한 알마륵이였다. 차가타이왕조는 어떤 때에는 또 카야시에 있기도 하였다. 이 알마륵과 카야시의 주변에 나무로 담을 만들어서 이 곳에 각종 야생동물들을 몰아서 사냥을 하였다.
사료들에 보면 차가타이한은 법집행에 있어서 엄격하였으며 국가의 정치와 행정,군사제도들에도 스스로 엄하게 지켰으며 자기아래 관리들에게도 엄격한 요구를 하였던 하나의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칭기스한이 살아있었던 때에 국가법집행을 그의 관할에서 관리하였다.
차가타이한은 자기에게 분할된 우루스을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중앙아시아의 투그크스탄과 아와라운네히르지역을 외르겐사람(어떤 자료에는 하레즘사람)인 상인 메흐무트 얄라와치을 통해서 다스렸다. 지금의 타림분지의 서부를 중심으로 한 망라이쉬예르지역을 몽골 도그라트부족을 통해서 다스렸다. 이드쿠트지역은 이드쿠트정권을 통해서 다스렸다.
메흐무트얄라와치는 일찍부터 칭기스한에게 복속되었다. 1219년-1222년에 칭기스한는 서역에 공격을 하고 부하라,하레즘지역을 복속하고 메흐무트야라와치를 마와라운네히르지역의 아루타치에 임명하고 이 지역의 행정과 경제등을 맡아 하게 하였다.
1224년 차가타이우루시가 형성되고 나서 메흐무트 야라와치는 차가타이한의 중신의 자리에 있었으며 마와라운네히르지역 특히 하레즘과 부라하의 최고통치기구의 대표로 있었다. 그는 항상 호젠트(지금의 타직크스탄에 속한지역)에서 살았으며 정해진 시간이나 어떤 일들이 발생을 하면 알마륵혹은 카야스에 가서 차가타이한과 대사를 이야기 하였다. 1221년 차가타이한의 동생인 왹타이한이 몽골제국의 카간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 그의 자리를 다시금 견고히 하였다.
그러나 1238년 부하라에서 3일길쯤 되는 타랍마을에서 무함메트타라비가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메흐무트야라와치의 무거운 통치로 인해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차가타이한은 그의 자리에서 해직을 하고 그의 아들 아스우트아랴와치를 다루가치로 임명을 했다. 매흐무트야라와치는 왹타이한의 명에 의해서 한바륵(지금의 북경)에 세금을 보내는 일을 하였으며 1254년 이 곳에서 죽었다. 의 아들 메스우트야라와치는 마우라운네히르지역의 다루가치의 임무을 하기 위해서 카라구차(위구르 이드쿠트왕조),비시바륵,호텐,케시케르,알마륵,헤이얄(지금의 바이카시호수의 남부),세메르칸트,,부하라와 제이훈(아무)강유역등지의 무슬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임무를 1289년 자기가 죽기까지 계속했었다.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망라이쉬에르지역은 동쪽에 타르-뷔귀르(지금의 뷔귀르),퀴센(쿠차),서쪽으로는 페르가네분지와 베데흐샨 북쪽으로는 이식쾰(이식호수) 남으로는 체르첸등지가 속해 있었다. 망라이쉬에르라는 말은 압탑로이(태양이 떠오르는 방향,동쪽)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은 차가타이우루시의 동쪽부분이다. 이 지역의 주민은 주로 위구르와 다른 투르크부족들이었다. 쿠차지역에서 카물(지금의 쿠물)와 지금의 감숙성의 가욕관성까지에 이르는 곳은 위구르이드쿠트왕조에 속해 있었으며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망라이쉬에르지역의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
망라이에르지역의 첫 번째 통치는 몽골도그라트부족의 족장이 오르툽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항상 악수(지금의 악수 퀸세헤르현)에 거주하였다. 사료들에 보면 도그라트부족은 원래 지금의 오눈강의 남부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칭기스한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돔나이한의 8대부단자르의 손이다.
