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1)
--문제점과 대안 모색--
(목 차)
1. 서 언--왜 이 질문이 절실한가?
2. 신학적 문제와 대안
3.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
4. 지도자의 문제와 대안
5. 교회생활 및 운영의 문제점과 대안
6. 교회 정치적 문제점과 대안
7. 선교의 문제점과 대안
8. 결 론
1. 서언 -- 왜 이 질문이 절실한가?
한국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여기에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한국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현금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절망적 아픔이 서려 있고, 또한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향한 희망적 전망을 담고 있다. 참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로 이천년 기독교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교회의 부흥을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독교가 참으로 올바르게 전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수많은 신학교의 난립 가운데서도 신학의 정체 혼미, 교회 밖으로 부터의 질시와 조롱, 교회 내부에서의 균열과 분열, 지도자의 사제주의화, 교회 운영의 천민자본주의화 등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차원의 역사를 준비하신다. 아합 시대 엘리아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고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후 이세벨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도피 중에 지쳐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칠천인을 남겨두었다고 대답하셨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와 교회를 어둠의 도전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지키고 사랑하시되, 언제나 순수한 진리와 교회의 거룩성을 갈망하는 새로운 손길을 준비시키고 그 손길을 통해 개혁의 물결을 이루어 가신다.
한국 교회의 저변에는 도처에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으며, 나름대로 현존 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성경적 신학의 정립을 시도하는 건전한 운동들이 감지된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건전한 몸부림과 시도들이 있다. 뿐 만 아니라 순수한 정열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교의 정열을 불태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이글은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과 움직임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찾아보려는 한 시도이다.
문제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인정이 없이는 교회는 새롭게 전진할 수 없다. 성경은 이를 포괄적인 용어로 “회개(메타노이아)” 라고 한다. 신학적으로 회개란 자기연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고 깊이 알지 못해 생겨난 자기중심적인 죄악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급진적인 변화”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하여 성령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이다.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은 중첩되는 점도 있지만 별개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분석하고 검토하되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을 균형있게 밝히고자 한다. 문제에 대해 절실한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대안 모색은 지속력이 없으며, 대안 없는 문제 지적 역시 자칫하면 자기파괴적인 비난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글에서는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여러 가지 항목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신학적 문제와 대안
2.1 신학적 문제를 진단하는 기준
우선 가장 먼저 지적 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학적 문제점이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기초로 하는 신학적 문제점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밝혀내기 위해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 혹은 원칙을 필요로 한다. 물론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긴 학문적 논의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담백하고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원칙적인 기준에 비추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을 점검하기로 한다.
신학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하나님 이해하기와 경외하는 일”이다. 이런 개략적인 신학의 이해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담고 있다.
첫째, 성경은 반드시 “전체로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성경은 66권으로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은 그 성경을 한권으로 의도하시고 그렇게 집대성하였기에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속성은 언제나 원칙적으로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성경해석의 파편화 현상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작업인 신학은 결국 성경 해석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성경 해석의 파편화를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알아가기라는 신학적 근본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의 통전성(wholeness)을 구축할 수 없다.
둘째, 신학은 순수 이론적인 작업에 머물 수 없으며 그것은 실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론과 실제의 분리현상은 서구 학문 혹은 서구 철학의 잔재이다. 인간의 이성적 작업을 통해 구성된 이성적 학문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입장 혹은 상황을 초월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편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은 삶의 실재(reality)를 온전하게 반영할 수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실제의 삶과는 분리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이성적 작업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물론 성령은 인간의 중생한 이성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게 함으로 신학의 작업에 인간의 중생한 이성이 사용되기는 하여도 영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은 일반 학문의 과정과는 달리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에 의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고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성경의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밝히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속에 역사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론으로서의 진리는 그 자체가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둠을 밝히고, 인간의 죄악된 어리석음을 타파하여 새로운 지혜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진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상을 경외하며 살아가던 인생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확인 해본 신학의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초에 대해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2.2 한국교회 신학의 문제점
첫째, 신학의 파편화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생명있는 지식과는 거리가 먼 파편화된
논리들의 집합체가 되고 있다.
