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2)

수호천사1 2011. 3. 31. 12:26

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2)

 

 

신앙의 성숙을 도모해야할 설교가 성도의 신앙 성숙에 해악이 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신교회는 말씀 즉 로고스의 종교이다. 그 말씀은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 성도들에게 선포된다. 현상적으로 보아 교회는 설교를 통해 세워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설교는 그 막중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지난 이천년 교회사를 살펴보아도 이는 명백하다.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되고 갱신된 역사에는 언제나 설교의 진정한 회복과 갱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가 자칫하면, 설교자가 의도하든 하지 않던 간에 참으로 위험하게 될수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씀대로, 설교자가 성경의 본래 가르침대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선포되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성도들이 허탄한 길로 인도될 수가 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실수하면서 배워 간다고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명제가 한국교회 설교의 현실에 적용되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결함과 위험이 한국교회 설교의 강단에 도사리고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설교자도 인간인지라 가끔 설교 본문과는 상관없이 자기감정에 도취되거나, 최선을 다 한다고 하지만 더러 본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주관적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설교 강단의 문제점은 이런 인간학적 문제로 축소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보다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때 신학적인 문제라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어떤 부분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대한 왜곡 혹은 오해를 의미한다.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는 설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이미지가 생겨난다는데 설교의 심각한 위험성이 있다. 즉 신앙의 성숙을 도모해야할 설교가 성도의 신앙 성숙에 해악이 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사태는 이미 얼마 전 설교비평으로 교계에 논쟁의 바람을 일으킨 정용섭 목사에 의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폭로된 바가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의 문제점과 위기상황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필자는 그 설교비평의 핵심적인 주장, 즉 한국교회의 비중있고 저명한 목사들의 설교가 신학적 깊이를 상실한 피상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성경관과 설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과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서 설교의 문제점과 그 이유를 분석해 보고 대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3.2. 설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설교의 강단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한 속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 비평의 기준으로서의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언급을 회피할수 없다. 설교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적, 설교학적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매우 담백한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설교란 “성경의 내적 논리와 증거를 좇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설교를 할 때 때로는 적절한 수준의 예화를 들 수도 있고, 성경 외적인 자료와 증거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혹은 보조적인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설교란 성경의 절대권위를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즉 설교란 이 세상 어떤 교훈이나 주장과도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경 말씀을 받들어 존중하되,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한 속성을 가감 없이 증거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설교는 인간의 주관적인 사상 혹은 자기감정과는 근원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설교는 사상 강연도 아니며, 사람들을 설득 혹은 선동하는 일반적 연설과도 절대적으로 구분된다. 요컨대 설교는 이 세상의 어떤 주의 주장과도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선포이다. 이런 설교의 정의 혹은 본령에 비추어 보면 한국교회 강단은 너무도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되어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설교의 강단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한 속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영광 선포보다는 거의 온갖 인간적 잡설과 경험들로 채워진다. 이는 정용섭 목사의 성실한 검토와 예리한 분석대로 “하나님 망각” 현상이다. 정용섭 목사는 한국교회의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성실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한 후 그의 저서들을 통해 한국교회 설교에는 정작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할 하나님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절규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 즉 하나님이 선포되어야 할 자리에 인간 영웅들의 이야기, 설교자의 신변잡기들, 세속적 성공사례, 허망한 세상적 축복의 약속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런 설교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설교의 중심주제로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그저 변죽거리, 혹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적인 존재로서 언급될 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설교의 주제가 아니라 허드레인 셈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인가! 이는 설교의 타락이자 변질이다.

둘째, 한국교회 설교는 설교의 기초가 되는 성경해석이 너무도 부실하다. 설교가 꽃이라면 성경해석은 뿌리에 해당한다. 건실한 뿌리없이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설교비평가 정용섭 역시 성경해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지만 필자의 관점은 그와 달리한다. 성경해석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 위해서는 해석의 대상인 성경관에 대한 검토가 우선적이다.

우선 정용섭의 성경관은 전형적인 역사비평적, 자유주의적인 성경관을 견지한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문서이며 그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기록되어 있기에 이성의 잣대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필자는 이런 관점을 빗나간 관점으로 거부한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거론해온 이성의 잣대는 언제나 학자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자체모순적인 주장이 얼마나 많이 있어 왔는가!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그 사상과 의미에 있어서 통일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은 역사적 정황에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차적으로 문법적 해석을 거쳐 역사적 해석을 통과해야한다. 즉 어떤 역사적 정황에서 그 당대의 독자들에게 주신 말씀인가를 엄격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이는 “역사비평적인 해석”과는 구분되는 “역사적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최종 목표는 신학적 해석에 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되 그 성경 안에는 성경을 풀어가는 고유한 해석의 원리가 내장되어 있다. 이 말은 성경해석의 올바른 원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말씀이기에 그것에 대한 해석의 관점 혹은 해석의 틀을 외부에서 가져와서는 안된다.