도그라트부족은 원래 몽골테이투트(테이트)부족과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1201년 칭기스한은 테이투트부족에게 공격을 할 때에 고구라트부족이 자원해서 칭기스한에게 복속되었으며 칭기스한이 서역에 팽창전쟁을 할 때에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카라차르누얀이 이끄는 많은 두그라트종족들은 차가타이한군대와 수누타이군대에게 속해서 전쟁을 했으며 망라이에르지역을 차지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두그라트부족은 바이다간과 그의 아들 오르툽의 지휘아래 망라이에르지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차가타이한은 도그라트부족에 대한 신임이 컷다. 도그라투부족도 몽골제국과 차가타이우루시의 권위에 대해서 아주 복종적으로 따랐다.
1238년 부라하의 메흐무트타라비가 봉기를 일으키고나서 차가타이한은 도그라트부족의 자리를 더욱더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 부족장인 오르탑의 관직을 높여서 자에게 자기의 가장 높은 관리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도그라트부족도 차가타이우루시에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는 지금의 악수퀸세헤르,마랄비시,케시케르,예켄,메키트,호텐등지에 많은 헤니예(국가와 관리들이 차지하는 영토)와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와 우루시의 모든 세금과 법에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
차가타이한은 자기 통치시대에 망라이쉬에르지역이 아주 평온하게 지내었기 때문에 도그라트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몽골이 서역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 위구르이트쿠트왕조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슬람의 신봉하였다. 그러므로 이지역은 위구르,카르룩,야그마,캉리,투르크멘,크르그스,등 대부분투르크부족들과 타직부족의 땅이었다. 몽골이 서역지역에 왔을 때 이 곳에 부족들사회는 각기다른발전단계에 있었다. 타림유역,아무강,시르강지역의 또 다른 부족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봉건들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을 하였다. 예테수지역,텡으트타그와 파미르산맥주변의 부족들은 유목생활을 하였지만 이 부족들에는 파트르아르한봉건들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몽골귀족들이 서역에 왔을 때 아주 복잡한 사회관계를 보게 되었다. 특히 차가타이우루시의 상황는 아주 복잡하였다.
차가타이한과 그의 대표격인 메흐무트야라와치,메시우트야라와치그리고 오르탑도그라트등은 몽골군대들로 들로 인해서 황폐한 이곳을 빠르게 회복을 시켰다. 그러므로 몽골귀족들은의 현실적,정치적필요를 잘 채워주었다. 즉 이들은 먼저는 현지의 발전된 부족과 민족들의 전통통치제도을 실행하고 현지관리들을 신힘하고 이들을 자기의 통지의 협력자라고 하였다. 특히 현지 무슬림들는 종교신앙과 투르크이슬람문화의 복원 시키고 더욱더 발전시키는 것을 실행하였다. 특히 자기들도 이 정책을 강화하고 선전을 하였다. 예를 들면 메스우트야라와치가 다르구치를 맡고 있을 때 차가타이한의 허락을 얻어서 부하라,세메르켄트,타시켄트,외르겐치,호젠트등지에 많은 새로운 도시들과 성들을 건설하였다. 성벽들 주변에는 물고랑들을 만들과 새로운 경작지와 정원과 과실들을 심었다. 아무강과 시르강에 많은 물 고정을 건설하고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마우라운네히르지역의 파괴된 경제를 아주 빨리 발전시키고 차가타이우루시뿐만 아니라 모든 몽골제국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지역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 이주해온 몽골부족들도 점점 자기의 이전의 유목습관을 버리고 농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은 이들이 투르크와 되는 과정을 빠르게 했다.
특히 몽골인들의 이전의 바르라스,도그라트부족들은 빠르게 먼저 투르크민족들에게 동화되었다.
메스우트아라와치는자기의 60년 통치 과정에서 마우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1238년 다루가치가 되고 나서 차가타이한의 비준에 의해서 부하라와 카쉬카르에 메드리스에시우디에라는 이름의 두 개의 큰 학교을 세웠다. 부하라의 메드리스메스우디에는 1274년 에젬(이란)지역에서 온 몽골인들로부터 파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빠르게 회복을 시켰다. 1289년 메스우트야라와치가 죽었을 때 그의 묘는 바로 이 곳 부하라의 메드리스메스우디에에 놓여지게 되었다. 케시케르의 메스우디에메드리스는 하루하루 발전을 거듭하여서 마와라운네히르,망라이쉬에르 특히 이란에젬지역까지도 아주 유명한 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동쪽에 유명한 이 메드리세는 1388년 악삭테무르가 케시케르에 공격을 하던 때에 완전히 파괴가되었다.