단마디로 말해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생명 있는 유기적 지식과는 거리가 먼 파편화된 논리들의 집합체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신학교가 난립되어 있으며 신학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토록 많은 신학적 작업들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으로 수렴되기 보다는 너무도 산발적이고 파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적 연구가 소모적이며 신학자들 간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한국 교회에 어떤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는가? 이는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모든 성도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주제이다. 오늘날 신학의 귀족화 혹은 사제주의화로 인해 일반 성도들(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구교적인 잔재로서 비성경적 용어이다)은 신학적 작업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 사상에 정면으로 상반된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할 이유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신학적 작업의 원칙과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왜 신학 작업이 그토록 파편화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크게 보아 서구신학의 영향과 잔재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후 지난 오백년의 신학의 역사를 검토할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을 그 기원으로 한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당대 카톨릭 신학의 허구를 간파했었으며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다. 루터는 성경에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도출했고, 칼빈은 루터를 뛰어 넘어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학 이론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그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 볼때 대단한 작업을 수행했고, 그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강력한 진리운동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종교개혁사상을 계승하고자 했던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18세기 서구 지성사의 중요한 계기인 계몽주의가 발흥했다. 이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변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란 서양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촉발된 사상운동으로서 하나님의 계시 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한 철학운동이었고, 그 정점에 칸트(I. Kant)가 있다. 칸트이후 학문은 분화되었고, 그것이 서구 과학적 학문의 대세를 형성했다. 이런 서구 지성사의 흐름은 신학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의미의 학문분화는 대세를 형성했고, 20세기에 와서 분과학문으로서의 과학은 부동의 진리기준처럼 행세했다. 그것이 이른바 최근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인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른바 세상에 대한 거대담론(meta-narrative)의 퇴조를 의미한다. 이런 서양의 현대사상 혹은 현대학문의 조류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촌 현상을 만들었다. 그런 강력한 대세와 영향력 속에서 신학도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라는 다양한 학문분과이다. 그리고 각 분과는 다시 더욱 세분화되어 수많은 하위 분과학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의 분야에도 수많은 하위 분과의 전문화 현상이 생겨 낳고 그것은 일반 현대학문의 세분화 현상과 맞물려 돌아갔다. 이것은 참으로 신학의 비극적인 퇴행이었다. 일반 학문의 분과화와 전문화는 어떤 점에서 이해 가능하다. 세계 전체를 전체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난점이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특정 분야 혹은 영역을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과학적 접근은 한편 알고 보면 정당한 시도 일수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그럴 수 없다. 신학의 근본 원천이 되는 성경은 그 전체로서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별개로 연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존신학에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분리된 채 연구되며 구약신학 안에서도 더 세분화되어 그 세분화된 영역에서 박사가 나온다. 이는 참으로 웃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두루 넓게 아는 ‘박사’가 아니라 자기 분야만을 좁게 아는 ‘협사’가 되고 만다. 이는 참으로 신학의 파편화를 의미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의 지리멸렬이다.
이런 신학의 파편화된 흐름과 전개가 신학교 강단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난삽한 신학이론에 치여 성경을 읽고 성경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확인하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한국 신학교 현상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교회 강단의 부실화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담백하고 깊이 있는 신학에 의한 성경의 이해, 이것이 너무도 목마른 한국교회의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저급한 학문적 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치부된다. 서구에서는 성경은 가장 저급한 수준의 치부되는 성경 대학(Bible College)에서나 읽고 가르치지 적어도 신학교(Seminary)나 유수한 신학대학(University)에서는 전혀 다른 식의 접근을 한다. 즉 성경 그 자체의 통일된 논리와 구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해석하고 파헤쳐 가기 보다는 신학자들의 신학이론을 소개하고 연구하며, 또한 신학 이론에 영향을 주는 잡다한 세속적인 학문의 흐름을 따라 잡는 것이 주된 임무로 되어 있다. 이런 서구 신학의 파편화와 혼돈 경향이 그대로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렇게 신학의 흐름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 현상은 한국의 신학교에 보편화되었고, 그 영향은 설교강단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 교회 내에 “성경 통독운동” 혹은 “성경의 맥을 잡아라” 등과 같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중시하여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고, 신학 이론보다는 성경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제제기적인 시도로서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런 시도가 성경 그 자체가 증거하는 견실한 신학적인 기준과 내용을 가지고 추구되지 못했다. 현재 한국 교회 전반을 지배하는 신학은 파편적인 접근이 주종을 이루고 거의 대다수의 교회 강단은 그런 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 갈 길을 상실하고 있다.
둘째, 현장과 분리된 신학의 이론화
현장과 분리된 신학의 이론화 현상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신학의 이론화는 알고 보면 앞에서 지적한 첫째 문제점인 신학의 파편화가 만들어낸 부산물이기도 하다. 신학이 성경 전체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에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학문의 전문화라는 미명아래 신학이 점점 구체적인 신앙의 현장인 교회생활 혹은 목회현장과 분리되어 갔다.