쉽게 말해, 박사학위의 논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초등학교 학생의 관점을 가지고는 정당하게 볼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필연적으로 박사학위의 내용이 초등학교 수준으로 뒤틀려 해석될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와 동일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 해석할 때 정당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한 것 처럼 절대적인 권위와 수준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하의 어떤 세상적인 기준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계시의 말씀인 성경 그 자체 안에 해석의 원리와 관점을 내장시켜놓은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관건은 성경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해석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전통적 보수신학은 구속사적 해석원리를 주장해 왔고, 자유주의신학은 사회정의적 해석원리를 강조한다. 전자는 일리 있되 부족하며 후자는 빗나간 해석원리이다. 인간의 구속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이되 근본적인 원리는 아니다. 사회정의는 복음의 부수적 열매이되 그 자체가 성경의 해석의 근본 목표일수가 없다. 이점에서 아직 성경의 근본적인 해석의 원리가 무엇인지는 더 추구되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남겨져 있는 셈이다.

설교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종의 태도로 서야 할 것이다.

셋째로 지적할 수 있는 한국교회 설교 강단의 문제점은 설교자의 자세의 문제점이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검토함에 있어서 설교의 내용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이슈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설교자라는 인격의 필터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일반적인 강연자와는 달리 그 책임과 사명이 막중하다. 그것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전달하는 사명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한국교회의 설교자는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거룩한 종으로서의 자세의 상실이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이지만 설교야 말로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의 열매일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선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란 도무지 어떤 존재인가? 그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붙들린 종일뿐이다. 스스로가 주인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망발이자 반역 일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의 전달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에게 부여된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나 사도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들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의 성취와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로우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구약을 들어 그리스도사건으로 연결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다룰 수 있는 듯한 포즈,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거나 자랑하는 설교의 주관화, 성경의 진리 증거를 위한 진지성보다는 개그수준의 만담식 희화화, 청중인 성도들을 닦달하는 도덕선생적인 태도, 성도로 하여금 성경 말씀의 깊이와 세계로 인도하기 보다는 설교자의 자극적인 선동에 말초적인 반응(할렐루야, 아멘 등의 반응)을 일으켜 우민화하는 시도들, 이 모두는 설교자가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있지 않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음식 맛을 알고 그 맛을 느낄 줄 모르는 요리사에게 어찌 영양가 있고 맛있는 요리를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 진리의 은혜롭고 놀라운 세계 안에 직접 경험해본 일이 없는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강단을 허드렛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온갖 설교에 대한 빗나간 태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의 영양을 깊이 생각하는 엄마의 요리는 진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이를 금쪽 같이 사랑하는 엄마 요리사는 요리의 재료를 구입하는 일부터 온갖 정성을 쏟을 것이며 그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자 보람이며 일종의 도(道)의 세계가 될 것이다. 하물며 하늘의 양식을 요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는 설교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는 설교는 진지할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되는 자리이다. 즉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에 순복하는 자리인 것이다. 설교를 하기 이전 설교자는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씨름하며 치밀하고 진지한 준비를 하되 설교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종의 태도로 서야 할 것이다. 이런 도의 경지를 추구해야할 설교자의 태도가 한국교회 강단에 있는가? 이 질문 앞에 긍정적 답을 하기가 어렵다. 실상 절망할 수준으로 강단은 세속화되어 있어 부패한 냄새가 역력하고, 하나님을 소개해야하는 거룩한 말씀은 인간적인 빗나간 해석과 참을수 없는 가벼움으로 희롱당하고 있다.

3.3 문제의 이유

이런 설교의 근원적인 문제는 어디로부터 말미암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학교육의 문제점이다. 설교는 건전한 신학을 토대로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 설교는 성경의 권위와 그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공부가 너무도 부족해 보인다. 모든 설교자는 신학 공부의 양과 질이 어떠하든지 간에 신학교라는 코스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신학교의 신학교육이라는 것이 성경 그 자체의 흐름과 깊이를 선포해야하는 설교자에게는 너무도 부실하다.