차가타이우르시가 형성이 되고 나서 이 자역에 상업과 금융과 그 밖에 영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마와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들의 대외무역은 급속하게 발전을 하였다. 이전에 실크로드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몽골제국의 수도인 한바륵(북경)에서 카라쿠룸까지와 카라쿠롬에서 알타이산맥,이밀,알마륵을 통해서 사라이(지금의 카스피해의 북부아스트라한시의 주변)과 이 지역에서 유럽까지 통하는 북부실크로드와 고대실크로를 따라서 연결되는 남부실크로드가 다시 한번 흥황의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특히 메스우트야라와치는 부하라에 금융감독기관을 설치하고 금과 은과 동전을 관리하였다. 다른 사료들에 보면 이 돈들에는 아랍어와 중국어 문자가 쓰여졌다고 한다.
1224년 형성된 차가타이우루시는 짧은 시간에 마와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의 사회를 빠르게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을에 촉진시켰다. 그러므로 차가타이한은 효과적인 책략으로 이 지역에 한동한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 처럼 차가타이은 중앙아시아와 신장지역등 광범위한 통치를 하였으며 자신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으며 다른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겼던 통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차가타이와 그의 자손들이 직접 통치시기(1224-1309), 완전히 투르화된 사람들의 통치(1309-1348)과 무굴스탄(1348-1524)이 통치를 하게 되면 이들의 마지막 왕조는 예켄왕조(1514-1682)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차가타이는 자신이 무슬림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자기의 왕조의 모든 사람을 이슬람의 교훈에 의해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차가타이 이후에 그의 아들들은 여러 국가들을 세운는데 그중에 우즈벡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우즈벡왕조는 카라한때에는 카라한에 속하였으며 차가타이왕조때에는 차가타이에 속하면서 강하게 투르크성향을 간직하고 역사을 이어간다.
예켄왕조와 근대위구르
예켄왕조는 중국의 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예켄왕조가 무너지면서 신장은 청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 후에 청조는 철저하게 무슬림과 한족을 차별하여서 다스리게 된다. 이 때에 1862년 섬서와 감숙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투르크스탄의 코칸트에서 야쿱백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서 신장에 진격을 하였다. 신장에 진출을 노리고 있던 영국이 일을 지원하며 천산북로의 일리지방에 들어오려 하자,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1871년 일리에 군대를 파견하여 굴자를 점령한다. 당시에 야쿱백은 영국이 공급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재래식 무기를 무장한 청나라와 대항을 할 경우 청나라 군대가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청군이 코물까지 진격을 하면서 야쿱백과 협상을 하기로 하고 야쿱백진영을 안정시킨 다음 급습을 해서 야쿱백진영은 총 한발 못 쏘아 보고 무너지게 되어서 우름치.투르판.다반청.코르라등이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에 야쿱백은 코르라에서 갑작스런 변동으로 인해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아직도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이후에 카쉬카르를 중심으로 호자들이 위구르인들을 통치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 때에 갈단(서몽골왕조)가 아팍호자와 손잡고 이곳을 70년정도 통치를 한다. 그러나 서몽골이 청으로부터 무너지고 난 다음 청은 청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팍호자들과 대결을 하여서 결국 아팍호자들을 물리치고 천산남북이 모두 청의 완전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된다.
이 후로 이곳을 '새로운 강역'이라는 이름으로 신장이라고 부르게 된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산당과 국민당이 신장에서 다시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위구르인들도 공산당과 국민당편으로 나뉘어 지는 국면을 맞이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에흐메트잔 카스미라는 사람이 신장의 북쪽 일리를 중심으로 위구르인들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위구르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공산당측에 완전하 자치를 요구하려고 모스크바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북경의 정부쪽으로 부터 초처을 받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폭파해서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찬란한 역사를 가졌던 위구르인들은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팍호자의 성묘
카쉬카르시의 외각에 모스크와 돔 형식으로 된 무덤이 있는데 이것을 아팍호자의 성묘라고 하는데 이곳을 중국인들을 향비묘라고 하며 향비묘로 더 유명하다.
