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민족 - 돌궐(투르크)
돌궐은 스텝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을 문자를 남긴 민족이다. 몽골리다 북부의 오르콘(오르혼)강 유역에서 발견된 투르크어비문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비문에는 돌궐제국을 쾨트르크제국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쾨'이라는 말은 청색을 의미한다. 이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돌궐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민족으로써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 이루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두 형제들이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유목민족의 전통을 오해하여 동돌궐과 서돌궐을 다른 두 개의 나라로 오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두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나 이것은 통일된 한 나라였던 것이다.
돌궐 자신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투르크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 아가티아스의 비쟌틴문서과 아랍 시인 나비가트 알 주부야니의 아랍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문서에서는 12세기 초기에 토르크(Tork) 형태로 나타난다.
그 뜻이 1072년 중세 카라한왕조의 투르크학자 마흐무드 카쉬카리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의 민간어원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말이 ture(튀레)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금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의 이론을 따르고 있지만 투르크인들 자신들을 전자 마흐무드가 해설한 '강력하다'라는 의미를 주장하고 그것이 합당하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다.
한편 돌궐이라는 말은 6세기 중국문서 주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투르크족을 돌궐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투르크인들을 소위 북방 오랑케라 하여 경멸적으로 칭하여 만들어낸 조어로서 투르크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혹은 퀼이라느 뜻이다. 즉 이말은 돌궐족 초기의 부족면이 궐 즉 큘혹은 퀼임을 암시하고 있다. 큘혹은 퀼은 궐족의 이름은 퀼테킨,퀼카간,퀼쵸르등 돌궐제국의 왕의 호칭에 많이 나타난다.
돌궐제국을 이룬 투르크족은 흉노의 하나로 보여지면,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투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와 같은 이름이을 붙였다고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직업은 철공업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에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마을과 도시를 건설함으로서 초원지대에서 도시를 건설하였다.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 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이라고 하는 고대 투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545년겨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키므로써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과 동생 이스테미가 동부스텝과 서부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이면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2의 통치자란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서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583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미 내부 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서 실패하여 멸망하게 되자,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시 부흥하는 듯 했으나, 곧 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벋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 카간, 퀼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 들이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영역은 않아 각종 유목민족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을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 바스밀부족이 위구르,카르룩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르룩, 그리고 위구르사이의 세력다툼에서 위구르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써 위구르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돌궐제국의 대외관계
돌궐의 대외관계는 과거의 스텝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은 대개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민족은 중국과 비잔틴제국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을 페르시아계 소그드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다 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렵하여 그 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떤 아프카니스탄 지방이 에프탈리테를 붕괴시키고 제국의 영토를 동부 킨강산맥에서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 무역협정을 주진했으나 이에 실패자하 곧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을 보냄으로써 돌궐과 비잔틴이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상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잔틴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직접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잔틴제국 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잔틴 간에 성립된 우호관계는 특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에게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틴의 관계는 무난히 지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잔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북부와 루마니아 지방에 있던 아바르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잔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아르바를 자신들의 복속국을로 취급하였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임을 주장하고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연연.에프탈리테.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부족이라 추정되지만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익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을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는 식의 억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 않은 중국은 대부분 긔 요구에 응했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 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형한 무역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년차이는 결국 양국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했었는데 돌궐은 경제적 목적으로 가진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형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침투와 탈라스국제전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머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동돌궐에서도 바로 원로였던 톤육쿡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의해서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휘쓸어 버린 이슬람의 아랍인들은 7세기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화시킨 후 중앙아시아의 서쪽 경계를 같이 하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8세기중엽에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티베트,당나라등과 함께 아랍이슬람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점점 박트리아,부하라,사마르칸트 지역을 지배하였다. 돌궐은 내부분열로 이것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스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영향권으로 들어갔고 이슬람화되었다.
이렇듯 아랍이슬람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티베트 역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 된 것이다. 곧 이어 734년 스텝 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투르크계인 위구르가 스텝이 동쪽에 세력을 구축하여 위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 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이 타쉬켄트 원정 때 자행했던 잔인한 약탈 행위는 그 지역 서부 투르크인들로 하여금 이슬람압바스왕조 칼리프엑 원정을 요청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랍이슬람압바스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는 티베트,돌궐계 카르룩과 연합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751년7월 이들 동맹군과 중국-위구르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충돌하여 이른 바 탈라스국제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르룩동맹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투르크스탄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라스국제전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터 트란속시아나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쇠퇴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이 확장되었으며 그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계속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스람세력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 후 투르크미족은 두 개 이상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투르크족은 이슬람세계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쥰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동투르크와 중부투르크는 스텝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혜초와 고선지장군
지금까지 우리는 혜초와 고선지장군에 대해서 우리민족을 빛낸 사람으로만 인식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한번 생각해 볼 문제는 이 들이 모두 당에 배경을 두었다는 점이다. 당은 당시에 세계제국으로 실크로드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팽창일변도의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영향으로 신라는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고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한반도를 통일한 것에 대해서는 신라의 염원이었겠지만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수나라의 대군이 침략을 해 왔을 때 우리선조는 지혜로 막아내는데 성공을 했으며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의 실패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구려는 만주를 포함하여 발해등지 지금중국의 동북부와 몽골지역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는 통일을 담보로 고구려의 넓은 영토와 투르크민족과의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을 하게 되며 정치,경제,문화,언어등의 모든 분야에 중국의 전면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고선지는 고구려유민으로 사실 고구려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닌 것인데 우리가 그의 기계를 높이 평가할 필요는 있지만 그의 정체성에는 박수를 보내는 것은 굉장한 사대주위적인 발상이 아닐수 없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처럼 당의 장안에는 신라방이 있었다. 신라방에는 1천명이 넘은 신라의 유학생들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역사의 헤게모니를 누가 이끌어 가느냐에 대해서 보여준다. 당연히 무력이 강한 나라가 이끌어 가는 것이 법칙으로 되어 있다. 당은 그러한 면에서 무력과 문화를 갗춘 신라가 따라야 할 모델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젊은 남자들의 대부분을 지금의 실크로드상의 황량한 사막지역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신라의 내정간섭에 들어가는 것이 시작이 된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보면 침략의 행위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도 고마워서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서 줄을 이어서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장안에 와서 당을 배우면서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중국사관과 중국의 문화에 젖고 중국에 동화되어서 신라로 돌아갔다. 이들의 눈에는 신라(자신의 본국)의 문화와 언어와 생활은 너무나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중국의 문명과 언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면서 으시대기에 이른다. 이들을 우리는 사대부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신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라승려가 중국의 심장부에서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고 이것이 세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 세인들과 중국인들은 이것을 보면서 더욱 자신들의 중화의 위대함과 우등함을 자랑하는 계기를 더 신라인들이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세종대왕은 신숙주등을 중심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신숙주는 위구르어 몽골어등에 능통한 언어학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역시 한자문화에서 한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몽골어(즉 고대 위구르문자)를 바탕으로 한글이 만들어 졌으며 이것은 이전에 중국이 이두문자등에 비하면 과학적이고 독창정이며 우리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을 태도는 어떠했는가?
이들은 "이것은 천한 사람들이나 쓰는 글이다"라고 치부했다... 이들이 바로 당시의 우리지식인들이 였으며 사대부들의 태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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