우선 신학교에서 성경 자체의 심도있는 공부가 거의 부재하다. 이는 국내 유수한 신학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성경 그 자체의 깊이 있는 배움보다는 성경이해에 대한 신학적 이론들을 따라 잡기에 바쁘다. 이런 부실한 성경에 대한 배움의 부족은 설교 강단을 세속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올바르게 성경을 배우지 않고 설교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둘째, 설교 현장인 목회에 대한 태도의 문제점이다. 한마디로 말해 성경말씀을 증거하는 설교가 목회의 도구가 되어 있다. 목회란 도무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말해 인간 목회자는 목회의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목회의 주관자이시며 인간 목회자는 그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목회는 이런 성경적인 목회의 정신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 보인다.

교회 성장 운운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일인가? 설교는 도무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이는 엄밀하고 냉철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으로 성도를 말씀 안에서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면, 목회는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일이 된다. 즉 목회가 직업화되고, 세속적 차원의 경영처럼 운영되는 목회라면 그것은 이미 목회의 본질로부터 빗나가 있다.

설교는 목회운영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로써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거룩한 일이다. 설교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 영광의 선포이며 바른 설교로부터 목회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말씀증거로서의 설교는 결코 허탄하고 그릇된 목회의 도구로 전락될 수 없다. 설교야 말로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와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은혜의 자리이다.


설교란 성경의 기록목적에 목숨을 거는 행위이다.


3.4 성경적 설교의 대안모색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너무도 훼손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심하게 조작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설교의 원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설교의 원형적 대안은 무엇인가?

1. 설교의 본질 회복

모든 일의 회복은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다. 본질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수록 지금의 관행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전통과 관행의 포로이다. 화장실 안에만 있으면 냄새를 못 느끼듯 전통과 관행 안에서만 있다면 문제를 문제로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전통과 관행을 근본적으로 검사할 수 있는 객관적이며 초월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즉 설교관행의 옥석을 분별하기위해서는 그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계시의 말씀 즉 성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교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고유한 논리와 가르침에 경청해야한다. 설교란 인간의 자기 사상의 펼침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상이신 계시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는 일이다. 즉 설교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가감없이 증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본질을 묻는 질문은 그 설교의 내용이 되는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설교의 기본이 되는 신학의 기본에 대한 실력이 엄밀하게 검증된다. 모든 것은 기본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의 주제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이고 심도있는 신학적 이해에 따라 설교의 깊이와 포괄성이 논의될수 있는 것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이 점을 깊이 있게 논할 수 없다.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심원하고도 놀라운 논리와 깊이의 세계,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끝없이 깨달아가는 일이다. 그것은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 깊어지는 세계이다. 이일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가듯,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바로 설교자이다. 모름지기 설교자는 그 세계 안에 기기묘묘한 광경과 맛을 본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그 세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글로 이루어져 있기에 문학적인 작품이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역사를 방편으로 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문학적이며 역사적인 방편을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하신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다.

설교란 이러한 성경의 기록목적에 목숨을 거는 행위이다. 활쏘는 사람의 시선은 오로지 과녁판이듯이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하심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도 설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하는데 사용되는 설교의 방편들 즉 예화, 삶의 경험, 세상적 지식 등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의 본문에 충실해야한다. 그 안에 기기묘묘하게 담긴 하나님 증거의 길을 찾아가는 행위가 바로 설교의 본령이다.

마치 애인과의 사귐 속에서 깊은 사랑의 언어와 감정을 나누지 못하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성경의 깊이와 고귀한 가치를 깊이 모르면 언제나 성경 자체보다는 다른 내용과 방향으로 설교가 뒤틀리고 산만해진다. 실제 성경의 본문 안에 담겨 있고 그 본문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속성은 복음의 생명 그 자체이므로 아무리 반복하더라고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물리지 않는 하늘의 양식이다. 한국교회 설교는 이점을 깊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허하고 알맹이가 없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동일한 방식으로 해주는 정상어린 흰밥과 보글거리는 된장찌개가 물리는 법이 있는가! 설교는 이처럼 담백하고도 맛깔스러운 어머니의 사랑의 밥상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심도있게 증거하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세계이다. 이런 설교의 본질이 새롭게 회복되어야 한다.

2. 올바른 성경해석은 설교의 기본 바탕

성경의 본래 기록 목적은 언제나 해석의 작업을 통해 드러난다. 이점에서 성경은 한편으로는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감취어진 보고이다. 예컨대 보물섬은 그 길을 찾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가치이지만 그 보물섬에 이르는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미지의 환상일 뿐이다.