일정 부분 신학의 이론화 작업은 정당하다. 성경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관점을 다듬고 정련화하는 신학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다소간 삶의 현장과 거리두기(distancing)라는 작업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인 작업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결국 신학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삶에 올바른 영향력을 주기 위함이다.
과연 한국 신학이 얼마나 오늘날 삶의 실제에 부합하고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신학교에 편만해 있는 자조적인 이야기 중에 하나는 “신학과 목회는 별개이다”라는 주장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신학교는 목회를 하기위해 제도적 차원에서 자격증을 얻는 한 과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만큼 신학교의 공부가 현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성경의 전체적인 안목보다는 파편화된 접근으로 인한 지리멸렬한 성경신학, 철학적 난점을 그 체계 속에 안고 있으며 지나치게 추상적인 조직신학, 지난날 신학과 교회의 모습에서 오늘의 교회를 반성케 하는 안목을 주지 못하는 역사신학의 무능, 이런 이론신학의 난맥 속에서 온갖 세속적인 기법과 방법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세속화되어 가는 실천신학의 문제점들.
이와 같이 서술되는 신학의 현상을 한마디로 규정하라면 현장과는 분리되어 돌아가는 신학이론의 자기유희현상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현상인가! 한국교회에서는 신학의 권위자가 교회의 진정한 선생이 되지 않는다. 신학적 권위는 신학이론을 검토하는 상아탑적 구조에서나 통용되는 자폐적인 권위일 뿐이다. 실제 교단을 움직이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신학적 권위를 가진 신학자가 아니다. 인간의 권력구조와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잘 간파하고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현장 교회 정치가이다. 이 얼마나 분열적인 신학과 교회의 분리현상인가!
물론 모든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상당히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전한 교회 지도자가 신학교의 신학자와 얼마나 서로의 성장을 위해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필자의 판단으로 보아 양자는 서로 다른 생리와 길을 가고 있어 보인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현실이다. 건전한 신학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목회는 장기적으로 보아 결국 비진리의 도전에 취약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목회현장에 드러나는 치열한 삶의 현실을 감지 못하는 신학작업은 현실과 유리된 채 백일몽에 빠진 창백한 이론추구일 뿐이다. 이런 경향은 양자 모두에게 불행하며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한국 신학계의 일각에서 이런 문제점을 의식하는 신학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극복해 가야하는지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문제의 극복은 어디에 있는가?
2.3 신학적 문제의 대안
우리는 위에서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제 그 대안은 어디에 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수 있다.
1. 성경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우리는 위에서 신학의 파편화 현상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 첫 단추가 잘못 끼여져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신학은 도무지 무엇을 원천으로 하며 무엇을 목적 삼고 있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신학의 근본적인 원천인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물어야 한다.
서구신학의 근원적 성찰
이를 위해서 먼저 지금까지의 서구신학의 성취를 근원적으로 재평가해야한다. 지금 서구신학은 그야말로 지리멸렬이다. 한편으로는 서구의 세속적인 학문의 거센 흐름 속에 휩쓸려가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교리수호라는 명분아래 교리의 숲에 걸려 성경의 진정한 세계로의 진입이 가로막혀 있는 전통 개혁신학의 흐름이 있다. 그 와중에 적당한 현실적인 절충을 통해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복음주의신학이 있다. 과연 이런 신학의 흐름에서 성경의 담백한 진리성이 확보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 새로운 시도와 접근이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난 오백년 개신교 역사와 신학은 크게 보아 성경에 철두철미 기초하려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혁혁한 신학적 유산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너무도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유산으로 물려주었지만 그 자체로서 완성된 신학을 물려 준 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교회는 부단히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명제대로 종교개혁의 신학 역시 보다 포괄적인 신학의 발견에로 전진해 가야 한다.
그러나 17세기 이른바 개신교 정통주의의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종교개혁의 건전한 유산을 자산으로 삼아 더 포괄적이고 깊은 성경의 진리에로 전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좁은 의미의 교리화 작업으로 빠져 들었다. 그 결과 18세기 계몽주의 혹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도전에 의해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그 이후 19세기부터 서구 자유주의신학이 거센 파도처럼 서구 신학계를 휩쓸어 갔고 전통 개혁신학은 언제나 수구적인 교리적 방어에 급급했다. 그 결과 서구교회는 점차 그 영적 생명력을 소진해 갔다.