향비는 '이파르한' 이라는 여인을 의미하며 이파르한의 뜻은 '향기가 나다'라는 뜻이다. 돔 형의 건축 안에는 북경에서 향비를 싣고 온 운구용 가마가 있는데 나무로 만들어 졌다.
향비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200년전 청나라 군대가 이곳을 정복했을 때 그에 저항한 한 수령의 딸이 있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몸에서 향기가 났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건륭제는 그를 북경으로 불러서 자신의 비로 삼았다. 황제는 고향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서역풍의 목욕탕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황제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소매에 단도를 숨기고 끝까지 잠자리를 거절 하면서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황태후는 황제에게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그가 귀를 귀울이지 않자 황제가 궁전을 비운 사이에 그녀를 불러 목 매어 죽도록 했다. 후일 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생전의 희망에 따라 시신을 나무로 만든 가마에 실어 고향인 카쉬카르로 보냈고 이런 연유로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아팍하자의 묘지는 향비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향비는 역사에서 용비라는 여자로 청군이 카쉬카르을 정복하고 북경에 복귀 할때 청군에 향비 노릇을 했던 그녀의 숙부와 종형제등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하사 받게 된다. 그때 건륭은 50세였다. 용비믄 1760년에 비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녀는 황제가 지방을 순회할때에 여러 차례 동행을 할 정도로 총해를 받다가 1788년 죽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황후에 의해서 죽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수 없다. 황후는 그녀가 죽기 몇년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위구르인들이 이야기하는 이파르한의 설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자신들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가공하여서 이러한 것으로 스스로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다.
호자
20세기 초까지 위구르인들 사이에는 '호자'라는 존칭으로 불리던 특수한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특수한 능력을 가졌으며 갖가지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슬람을 신봉하는 위구르인들에게는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현제 이 호자들에 관한 전기가 여러 종 전해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들이 행한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 한 가문에 속한 이들은 신비주의 교단을 형성하고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세속적이면서 권력도 강화하였다. 17세기 호자집안에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면서 악타그륵(백산당),카라타그륵(흑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하여 세속 군자와 귀족등고 같은 권력층과 손을 잡았고, 이로 인해서 이 지역의 정치는 극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향비묘의 실질적인 주인 아팍호자는 바로 이 백산당의 거두였다. 그는 적대세력에게 미려 도저히 그 곳에 머룰 수 없게 되자 국외로 망명을 떠나서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편지를 써서 갈단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 하도록하였다. 갈단은 칭기시칸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에 불타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팍호자의 요청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1680년 아팍호자를 앞세우고 군대를 파견하여 남장지역을 점령하고 70년간 몽골인들이 위구르인들을 지배한다.
아팍호자 역시 몽골인들의 대리인으로 위구르인들 위에 군림하였다. 종교인이 세속권력까지 장악을 하여서 신성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아팍호자는 외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위구르인들은 독립을 잃고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백산당과 흑산당의 관계는 더 깊은 골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위구르인들은(남장의 위구르인들) 몽골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북쪽 초원지대에서 농사를 하도록 강요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리지역과 북장의 여러곳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아팍호자의 통치 때에 옮겨가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오늘난 천산 북쪽에 많은 도시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위구르인들의 농경을 하면서 정착과 도시를 이루는 전통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1750년 들어와 서몽골(갈단왕조)를 물리친 청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위구르인들이 사는 천산남쪽도 지배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호자들은 몽골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독립국가을 세우려고 했다. 결국 청나라와의 충돌이 불가피 했다. 이 때 청나라 장수를 살해하고 반청투쟁을 했던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호자형제'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팍호자의 증손들이다.
당시 흑산당과 기득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많은 관리들이 청군과 손을 잡았고 아팍호자자손들 집안에도 분열이 일어나 청군에 길을 열어 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용비는 청조를 도와 북경에서 고관이 된 일족은 바로 아팍의 동생 집안이었다.
호자형제가 이끄는 위구르군대는 야르칸트와 카쉬카를 최후의 보루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759년 인도로 도주 하려고 파미르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4000년명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바닥샨 지방을 다스리던 군주는 호자형제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얼마 후 그 군주는 이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청군이 호자형제의 주검를 양도 할 것을 요구하자 바닥샨은 자신이 무슬림으로서 호자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청군은 시체 양도의 허락을 얻어 냈지만 시체는 이미 무슬림들이 빼돌린 후였다.