성경에 드러나 있는 진리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적 지혜로 연구해서 읽혀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바른 진리에 이르는 해석의 길을 성경 안에 가르쳐 주시고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진리의 영, 즉 진리해석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안에 부어주신 것이다.

이점에서 성경은 다른 일반적인 책과는 전혀 그 품격과 목적을 달리한다. 즉 성경은 해석의 원리를 성경 안에 내축하고 있는 절대적인 책이다. 여타 어떤 해석의 원리를 밖에서 가지고 오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의 내재적 해석의 원리이다. 어떤 성경 밖의 해석 원리를 가지고서는 성경을 정당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보물섬에 이르는 길과 방법이 담긴 지도”가 “보물섬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보물섬을 만들고 그 안에 지도를 넣어 놓은 보물섬 주인의 허락과 알려주는 사역이 없이는 그 보물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섬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그것은 그 보물섬으로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는 존재가 보물섬 밖에 있는 존재에게 가르쳐 주는 길 밖에 없다. 이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 없느니라.
(마 11: 25~27)

위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백성에게는 “나타내신다”. 이것이 진리 인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으며 그 해석의 길을 예수님은 명백하게 성경 안에 밝혀 놓으셨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바라보되 그것은 “나를 가르쳐 기록된 것”(요 5:39)이라고 증거하심으로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즉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성취임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요 14:9)”라고 증거하셨다. 즉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하신 분이심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증거 하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신다.

정리하자면 구약은 그리스도 사건의 언약이며 신약은 그리스도 사건의 성취임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 즉 아버지이심을 성경의 내적 논리와 증거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신약은 구약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기본 틀인 셈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은 여호와 되심” 이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주제이며 그 주제를 구체적으로 역사가운데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설교, 즉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설교는 이 해석의 맥락을 벗어나면 안된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을 많이 운운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설명하기위해서는 성경의 기본 계시의 방법인 그리스도 중심의 언약과 성취의 논리를 따라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그리고 그의 전능하심으로 역사가운데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여호와, 우리 아버지이심을 증거할수 있게 된다. 이를 우리는 언약-성취사적 성경해석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경해석의 원리를 견고하게 유지할 때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는 복음적 설교가 될 것이다.

3. 설교의 바른 태도

인간 설교자는 자신이 그 설교를 통해 배워가는 청중의 한 사람이다.

설교는 인간 설교자가 하지만, 실상 그 일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 설교자는 사실 청중을 향한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이 그 설교를 통해 배워가는 청중의 한 사람이다. 아니 가장 중요한 청중의 한사람이다. 자신의 설교에서 진리의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청중에게도 참 자유함을 전할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 수없는 죄인이요,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너무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진정성을 점검함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와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정으로 깨닫고 인격 깊숙한 곳에서 감격할 때에만이 생명력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를 복음의 증인이라고 표현하였다. 증인은 실제 사건을 목격한 체험자라는 뜻이다.

설교에서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인간이 다루거나 조작 가능한 논리가 아니다. 복음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요, 그리스도라는 부활의 인격 안에 역사하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 설교자는 그런 영원한 생명을 조작적으로 다룰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분이 찾아오시고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생명이 설교자를 사로잡아 그 입을 통해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야 말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하기에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자리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설교에는 인위적인 기교, 인간 자신의 경험의 자랑, 내가 설교를 통해 성도를 설득시키거나 변화시켜야겠다는 오만 등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설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하늘의 진리를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뜨겁게 체험하는 복된 자리이자, 인간의 허탄한 자기 영광과 자아실현의 욕망의 자리가 될수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이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사역이다.

4. 결 론

한국교회 강단이 얼마나 부패되고 세속적 욕망이 분출되고 있는 자리인 것은 이미 세상에도 알려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설교의 개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설교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진정한 근원지인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실수할 수 있으며 자신의 부족한 설교를 통해 점차 배워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설교의 원칙을 분명히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경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언약 성취의 논리를 통해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위대한 속성을 증거하기, 이에서 벗어나면 설교의 본질에서 빗나가게 된다.

참으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으로 거룩한 도구로 쓰여질 때 깊이 있고 생명력있는 설교를 해 갈수 있을 것이다. 즉 진리를 전파하는 참된 설교란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사역의 열매가 아닌가! 아멘.

출처/ 한국크리스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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