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자유의지<2>-자유, 자유권, 자유의지
신학적 논의를 하려면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신학 용어를 모르고 사전적 의미만 아는 사람이 신학적 토론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게시판에는 아직도 구원론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가장 핵심적인 두 용어 [구원]과 [자유의지] 두 용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구원]의 용어를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유의지]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자유라는 용어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전에는 자유란 :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유(自由)] 가장 기본적인 뜻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종족 보존을 위한 섹스(Sex)를 하게 되면 이를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권(自由權)]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위의 자유 외에 법적인 자유권이 필요합니다.
자유권에는 “신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주거의 자유”, “결사의 자유”등이 있습니다.
이 자유권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짐승에게는 자유권이 없습니다.
짐승은 이런 것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를 보장해 주어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자유의지(自由意志)]: 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자유와 자유권과는 전혀 다른 개념(槪念)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반드시 자유의지가 필요합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는 로봇이지 사랑의 대상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느냐?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느냐? 의 선택 의지입니다.
결코 제3의 방법 예를 들면 생명과도 아니고 선악과도 아닌 다른 열매를 따먹는 길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그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을 선택 했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으로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영이 죽은 상태의 사람은 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24)
혹 안다 하드라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느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8-24)
따라서 죄를 범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악을 행하여 죄를 짓는 행위는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학자는 이를 노예의지라고도 합니다.
죄의 삯으로 영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구원)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서 독생자를 대속 물로 주시고 이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웹2:8)
문제는 손상된 자유의지(노예의지)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으니 이 믿음을 받아서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견 논리적으로 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진리를 모르고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한 결과로 큰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곤고한 사람>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내가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논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곤고한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성령께서 믿게 해주십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하)
이 때 비로소 믿게 되는데 이는 결코 자유의지(어떤 이는 자율적 의지라고도 함)로 믿은 것이 아니고 불가항력적 은총(不可抗力的恩寵)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 데는 우리의 공로는 0.001%도 없고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이제 없는 것 인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비로소 자유의지가 회복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행방합니다.
이 때 비로소 자유의지가 회복되어 육신의 생각도 할 수 있고, 영의 생각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성화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성화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의 생각을 하게 되면 생명과 평안이요,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면 사망입니다.(롬8:2-8)
성령을 쫓아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되고 육체의 소욕 되로 행하면 육체의 일 15가지가 나오게 됩니다.(갈5:16-24)
이 성화 과정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로 성령을 쫓아 행하면 공적 심판 때 상(賞)을 받고, 육신의 생각을 쫓아 행한 사람은 공적이 불타 없어지므로 해(害)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게 됩니다.(고전3:10-15)
결론을 말씀 드리면 구원은 육신의 생명을 죽지 않게 하는 구조, 구명 소생과는 차원이 다른 죽었든 영을 살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육신의 자유나 자유권, 혹은 인간 이성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차원 높은 자유의지의 문제 입니다. 죄 값으로 영이 죽은 사람은 자유의지가 손상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불가항력적 은총으로 믿고 구원 받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회복하고 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행위로 공적을 쌓아 영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영화구원은 지옥 가느냐. 천구 가느냐의 판가름이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이 얼마나 영화롭게 천국 가느냐? 의 문제입니다.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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