결과적으로 청은 위구르인들이 사는 모든 곳을 정복하고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의 신장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국제두되집단 위구르
몽골의 확대와 지배에 빠져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위구르이다. 그들은 몽골 출현 당시, 천산위구르왕국(이드쿠트위구르왕조)라고 불리는 목농 복합형의 통상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르혼위구르왕조의 후예들인 것이다. 투르판을 중심으로 한 5개도시를 가진 국가로 유명하다. 왕족,귀족층은 유목국가의 전통을 가지면서도 민중은 이전 국씨고창국이 오아시스 통상 문화국가의 꽃을 피웠던 토양 위에 세워진 것이다.
지배층은 투르크인(위구르인들)이였으나 영내에는 먼저 거주하고 있던 인도,아리안계와 한족계,소그드계,티베트계도 있었다. 언어는 위구르어와 소그드어,페르시아어,티베트어,아랍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등을 사용하였다.
언어.인종.문화 모든 면에서 혼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가 병존하면서 한 사람이 다언어.다문화에 통하고 다인종의 피가 체내에 흐르는 것도 상당히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생업도 유목,목축,농경,상공업,국제통상 등 다양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중앙아시아의 제요소가 이 국가에 응집하며 존재했다. 당연히 주변과 멀리있는 국가들과도 왕래가 있었으며 여러나라의 정보도 집중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입국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몽골시대 유라시아 동서에서 활약하는 위구르인들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눈에 띈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위구리스탄-위구르인들의 땅'은 인재 공급의 보고였다.
이미 1209년 위구르왕 이드쿠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호이다. '이드-주인, 쿠트-행복'이라는 이름이다. 크탄이 지배를 하고 있었던 때에 위구르왕은 크탄의 지배를 거절하고 몽골에 의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직몽골이 큰 힘를 발휘하지 않고 있었던 때이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이드쿠트위구르왕조는 칭기스칸의 조력자로 세계지배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몽골공주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준몽골왕가의 지위를 차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칭기스칸의 사부에서 참모,행정관,재무관,군인,기업가등까지 다양한 방면에 활동을 하게 된다. 크탄(서요)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위구르는 두뇌가 뛰어났다. 그러므로 크탄은 몸으로 승부했다고 하면 위구르는 머리로 승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칭기스칸은 이들(타타통아)로부터 법률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이 법을 엄격히 준수 했으며 모든 이들이 준수하도록 명하였다. 아들들 중에서는 차가카이가 가장 잘 준수했다고 한다.
법률과 행정을 정비하려면 일단 문자가 있어야 하는데 칭기스칸은 위구르인들로부터 문자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에 가르쳐서 지금의 몽골문자에 까지 이른다.
원제국을 전설한 쿠빌라이등은 위구르인을 참모로 전중국을 차지 했을 뿐만 아니라 늘 통치의 스승으로서 위구르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국제경찰 오르혼위구르제국
당왕조 중국에 티베트고원의 토번이 진공을 하면 위구르기마군단이 출동했다. 또 당왕조 국내에 있어서도 번진의 발호가 있을지라도 약화되었던 당왕조가 나름대로 평형과 안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불가사의한 배경에는 번진 위에 북으로 덮쳐 누르는 위구르의 건대가 그림자를 간과할 수가 없다. 역시 정국은 공간의 테두리를 넘어 연동하고 있었다. 위구르는 아시아 동방에 있어서 국제경찰의 역할를 하고 있었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돌궐 이래 투르크국가와 인연이 깊은 소그드 상업세력과 결합하여 위구르는 소그드대상들을 이용하여 비호국으로 삼았던 당왕조의 중국에 말을 운송하고 비단을 가져오는 무역을 전개하였다. 장안에는 항상 천명이 넘는 소그드상인단들이 주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로 국제상품 비단은 소그드 상인망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그보다 서쪽으로 판매되었다.
이리하여 위구르왕조는 당왕조 중국으로부터 경제 제공과 소그드상인과의 일체화된 국제무역에 의해 이전에 없었던 군사력과 자금력을 겸비한 유목제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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