이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종교개혁신학의 명맥을 유지시켜오면서 최근에 와서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방만한 신학의 흐름으로 흡수되면서 개신교 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파악하려는 엄밀한 신학적 작업에 비추어 볼때 너무도 아쉽고, 자유주의신학의 도전 앞에 허약한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종교개혁의 건전한 정신과 기초위에 보다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성경적 신학의 새로운 구성이 너무도 절실한 시점에 와있다.
성경의 주제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며 그 주제를 설명하는 구조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해야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라는 근본적인 주제의 새로운 발견이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엘로힘 즉 전능자라는 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전능자가 여호와이시다 라는 것이 구약 성경에 너무도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언제나 언약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을 하시면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신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래서 결국 성경은 전능자가 한번 언약을 하시면 그 언약을 결코 잊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신실한존재 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다. 이 얼마나 쉽고도 담백한 내용인가!
알고 보면 성경의 전체 내용이 이 주제의 확증을 위해 구조화되어 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 이며, 그 구조가 바로 언약과 성취의 구조인 것이다. 성경의 어떤 내용도 이 구조의 틀 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질서의 하나님은 66권의 성경의 내용과 편집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 정연한 진리성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의 전체성(tota scriptura)을 매우 강조하였다. 즉 성경의 진리성은 부분에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논리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 성경의 전체적인 논리가 도무지 무엇인가 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언약과 성취의 논리이다. 구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이 요한복음(요 5:39)에서 증거하시는대로 “이 성경(구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시는 말씀” 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전체가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언약하는 말씀이신 것이다.
신약은 그런 언약이 실제 역사가운데서 신실하게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성경은 참으로 그런 명백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성경은 그리스도를 언약하시고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신실하게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구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적 목적이다.
이처럼 성경은 이런 질서 정연한 논리의 흐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아 갈 때 우리는 성경의 통일된 의미파악을 할 수 있으며 그때라야 설교 강단이 빗나가지 않는다. 참으로 성경은 알고 보면 어려운 책이 아니다. 성경은 언약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하며, 그의 무궁한 능력과 사랑을 계시하고 있는 책이다. 인간들의 무수함 범죄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성경 전체의 논리를 통해 확증하고 있다. 이제 그동안의 신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성경이해의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이해를 새롭게 재구조화 할때가 왔다.
2. 신학과 삶의 통합
올바른 신학은 반드시 삶의 현장에 생명으로 역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진리해석을 담고 있는 신학은 그 당대의 교회의 모습을 결정한다. 이제 전통적인 신학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보다 포괄적인 신학은 구성은 반드시 현실속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교회적 삶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언약대로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인 신학은 참으로 모든 성도의 삶과 교회의 절대적인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개혁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한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학인 셈이다. 모든 삶의 국면에는 인간이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작정을 하시고 그 작정된 뜻을 실현하시되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세상만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런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을 소개하는 진리를 깨달아 가게 될 때 성도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을 바라보고 은혜에 감동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범사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강렬한 신앙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은 실제의 삶과의 괴리가 없다. 신학과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하자면 건전한 신학자와 성숙한 목회자는 참으로 서로의 성숙을 위해 긴밀한 소통이 가능해야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양자의 길을 동시에 갈수 있다. 성경에서 바울 혹은 베드로의 예를 들어 보아서 우리는 이론과 실제가 통합된 예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요즘의 관점으로 보아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그리고 현장선교사이다. 바울의 삶 안에는 이론과 실제가 도무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바울 서신은 목회현장에서의 구체적인 문제가 언제나 신학적인 성찰의 내용이 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베드로 역시 마찬 가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이자 베드로서신이라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글을 쓴 신학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복음이 일반 세속 학문적인 이론과는 다른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지식을 위한 지식의 추구하는 서구 학문, 즉 실제 피와 땀이 범벅된 삶의 현실과는 구분되는 아카데미즘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의 복음은 죄악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신앙인의 삶속에 녹아드는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이다. 결단코 복음은 창백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의 삶을 보듬고 변혁시키는 능력 그 자체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신학자로서의 은사의 전문성과 목회자로서의 은사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보다 이론적인 은사를 가지고 체계적인 신학 작업을 수행하는 신학자의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고통과 문제를 민감하게 느끼며 영혼의 성장을 위해 섬김의 도를 추구하는 목회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양자의 세계가 분리되어 돌아가서는 안된다. 양자는 서로 소통 가능하고 통합가능한 세계이다. 양자는 한분 하나님의 다스림이 존재하는 세계일뿐이다. 요컨대 성경적 신학은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학의 건전성은 얼마나 현장과 긴밀하게 소통되고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으로 검증된다.
|출처/건설 사업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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